[세상돌아가는 이야기.. ]/[世界-人文地理]

[퇴조하는 크리스마스] [일곱 생선 만찬] [크리스마스의 기적] ....

뚝섬 2022. 12. 23. 09:34

[퇴조하는 크리스마스]

[일곱 생선 만찬]

[크리스마스의 기적]

[트래펄가의 예수 그리스도]

[1 대전크리스마스 휴전’]

[산타클로스]

 

 

 

퇴조하는 크리스마스 

 

한 세대 전, 가수 이연실이 부른 ‘조용한 여자’에서 젊은 여성은 외로움을 토로하며 ‘그 흔한 크리스마스 파티 한번 구경 못 했지요’라고 한다. 모두가 크리스마스를 즐기던 시절의 분위기를 반어적으로 표현했다. 당시 서울 명동은 크리스마스 축제 1번지였다. 기자의 현장 스케치엔 ‘발 디딜 틈 없다’는 문장이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올해 크리스마스를 3일 앞둔 22일 오후 찾아간 명동은 한산했다. 명동 입구에서 명동예술극장까지 걷는 동안 눈에 들어온 크리스마스 장식도 ‘메리 크리스마스’라 적힌 플래카드 두 개와 트리 하나가 전부였다.

 

▶파티와 인파만 사라진 게 아니다. 겨울이면 12 내내 전국 거리에 울리던 캐럴도 좀처럼 듣기 어렵다. 엄격해진 저작권 영향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정부 관련 당국이 2019년부터 무료로 틀 수 있는 캐럴을 공급하는데도 캐럴 붐이 일지 않는다. 이미자·남진·나훈아·조용필 등 인기 가수가 캐럴을 부르고, 심형래·최양락 등 개그맨까지 가세했던 시절은 옛날이 됐다. 캐럴 퇴조가 우리만의 현상은 아니다. 미국에서 소매상을 대상으로 겨울에 가장 듣기 싫은 노래가 뭐냐고 물었더니 왬의 ‘라스트 크리스마스’와 머라이어 케리의 ‘올 아이 원트 포 크리스마스 이즈 유’를 꼽았다. 신곡은 나오고, 1980~90년대 곡만 트니 지겹다고 한다.

 

▶크리스마스 퇴조 현상은 사회의 구조적 변화라는 분석도 있다. 저출산으로 산타클로스 일이 크게 줄었고, 젊은이는 핼러윈을 선호한다. 서양에선 특정 종교를 타인에게 강요하지말라는 PC(정치적 올바름) 운동도 있다. 국교를 인정하지 않는 우리나라에서 크리스마스나 석탄일이 아니라 제헌절, 국군의날, 어버이날이 휴일이 돼야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명동 노점상들이 크리스마스이브인 24일 전체 휴업에 들어간다. 이후 31일까지 단축 운영도 한다.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이태원 참사와 코로나도 고려했다고 한다. 올해 크리스마스가 일요일인 것을 두고도 설이나 추석처럼 대체 휴일 대상에 포함하자는 의견과 이제 특정 종교 축일은 휴일에서 빼자는 주장이 맞선다.

 

▶크리스마스 열기가 전만 못하다 해서 예수 탄생의 의미까지 퇴색하는 것은 아니다. 말 구유에서 탄생한 예수는 가난하고 상처받은 이들과 함께하며 구원을 설파하다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비탄에 우는 이들에게도, 오랜 불황의 터널에 갇혀 시름에 겨운 이들에게도 크리스마스에 담긴 예수의 사랑이 온전히 전해지길 기원한다.

 

-김태훈 논설위원, 조선일보(22-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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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생선 만찬

 

20세기 초 이탈리아의 나폴리나 시칠리아 등 상대적으로 가난했던 많은 남부 지방 사람들이 먹고살 궁리를 하다가 미국이민을 택했다. 이전에 아일랜드에서 감자 기근으로 많은 사람이 미국으로 이주했던 것과 비슷한 이유다. 영어를 몰랐던 이탈리아인들은 배에 승선하면서 모자에 ‘목적지 뉴욕(To NY)’의 뜻으로 영어 알파벳을 적었고, 후에 뉴욕의 많은 이탈리아 이민자의 영어 이름인토니(TONY)’ 되었다는 설이 있다. 

 

뉴욕의 이탈리아 레스토랑 ‘일 부코(Il Buco Alimentari)’의 일곱 생선 만찬(Seven Fish Diner) 풍경.

