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무역 시대와의 기약없는 이별]
[새해 경제정책 納期, 지켜야 한다]
[정주영 회장도 겁낸 ‘전쟁’ 같은 위기, 한국 기업 덮친다]
자유무역 시대와의 기약없는 이별
중국은 국가·당·기업이 한 몸… 리카도 철학과 태생적 모순
과거와 달리 타협 어려워 무역 갈등은 더 거칠어질 듯
1985년 9월 23일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이 경제·산업계 주요 인사들을 백악관에 초대했다. 미국·영국·프랑스·독일·일본 등 G5(주요 5국) 재무장관들이 달러화 강세를 완화하는 ‘플라자 합의’를 맺은 다음 날이었다. ‘쌍둥이 적자’에 시달렸던 레이건은 이날 자신의 무역 철학을 꽤 소상히 밝혔다. 그는 자유무역에 대한 믿음은 확고하다면서도 “자유무역은 ‘공정한 무역’이어야 한다”고 했다. 다른 나라가 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해 그 기업이 해외에 덤핑할 수 있도록 하거나 미국 제품을 위조·복제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자유무역이 아니라고 했다. 그건 “우리 미래를 훔치는 것”이라고도 했다.
미국의 대규모 무역 적자는 산업 경쟁력 약화에도 원인이 있지만 비관세 장벽 등 다른 나라의 불공정 행태가 주범이라고 레이건은 봤다. 해결책을 놓고 협상국 간 갈등도 있었지만 상황은 지금보다 나았다. 고민을 털어놓고 머리를 맞댈 수 있는, 협상 가능하고 생각이 비슷한 ‘친구들’이었기 때문이다. 세계는 자유무역을 향해 더 전진했다.
영국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가 이론 체계를 완성했고, 곡물법 폐지(1846년)로 본격적으로 닻을 올린 자유무역은 21세기 들어 만개했다. 1991년 소련 붕괴에 이은 2001년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은 화룡점정이었다. 지구촌은 하나로 묶였고 풍요로워졌다. 리카도 자유무역의 절정이라 할 만했다. 이런 분위기는 20년도 안 돼 급변했다. 2016년 미 대선을 기점으로 인정사정 안 봐주는 자국 우선주의와 보호무역이 부상했다. 몇 년이 지났어도 상황은 악화 일로다. 미국과 유럽, 중국 등 세계 3대 경제권은 물론이고, 일본·인도도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전엔 상상도 못 했던 엄청난 정부 지원금이 기업에 쏟아진다. 과거와 다른 건 대화와 타협이 어렵다는 점이다. 달라도 너무 다른 진영이 생존을 놓고 다투고 있기 때문이다.
격변이 트럼프 탓이란 주장도 있지만 근원적 분석은 아니다. 미 대통령이 바뀌어도, 인류에게 공포를 줬던 코로나 팬데믹이 물러가도 보호무역 경향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된 데는 중국 국가자본주의가 몰고 온 분노와 불안감을 꼽지 않을 수 없다. 국가의 전폭적 지원을 받는 중국 기업이 글로벌 자유무역을 악용, 각국의 산업과 기업, 시장을 장악하고 무너뜨려왔다는 것이다. 트럼프 때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를 지낸 로버트 라이트하이저는 “자유무역 어젠다가 지배했던 지난 20여 년은 역사적 비정상 상태였다”고 했다. 문제는 앞으로 중국이 달라질 수 있느냐는 것이다.
중화공상시보에 따르면 지난 2002년 전체 민간 기업 중 공산당 조직이 설립된 곳은 27.4%였는데, 2018년 48.3%까지 늘었다. 중국이 세계 무대에서 존재감을 키우는 동안 공산당의 기업 지배는 더욱 강화됐다. 중국은 한발 더 나아갔다. 2018년 말 ‘중국공산당지부공작조례’를 발표했다. 기업 등 모든 조직에 공산당원이 3명 이상일 경우, 당 지부를 설립하라는 내용이다. 최근 통화한 한 중국 전문가는 “지금은 거의 모든 기업에 당 조직이 들어섰을 것”이라고 했다. 남방도시보는 “2021년 현재 텐센트 직원 6만명 중 1만명 이상이 공산당원”이라며 “회사엔 14개 당 총지부, 275개의 당 지부가 있다”고 했다.
