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률 1%' 쇼크]---
["한국 메모리 수입하던 중국 자립… 곧 한국이 중국산 칩 쓸 것" ]
일본 '제로 성장' 30년… 반도체 생산 클린룸이 상추 재배 작업장 됐다]
[한국의 일본化… 이러다 '제로 성장'에 갇힌다]
[산업 대신 부동산… 돈 흐름도 30년전 일본 닮아]
['피크 재팬' 저자 "역동적인 한국, 변화 거부한 일본 실수 반복 말라"]
---['성장률 1%' 쇼크]---
"한국 메모리 수입하던 중국 자립… 곧 한국이 중국산 칩 쓸 것"
'칩 워' 저자 크리스 밀러 美 터프츠대 교수 인터뷰
지난해 3월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린 ‘코먼웰스 반도체 포럼’에 참석한 크리스 밀러 미 터프츠대 교수의 모습. 이날 행사에는 TSMC의 창립자 모리스 창이 함께 참석해 반도체 산업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 이야기 나눴다. 밀러 교수는 본지 인터뷰에서 한국이 반도체 경쟁력을 회복하기 위해 “기술 혁신에 끊임없이 집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로이터 뉴스1
“10여 년 전만 해도 중국은 한국 회사가 만든 메모리를 수입해 썼죠. 지금은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현지 공장뿐 아니라, 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YMTC) 같은 중국 회사가 필요한 반도체를 직접 생산합니다. 멀지 않은 미래에는 한국이 중국산 칩을 사게 될 수 있습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직면한 문제죠.”
‘칩 워(Chip War·반도체 전쟁) 저자인 크리스 밀러(Miller) 미국 터프츠대 교수는 최근 본지 인터뷰에서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서 지난 몇 년 동안 가장 큰 변화는 중국의 부상”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압도적 투자, 풍부한 내수, 강력한 정부 지원을 바탕으로 미국의 제재를 뚫고 반도체 기술 리더십을 확보해 가고 있다는 것이다.
밀러 교수는 글로벌 반도체 패권 전쟁을 통시적으로 고찰한 ‘칩 워’에서 후반부 약 3분의 1을 중국에 할애했다. 그는 “과연 한국과 미국, 대만, 일본은 중국이 세계의 반도체 공급망에서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라고 반문했다. 밀러 교수는 “현재 이 국가들은 ‘그럴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며 “그것이 현재 미국 주도로 진행 중인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재편의 본질”이라고 말했다.
-한국 반도체가 가장 먼저 타격을 받은 것 같다.
“한국은 메모리 중심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5년 전까지만 해도 중국은 메모리에서도 별 경쟁력이 없었다. 하지만 막대한 돈을 투자해 지금은 D램과 낸드에서 한국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실질적 위협이 되고 있다. (실제 한국 기업들은 예전 ‘캐시 카우’ 역할을 하던 레거시 반도체에서 중국에 시장을 빼앗겨 큰 타격을 받고 있다.) 반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는 중국이 TSMC보다 여전히 5년 정도 뒤처져 있다. 중국이 공개한 정보를 보면, 파운드리에선 수입 제조 설비와 미국 기술에 여전히 크게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그들이 이 모든 것을 내재화하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5년 후에도 최첨단 인공지능(AI) 칩을 주도하는 나라가 어디냐 묻는다면, 여전히 대만일 것이라고 답하겠다.”
-세계 공급망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어떻게 평가하나?
“사실 반도체만의 문제는 아니다. 석유화학이든 디스플레이든 중국은 저렴한 가격으로 양질의 제품을 생산해 내고 있다. 중국은 한국산 제품을 구매하는 대신, 한국 기업들의 생산법을 빠르게 배우고 있다. 예전 한국 기업들이 미국·일본 기업을 모방하던 것과 같은 방식이다. 중국은 일부 최첨단 반도체, 항공기 엔진 등 몇몇 분야를 제외하고는 거의 자립에 성공했다. 중국으로 기술이 유출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국의 부상을 지연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보인다.”
-중국이 빠르게 자립할 수 있었던 이유는?
