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마천루가 높다]
[서울에선 ‘어제+오늘+내일’ 시간의 겹을 걷는다]
남의 마천루가 높다
마천루를 사랑한다. 유명 마천루는 다 올랐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당연히 올랐다. 영국에서 가장 높은 런던의 더 샤드도 올랐다. 그래봐야 파리 에펠탑보다 낮다. 유럽은 마천루 경쟁에 뛰어들 생각이 없다. ‘올드 머니’는 고층을 선호하지 않는 모양이다.
21세기 이후 높은 마천루는 다 아시아 몫이다. 세계 10대 마천루 중 아시아 바깥에 있는 건 뉴욕 제1세계무역센터뿐이다. 나머지는 다 중국 아니면 두바이에 있다. 하나는 한국에 있다. ‘뉴 머니’는 고층을 선호하는 모양이다.
마천루광에게 서울은 심심한 도시였다. 63빌딩 하나로 너무 오래 버텼다. 요즘은 사정이 낫다. 여의도는 빨간 테를 두른 파크원 덕에 활기가 생겼다. 나는 다들 ‘사우론의 눈’이라 놀리는 롯데월드타워도 썩 좋아한다. ‘반지의 제왕’ 팬이라 그런 게 맞다.
처음 롯데월드타워에 간 날 나는 철학적이고 물리학적인 고민에 빠졌다. 세계에서 여섯째로 높은 빌딩처럼 느껴지질 않았던 탓이다. 엠파이어 스테이트보다 작아 보였다. 내 감각은 틀렸다. 전자는 555m다. 후자는 381m다. 감각은 믿을 것이 못 된다. 남의 것과 내 것을 비교할 때의 감각은 더욱 믿을 것이 못 된다.
우리는 한국의 모든 것이 작다고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남의 것 앞에서 쉽게 움츠러든다. 오랫동안 우리는 자금성과 비교하며 경복궁의 소박함을 애처로워했다. 두 궁궐 면적은 압도적으로 큰 차이는 없다. 창덕궁 등 다른 궁 면적을 합치면 서울 궁궐 규모는 베이징을 뛰어넘는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던 선조들 말씀은 여전히 유효하다.
요즘 나는 한국을 OECD 평균과 비교하는 대량생산형 기사는 클릭하지 않으려 애쓴다. 남의 떡 크다는 소리 만날 들어봐야 내 떡만 작게 느껴질 뿐이다. 마지막으로, 얼마 전 같은 평수로 이사한 친구 아파트가 내 아파트보다 훨씬 커 보인다고 생각했던 내 마음의 불경한 겸손함을 반성한다.
-김도훈 문화칼럼니스트, 조선일보(24-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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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선 ‘어제+오늘+내일’ 시간의 겹을 걷는다
지난달 23일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DDP 루프톱 투어 사전 공개 행사 모습. 뉴스1
며칠 전, 서울의 하늘을 걸었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개관 10주년을 맞아 특별히 개방된 루프톱 투어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한 이 특별한 경험을 통해 서울 생활 16년 차인 내가 수없이 지나쳤던 이 공간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지하철을 갈아타기 위해, 쇼핑을 하기 위해, 혹은 그저 스쳐 지나갔던 이 공간이 29m 상공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현재는 세계적인 건축물로 유명한 이곳 DDP는 한때 대한민국 스포츠의 심장이었다. DDP의 전신인 동대문운동장은 수많은 역사적 순간의 무대였다. 그중에서도 브라질 사람으로서 특별히 의미 있는 두 순간이 있다. 1972년 축구 황제인 펠레가 이끄는 브라질 산투스 팀이 이곳에서 경기를 가졌고,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는 또 다른 브라질 축구 영웅인 호마리우와 베베투가 이곳 잔디를 누볐다. 당시 경기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이곳을 걸을 때마다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88올림픽 당시 운동장은 이제 자하 하디드라는 또 다른 전설이 만든 미래적 건축물로 변모했다. 역명도 마찬가지다. 2, 4, 5호선이 만나는 ‘동대문운동장’역은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운동장의 기억은 곳곳에 살아 숨 쉰다. 역 안에는 88올림픽의 마스코트였던 호돌이 그림이 곳곳에 걸려 있다. 여전히 수십 개의 스포츠용품 가게들도 성업 중이다. 특히 축구용품을 사러 온 사람들로 붐빌 때 이곳의 활기는 과거 운동장이 품었던 열기를 그대로 이어받은 듯하다. 주말이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스포츠 애호가들로 거리가 가득 찬다.