 

이민 초기 허드렛일을 하며 생활하던 이탈리아 이민자들은 크리스마스 명절이면 바다가 인접했던 자신들의 고향에서 먹던 다양한 생선 요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일곱 생선 만찬(Seven Fish Diner)’의 전통이 시작되었다.

 

일곱 생선 만찬(Seven Fish Diner)의 생선 요리.

 

정확하게 언제부터인지는 불확실하지만 1983년 필라델피아의 일간지에 이 표현이 최초로 기록되어 있다. 과거 로마가톨릭에서 명절에는 도축을 금하던 이유로 대신 생선을 먹었던 전통과도 연관이 있다. ‘일곱 선택한 것은 성경에 나오는 숫자면서 로마의 일곱 언덕도 상징한다.

 

크리스마스이브 저녁 준비를 위해서 미국의 이탈리아인들은 부지런히 어물전을 다닌다. 뉴욕을 비롯한 대도시의 이탈리아 레스토랑들도 일곱 생선 메뉴를 짜느라 분주하다.(물론 남부를 무시하는 북부 이탈리아 식당들은 제외다) 가정마다, 레스토랑마다 메뉴는 조금씩 다르지만 보통 대구, 문어, 굴, 조개, 새우, 오징어, 패주, 열빙어, 장어 등의 생선과 해산물 요리가 다양하게 준비된다. 2018년에는 이를 소재로 한 영화도 만들어졌다. 

일곱 생선 만찬(Seven Fish Diner)의 조개파스타 요리와 오징어 요리

 

‘일곱 생선 만찬’이라는 표현은 이탈리아 본토에는 없다. 그렇지만 미국에 사는 남부 이탈리아인들에게는 중요한 전통이다. 몇 해 전 나의 델리에 햄과 살라미 등을 공급하던 이탈리아 형제에게 “크리스마스이브에 ‘일곱 생선 저녁’을 먹느냐?”고 물어봤다. “물론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일곱가지가 아니라 열가지도 훨씬 넘는다”며 웃었다.

 

-박진배 뉴욕 FIT 교수/마이애미대학교 명예석좌교수, 조선일보(22-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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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의 기적

 

[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크리스마스는 언제나 좋아요. 인정 많고 관대하고 자선을 실천하는 즐거운 때죠. 사람들 모두가 일 년 내내 닫혀 있던 마음을 활짝 열고, 다른 사람들이 다른 길을 가는 이방인이 아니라 죽음을 향해 함께 걷는 동반자라고 생각하는 때잖아요. 성탄절이라고 해서 주머니에 동전 한 푼 들어오는 건 아니지만 크리스마스는 좋은 날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믿어요.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신의 은총이 함께하기를! -찰스 디킨스 ‘크리스마스 캐럴’ 중에서

 

‘전국 장애인차별철폐 연대(전장연)’가 1년 가까이 지하철 시위를 하고 있다. 서울시가 2004년까지 지하철역에 리프트를 설치해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쉽게 해결 못 하는 시의 입장도 있겠지만 몸이 불편한 분들의 외침은 안타깝다. 하지만 가장 많은 피해를 감당해야 하는 건 매일 지하철을 이용하는 시민들이다.

 

인간은 모두 잠재적 장애인이다. 하루아침에 사고로 장애를 얻을 수도 있지만 나이가 들면 누구나 걷고 말하고 듣고 생각하는 능력이 저하된다. 따라서 노약자나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배려는 현재 건강한 사람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다만 건강을 잃기 전에는 건강을 당연하게 여기고, 늙기 전에는 젊음이 영원할 것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아프고 힘들다며 화내는 사람보다 좋다, 괜찮다, 웃는 사람 곁에 머물며 그런 사람을 지켜주고 싶은 것도 사람의 마음이다.

 

수금은 안 되고 청구서는 밀려있고, 나이만 먹고 뜻대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는데 ‘메리 크리스마스’란 인사가 무슨 소용이냐고 불평하는 스크루지에게 조카는 손해와 이익을 따지지 말고 성탄절만이라도 행복을 느껴보라고 말한다. 멍청한 소리 집어치우라고 불평했지만 하룻밤 사이, 기적이 일어나고 스크루지는 진정한 행복을 얻는다.