“중국은 2000년 전후 전자 상거래와 인터넷 검색 등에서 빠르게 성장했다. 그런데 그런 정보들은 외국산 반도체에 저장됐다. 2010년대 중국이 가장 많이 수입한 것은 석유가 아니라 반도체였다. 언제든지 미국에 유출될 수 있는 것이다. 중국이 반도체 자립에 속도를 내는 계기가 됐다. 중국 시장을 포기할 수 없었던 IBM과 AMD, 암 같은 반도체 회사는 중국 업체와 컨소시엄을 꾸리는 등의 방식으로 중국의 기술 자립에 협조했다. 또 화웨이는 매출의 23% 이상을 연구·개발에 투자하는데, 이 비율은 미국 빅테크의 거의 2배 수준이다.”
-한국이 경쟁력을 회복할 방법은?
“기술적 차별화가 없는 기업은 치열한 경쟁과 수익 하락을 피할 수 없다. 이런 기업들은 과거보다 훨씬 빠르게 시장점유율을 잃을 것이다. 반도체는 변화 속도가 빠른 만큼 차별화 실패에 따른 리스크도 그에 비례해 빠르고 강하게 나타난다. 기술 혁신에 끊임없이 집중하는 게 리스크를 피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한국은 AI처럼 다음 시대의 혁신에 올라탈 수 있는 핵심 부품을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 SK하이닉스가 그런 가능성을 보여주긴 했는데, 다른 기업들도 사업 모델을 조정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기술 변화에 뒤처질 수 있다는 두려움을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게 역사의 교훈이다.”
-미국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은 성공할까?
“미국의 대중 제재가 없었다면 중국의 기술 자립 속도는 우리가 지금 보는 것보다 훨씬 빨랐을 것이고, 미국·한국 등에 더 큰 타격을 입혔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어느 정도 의도한 목표를 달성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은 다시 글로벌 첨단 반도체 생산 거점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삼성전자나 TSMC가 미국에 가장 진보된 2나노 생산 시설을 짓긴 어렵겠지만, 바로 아래 단계인 3나노 공정은 적용할 것이다. 수많은 AI 반도체가 3나노 공정에서 생산되고 있다.”
-최첨단 칩이 TSMC에 집중되는 것도 한국엔 위기인데.
“최첨단 반도체 생산의 90%가 대만에 있는 구조는 분명 문제가 있다. 대만은 중국의 침략이라는 안보 문제가 걸려 있다. TSMC가 대만의 안보를 보장할 것이라는 시각도 있지만, 중국 시진핑 주석은 정치적 목표 달성을 위해서라면 비이성적이고 파괴적인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인물이다. 제조 기반을 보다 다양화하려는 미국의 목표를 고려하면, 삼성전자는 잠재적으로 매우 중요한 플레이어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크리스 밀러와 칩 워
미국의 유명 경제사학자이자 국제 정치 전문가. 터프츠대학교 국제관계학 대학인 플레처스쿨 교수로 재직하면서, 현대 기술과 국제 정치의 관계를 통찰한 연구로 주목받고 있다. 대표작이 2022년 10월 출간한 ‘칩 워(Chip War)’다. ‘누가 반도체 전쟁의 최후 승자가 될 것인가’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산업이 아니라 정치·경제·국제 관계적 측면에서 세계 반도체 70년 역사를 분석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실리콘밸리=오로라 특파원, 조선일보(24-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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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로 성장' 30년… 반도체 생산 클린룸이 상추 재배 작업장 됐다
경제, 끝없는 저성장 터널로
일본 후지쓰 직원들이 후쿠시마의 아이즈와카마쓰시 공장 반도체 클린룸에서 친환경 방식으로 재배 중인 상추를 살펴보고 있다. 후지쓰는 한때 세계 반도체 기업 매출 상위 10위에 들었지만 1990년대 들어 쇠락했고, 주력 반도체 공장이었던 이곳은 친환경 상추를 기르는 ‘농장’으로 재활용하고 있다. /후지쓰
일본 도쿄에서 북쪽으로 300km 떨어진 후쿠시마현 아이즈와카마쓰시(市)에 있는 후지쓰 공장 정문에는 간판이 없다. 축구장 36개의 크기인 대형 공장 입구에는 예전에 ‘후지쓰세미컨덕터(반도체)’라는 사명이 붙어 있던 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 공장은 1980년대 세계 톱10 반도체 기업이었던 후지쓰의 주력 반도체 공장이었다. 후지쓰의 반도체 사업은 1990년대 들어 쇠락했고 2013년 시스템반도체 부문을 파나소닉과 경영 통합했다. ‘후지쓰도시’라고 불렸던 아이즈와카마쓰도 함께 몰락했다. 공장 주변에서 만난 일본인 주민은 “1980년대엔 마을 주민 절반 정도가 가족 중 한 명은 후지쓰에서 근무했을 정도로, 후지쓰 도시였다”며 “후지쓰의 월급날은 마을 전체가 작은 축제처럼 들떴다”고 말했다.
