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이 호랑이다]
[한 위원장이 책임지고 특별감찰관 임명, 총선 후 특검 추진을]
[역사의 동력, 대통령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에서 나올 수 있다]
[한 마음 재상 이원익]
[임인년 ‘미스터 션샤인’과 노블레스 오블리주]
국민이 호랑이다
[강천석 칼럼]
육영수·손명순·이희호 여사… 국민 기억 속에 남은 따스한 이름
‘나를 넘어서 승리해주세요’는 무리라도 한동훈 짐은 덜어줘야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뉴스1
총선에서 여당은 대통령을, 야당은 당대표를 얼굴로 내세워 심판받는다. 유권자들은 두 얼굴을 비교하여 정권 실적을 떠올리고, 야당이 제시한 비전의 현실성을 평가한다. 이번 총선은 그랬던 과거와 달리 정권 심판인지 야당 심판인지조차 불분명하다. 그래도 대통령 지방 순방과 야당 대표 지역 방문은 사전(事前) 선거 운동 효과를 낳는다.
전국 250개가 넘는 지역구 여야 출마자들이 너나없이 청와대나 중앙당에 ‘한번 내려와주셔야겠다’는 구조(救助) 신호를 보내는 것이 과거 선거 풍경이었다. 인기 있는 대통령이나 호소력 있는 야당 대표가 다녀가는 것만으로도 승패가 뒤바뀌기도 했다. 올 선거에서도 후보자들은 그런 기대로 대통령과 제1 야당 대표를 기다릴까. 대통령 지지도는 30% 초반에 멈춰 섰고 야당 대표는 20% 대에 붙박여 있다. 어쩌면 이재명 대표 지원 유세를 마다하는 곳이 나올지 모른다.
대통령 지원이 역(逆)효과를 빚기도 한다. 1967년 6월 박정희 대통령 목포 유세다. 당시는 대통령 유세가 허용됐다. 비세(非勢)인 공화당 후보의 거듭된 요청으로 대통령이 유세 마이크를 잡았으나 공화당 후보는 낙선했다. 이 결과는 지역 정치인 김대중 의원이 전국적 인물로 올라서는 디딤돌이 됐고 몇 년 뒤 박 대통령에게 도전하게 된다.
대통령과 제1 야당 대표가 지원 요청을 다 소화하지 못할 때 등장하는 인기 대타(代打)가 그들의 배우자다. 퍼스트레이디는 권력 서열 2인자보다 더 뜨거운 호응을 이끌어냈다. 그 대표가 육영수 여사였다. 국민 마음으로 스며드는 영향력이 대통령을 앞섰다. 언변(言辯)이 뛰어난 건 아니었다. 수수한 한복 차림, 환한 미소, 상대 손목을 두 손으로 감싸며 눈을 마주치고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가 삼위일체를 이뤄 막강 파워를 발휘했다. 공화당 의원 가운데 신세 진 사람이 많았다.
여성 지위 향상에 힘써온 김대중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 남편이 야당 총재였을 때나 대통령이 된 후에나 한결같이 정치와 거리를 뒀던 김영삼 대통령 부인 손명순 여사도 늘 환영받았다. 남편들 운명은 울퉁불퉁했으나 그 부인에 대한 국민 기억은 아련하고 따스하다.
4ㆍ10 총선까지 이제 95일 남았다. 눈 깜짝하면 선거다. 대통령이 진두지휘할지 아니면 역할을 줄이고 한 발 뒤로 물러설지 알 수 없다. 한동훈 비대위원장의 역할 크기도 그에 따라 정해진다. 한 위원장에게 얼마나 힘을 실어줄지는 몰라도 짐은 덜어줘야겠다는 생각은 섰을 것이다.
테러당한 이재명 대표 거취(去就)는 예측하기 힘들다. 물러나면서도 끈을 놓지 않을 기회로 삼을지, 이번 일을 발판 삼아 지위를 굳히려할지 짐작하기 어렵다. 확실한 건 이번 총선에서 대통령과 야당 대표 부인 모습이 눈에 띄는 일은 없으리라는 사실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속사정과 뒷이야기를 국민은 알고 있다. 남편들보다 더 오래전 더 자주 저 소상히 들었을지 모른다. 이런 일은 없었다. 대통령을 가까이 모셨던 사람들, 야당 대표 주변 사람들은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러나 결국 대통령과 야당 대표 본인 문제다.
