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제비.. 나비가 날갯짓을 하듯 입속에서 펄럭인다]
[ 수제비와 비빔밥]
수제비.. 나비가 날갯짓을 하듯 입속에서 펄럭인다
서울 영등포구 '왕왕수제비'의 수제비와 감자전, 만두. 나비가 날갯짓을 하듯 입속에서 펄럭이는 수제비는 사람이 손으로 찢어낸 것이 분명했다.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수제비를 좋아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메뉴에 수제비가 올라와 있으면 보통 그 밑에 적혀 있는 만두나 칼국수를 시키는 편이었다. 옛날 할머니는 이따금 소주병으로 밀가루 반죽을 밀어 커다란 부엌칼로 잘라 면을 뽑았다. 면을 뽑고 난 자투리로는 수제비를 뜯었다. 어른들은 그 수제비를 꽤나 좋아했는데 나는 그보다 젓가락에 면이 걸리는 무게감이 더 좋았다. 수제비는 젓가락으로 먹기에도, 숟가락을 쓰기에도 애매했다. 또 그 투박한 모습이 별것 없다고 생각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날 꼭 수제비를 먹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일이 생각보다 늦게 끝났다. 2호선 전철은 사람에게 밀려 숨 쉬기 어려웠다. 내려야 할 때 나는 죄책감 없이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밀며 문을 빠져나왔다. 모두가 모두에게 불편한 존재였다. 아침과 저녁, 이름도 모를 사람들을 그저 붐빈다는 이유로 미워하고 거추장스러워하는 내 모습에 스스로 마음이 상했다. 형과 한 약속은 이미 한참 늦었다. 지하철역에서 나와 뛰며 전화를 했다. “응, 앉아 있다. 천천히 와라.”
서울 여의도 '왕왕수제비'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형은 이미 식당에 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샛강역에서 나와 KBS 별관을 지났다. 곧 한양아파트 앞 사거리에 다다랐다. 식당은 바로 근처 주상복합 빌딩 지하에 있었다. 이름은 ‘왕왕수제비’였다. 이 자리에서 장사한 지 10년이 넘었다고 했다. 훤히 불이 켜진 가게에 형 혼자 앉아 있었다. 종업원은 그 앞을 서성이며 가게를 정리하고 있었다. 가게 이름이 그러하듯 수제비를 전문으로 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변덕스러운 여의도 직장인을 상대하느라 그런 것인지 메뉴가 육개장부터 메밀국수까지 길게 늘어서 있었다. 수제비만 팔아서는 이문을 남기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제비만 찾는 사람이 그다지 많진 않기 때문이다. 형 앞에 자리를 잡았다.
수제비가 나오기 전에 작은 보리밥 한 그릇이 상에 올라왔다. 열무김치를 한 젓가락 크게 집었고 참기름, 고추장도 곁들였다. 으깬 마른 고추와 고춧가루를 섞어 살짝 양념한 열무김치는 풋풋한 내음이 차분하게 감돌았다. 입에서 뻣뻣하고 억세게 거친 느낌 없이 또 부드럽게 씹히는데 양념을 한 듯 만 듯한 그 맛에 여러 번 먹어도 물리지 않았다. 보리밥 작은 그릇이 아쉬웠다. 하지만 곧 작은 항아리에 담겨 나온 수제비를 보고 바로 그 생각을 접었다.
'왕왕수제비'의 열무보리밥 /인터넷 캡처
일인분이라고 하기엔 담긴 수제비 양이 만만치 않았다. 수제비는 중국의 완탕처럼 상앗빛으로 반쯤 투명하게 하늘거렸다. “어떤 사람들은 두껍게 씹히는 수제비가 좋다는데 나는 이렇게 얇은 게 좋더라.” 형은 말릴 틈도 없이 파와 양파, 애호박이 들어간 수제비를 국자로 퍼서 내 앞에 담아줬다. 옅은 갈색빛 국물을 그릇째 들어 마셨다. 오래 우려낸 멸치 국물이 담담하게 위장으로 흘러 들어갔다. 뼈가 으스러질 때까지 푹 고아낸 국물에는 가식이 없었다.
나비가 날갯짓을 하듯 입속에서 펄럭이는 수제비는 사람이 손으로 찢어낸 것이 분명했다. 입안을 이불처럼 폭 감싸는 수제비는 몇 번 씹을 필요도 없이 날아가듯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매일 담근다는 겉절이 김치를 곁들이니 순한 맛 사이로 들썩이는 리듬이 감돌았다. 수제비 항아리 앞으로 만두가 나왔다. 수제비를 찢은 그 손으로 빚은 만두는 물만두보다 살짝 더 컸다. 다진 고기가 실하게 들어 있는 만두는 맛이 튀지 않고 담백했다. 아마 점심이었다면 이쯤에서 식사를 마쳤으리라. 하지만 나를 기다린 형과 바로 헤어지긴 아쉬워 벽에 걸린 메뉴판을 다시 돌아봤다.
