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을 주저앉힌 헌법의 무게]
[軍人들에게도 악몽이었던 그날 밤 ]
[비상계엄이 짓밟은 제복의 명예… 장병들이 무슨 죄가 있나]
[분열된 소셜미디어]
계엄을 주저앉힌 헌법의 무게
[오늘과 내일]
4일 새벽 비상계엄 해제를 위해 의원들이 모인 국회 본회의장 화면을 지켜보면서 ‘곧 계엄군이 들이닥쳐 난장판이 되리라’고 걱정한 이들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표결은 순탄하게 진행됐고 계엄은 실패로 끝났다.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한편으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의아했다.
이번 계엄 실행을 위해 최소 1500명의 장병이 동원됐다는 점이 밝혀졌다. 게다가 특수전사령부 산하 707특수임무단과 제1공수특전여단, 수도방위사령부 군사경찰특임대 등 내로라하는 최정예 부대가 투입됐다. 방첩사령부, 정보사령부 요원들과 경찰도 가세했다. 국회의 표결을 막기에 충분한 병력이었다.
게다가 지금까지의 수사와 증언에 따르면 윤석열 대통령은 특전사, 수방사, 경찰에 수차례 ‘의원들을 끌어내라’고 독촉했다. 김용현 당시 국방부 장관은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항명죄로 다스린다’며 엄포를 놨다고 한다. 대통령과 장관의 성화에도 장병들은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전 계엄들과의 결정적인 차이였다.
‘항명죄’ 엄포에도 움직이지 않은 장병들
1980년 광주의 계엄군 중 상당수는 한강 작가가 적었듯 “죄의식도 망설임도 없는” 잔인함을 보였다. 이런 부당한 행위를 저지른 군인들은 강압, 인식론적 한계, 축소된 책임 등 세 가지 범주에서 변명을 내놓는다고 제프 맥머핸 옥스퍼드대 교수는 분석한다. 군인으로서 어쩔 수 없었다, 잘못된 행동인 줄 몰랐다, 또는 정신적 문제가 있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과거 계엄군들의 생각은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군인이라면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2024년 서울의 계엄군은 아무리 명령이라도 국민을 향해 총부리를 겨눠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인식했고 실천했다. 여기에는 시대의 변화와 함께 헌법의 힘이 작용했다고 본다.
윤 대통령 스스로 “예산 폭거” “입법 독재” 등을 명분으로 내세운 것처럼 이번 계엄이 정치적 이유에서 비롯됐다는 점에는 이견이 거의 없다. 헌법상 계엄 선포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 또 계엄 선포권의 근간이 되는 국군 통수권은 헌법이 정한 대통령의 핵심 권한이지만 “헌법과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해” 행사돼야 한다고 헌법에 적혀 있다.
헌법상 군 통수권의 한계와 군의 중립성
더욱이 헌법에는 “국군의 정치적 중립성은 준수된다”고 명시돼 있다. 종합하면 대통령이 정치적 목적으로 군을 움직여 중립성을 훼손하는 것은 헌법이 용납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된다. 지금은 ‘군의 정치적 중립’이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실제론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개정된 현행 헌법에 새로 들어간 조항이다. 그전까지 11차례 계엄이 선포되고 3차례 위수령이 발동되면서 국군이 국민을 해치는 비극이 벌어졌다. 군부독재하에서 고통받은 이들은 셀 수 없이 많다. 이들의 피와 눈물이 쌓여 헌법에 반영됐다.
계엄령에 따라 긴급 출동한 장병들이 헌법을 떠올릴 겨를이 있었겠냐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런 헌법 조항을 세세하게 아는 이들도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현장의 군인들은 헌법에 부합하는 행동을 했고, 그 덕분에 헌법 규정에 따른 계엄 해제가 가능했다. 자연스럽게 헌법이 작동한 결과가 됐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긴 세월에 걸쳐 헌법의 가치가 개개인의 의식에 스며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무게는 대통령이 앞장선 계엄을 주저앉힐 만큼 무겁다. 이제 군을 동원해서 권력을 쥐어보겠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세상이 됐다. 혼란과 충격의 와중에 건진 희망이다.