국민은 호랑이다. 호락호락하지 않고, 어수룩하지 않고, 만만하지 않고, 드세고 사납고 무서운 게 국민이다. 가정이 문제가 되면 대통령 되기 어렵고, 대통령이 돼도 성공하기 힘들고, 대통령에서 물러나도 평안(平安)하지 못했다. 여러 대통령이 자식 때문에, 형님 때문에, 아우 때문에, 아내 때문에 고개를 숙였다. ‘나는 예외’라던 대통령일수록 급소(急所)를 물렸다.
국민은 민주당이 통과시킨 특검법이 81억 국민 세금으로 150명 수사 인력을 동원해 재탕(再湯) 수사를 벌여 선거 기간 내내 대통령 부인을 물어뜯으며 정치 이문(利文)을 챙기려는 정치 연극이란 사실을 뚫어 보고 있다. 그런 국민들이 대통령 거부권 행사에는 뭔가가 빠졌다고 느낀다.
적지 않은 국민이 특검법 대상이 ‘몰래 카메라 사건’인 줄 잘못 알고 있다. 용산 주변 온도(溫度)가 세상 온도는 아니다. 마음의 온도를 알아야 국민 마음을 녹일 수 있다. 한몫 챙기려는 야당이 꽃놀이패를 포기할 리는 없다. 그러나 선거운동은 국민을 보고 하는 것이다. ‘나를 밟고 선거에 이겨주세요’라는 말을 기대하는 게 무리라고 해도 한동훈 위원장 짐을 덜어줄 사과 한마디는 필요한 게 아닐까.
-강천석 고문, 조선일보(24-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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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위원장이 책임지고 특별감찰관 임명, 총선 후 특검 추진을
이관섭 비서실장이 5일 용산 대통령실 청사 브리핑룸에서 김건희 여사·대장동 특검법(쌍특검법)에 대한 재의요구안(거부권) 의결과 관련한 브리핑을 하고 있다. /뉴스1
윤석열 대통령이 5일 이른바 ‘김건희 특검’과 ‘대장동 50억 클럽 특검’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관섭 비서실장은 “이번 특검 법안은 총선용 여론 조작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며 “여야 합의로 처리해 오던 헌법 관례를 무시했고, 재판 중인 사건 관련자를 이중으로 수사해 인권이 유린당한다”고 했다. 김 여사 특검 관련해선 “12년 전 결혼도 하기 전 일로 문재인 정부에서 2년간 탈탈 털어 기소는커녕 소환도 못 한 사건”이라며 “정치 편향적 특검”이라고 했다. 이 실장 말에 틀린 것이 없다. 김 여사 특검법은 민주당의 노골적인 총선 정략이다.
민주당이 이 특검들이 실현될 것으로 생각했을 리 없다.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해 국민으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실제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 특검을 실시해야 하고, 거부권은 안 된다는 국민 여론이 높다. 김 여사와 관련해 많은 의혹이 불거졌지만 윤 대통령은 제대로 설명한 적이 없다. 그러니 대통령이 아무리 정당하게 거부권을 행사한다고 얘기해도 부인을 감싸기 위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산다.
이런 비판을 의식한 듯 대통령실은 김 여사를 담당할 제2부속실 설치 및 특별감찰관 임명 등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국민 대다수가 원하면’이란 단서를 달아 제2부속실 설치를 검토하겠다고 했고, 특별감찰관은 여야 합의로 추천하면 지명하겠다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한때 국민의힘 내부에서 논의되던 총선 후 특검은 언급하지 않았다. 제2부속실은 윤 대통령 공약에 따라 없앤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 일정이 김 여사를 통해 무분별하게 전파되고, 심지어 친북 활동을 하는 사람이 김 여사를 통해 대통령 취임 만찬에 참석했다. 김 여사는 그가 준 명품 백까지 받았다. 김 여사 활동을 공적으로 지원하는 조직이 있었으면 이런 황당한 일은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특별감찰관은 대통령 배우자 및 4촌 이내 친족과 수석비서관급 이상의 공무원을 감찰하는 독립 기구다. 명품 백 수수 문제 등을 독립적으로 조사할 수 있다. 특별감찰관이 있었다면 김 여사는 더 조심했을 수도 있다. 문재인 정부는 5년 내내 특별감찰관을 임명하지 않았다. 숨길 일이 많았던 것이다. 문 전 대통령은 여야가 합의해 추천하면 임명하겠다는 핑계를 댔다. 지금 윤 대통령도 같은 말을 한다. 김 여사 문제가 계속되기를 바라는 민주당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추천을 미루고 있다. 민주당 우상호 전 비대위원장은 “우리 입장에서는 특별감찰관 없이 김건희 여사가 계속 사고 치는 게 더 재미있다”고 했다.