자유무역의 기본 철학은 정부가 기업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다. “국가와 당과 기업이 한 몸”인 중국 체제와는 양립이 어렵다. 시진핑 주석이 ‘중국식 현대화’를 강조한 데서 보듯 공산당 독재의 중국이 기업 지배를 포기하는 건 태생적으로 불가능하다. 뜻 맞는 국가끼리 협력은 가능해도 지구촌 전역에 자유무역이 다시 꽃피는 시대는 기약 없는 먼 미래가 될 수 있다. 중국이 변하지 않는 한 말이다.
-장일현 기자, 조선일보(24-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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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경제정책 納期, 지켜야 한다
영국 노동당 내각을 이끌며 ‘일하는 복지’를 제시한 토니 블레어(71) 전 총리는 최근 파이낸셜타임스 인터뷰에서 “국가는 방향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2016년 싱크탱크를 설립, 현재 아프리카·동남아 등지 40국 자문에 응하고 있다. 대통령이나 총리를 만나면 늘 “계획이 있냐”고 묻는다. 탈탄소 시대를 맞아 ‘오일 머니’ 의존도를 낮추고 IT·신재생에너지 등으로 경제 구조를 다변화하겠다는 ‘비전 2030′ 구현에 한창인 사우디아라비아도 고객이다. 뭐든 원하는 대로 된다고 해서 ‘미스터 에브리싱’이라고 불리는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 겸 총리도 늘 미래와 계획을 묻는다.
대외 의존도가 높고 안보 위험이 남다른 한국은 계획을 제대로 점검하고 새해를 시작했을까. 국가 한 해 계획인 ‘경제정책 방향’도 내지 않은 채 새해를 맞았다는 점에서 유감이다. 경제 전망과 정책 밑그림을 담은 보고서를 12월 중순경 미리 발표해 왔는데, 올해는 경제부총리 인선 지연으로 1월 초순 낸다고 한다. 해를 넘긴 경우는 2008년 2월 기획재정부 출범 이후 처음이다. 다른 때도 아니고 고물가·저성장 복합 위기에 ‘두 개의 전쟁’이라는 안보 불안이 겹친 비상 시국이다.
장관 6명을 4월 총선 후보로 차출한 여파다. 2023년 마지막 근무일인 지난달 29일 취임한 새 부총리가 판을 짤 시간을 주자는 취지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15년 관행인 대국민 납기(納期)를 어긴 점은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정치 판도를 흔들 총선을 앞두고 정부 방향이 무슨 소용이냐’는 시선도 정부 안팎에서 있지만, 정책 방향이 제때 나오지 않아 혼란을 겪었다는 기업인도 적지 않았다. 한 대기업 간부는 “회사 관련 정책 내용을 파악해오라”는 상부 특명으로 살얼음판 같은 연말을 보냈다고 한다.
기재부 전신인 재정경제부 시절엔 12월 대선 등으로 1월에 정책 방향을 발표하기도 했다. 2008년 정책 방향도 전례에 따라 이명박 대통령 취임을 한달 앞 둔 그해 1월 나왔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회의에서 ‘새 정부 몫인데, 우리가 발표해야 하느냐’는 취지로 물었고, 일부 참모들은 “경제 전망·진단에 대한 수요가 있어 내야 한다”고 했다고 한다. 제때 납품된 정책 방향에는 미국발 서브프라임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에 따른 국내 금융시장 악영향 가능성 등 시의적절한 진단이 담겼다. 3월 새 정부가 ‘MB노믹스’라는 별도 계획을 발표하기까지 두 달간 기업들이 기댔던 정부 공식 진단이었다.
총선 대비는 당 지도부나 비상대책위원회의 일이다. 상설 비대위인 정부 일정표는 국민·기업의 기대와 수요를 우선시해야 한다. 정책 수요자인 국민을 대상으로 납기를 어기는 일이 앞으로 반복되지 않았으면 한다. 2기 경제팀의 충실한 계획을 기대한다.