 

세상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 이쪽과 저쪽의 요구와 주장이 늘 대립한다. 성탄절 하루만이라도 갖지 못한 것을 소원하는 대신 가진 것에 감사하는 기도만 가득하기를. 어느 쪽 바람을 들어줘야 하나, 고민하지 않고 신도 행복하기를. 그런 신의 축복으로 모두의 마음이 평온하기를. 그것이 크리스마스의 진짜 기적이 아닐까.

 

-김규나 소설가, 조선일보(22-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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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펄가의 예수 그리스도

 

[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마크 월린저, 이 사람을 보라, 1999~2000년, 대리석 수지, 런던 트래펄가 광장 설치 장면, 사진 존 리디.

 

8m 높이의 거대한 좌대 끝에 위태롭게 선 창백한 이 조각은 영국 미술가 마크 월린저(Mark Wallinger·1959년생)의 예수상, ‘이 사람을 보라’다. 유대인들에게 제소되어 그 앞으로 끌려온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로마 총독 빌라도는 ‘이 사람을 보라’고 외쳤다. 아무리 봐도 예수는 지은 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군중은 당장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아우성쳤고 빌라도는 그들의 강요에 굴복해 예수를 처형했다.

 

월린저의 조각은 1999년 런던 트래펄가 광장의 네 번째 좌대에 설치됐다. 광장은 넬슨 제독이 1805년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 함대에 압승을 거두고 전사한 트래펄가 해전을 기리기 위해 1840년경 재정비됐다. 중앙에는 52m 높이 기둥 위에 넬슨상을 세웠고, 사방에는 이처럼 커다란 좌대를 두고 각각 국왕의 기마상과 장군상 두 기를 세웠는데, 그중 하나가 자금 부족 등의 이유로 줄곧 비어 있었다. 그러다 1999년에 왕립예술협회 주도로 현대 미술가에게 광장을 대표할 조각을 의뢰해 매년 교체하는 프로그램이 시작됐다. 월린저의 조각은 160년 만에 마침내 네 번째 좌대를 채운 첫 번째 작품이다.

 

실제 사람 크기로 만들어진 예수상은 반대편에서 압도적 크기로 보는 이를 짓누르는 왕의 기마상이나 위풍당당하게 아래를 내려다보는 장군들의 거대한 청동상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다. 그러나 가시관을 쓰고 두 손을 묶인 채 어리석은 군중의 함성 속에 눈을 감고 홀로 고요한 예수가 네 번째 좌대에 올라서자, 그 큰 좌대를 꽉 채우던 나머지 인물들의 위대한 업적이라는 것이 오히려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를 깨닫게 됐다. 세상을 바꾸는 힘은 눈에 보이는 크기에 비례하지 않는다.

 

-우정아 포스텍 교수·서양미술사, 조선일보(22-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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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밤” 울려퍼진 전쟁터… 10만명은 총을 내려놓았다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1 대전크리스마스 휴전 

 

지난 2014년 영국의 조각가 앤디 에드워즈가 만든 ‘크리스마스 휴전 동상’이 리버풀 세인트 루크 교회 앞에 서 있다. 영국군과 독일군이 크리스마스를 맞아 총을 내려놓고 함께 친선 축구 시합을 했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만든 동상 주변에 심은 것은 1차 대전 추모의 상징인 붉은 양귀비꽃 조형물이다. 양귀비꽃은 1 대전 격전지 프랑스 북부와 벨기에 남부 들판에 흔하게 피어 있던 꽃으로 광경을 묘사한 매크래(캐나다군 참전 군의관) 플랑드르 들판에서 통해 1 대전 상징물로 자리 잡았다. /위키피디아

 