국민의힘이 먼저 나서야 한다. 지금 국민의힘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은 한동훈 비대위원장이다. 한 위원장이 민주당 상관없이 국민의힘 차원의 특별감찰관 추천을 해야 한다. 본인이 언급했던 대로 총선 이후 여야 합의로 김 여사 특검을 실시할 수 있다고 밝힌다면 많은 국민이 대통령의 이번 거부권 행사를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일보(24-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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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동력, 대통령의 ‘’에서 나올 수 있다
[김순덕 칼럼]
윤 대통령이 존경한다던 노무현 대통령
측근비리 특검 재의결에 “부끄럽다” 사과
비전 이루려면 개인적 희생 감수해야
관료부터 도덕성 보여야 나라가 뛴다
윤석열 대통령이 1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청사에서 2024년 신년사를 하고 있다. 2024.01.01. 대통령실제공
더불어민주당은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관련 특검법을 그냥 넘기지 않을 태세다. 어제도 만일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다면 모든 법적 조치를 검토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숫자에 약한 나로선 김 여사가 결혼 전 주가를 어쨌다는 건지 알 도리가 없다. 친윤(친윤석열)계 아닌 의원들이 “검찰에서 탈탈 털었는데도 나온 게 없다”고 한 말을 믿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역대 대통령이 가족 관련 특검을 거부한 적 없다”는 민주당 주장에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측근 비리 관련 특검 거부권을 행사했다”고 반박한 건 실수라고 본다. 측근은 가족이 아닌 데다 2003년 11월 25일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자 야당인 한나라당(현 국힘)에서 여당인 열린우리당만 빼고 다른 야당과 공조해 열흘 만에 209 대 54로 재의결했기 때문이다.
그때도 여당은 “(대선자금 비리 은폐를 위한) 방탄특검이자 (내년) 총선을 위한 정략특검”이라고 야당을 공격했다. 국힘이 지금 민주당에 대고 하는 말과 다름없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총선을 보름 앞둔 2004년 4월 특검팀 최종 수사 발표에서 특별히 밝혀낸 게 없다는 것도 특검의 아이러니다. 그때와 다른 점은 있다. 특검법이 재의결된 뒤 윤 대통령이 존경한다는 노무현은 “잘못했다, 미안하다 말하기 이전에 참 부끄럽다”고 언론 간담회에서 거듭 사과를 한 것이다.
물론 ‘정치인에게는 측근이 웬수(원수)’라는 말이 있지만 측근과 가족은 무게가 같지 않다. 그러나 국민 눈에는 대통령 가족도 공적 영역에 포함돼선 안 될 사적 영역에 불과하다. 설령 대통령 부인이라 해도 국민은 권력을 위임한 바 없다. 공적 영역에 사적 관계를 앞세운다면, 그것도 일종의 부패다.
윤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민생 현장에서 국민 여러분을 뵙고 고충을 직접 보고 들을 때마다 대통령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고 했다. “경제 외교, 세일즈 외교는 바로 우리 국민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일자리 외교”라고도 강조했다. 그런데 어쩌랴. 국민 기억 속에 또렷이 남은 건 김 여사가 대통령 해외 순방길에 수십 명의 수행원을 대동하고 명품 숍을 방문한 모습이다. 그러고도 한국에서 뒤늦게 공개된 영상에선 300만 원짜리 명품 가방을 뇌물로 받았다는 의혹을 남겼다.
작년 12월 둘째 주 갤럽 조사에서 윤 대통령 직무수행 부정평가가 62%였다. 그 이유 중 하나가 김 여사 행보(2%)다. 2022년 2월 문재인 당시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의 옷 사치 문제가 불거졌을 때도 김 여사 행보는 부정평가 이유에도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억울하더라도 김 여사는 이미지 관리를 할 필요가 있다.