-정석우 기자, 조선일보(24-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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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회장도 겁낸 ‘전쟁’ 같은 위기, 한국 기업 덮친다
[송의달이 만난 사람]
김경준 CEO스코어 대표
80년 만의 삼각 파도...한국기업의 생존법
고(故) 아산(峨山)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회장이 1980년대 서울 종로구 세종로의 횡단보도를 달리면서 건너고 있다. 그는 종종 청운동 자택에서 광화문 사옥까지 걸어서 출근했다./조선일보DB
“우리나라가 30년째 메모리반도체 세계 1위인 것은 글로벌 지정학(地政學)에 따른 천운(天運) 덕분이 크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질서가 무너지는 대격변기인 지금은 지정학과 기정학(技政學), 자정학(資政學)의 ‘삼각 파도’가 몰아치고 있다. 기업과 정부가 과거보다 수 십배 이상 기민해야 한다.”
기업경영분석 연구소인 CEO스코어의 김경준(59) 대표의 진단이다. 쌍용투자증권과 쌍용경제연구소를 거쳐 2000년 딜로이트컨설팅에 입사해 대표이사, 경영연구원장, 부회장을 지낸 그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토종(土種) 컨설턴트이다.
<위대한 기업 로마에서 배운다> <지금 마흔이라면 군주론> <사장이라면 어떻게 일해야 하는가> 같은 스테디셀러를 비롯해 20권이 넘는 저서를 냈다. 기자는 2023년 10월 20일 김 대표를 만나 최근의 글로벌 경영 환경 변화와 우리 기업들의 대응 전략을 들어봤다.
김경준 CEO스코어 대표는 서울대 농경제학과 졸업 후 같은 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외국 유학이나 MBA(경영대학원) 공부 없이 그는 딜로이트컨설팅 대표이사와 부회장까지 올랐다. 김 대표는 "전쟁 같은 위기를 경험하지 못한 대다수 한국 기업들에게 지정학에 기술과 자원이라는 변수의 상호 작용이 커지는 최근 변화는 기업 운명을 위협하는 심각한 도전"이라고 말했다./김경준 제공
◇韓 반도체는 글로벌 지정학 天運의 산물
-한국이 반도체 강국(强國)이 된 게 ‘지정학’ 덕분인가?
“1950년대 미국에서 태동한 반도체 산업은 1970년대부터는 일본이 시장을 주도했다. 80년대 미·일(美日) 갈등이 불거져 미국 정부가 일본 반도체 7개사를 제소하고, 1986년 미·일 반도체 협정으로 미국이 일본을 옥죄었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는 일본 외에 반도체 신규 공급국을 허용하는 국제 역학관계 틈을 파고들어 반도체산업에 뛰어들었기에 승기(勝機)를 잡을 수 있었다.”
1987년 삼성전자 반도체공장 3라인 기공식에 참석한 고 이병철(맨 오른쪽) 삼성그룹 창업자와 이건희(오른쪽에서 둘째) 삼성전자 회장
김 대표는 “삼성전자는 1983년 6월 64K D램 생산을 시작한 지 10년 만인 1993년 메모리 시장 세계 1위 기업이 됐다. 지정학적 환경 변화에 올라탄 다음 첨단 연구기술력과 공정 관리력이 결합하면서 우리나라는 반도체 강국으로 도약했다”고 했다.
-‘지정학’을 넘어 지금은 ‘기정학 시대’라고 했는데 어떤 의미인가?
“지리적인 위치가 가장 중요한 지정학과 달리 기정학(技政學·techpolitics)에선 인공지능(AI), 반도체, 퀀텀 컴퓨팅 같은 기술력이 국제 질서를 만들고 세계 패권을 좌우한다. 한 나라의 과학기술력이 곧 해당국가의 경쟁력이라는 말이다. 2022년 10월 팻 겔싱어 미국 인텔 CEO가 ‘과거 50년 동안 석유 매장지가 세계 지정학 질서를 결정했지만, 앞으로 50년은 반도체 공장이 더 중요해질 것”이라고 말한 게 이를 상징한다.”
◇한·미·일·대만 vs 중국...반도체 ‘技政學 전쟁’
-‘기정학’의 힘을 보여주는 다른 사례가 있다면?