1914년 12월 24일,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6개월이 지나 전선이 교착 상태에 들어간 플랑드르 지역. 이곳에는 지옥도가 펼쳐져 있었다. 이미 전사자가 수십 만 명 발생했다. 매일 양이 엄청난 폭탄이 폭발하고 머리 위로 총알이 날아다녔다. 병사들이 매서운 추위를 견디며 참호 속에 웅크리고 있다가 밤이 되면 호각 소리와 함께 적 병사들이 돌격해 오고 아군은 기관총 대응 사격을 했다. 그런데 이날 밤은 웬일인지 달빛만 훤한 가운데 기이할 정도의 정적만이 흘렀다. 깊은 밤중에 돌연 상대편 독일군 부대에서 노랫소리가 들렸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프랑스와 영국에서도 잘 아는 캐럴 ‘슈틸레 나흐트(Stille Nacht)’였다. 8월에 징병당해 아내와 어린 딸을 두고 전선에 와 있던 프랑스 병사 프랑수아 길렘은 놀라서 주변 동료들을 보았다. 동료들 모두 그와 마찬가지로 놀란 표정으로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 길렘은 아내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사랑하는 오귀스틴, 이번 크리스마스이브를 오랫동안 기억할 거요. 밤 10시경, 독일군이 성가를 부르기 시작했을 때 얼마나 놀랐던지! 프랑스인들이 국가를 부르자 다음에 독일인들이 그들의 국가를 부르고 만세를 외쳤소. 프랑스 병사들은 출정가를 불러 응답했소. 전선에서 남자 수천 명이 노래를 부르니 마치 동화 같은 분위기였소.”

 

도대체 왜 우린 싸우고 있는거요?”

 

전선 곳곳에서 유사한 일이 일어났다. 이프르(Ypres)시 근처에서는 독일군과 영국군이 고작 수십 미터의 무인 지대(no man’s land)를 사이에 두고 대치 중이었다. 밤이 되자 먼저 독일군이 노래를 불렀다. 영국군도 자기들 노래를 했고, 곧 독일군 측에서 잠시 사격을 멈추고 중간 휴식 시간을 두자고 소리 질렀다. 영국군 내 전직 테너와 바리톤 가수가 흉벽 위에 올라가서 열창했고 양측 모두 따라 불렀다.

 

곧이어 독일군 두 명이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

 

“에든버러에서 온 분 있소?”

“나요!”

“프린스 스트리트에 있는 이발소 아시오?”

 

놀랍게도 스코틀랜드 병사는 바로 그 이발소 근처에서 살았었고, 독일 병사들은 전쟁 전에 그곳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이 무슨 기이한 인연인가.

 

이 근방 남쪽 전선에 자리 잡은 독일군 바이에른 17연대는 전나무를 구해 와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고 촛불로 장식했다. 프랑스에서는 아직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드는 관습이 없었던 터라, 프랑스 병사들은 처음 이 이상한 물체에 총을 쐈지만 곧 그 의미를 이해했다. 곧이어 카를 뮐레그(Carl Mühlegg)라는 이름의 독일 병사가 과감하게 철조망을 넘어 무인 지대로 저벅저벅 걸어왔다. 그의 오른손에는 총 대신 전나무 가지가 들려 있었다. 그는 정답게 인사하고 큰 소리로 ‘즈와이외 노엘(Joyeux Noël·프랑스어로 메리 크리스마스)’ 하고 외쳤다. 프랑스 병사 한 명이 마법에 홀린 듯 그에게 다가가 악수를 건넸다. 곧 양측 수백 병사가 무인 지대로 나와 서로 인사를 나눴다. 

 

1차 대전이 발발한 1914년의 크리스마스 무렵 독일군 병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단체 사진을 찍었다. 당시 전선 곳곳에서 독일군 병사들이 적군인 영국·프랑스 병사들과 담배·초콜릿 등을 교환하며 어울렸다. /위키피디아

 

도처에서 이런 초현실적인 일이 일어났다. 서로 담배를 권했고, 초콜릿과 술을 교환했다. 영국군의 쇠고기 보급품과 독일의 맥주에 대해 서로 칭찬했다. 일부 병사는 기념품을 교환하기도 했다. 주로 단추나 모자였지만, 심지어 서로 훈장을 바꿔 가진 사람들도 있다. 영국군의 기관총 사수 한 명은 전직 이발사였는데, 독일 병사 하나의 머리가 너무 긴 것을 보고 그 자리에서 머리를 다듬어 주었다. 전장 한가운데에서 만난 양측 병사들은 “도대체 왜 우리가 여기에서 서로 싸우고 있는 거요?” 하고 물었다. 마지막으로 모두 올드랭사인을 부르고 헤어졌다. 한 영국군 병사는 이렇게 기록했다. “ 시간 전까지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을 만나 악수하다니 믿을 없는 일이었다.” 어느 프랑스 병사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헤어지기 전에 마치 오랜 친구가 그런 것처럼 기념품을 교환했다. 한 명은 자기 주소를 적어주며 전쟁 끝나면 만나자고 말했다. 이런 사람들끼리라면 전쟁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또 다른 병사의 기록대로 “만일 영화에서 이런 장면을 봤다면 거짓말이라고 했을 것이다.” 이 시기까지는 군인들의 사진기 휴대를 금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독일군과 영국군이 찍은 사진 수천 장이 남아 있어서 이때 일어난 기적 같은 일을 증언한다.