지금은 정문 맞은편, 600~700대가 주차할 수 있는 대형 주차장 부지에 몇 대만 주차돼 있었다. 주차장 절반은 아예 폐쇄돼 태양광 패널이 설치됐다. 건물 9~10층 높이에 좌우로 100미터가 넘는 옛 반도체 건물의 클린룸에선 반도체가 아닌 친환경 상추를 재배하고 있다. 후지쓰가 2014년에 텅 빈 반도체 클린룸을 재활용하는 방안으로, 친환경 실내 재배 사업에 진출한 것이다.
후지쓰 공장은 일본 경제의 장기 침체를 뜻하는 ‘잃어버린 30년’의 축소판이다. 1992년부터 30년 동안 연평균 0.73% 성장에 그친 일본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딥팩터 70%가 일본 불황 초기와 비슷
외환 위기 이후 처음으로 한국 경제 성장률이 3년(2021~2023년) 연속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38개 회원국 평균을 밑돌고, 내년부터 1%대 저성장이 가시화한다는 경고가 나오기 이전부터 한국 경제의 일본화를 경계하는 목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2015년에는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인구구조와 경제의 모든 관련 지표가 20년 시차를 두고 일본을 따라가고 있다”고 경고했다.
KDI 경고가 나온 뒤 10년 가까이 한국은 무엇을 바꾸었을까. 본지가 인구구조와 잠재성장률, 재정수지, 가계부채, 노동생산성 등 경제 성장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경제·사회 지표인 딥팩터(deep factor) 24개를 분석한 결과, 10개 지표(42%)가 일본의 ‘잃어버린 30년’ 불황 초기와 비슷한 것으로 나타났다. 합계출산율과 노년부양비 등 6개 지표(25%)는 일본보다 더 심각한 수준이었다. 딥팩터의 70% 가까이가 일본의 불황 초기와 비슷하거나 일본보다 심각하다는 뜻이다.
내년부터 2년 연속 한국 성장률이 1%대에 머물 것이란 한국은행의 경고가 현실화한다면 2024~2026년 한국의 성장률 추세는 일본 불황 초입인 1991~1993년과 유사해진다. 한 나라 경제의 기초 체력 수준으로 여겨지는 잠재성장률은 이미 한국이 2%로, 1990~1996년 일본(2.8%)보다 한참 더 낮다. GDP의 26.5%를 제조업이 차지해 제조업 경쟁력에 따라 경제 전체가 휘청이는 한국의 산업구조도 일본 1990년(26%)과 같다.
경제의 선순환을 뒷받침하는 인구 구조는 일본보다 심각한 수준이다. 지난해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0.72명으로, 1990년 일본(1.54명)의 절반 수준이다. 한국의 총인구는 이미 정점을 지났지만, 일본은 장기 불황에 들어간 지 한참 후인 2010년에야 내리막길을 시작했다.
가계와 기업 등 민간이 빚을 짊어지고 있는 모습도 닮았다. 지난해 GDP 대비 한국의 민간 부채 비율은 204.2%로, 일본 1994년(214.2%)과 같은 수준이다. 민간의 빚이 과다하면 사람들은 지갑을 열지 않고, 기업은 투자를 주저한다. 버는 사람은 줄고, 쓰는 사람은 늘어 재정 수요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2020년부터 한국 재정 수지는 본격적으로 적자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1993년부터 매년 재정 적자다.
◇”젊은 미국 경제의 길 따라가야”
한국의 선택지가 일본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은 세계 최대 경제 대국이지만, 1인당 GDP로 일본을 제친 것은 1998년(미국 3만2853달러, 일본 3만2423달러)부터다. 이후 궤적은 차이가 난다. 미국은 가속도를 붙여 8만달러를 터치했지만, 일본은 여전히 3만달러대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어냈을까.