이달 중 윤 대통령이 가질 예정인 신년 기자회견에서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고 멋지게 대신 사과해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제2부속실과 특별감찰관을 설치해 김 여사의 조용한 활동을 보좌하겠다고 밝힌다면, 모질지 못한 우리 국민은 김 여사와 화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저성장 양극화 속에 강남 빼고 전 국민이 상대적 박탈감으로 부글거리는 상황이다. 윤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장관 청문회만 봐도 ‘부모 찬스’를 누리고 또 물려주며 세습자본주의를 즐기는 얌체족이 수두룩했다. 대통령은 “자기들만의 이권과 이념에 기반을 둔 패거리 카르텔을 반드시 타파하겠다”고 했으나 검찰 출신 검피아·기재부 출신 모피아는 인사 회전문을 타고 공무원연금까지 받으며 몇 바퀴씩 해먹는 것을 전 국민이 목도하고 있다.
연세대 송복 명예교수는 지금 우리나라 고위 관료, 상층 계급에선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보이지 않아 국민이 절망하고 있다고 했다. 영국, 프랑스 같은 선진국일수록 계속 존경심을 유발하는 사람들이 있고, 계속 도덕심을 높여주는 집단이 있어 역사를 이끄는 동력이 나오는데 우리 사회에선 운 좋게 높은 자리 올라간 사람들이 혜택받은 만큼 도덕성과 책임윤리를 보여주지 못해 경제도 더는 도약을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것을 윤 대통령이 보여줬으면 좋겠다. 변혁적 리더십의 요체는 비전 달성을 위해 개인적 희생을 감수하는 것이다. 샤를 드골 전 프랑스 대통령은 1969년 대통령직을 사임할 때 대통령 연금조차 사양했다. 국가를 위한 봉사에 대가는 필요 없다는 신념이 있어서다. 조희대 대법원장 같은 유능하고 깨끗한 인선을 계속하는 것도 방법이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공직사회가 달라지고, 보수세력이 달라지고, 젊은 세대 눈빛이 달라지면서, 나라엔 새로운 활력이 넘쳐날 것 같다.
-김순덕 칼럼니스트, 동아일보(24-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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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음 재상 이원익
[이한우의 간신열전]
옛날 중국에서 늘 하는 말 중에 “한마음으로 두 임금을 섬길 수는 있어도 두 마음으로는 한 임금도 제대로 섬길 수 없다”는 명언이 있다.
이 말을 온몸으로 보여준 조선 재상을 꼽자면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1547~1634년)이 첫째이다. 이원익은 어찌 보면 재상감이라기보다는 이조판서에 어울리는 전형적인 판서감이었다. 세상의 격변에 따라가기보다는 자기 원칙을 고수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 원칙이란 오직 백성 향한 한마음이었다. 출세를 도모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서북 지방으로 몽진하려던 선조는 가장 먼저 이조판서이던 이원익을 평안도도순찰로 삼아 평안도로 보낸다. 그전에 안주목사로 있을 때 백성들에게 누에치기를 권장하는 등 민생을 안정시켜 그곳 백성들이 흠모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선조가 서울로 돌아온 후에 우의정 및 4도체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도성에 있지 아니하고 전쟁이 계속되고 있던 영남체찰사영에서 일했다. 그후 좌의정, 영의정 등을 두루 역임했다.
그의 정치 노선은 유성룡을 따랐기에 남인에 가까웠으나 백성 사랑에 동서남북이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북인들이 세운 광해군 초에도 그는 영의정에 임명된다. 그러나 광해군이 친형 임해군을 처형하려 하자 극력 반대하다가 병을 핑계로 고향에 내려갔다. 이이첨을 필두로 한 북인들이 주도한 이른바 인목대비 폐위론이 제기되자 이를 비판하는 소를 올렸다가 유배를 가야 했다.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반정 성공 직후인 3월 16일 실록이다. “이때에 와서 다시 수규(首揆·영의정)에 제수되니 조야가 모두 서로 경하하였다. 상이 승지를 보내 재촉해 불러왔는데, 그가 도성으로 들어오는 날 도성 백성들은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맞이하였다.” 실록은 그를 충정청백(忠貞淸白)했고 강정청고(剛正淸苦)했다고 평한다.
조선에는 조준, 하륜, 황희 등 경륜이 뛰어난 재상들이 있었지만 새해 벽두 왠지 이원익 같은 한마음 재상이 그립다.