 

심지어 적군끼리 무인 지대에서 축구 경기를 했다는 기록도 있다. 1915년 1월 1일 치 ‘타임스’지는 영국 병사들과 독일 병사들 간 축구 경기가 벌어졌다고 보도했다. 후일 로버트 그레이브스(Robert Graves)라는 문인이 더 멋지게 각색해서, 정정당당하게 실력을 겨룬 끝에 영국 팀이 독일 팀에 3대2로 승리했다는 소설을 썼다. 전선에서 축구를 했다는 것은 사실일까, 아니면 허구에 불과할까? 일부 연구자는 여기에 의문을 제기한다. 우선 수많은 포탄이 터져 울퉁불퉁해진 땅에서 축구 경기를 할 여건이 못 되었으며, 제대로 된 공도 없었으니, 기껏해야 ‘깡통 차기’ 수준의 놀이를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렇지만 당시 많은 사람이 고향에 보낸 편지에서 축구 경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이와 같은비공식 휴전상태를 경험한 사람은 대략 10만명에 이른다. 어떤 곳에서는 크리스마스를 지나 새해 첫날 아침까지 휴전 상태가 이어졌다. 이런 특이한 사건에 대해 영국 신문들은 크게 보도했지만,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보도를 금지했고, 병사들에게도 절대 발설하지 말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럼에도 프랑스 병사들은 개인 서한에서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라면서 자기들이 겪은 일을 상세하게 전하곤 했다.

 

참혹한 전쟁 속 ‘인간’을 되찾은 순간

 

사실 군 지휘부로 보면 이 사태는 경악을 금치 못할 일이었다. 전쟁 상황에서 적을 죽이는 것이 의무이거늘, 멋대로 무기를 내려놓고 적군과 내통하면 어찌 한단 말인가. 실제로 서로 다정한 대화를 나누었던 군인들은 상대방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싶은 마음이 스러진 것 같았다. 심지어 독일군 측에서 “내일 우리 장군이 시찰 나오는데 영국 병사들 숨어 있기 바란다” 하고 소리쳐 주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루이 베르타라는 프랑스 병사는 “오랫동안 비슷한 고통과 위험을 경험한 사람들 사이에서 돌연 어떤 저항할 없는 힘이 작용해 인간 본성을 일깨운 아닐까” 하고 자기 수첩에 적었다. 바로 그 점이 문제다. 사랑해서는 안 되고 증오를 키워서 서로 싸우고 죽여야 마땅하다. 당시 참전한 젊은 시절의 아돌프 히틀러도 병사들이 제멋대로 휴전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군 지휘부는 즉각 사태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프랑스군은 비공식 휴전 행사가 일어난 지역에 강력한 포격을 퍼부으라고 지시하고, 그런 일을 벌인 부대는 훨씬 험한 곳으로 보내버렸다. 아직 정신 차리고 무기 내리고 다가오는 적병이 있으면 장교가 냉혹하게 사살했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주 오베른도르프 마을에 있는 ‘고요한 밤 소성당’ 건물. /고요한 밤 소성당 홈페이지

 

짧았던 기적의 시간이 지나고 모든 것이 원래의 참혹한 현실로 되돌아갔다. 전쟁이라는 악마의 맷돌이 다시 인간들을 잔혹하게 갈아버렸다. 온 세상에 죽음이 차고 넘쳤다. 그렇더라도 1914년 겨울, 의미 없이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을 하던 병사들이 잠시나마 인간 본래 모습을 되찾는 순간이 있었다는 사실만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고요한 밤’ 성가의 탄생]

 

크리스마스 축제 직전 교회 오르간 고장나자 쉽게 연주할 곡 만들어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주의 오베른도르프(Oberndorf) 마을에 ‘고요한 밤 소성당(Stille-Nacht-Kapelle)’이 있다. 이름 그대로 유명한 크리스마스 캐럴 ‘고요한 밤’ 기념비가 있는 곳이다. 이 곡은 원래 같은 자리에 있던 성 니콜라우스 교회에서 1818년 12월 24일 처음 연주했다. 크리스마스 축제 준비를 하던 차에 오르간이 고장 나자 간단하게 기타 반주로도 분위기를 살릴 있는 쉬우면서도 아름다운 노래가 필요했다. 부목사 요제프 모르(Joseph Mohr)가 가사를 쓰고 오르간 반주자 프란츠 그루버(Franz Xaver Gruber)가 작곡한 노래가 바로 ‘슈틸레 나흐트’다.