“세계 최대 파운드리(foundry·반도체 위탁 생산)기업인 대만 TSMC의 창업자 모리스 창 전 회장은 2022년 11월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서 카말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 시진핑 중공 총서기와 각각 회동했다. 일개 민간 기업인이 미중(美中)의 최고지도자와 연쇄 면담한 것 자체가 ‘기정학’의 힘을 보여준다. TSMC는 중국의 침공 위협에 대응하는 국방력의 중핵으로 대만을 지키는 ‘호국신산(護國神山)’으로 불린다. 해군 함정보다 TSMC 공장이 유사시 미국의 군사 지원을 담보하는 실질적인 전쟁 억지력이라는 애기이다.”
2022년 11월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서 모리스 창 TSMC 창업자가 카말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과 만나고 있다.(왼쪽). 그는 같은 회의에서 시진핑 중공 총서기와도 회동(오른쪽)했다.
TSMC가 일본 구마모토현에 짓고 있는 반도체 공장/교도통신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의 주력 산업인 반도체가 바로 ‘기정학의 전쟁터’이다. 현재 미국은 한국, 일본, 대만과의 ‘칩(chip) 4 동맹’을 맺어 중국 고립을 꾀하고 있다. 미국의 반도체 설계(팹리스), 한국의 메모리, 일본의 소재·부품장비, 대만의 위탁 생산(파운드리) 기술을 결합한다는 전략이다. 일본, 인도, 유럽연합(EU) 등이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해 최근 국가 역량을 총동원하는 것도 기정학 때문이다. 일본 구마모토(熊本)에 반도체 공장을 짓는 대만 TSMC에 일본 정부가 직접 지원키로 확정한 보조금만 우리 돈으로 12조원이 넘는다.”
-‘기정학’은 앞으로 더 강화될 것으로 보나?
“그렇다. 기정학 흐름은 더 거세질 것이다. 디지털 시대에는 기술 주도력(技術主導力)이 경제력 범위를 넘어 국가안보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한 예로 디지털 플랫폼을 장악하면 해당 분야의 고객, 생산, 유통 등 모든 정보를 지배한다. 유튜브, 페이스북, 트위터는 단순한 SNS(소셜미디어)가 아니다. 사회경제적 트렌드를 만들고 확산하며 심지어 정치적 변화를 촉발하는 파괴력까지 갖고 있다. 우리는 ‘아랍의 봄’ ‘월가를 점령하라’ 같은 시위에서 이를 확인했다.”
카이스트(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은 2023년을 '기정학 시대'의 원년으로 설정했다. 카이스트가 펴낸 단행본 <기정학의 시대>/인터넷 캡처
그는 “세계질서에서 최근 또 하나의 새로운 흐름은 ‘천연자원’의 정치·경제적 중요성이 높아지는 자정학(資政學·Reso-politics)”라며 “중국 정부가 희토류와 전기차 배터리 소재인 흑연 수출을 통제하고, 러시아가 천연가스를 서방에 대한 외교 압력 도구로 사용하는 게 단면”이라고 말했다.
◇21세기 자원은 국가안보 직결된 ‘전략 물자’
-‘자정학’으로의 변화도 구조적 대세인가?
“그렇다. 자정학은 서구 중심 G7과 대척점에 있는 이른바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 진영이 주도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이 주축이 된 브릭스(BRICs)가 핵심이다. 2023년 8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브릭스(BRICs) 정상회담에선 6개국이 새로 가입했다. 세계 10대 자원 부국(富國) 중 7개국이 브릭스 회원국이다.”
김 대표의 이어지는 말이다.
“1위인 러시아와 사우디아라비아(3위), 이란(5위), 중국(6위), 브라질(7위) 등 7개국이 보유한 천연자원의 가치는 총 212조달러로 미국과 캐나다·호주 3개국이 보유한 천연자원의 가치(98조 달러)를 압도한다. 브릭스는 ‘반(反)G7 성향 자원 부국 블록’으로 세력화하고 있다. 이는 천연자원이 국가의 외교·안보와 연계돼 상대국을 위협하는 ‘자정학 시대’의 도래를 보여준다. 단순 거래 상품(commodity)이던 천연 자원이 국가안보 차원의 ‘전략 물자’가 된 것이다.”
- 릭스 파워가 G7을 곧 능가할 것 같다.