미국 애리조나주(州) 피닉스 도심에서 17번 고속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약 30분 정도 올라가다 보면 약 400만㎡의 공장 부지가 펼쳐진다. 크레인이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공장 옆면에 붉은색 ‘TSMC’라는 글자가 선명한 간판이 달려 있었다. 세계 1위 파운드리 업체인 대만의 TSMC가 650억달러(약 90조원)를 들여 공장을 만드는 현장이다. 미국은 2022년 반도체 기업의 미국 내 투자를 늘리기 위해 반도체 생산 보조금 등 5년간 총 527억달러를 지원한다는 내용의 반도체법을 제정했다. 이에 따라 삼성 등 세계 굴지의 반도체 기업들이 보조금을 받기 위해 뛰어들었고, TSMC도 선제적 투자에 나선 곳 중 하나다. 거대한 몸집을 가진 미국 경제가 꾸준한 성장을 일구는 배경으로 신기술을 통해 세계 혁신 성장을 이끄는 기업들과 해외 기업의 적극적인 투자 유치를 이끌어내는 미국 정부의 노력이 꼽힌다. ‘혁신 주도’와 ‘투자 유치’라는 쌍두마차로 미국 땅에 새로운 산업 물결이 만개하도록 상황을 조성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피닉스시는 TSMC 공장 건설로 지역에 최대 8만개의 일자리가 창출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미국과 일본의 길이 엇갈린 이유가 미국이 지속 성장에 장애가 되는 구조적 요인들을 성공적으로 해결해 나갔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혁신 기업에 진입 장벽이 높지 않은 미국에서는 IT, 바이오, 인터넷 콘텐츠 분야의 신생 기업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을 해 왔다”며 “기득권을 쥔 대기업들이 신(新)사업을 주로 시도하고 있는 일본과는 달랐다”고 말했다. 김태유 서울대 명예교수는 “한국도 첨단 산업에 대한 압도적인 지원과 투자로 미국의 길을 걷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딥팩터(deep factor)
인구와 교육 수준, 지정학적 위치 등 경제성장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 가운데 특정 국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내재돼 있어 단기간에 변하기 힘든 요인들.
-아이즈와카마쓰(후쿠오카현)=성호철 특파원/피닉스=윤주헌 특파원/김정훈 기자, 조선일보(24-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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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일본化… 이러다 '제로 성장'에 갇힌다
한국 경제가 일본식 장기 불황의 문턱에 섰다. 내년(1.9%), 내후년(1.8%) 모두 GDP(국내총생산) 성장률이 2% 아래에 떨어지는 저성장 터널로 진입한다는 것이 한국은행 경고다. 석유 파동, 글로벌 금융위기, 코로나와 같은 외부 충격에 한국 경제 성장률이 2%를 밑돈 적이 그간 6차례 있었지만, 2년 연속은 처음이다.
지금 한국 경제는 일본의 ‘잃어버린 30년’ 초입과 비슷하다. 한국 등 신흥국에 제조업을 야금야금 내주던 일본은 자산 시장 거품 붕괴와 함께 1990년대 들어 저성장 국면에 진입했다. 일본 성장률은 1991년 3.5%에서 1992년 0.9%, 1993년 -0.5%로 급전 직하한 뒤 30년간 0%대 제로 성장에 갇혔다.
올해 우리나라 성장률 전망치(2.2%)는 일본 장기 불황 직전보다 낮다. 재정 적자와 가계부채 비율은 일본의 1990년대 초반과 닮았다. 일본이 한국에 추월당했듯, 산업 경쟁력에서 이웃나라 중국에 밀려나는 모습도 비슷하다. 인구구조의 고령화는 30년 전 일본보다 심각하다. 한국 경제가 저성장·저물가·저금리로 대표되는 일본화(Japanification)에 빠져 ‘신흥쇠퇴국(新興衰退國)’으로 전락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그동안 신성장 동력 산업을 찾고, 구조 개혁을 하고, 수출 의존 경제 구조를 바꾸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많다. 이해 갈등을 조정해야 할 정치권이 개혁을 외면하는 것도 불황 초입의 일본과 공통점이다.