밤이 되면 이곳은 더욱 특별한 모습을 보여준다. 옛 투광등의 불빛과 DDP의 은빛 물결이 어우러져 만드는 야경은 마치 과거와 현재가 대화를 나누는 듯하다. 스포츠의 열정이 디자인과 문화의 열정으로 이어지는 모습을 보며 도시의 진화가 얼마나 자연스러울 수 있는지 깨닫게 된다. 낮과 밤이 만들어내는 풍경의 대비 또한 이곳만의 특별한 매력이다.
5000년이라는 깊은 역사를 가진 한국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모습을 일상적으로 마주친다. 최신식 빌딩 건설 중에 유적이 발굴되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브라질 출신인 내가 특히 매료되는 점은 한국이 보존이라는 개념을 단순히 ‘옛것을 지키는 것’에 국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DDP가 바로 그 좋은 예시다. 옛 성곽과 운동장을 곳곳에 남기면서도 완전히 새로운 문화 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 이곳은 한국의 유연한 문화재 활용을 보여주는 완벽한 사례라 할 수 있다.
내 고향 브라질은 5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유럽인들이 처음 발을 디딘 순간부터 시작된 이 짧은 역사 속에서 우리는 ‘보존’을 ‘현재와의 단절’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래된 건물은 박물관이 되거나 아니면 새로운 것으로 완전히 대체되었다. 하지만 서울에서 마주하는 역사는 다르다. 그것은 현재와 끊임없이 대화하며 때로는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한다. 과거의 흔적을 존중하면서도 현대적 편의와 아름다움을 더하는 방식은 한국만의 특별한 지혜처럼 느껴진다.
서울에서는 과거와 현대의 시간, 공간이 겹쳐진다.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성벽이 현대식 빌딩 사이로 이어지고, 고궁 앞에서 첨단 전자제품이 팔린다. DDP의 지붕 위에서 바라본 서울은, 그래서 더욱 특별했다. 한 도시가 어떻게 과거를 품으면서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지, 그 해답을 발견한 듯했다.
동대문운동장 시절, 이곳에서 울려 퍼지던 함성과 환호는 이제 패션쇼와 디자인 전시회의 박수 소리로 이어지고 있다. 스포츠 경기장이었던 곳이 문화예술의 중심이 되고, 관중석이 있던 자리에 디자인 스튜디오가 들어선 것이다. 내년부터는 이 하늘 산책로가 390m로 확장된다고 한다. 더 넓어진 하늘길에서 우리는 어떤 새로운 이야기들을 발견하게 될까. 아마도 그곳에서 서울의 또 다른 모습을, 그리고 더 많은 시간의 층위를 만나게 될 것이다.
변화하는 것과 변치 않는 것 사이의 절묘한 균형.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서울이 간직한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DDP 루프톱에서 만난 새로운 풍경은 그런 서울의 진면모를 다시 한번 일깨웠다. 시간의 겹을 걸으며 우리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한데 어우러진 서울의 진정한 모습을 만나게 된다. 오늘도 DDP의 은빛 지붕 위로 쏟아지는 빛은 마치 이 도시의 끝없는 진화를 축복하는 듯하다. 그리고 그 빛 속에서 우리는 서울이 들려주는 시간을 초월한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된다.
-카를로스 고리토 브라질 출신 방송인·사업가, 동아일보(24-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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