“브릭스가 전 세계 총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95년 17%에서 2022년에는 32%로 상승했다. 지난해에는 G7과 브릭스의 GDP 비중이 동일했다. 올해 신규 가입한 6개국을 포함하면, 브릭스가 이미 G7을 추월했을 것으로 본다. 확대를 거듭하는 브릭스는 원유 같은 자원 거래에서 위안이나 루블 같은 자국 통화(通貨) 또는 블록내 공동 통화를 만들어 국제 기축 통화인 미국 달러 체제를 회피 또는 약화하고 있다.”
-지정학과 기정학, 자정학이 발호(跋扈)하게 된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21세기 디지털 시대 들어 ‘기술’과 ‘자원’의 독립 변수화가 가속화되고 있어서다. 아날로그 시대에 서방 선진국이 사실상 독점하던 과학기술과 제조기반은 디지털 시대를 맞아 후발주자의 기술력이 선발주자를 추월하는 수준이 됐다. 반도체, 스마트폰, AI, 배터리 같은 디지털 기술분야에서 강력한 입지를 구축한 우리나라가 이런 변화를 상징한다. 자원도 예전에는 탐사·채굴·금융역량에서 서방의 압도적 우위였으나 지금은 그것이 약화·분산하고 있다.”
◇냉전·세계화 끝나고 대격변기 도래
-2차 세계대전후 80여년 지속돼온 세계 질서가 최근 크게 흔들리고 있는 것 같다.
“그러하다. 지금까지 세계정치외교는 미국·영국·소련이 주도해 창립한 UN이 맡고, 국제금융질서는 달러(dollar) 체제가 근간을 이뤄왔다. 냉전시대가 1991년 소련 붕괴로 종식된 후 30년 동안 세계화 시대가 열렸다. 그 과정에서 세계 2위 정치·경제·군사 대국으로 부상한 중국이 ‘기술’과 ‘자원’을 지렛대로 세계질서 재편을 시도하면서 기존 질서가 균열하고 있다.”
김 대표는 “미국이 2021년 미국혁신경쟁법(US. Innovation and Competition Act), 2022년에 미국 경쟁력 강화법(America COMPETES Act)과 반도체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 등을 만들어 반도체 산업 지원, 첨단기술 육성, 미국 중심 공급망 강화를 서두르는 것은 중국의 도전에 대한 미국의 반격”이라고 말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23년 8월 9일(현지 시각) 뉴멕시코주 벨렌에 있는 아르코사 풍력 타워를 방문해 경제 정책 ‘바이드노믹스’에 대해 연설하고 있다. 이날 미 행정부는 반도체지원법 시행 1년의 성과와 함께 인공지능(AI), 반도체, 양자컴퓨터 등 첨단 기술 3종의 대(對)중국 투자를 제한하는 행정명령을 발표했다./AP연합뉴스
그는 “이런 변화는 우리나라에는 부정적이다. 대한민국은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을 내걸고 최근 30년 세계화 시대에서 가장 큰 혜택을 누렸다. 이제 그런 안온한 구조가 깨졌기 때문에 우리도 세계 무대에서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거친 파도를 헤쳐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나라 전체와 기업의 대응은 어떤가? 점수로 평가한다면?
“기정학(技政學)에만 국한해 볼 경우, 100점 만점에 국가는 50점, 기업은 70점 정도이다. 국가의 경우 행정보다 정치적 낙후성이 더 큰 문제이다. 정치권은 국가경제와 과학기술의 기본적 역학관계 조차 이해 못하는 수준에서 기업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1995년 “우리나라 정치는 4류, 관료 조직은 3류, 기업은 2류”라고 지적했는데 오늘까지 바뀐 게 거의 없다.”
◇아프리카, 중동 등...글로벌 전략 경영 절실
-기업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벤치마킹할 사례가 있다면?