1970~80년대 세계 2위 경제 대국이었던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을 버틸 체력이라도 있었다. 20년 넘게 축적한 자본으로 세계 최대의 채권 보유국이 됐고, 기축 통화를 보유하고 있었다. 김정식 연세대 명예교수는 “올해 기준으로 세계 14위인 한국 경제는 일본에 비해 축적한 자본이 부족하기 때문에 한번 저성장 터널로 들어가면 돌이키기 어렵다”고 했다.
☞일본화 (Japanification)
한때 애니메이션 등 일본 문화의 세계적인 확산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됐다. 하지만 1990년대 초반 일본이 버블 붕괴 이후 장기 불황에 빠진 뒤에는 장기간 저성장, 저물가, 저금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일본식 장기 침체의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김정훈 기자, 조선일보(24-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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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 대신 부동산… 돈 흐름도 30년전 일본 닮아
한국 가계 자산, 부동산에 묶여
내수 소비와 생산적 투자 줄어
증시로 자금 유입 감소 흐름도
경기도 과천시의 한 아파트단지 모습./ 오종찬 기자
경기 과천시에 사는 김모(59)씨의 재산은 지금 살고 있는 시가 15억원짜리 30평대 아파트 한 채가 거의 전부다. 그나마 집을 살 때 빌린 은행 대출금을 갚기 위해 매달 300만원씩 원금과 이자를 갚고 있다. 김씨 가족이 가진 금융 자산은 채 1억원이 되지 않는다. 김씨는 “대출금 상환이 벅차지만, 집값이 더 오를 수 있다는 기대 때문에 집을 팔거나 주택연금에 가입할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김씨처럼 자산이 부동산에 몰려 있는 것은 한국 가계의 일반적인 특징이다. 29일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와 한국은행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우리나라 가계의 비금융 자산 비율은 63.2%로 집계됐다. 미국(33.8%)이나 일본(37.2%)의 두 배에 가깝다. 영국(46.8%), 캐나다(46.3%), 프랑스(61.7%)보다 높다.
문제는 부동산에 쏠린 자산 구조가 한국 경제의 성장 잠재력을 잠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산이 부동산에 묶이면서 내수 소비와 생산적인 투자가 줄고, 국내 증시로 자금이 흘러들지 않기 때문이다. 기업들은 필요한 투자를 하기 어려워지고, 이는 경제성장을 저해하는 악순환을 만든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실장은 “기업으로의 자금 흐름이 장기간 막히면 산업 전반의 활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는 이미 30여 년 전 일본에서 나타난 모습과 판박이다. 1980년대 일본은 저금리, 수출 촉진 정책, 기술 혁신 등으로 최대 경제 호황기를 맞았다. 갈 곳 없는 돈이 쏠린 곳은 부동산이었다. 일본 부동산 가격은 1987년 한 해 동안에만 약 70% 폭등했다. 1990년, 일본 가계의 비금융 자산 비율은 63.7% 수준이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거품이 꺼지면서부터 발생했다. 일본 주택 가격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해 가계가 직격탄을 맞게 된 것이다. 일본의 ‘잃어버린 30년’ 배경엔 이런 부동산 버블이 있었다는 분석이 많다. 생산적 분야나 국내 기업에 자금이 유입될 수 있도록 증시로 돈의 흐름을 돌리지 않으면, 한국도 일본처럼 장기 침체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자금 흐름 면에서 한국이 장기 불황 초입의 일본보다 심각한 부분도 있다. 부동산 쏠림 현상에 더해, 한국 자금이 해외로 빠져나가는 것이다. 국내 투자자들이 부진한 국내 증시가 아닌 미국 주식에 투자하기 때문이다. 미국 S&P500, 다우평균 등은 연일 최고치를 경신하며 투자자들을 끌어모으는 반면, 코스피는 연초(2669.81)보다 7% 넘게 빠져 겨우 2500선에서 움직이고 있다. 서학개미(해외 주식에 투자하는 국내 투자자)들의 미국 주식 보관액은 이번 달 초 사상 처음으로 1000억달러(약 140조원)를 넘었다.