-이한우 경제사회연구원 사회문화센터장, 조선일보(24-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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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인년 ‘미스터 션샤인’과 노블레스 오블리주
[김순덕의 도발]
30여 년 전 나를 뽑아준 편집국장 댁에 몇몇 선배들과 세배를 갔을 때다. 여기자는 한해 한두 명쯤 뽑히던 그 추운 시절(지금은 거의 절반이다), 국장이 “기자는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를 보는 기자와 안 보는 기자로 나눌 수 있다”고 했다. 그때부터 그걸 들여다보기 시작해 연말이면 이 잡지가 내놓는 새해 세계전망을 들여다보는 게 나만의 연말행사가 됐다(작년 말 이코노미스트는 윤석열 대통령의 당선을 예측했다).
2023년 전망을 담은 이코노미스트 최근호 표지. 이코노미스트는 매년 연말 새해 전망을 담은 특집호를 발행한다.
1년 전 ‘50억 벌어 교수직도 던진 최성락 투자법’이라는 책으로 대박 낸 최성락 전 동양미래대 교수도 젊은 날 비슷한 경험을 한 모양이다. ‘100년 전 영국 언론은 조선을 어떻게 봤을까?: ‘이코노미스트’가 본 본 근대조선’이라는 제목에 꽂혀 그의 책을 샀다. 서문을 보니 대학 때 고품격 영어잡지를 봐야 영어실력이 는다는 영업사원에 홀려 보기 시작했다고 했다.
100년 전 조선의 모습을 보기 위해 그가 굳이 일본 국립도서관까지 찾아 이코노미스트를 뒤진 건 1843년 창간된 이 잡지가 객관적 시각으로 사건을 보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중국과 일본엔 방관자가 사물을 냉정히 바르게 본다(傍觀者淸)는 격언도 있다던가.
청일전쟁 러일전쟁 예견했던 이코노미스트
안타깝게도 약소국 조선이 단독으로 다뤄진 기사는 없다. 중일 러일 등 강대국 관계의 대상으로 언급될 뿐이다. 제목이 Korean War인 1894년 9월 24일 기사도 청일전쟁을 다룬 내용이다. “일본군을 목격한 사람들은 장비와 조직의 정밀함을 언급했으며 함대의 상태도 최상인 점에 주목했다”며 일본의 승리를 전망했다(조선에선 죄 청나라 승리를 믿었다).
청일전쟁 내용을 다룬 이코노미스트 1894년 9월 24일 지면. 구글·미국 미네소타대 자료
대한제국 황제 고종이 광무개혁을 시작했던 1898년 1월 8일 기사는 슬프기 짝이 없다. “러시아는 조선에 대해 절대적인 영향력과 완전한 통제력을 갖고 있다”는 거다. 1899년 말부터 ‘극동지역에서의 소문’이라는 제목으로 5년 후의 러일전쟁을 예견한 것도 놀랍다. 1902년 1월 30일 영일동맹을 맺은 뒤엔 “영일동맹은 영국과 일본에 큰 이익을 줄 수 있다”고 분석했다(2월 15일).
1910년 한일병합 기사가 단신 수준이라는 사실은 허망하다. “러일전쟁으로 조선을 손에 넣은 뒤, 일본은 조선에 자신들의 사법과 행정 체제를 밀어붙였다. 이제 일본은 명목상으로도, 실제적으로도 대륙의 권력자가 됐다.”(1910년 8월 27일)
국제정세에 눈감고 권력다툼에 골몰했던 나라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일본 식민사관에 따르면 조선은 당쟁 때문에 망한 나라였다. ‘100년 전 영국 언론은…’에 따르면 조선 황실은 국제정세에 무지해 망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도 삼국간섭으로 랴오둥 반도를 청에 반납했어야 했던 일본이다. 120년 전 임인년(壬寅年) 일본이 당시 세계 최강국 영국과 맺은 영일동맹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견제하기 위해 대등한 입장에서 체결한 세계적 사건이었다. 이코노미스트가 진작부터 러일전쟁을 예고했듯 국제정세에 밝은 사람은 이 동맹이 일본의 승리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내다볼 수 있었음에도 고종실록엔 한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대한제국 황제 고종. 동아일보DB
그 무렵 고종실록에 영국이 언급되는 건 딱 하나, “광무 6년 양력 1월 30일(공교롭게도 영일동맹을 맺은 바로 그 날이다) 이재각을 특명대사로 임명하여 영국 황제의 대관식에 참가하게 하다”는 것뿐이었다.