“지정학과 기정학, 자정학이 격변하는 교차점에서 기회를 찾는 새로운 차원의 글로벌 전략 경영이 절실하다. G7 선진국의 주도력 약화, 기술패권 경쟁, 자원부국 블록화라는 구조적 복합 변동기에 글로벌 전략을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 인구와 자원을 겸비한 아세안, 중동, 아프리카의 잠재력에 주목해야 한다. 단순 수출 방식이 아닌 K브랜드, 디지털, AI, 플랫폼 등과 접목해 이들과의 관계를 심화·업그레이드해야 한다. 우리 기업의 차별화된 경쟁력 향상에 BTS, 오징어게임 같은 K브랜드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
그는 “글로벌 전략 경영이란 관점에서 일본의 종합상사(綜合商社)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워렌 버핏(왼쪽) 버크셔해서웨이 창업 회장과 세지마 류조(오른쪽) 전 이토추 회장/조선일보DB
“일본 종합상사들은 1990년대부터 식량, 자원개발, 에너지 등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이들은 전 세계에서 사업현장 정보를 수집·분석해 기회를 포착하고 위험을 최소화하는 능력으론 왠만한 국가 정보기관을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세지마 류조 이토추상사 회장은 1967년 중동전쟁이 1주일이면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날 것을 정확히 예측했고, 1973년 오일쇼크도 예견해 회사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세계적 투자자인 워렌 버핏은 최근 일본 종합상사를 ‘영원히 살아남을 기업’으로 표현했다. 한국 기업도 이런 역량 구축을 서둘러야 한다.”
-또 다른 대응 전략이 있다면?
“2022년 2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면서 삼성전자, 현대차, 폭스바겐, 도요타, 보잉, 월마트, 코스트코 등 1000개가 넘는 기업들이 러시아에서 철수했다. 이런 정치경제 군사 급변 상황에 대비한 시나리오 경영이 중요하다. 글로벌 정유기업 쉘은 전쟁, 시장 붕괴 같은 최악에 대비하는 시나리오 경영을 체계화해 1970년대 세계 7위 메이저 석유 회사에서 2위로 올라섰다. 일본 도요타는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 참사 후 공급자 협력체계 구축, 통합공급망 정보시스템 ‘레스큐’ 개발 등으로 위험관리 경영 능력을 대폭 높였다.”
◇日 종합상사 벤치마킹...시나리오 경영 본격화
-한국 기업들도 비상 위기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는 말인가?
“한국 기업들은 1953년 7월 6·25 휴전협정 조인 이후 전쟁을 한 번도 경험하지 않는 평화 시대에서 존립해 왔다. 그러나 지난해 우크라이나 전쟁과 최근 하마스에 의한 이스라엘 기습 공격 등은 동아시아에서도 언제든 전쟁이 발발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한국 기업들도 ‘위험’에 대한 인식 수준과 대응 강도를 확실히 높여야 한다.”
김 대표는 이어서 말했다.
“서양과 일본에서 100년 넘는 기업들은 세계 대전과 오일 쇼크 같은 극단적 상황에서 살아남아 사업을 유지했다. 독일의 지멘스(1847년 창립)·벤츠(1886년)·보쉬(1886년), 프랑스의 푸조(1896년)·르노(1899년), 일본의 미쓰비시(1871년)·미쓰이(1876년)·도요타(1902년) 등이 다 그렇다. 이들에게서 ‘위험’의 개념은 한국 기업과 차원이 다르다. 거듭 강조하지만 한국 기업들도 위험 인식과 정보 수집, 전략적 대응 수준을 높여야 한다.”
김경준 CEO스코어 대표가 쓴 주요 저서들. 이 가운데 <지금 마흔이라면 군주론>은 6만부, <위대한 기업 로마에서 배운다>는 각각 4만부 넘게 팔렸다. 그는 "책을 쓰면 그 주제에 대해 깊이 이해할 뿐 아니라 자신을 개별 브랜드로 키울 수 있다"고 말했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는 1986년 한 강연에서 ‘우리의 생활에서 전쟁만 없으면 어려운 일은 없다’라고 말했다. 창업 후 태평양전쟁과 6·25 전쟁을 겪은 그가 한 말이다. 1970년대 베트남 패망과 1991년 소련 붕괴, 1997년 IMF 충격 등은 결과적으로 우리가 더 강해지는 ‘위장된 축복’이 됐다. 세계 질서가 요동치고 해체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위기를 직시하고 냉정하게 대처해 새로운 기회를 붙잡아야 한다. ‘태평성대에도 굶는 사람 있고 전쟁통에도 돈 버는 사람 있다’는 말은 개인은 물론 기업 경영에도 적용된다.”
-송의달 에디터, 조선닷컴(23-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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