-한예나 기자, 조선일보(24-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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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크 재팬' 저자 "역동적인 한국, 변화 거부한 일본 실수 반복 말라"
'피크 재팬' 저자 글로서먼 인터뷰
미 동아시아 분석가 브래드 글로서먼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이란 정체 속에서 변화를 따라잡지 못했다. 한국인은 여전히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지만, 일본엔 더 이상 그런 미래 지향적 야망이 없다”고 했다. 사진은 글로서먼이 2015년 5월 워싱턴DC에서 열린 동아시아 세미나에 참석했을 때 모습./연합뉴스
“일본은 현대적이고 안전하고 깨끗해 보입니다. 그래서 일본·일본인에겐 ‘획기적으로 변해야 한다’고 설득하기가 어렵습니다. 일본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어쩌면 과거의 성공일지 모릅니다.”
‘피크 재팬(Peak Japan): 마지막 정점을 찍은 일본’의 저자 브래드 글로서먼은 최근 일본 도쿄에서 본지와 만나 “일본은 이제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를 알아내기 어려운 국가가 됐다”며 “한국엔 아직 역동성이 남아 있다. 한국이 일본의 실수를 배워 같은 길을 따르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2019년 일본에서 나온 책 ‘피크 재팬’(한국어판은 2020년 출간)은 미국 출신 글로서먼이 1990년대부터 도쿄에서 기자·연구자로 살면서 수집한 인터뷰와 자료를 토대로 했다. 한때 세계 2위 경제 대국이었던 일본이 1990년대 자산 거품 붕괴,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같은 안팎의 큰 충격을 받으면서도 변화·적응하지 못하는 원인을 분석한 책이다. 경제·인구·사회구조가 일본을 닮아간다는 한국을 떠올리게 하는 내용도 적지 않다.
日, 변해야 한다는 위기감조차 없어
-일본은 왜 변화를 멈췄을까.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이라는 기나긴 정체를 거치면서도 변화하지 못했다. 세계는 빠르게 변하는데 일본은 그저 기존의 궤도에 머무르기만 하니 결국 뒤처졌다. 일본의 가장 큰 문제는 변화가 필요하다는 위기감 자체가 없다는 점이다. 도쿄에 살다 보면 안다. 일본은 (높은 평가를 받은) ‘미슐랭 스타’ 식당이 수두룩한 효율적이고 살기 좋고 안전한 나라다. 이런 현실이 ‘이대로 만족한다’는 일본인의 사고방식과 태도를 만들어낸 측면이 있다. 이 책을 낸 후에도 ‘우리(일본인)가 왜 변해야 하죠’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일본이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우선, 일본을 ‘실패한 나라’라고 부르긴 조심스럽다. 틀림없이 (한때) 성공은 했지만 정점을 찍고 내려오는 국가라고 표현하고 싶다. 과거의 성공은 사실 쉬웠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을 바라보고 자동차·철강과 같은 산업을 모방하기만 하면 됐기 때문이다. 한국도 비슷하지 않았나. ‘해야 할 일’에 대한 명확한 지표가 있었다. 자동차·철강 분야는 미국을 이기기도 했다. 그런데 그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길을 찾지 못했다. 제대로 고민하지도 않았고 ‘20세기식 방식’을 지속했다.”
글로서먼은 “20세기의 성공 이후 일본은 어려운 변화보단 안주(安住)를 택했다.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으면 도전을 하지 않았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세계 경제가 디지털 위주로 재편될 때 일본이 위기감조차 느끼지 않고 뒤처져 ‘갈라파고스’ 신세가 된 일을 사례로 들었다. 그는 “21세기 디지털 경제와 20세기 아날로그 시스템 사이엔 큰 간극이 존재한다. 일본은 이에 제대로 대처하기보다는 현실을 인정만 해버리고 말았다”고 했다. 그 원인 중 하나로 “정치·경제가 모두 과거의 기득권에 사로잡혀 버렸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정치도 일본 쇠퇴의 원인이란 뜻인가.
“최근 일본 정치는 줄곧 자민당이 장악해 왔다. 내가 인터뷰한 사람들은 ‘자민당이 교훈을 얻지 못하고 오만해지는 것’을 최악의 상황이라고 말했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일본 경제의 부흥을 꿈꿨지만 기득권 정치인이었던) 아베 신조 전 총리의 퇴임 후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리더십이 등장하기는커녕 낡은 정치가 다시 돌아왔다. 일본은 인구 감소와 국가 부채 증가, 방위비 부담, 고령자 문제 등 실질적인 위기에 동시다발적으로 직면했다. 이런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강한 정치적 리더십이 필요하지만 보이지 않는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고령자 증가, 인구 감소 등의 문제는 오랫동안 진행되지 않았나. 일본은 왜 이를 해결하지 못했나.