차라리 호남 선비 황현이 낫다. 그가 쓴 ‘매천야록’ 1902년 1월엔 “시찰사 파원(派員) 붙이들을 소환하도록 하고, 음직(蔭職;과거를 거치지 않고 조상의 공덕에 의해 맡은 벼슬)으로 차함(借啣;실제 근무하지 않고 벼슬 이름만 가지던 일)한 자들을 관보에 게재하지 말도록 하였다. 이 때에 영국과 일본이 협조하여 동맹을 맺고 우리나라의 내정을 관리할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떠돌아 조정의 의론이 흉흉하였으므로 이러한 조칙을 발표하기에 이른 것이다”라는 대목이 있다. 유언비어일지언정 지식인은 영일동맹을 들어봤다는 얘기다.
매천야록에는 이 같은 집권층의 무능과 부정부패, 권력다툼에 대한 비판이 끝없이 이어진다. 정말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나라를 말아먹은 것은 조선의 못난 집권층이었던 거다.
미스터 션샤인과 애기씨의 불꽃같은 사랑
나라가 망했다고 조선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키지는 않을까, 이코노미스트는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고 봤다. “지난 몇 년 간 이뤄진 가혹한 일제의 가혹한 군국주의 통치는 원래부터 거친 것과는 거리가 멀었던 이 은자의 나라(Hermit Kingdom) 국민에게서 반항할 만한 기질과 여력을 모두 빼앗아 버렸다.”(1910년 8월 27일)
이 대목을 보는 순간 나는 2018년 방송된 김은숙 극본의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떠올렸다. 국가보훈처가 얼마 전 드라마 속 유진 초이 역의 실존 인물인 황기환 선생을 2023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유진 초이가 극중 남장 스나이퍼이자 의병인 애기씨 고애신과 불꽃사랑을 한 것이 1902년부터 1907년까지 일제의 가혹한 군국주의 통치기였다.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한 장면. 배우 이병헌이 유진 초이를, 김태리가 고애신을 연기했다. tvN 화면 캡처
물론 드라마이고 고증에 문제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저물어가는 조선에 그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저 아무개다. 그 아무개들 모두의 이름이, 의병(義兵)이다. 원컨대 조선이 훗날까지 살아남아 유구히 흐른다면, 역사에 그 이름 한 줄이면 된다”는 포스터 문구는 아직도 가슴을 친다.
의병은 있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없다, 지금도?
한중일 문명비평서 ‘풍수화’(風水火)에서 김용운은 “한국의 원형에 귀족의 책무,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없는 반면 일본 원형에는 의병이 없다”고 썼다. 달리 말하면 일본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있다는 의미다. 일본이 아시아에서 제일 먼저 근대화를 시작하고, 120년 전 영일동맹을 맺고(일본은 늘 최강대국과 동맹을 맺어 국익을 꾀하는 나라다), 국제정세 변화를 귀신같이 감지해 나라를 키우고 지켜온 데는 이 영향도 적지 않다고 본다.
지금 우리나라는 어떤가. 국제정세에 무지한 채 한물간 이념에 매달려 죽어라고 근대화를 막던 위정척사파의 후예, 86운동권 정권은 2022년 임인년 대선에서 마침내 국민심판을 받았다. 그러고도 거대야당이랍시고 국회권력을 움켜쥐고는 당 대표 방탄에 골몰하며 국정발목이나 잡는 의원들 몰골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찾을 수 없다.
새로 출범한 윤석열 정부 역시 슬프게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보여주지 못했다. 능력주의 인사라지만 마치 실력 있고 깨끗한 인물은 존재할 수 없다는 양 고관들은 여전히 당당하다. 이러다 ‘아빠 찬스’를 타고 나야 성공할 수 있는 신분사회로 굳어질까 겁난다.
앞으로 4년 반, 윤 대통령이 국민 눈높이에 맞는 인사만 해준대도 나라 분위기는 달라진다. “한국에도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존재한다!” 외칠 수 있게 되고, 우리는 ‘깔딱 고개’를 넘어 품격사회로 진화할 것이다. 120년 전 임인년처럼 또 미스터 션샤인이 달려와 “귀하는 조선을 지키시오. 난 귀하를 지킬 터이니…” 해주길 고대할 순 없지 않은가.
-김순덕 대기자, 동아닷컴(22-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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