'왕왕수제비'의 수제비, 감자전, 만두. 일인분이라고 하기엔 담긴 수제비 양이 만만치 않다.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늦은 저녁 심심하게 먹기 좋겠다 싶어 고른 것은 감자전이었다. 주문을 넣자 우리 말고 아무도 없는 가게에 감자를 강판에 가는 소리가 울렸다. 주문이 들어오자 그제야 감자를 갈아 부친 그 맛은 먹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홀로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 일요일도 공휴일도 없이 수제비를 밀고 감자를 가는 마음, 그 마음은 손으로 잡히지 않고 값으로도 매겨지지 않는다. 자학하듯 몸을 부숴가며, 그렇게 스스로를 조금씩 잃어가면서 만드는 그 맛에는 거짓도 과장도 없었다.
-정동현 음식칼럼니스트, 조선일보(25-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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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제비와 비빔밥
김훈 산문집 '허송세월'. 작가는 "혀가 빠지게 일했던 세월도 돌이켜보면 헛되어 보이는데, 햇볕을 쪼이면서 허송세월할 때 내 몸과 마음은 빛과 볕으로 가득 찬다. 나는 허송세월로 바쁘다"고 썼다.
깊은 산속 절 마당에서 50대 남자가 담배를 피우다 노스님에게 걸렸다. 사찰은 금연 구역이다. 스님은 작았고 얼굴에 주름이 가득했지만 위엄이 있었다. 남자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노스님이 말했다. “담배를 피우는구나.” “그렇습니다.” “끊어라. 딴 데 가서 피우란 말이 아니다.” “이게 끊어지는 게 아닙니다.”
노스님이 그를 노려보았다. “말을 잘하는구나. 자네가 안 피우면 되는 거야. 피우면 못 끊는 거고.” 남자는 벼락이 뒤통수를 치는 충격을 받았다. 무참해서 물러났다. 돌아가는 등 뒤에 대고 스님이 말했다. “산은 금세 어두워진다. 조심해서 내려가라. 담배 피우러 절에 오지 마. 가서 끊어!”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된 김훈 산문집 ‘허송세월’을 읽다가 모처럼 소리 내 웃었다. 혼난 남자가 김훈이다. 네가 안 피우면 끊는 거다, 라는 단순한 한마디에 더 이상 들이댈 말이 없었다고. 노스님은 고도로 응축된 단순성으로 인간의 아둔함을 까부순 것이다. 알면서도 실천하기가 어려운 속세 중생의 괴로움이여.
소설가 김훈이 지난 4월 17일 서울 서초구 반포4동 성당에서 '땅 위에 세우기'라는 주제로 정약전, 정약용, 황사영, 안중근의 신앙과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오종찬 기자
이 책에서 더 오래 눈길이 머문 대목은 ‘수제비와 비빔밥’(195~200쪽)이다. 먹을 것이 모자라던 시절에 그의 가난한 어머니는 가끔씩 수제비를 만들어 식구들을 먹였다. 밀가루 반죽을 오래 치대야 수제비가 차지고 국물이 맑다. 수제비에는 어머니의 손바닥 굴곡이 남아 있었고 식감은 쫀득쫀득했다.
비빔밥을 만들 때 어머니는 흰 쌀밥에 여러 가지 나물들과 고추장, 들기름을 넣고 가볍게 비볐다고 한다. 어린 김훈이 주걱을 들고 비비는 것을 거들 땐 “으깨지 말고 치대지 마라. 반죽을 만드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비빔밥에는 흰 밥알의 존재가 한 개씩 살아 있어야 하고, 여러 가지 나물들의 개별성이 뒤범벅되면서 파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어머니의 원칙이었다고 작가는 썼다.
밀가루 반죽을 주무르는 손길과 비빔밥을 비비는 손길은 힘과 질감과 작동 방식이 이렇게 다르다. 막히는 도로 위에서 김훈은 이 세상의 모든 갈등과 다툼과 불화와 적대 관계를 버무려서 서로 의지하는 세상을 만들어 내야 하는 사람의 손길과 마음은 어떠해야 하는가 생각했다. 차 때문에 차가 가지 못하고 있었다. “다들 오도 가도 못 했다”는 마지막 문장을 읽는데 경박하게도 배가 고팠다. 수제비와 비빔밥, 두 손길 중에 하나를 고르기로 했다.
-박돈규 주말뉴스부장, 조선일보(24-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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