“일본에서 처음으로 인구 감소 경고가 나온 것은 1970년대다. 이후 한동안 일본은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뒤늦게 노인 복지, 저출산 대책 등 (인구문제로 인한) 지출을 계속 늘리는 가운데 정부가 세금을 올리지 않으니 국가 부채까지 가파르게 늘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채비율이 200%를 넘어 지금도 계속 증가한다. 일본 경제학자들에게 물었더니 ‘빚을 못 갚게 되기 전까지 계속 국가 부채를 늘려도 된다’고 하던데, 어느 순간 일본이 빚을 갚지 못하는 ‘도산’의 시점이 올 수 있다고 본다. 그게 내일일지도 모른다.”
일본 증시 활황, 실물경제와 괴리
-일본 증시는 그래도 활황이다. 재(再)성장의 시그널 아닐까.
“닛케이평균(일본 대표 주가지수)이 일본의 미래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주식시장은 때론 실제 경제와 단절된다. 지금 주식시장에서 돈을 버는 이들은 엔저(低) 기회를 포착한 외국인 투자자들이 대부분이다.”
-한국도 일본처럼 ‘정점’을 지나 쇠퇴할 가능성이 있을까.
“한국은 고립된 일본보다는 훨씬 국제화됐다. 한국인은 여전히 세계시장에서 경쟁하고 앞을 내다보며, 다른 나라의 모델에서 배우려고 한다. 특히 한국의 젊은이들은 훨씬 국제적이다. 한국에 정치 스캔들이 많을지는 몰라도 중국·일본과 달리 정권 교체가 자주 되고 권력의 오만이 덜하다는 점도 상대적 강점이다.”
인구 감소 한국, 잠재적 해법은 통일
-저출산 등 인구문제는 한국이 최근 더 심각한데.
“한국도 분명히 인구학적인 문제가 있지만 일본은 못 가진 잠재적 해결책이 있다. 북한과의 통일이다. 김정은 정권이 옛 소련처럼 갑자기 붕괴한다면 2500만명의 새로운 시민을 확보할 수 있다. 물론 이는 먼 미래의 가정(假定)이다. 역시 핵심적인 해법은 여성들이 가족을 가질 수 있도록, 선택지를 늘려주는 것이다. 주부, 워킹 맘(자녀가 있는 취업자), 전문직 종사자 등 여성이 어떤 선택을 하든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사회 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
-한국의 문제는 무엇일까.
“한국이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나라’라는 인식, 즉 국제 무대에서 한국이 약하고 주체성이 약하다는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한국이 적어도 대부분의 한국인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더 큰 힘과 많은 자원을 가진, ‘돌고래’ 같은 나라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혁신을 장려하기 위해, 기업인에게 과도한 처벌 없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시도할 기회를 더 열어줄 필요가 있다. 영화·음악 등의 분야에서 엄청난 창의성을 발휘 중인 한국 문화의 역동성이 대부분 재벌·대기업의 틀 안에서 나온다는 점도 문제다. 더 많은 스타트업(신생 기업)이 활동할 필요가 있다.”
☞브래드 글로서먼과 피크 재팬
브래드 글로서먼(Brad Glosserman)은 미국의 동아시아 분석가다. 1991년 마이니치신문 기자로 일하며 일본에 체류하기 시작해 이후 일본을 연구·분석해온 일본통이다. 하와이 호놀룰루에 있는 전략국제연구소(CSIS) 퍼시픽 포럼에서 16년간 근무하며 연구 책임자와 선임 고문을 역임했다. 일본 다마대 룰형성전략연구소(CRS) 부소장과 객원교수로도 일했다.
’피크 재팬(Peak Japan) : 마지막 정점을 찍은 일본’은 한때 전 세계 부(富)의 16%를 차지했지만 정점을 찍고 쇠락하는 일본의 정치·경제·사회를 분석한 책이다. 일본 특유의 정치 리더십과 자본주의 메커니즘, 조직화된 기득권은 과거에는 일본 발전의 원동력이었지만 지금은 발목을 잡는 요인이라는 분석이다.
-도쿄=성호철 특파원, 조선일보(24-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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