 

이 성가는 어느덧 전 세계에 알려졌고, 세계대전 중에도 평화를 갈구하는 병사들이 크리스마스에 많이 부른 노래 중 하나였다. 이 노래가 주는 성스러운 평화 메시지를 지키기 위해 새로운 교회를 지었다. 이 성당에서는 매년 12월 24일 오후 5시에 미사를 드린 후 각국어로 ‘고요한 밤’ 캐럴을 노래한다.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조선일보(22-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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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클로스

 

빨간색 의상에 거품 같은 하얀 수염… 코카콜라 마케팅에서 처음 묘사

 

성탄절 전날 밤 어린이의 양말에 선물을 넣고 간다는 노인 산타클로스. /위키피디아

 

성탄절이 다가오면 아이들은 산타클로스(Santa Claus)를 기다리지요. 산타클로스는 성탄절 전날 밤 어린이의 양말에 선물을 넣고 간다는 노인인데요. 빨간 모자와 빨간 겉옷의 복장을 한 산타클로스 이미지는 언제, 어떻게 생긴 걸까요?

산타클로스 이미지의 기원이 된 인물은 4세기 로마 제국의 대주교였던 성 니콜라스(270~343·Saint Nicholas)라고 전해져요. 그는 다양한 기적을 이뤘다고 알려지며 기독교에서 성인(聖人)으로 여겨졌고, 그의 기일인 12월 6일은 축일이 됐지요. 특히 어린이를 수호하는 성인으로 유명했답니다. 그러다 12세기 프랑스 수녀들이 축일 전날인 12월 5일 가난한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기 시작했는데, 그 이후 유럽에는 "축일에 성 니콜라스가 나타나 착한 어린이를 칭찬하며 선물을 주고 나쁜 어린이를 혼낸다"는 전설이 생겼다고 해요.

초기 산타클로스의 이미지는 다양했어요. 중세 유럽 때는 마르고 키가 큰 체형에 성직자 옷을 입은 기품 있는 이미지였죠. 그러다 1809년 미국의 소설가 워싱턴 어빙이 '뉴욕의 역사'라는 책에서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헐렁한 바지를 입은 뚱뚱한 사람으로 산타클로스를 묘사했어요.

이후 작가이자 신부였던 클레멘트 무어는 1823년 '성 니콜라스의 방문'이라는 시에서 8마리 순록이 끄는 썰매를 타고 굴뚝 아래로 선물을 주려고 내려오는 현재의 이미지와 유사한 산타클로스를 등장시켰어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재 묻은 털옷을 입고, 눈처럼 흰 턱수염과 넓은 얼굴, 젤리처럼 흔들리는 통통한 배를 가진 명랑한 캐릭터였죠.

미국의 시사 만화가였던 토머스 나스트는 무어의 시에서 영감을 받아 잡지 '하퍼스 위클리'에 산타클로스의 모습을 흑백으로 그리기 시작했는데요. 1862~86년 사이 산타클로스가 총 33번 그려지면서 산타클로스의 체구는 점점 커지고, 익살스러운 표정과 풍성한 수염이 강조됐어요. 털옷에 벨트도 매고 있는 모습이 됐고요.

이 모습을 기반으로 1931년 코카콜라의 의뢰를 받은 화가 헤든 선드블룸이 그린 산타클로스는 현재의 산타클로스 이미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코카콜라 로고에 쓰인 빨간색을 의상에 그대로 적용했고, 신선한 하얀 거품은 덥수룩한 수염과 더불어 옷과 모자 끝에 달린 흰 털이 되었죠. 선드블룸이 묘사한 산타클로스는 코카콜라가 겨울마다 꾸준히 마케팅을 벌인 덕분에 어느덧 '산타클로스' 하면 생각나는 대표 이미지로 범세계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답니다.

 

-전종현 디자인·건축 저널리스트, 조선일보(22-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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