-장택동 논설위원, 동아일보(24-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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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人들에게도 악몽이었던 그날 밤
육군 특수전사령부 707 특수임무단 대원들의 시간은 지난 3일 밤에 멈춰있다. 부대원 A씨는 “새벽에 부대에 복귀해서 ‘이게 뭐지’라고 100번 넘게 중얼거렸다”고 했다. 국회 비상계엄에 투입됐던 특전사 대원들은 TV와 소셜미디어에서 자신들의 모습이 계속 방영되는 모습을 보며 고통받고 있다고 한다. “온종일 같이 밥 먹고 훈련하며 부대끼는 동료들이라 복면을 써도 눈만 봐도 누가 누군지 안다. 너무 괴롭다”고 A씨는 말했다.
707 대원들은 3일 오후 11시 48분쯤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운동장에 착륙하기 직전에야 목적지가 국회라는 사실을 알았다. A씨는 “국회에 쳐들어온 북한군을 상대하는 줄 알았지, ‘국회 해산 작전’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했다. 완전 무장한 대원들은 국회 뒷문으로 진입하다가 집기를 쌓아두고 농성하는 사람들이 북한군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임을 깨달았다. “너희는 반란군이야”라는 국회 직원들과 보좌진의 말에 이들의 마음은 무너졌다.
1공수여단 대원 B씨는 “707은 그나마 헬기에서라도 목적지를 알았지,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보니 국회였다”고 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어머니뻘 여성이 울면서 달려들었다. “계엄군! 반란군! 절대 국회 못 들어간다!” 순간 B씨의 머릿속은 하얘졌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지?’ 다른 버스에 탄 대원들은 ‘인간띠’로 출구를 막아선 시민들 때문에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차라리 날 밟아 죽여라!”며 버스 바퀴 앞에 드러누워 있었다. 1공수여단 대원들은 그날 밤의 아우성에 대해 “아직도 꿈같다” “악몽을 꾼 기분”이라고 말한다고 한다.
국회 본회의에서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통과된 시각은 4일 오전 1시 1분. 그러나 특전사 대원들은 한동안 국회를 떠나지 못했다. 성난 시민들이 몰려들어 비난과 야유를 쏟아내며 군용 차량을 막아섰다. “복귀할 수 있게 해주세요”라는 한 군인에게 시민들은 “복귀도 못 할 걸 뭐 하러 오냐고!”라고 외쳤다. “국민 여러분 한 번만 도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라고 두 손을 모으고 간청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국회의사당을 빠져나가는 707 대원들을 붙잡고 국회 보좌진은 “지휘관이 누굽니까” “소속 밝혀달라”고 물었다. 대원들의 어깨는 축 처져 있었다.
그날 밤 우리가 본 젊은 대원들은 최저임금 수준의 월급을 받으며 열악한 숙소에 기거하면서도 국민과 나라를 지킨다는 자긍심 하나로 버텨온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군인들이다. 목적지가 평양 주석궁이든 테러범 소굴이든, 목숨을 초개처럼 내던지고서라도 임무를 완수하는 충성스러운 대한민국 군인들이다. 그런 군인들이 민간인 대상 작전에 투입됐고 시민들의 분노와 원망을 온몸으로 받아야 했던 것이다. 지휘관이라면 몰라도, 이 젊은 군인들은 보듬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도 그날 밤은 악몽이었다.
-장윤 기자, 조선일보(24-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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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계엄이 짓밟은 제복의 명예… 장병들이 무슨 죄가 있나
비상계엄 당시 국회에 투입됐던 특전사 707특수임무단의 김현태 단장(대령)이 9일 오전 기자회견을 자청해 “부대원들은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에게 이용당한 피해자”라며 “죄가 있다면 (저 같은) 무능한 지휘관의 지시를 따른 죄일 뿐”이라고 했다. 이어 “어떠한 법적인 책임도 모두 제가 지겠다. 잘못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 스스로 죄를 물어 사랑하는 군을 떠나겠다”고 했다.
국군 최정예 특수부대의 지휘관이 기밀 사항인 실명과 얼굴까지 드러내며 공개 발언을 한 것은 부적절한 초유의 일이다. 하지만 김 단장이 “부대원들은 죄가 없다”고 눈물로 호소할 정도로 일선 장병들의 사기 저하는 심각한 수준이다. 비무장 자국민을 진압하라는 명령으로 명예에 치명상을 입은 데다 당시 병력 투입을 지시했던 사령관들이 야당 국회의원의 유튜브에 나와 “상부 지시를 따랐을 뿐”이라며 변명을 늘어놓자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졌다. 초급 장교들 중에는 전역을 결심하고 자격증 취득을 준비 중인 이들도 있다고 한다. 일선 경찰들 사이에서도 시민들의 싸늘한 시선에 “더 이상 경찰 방패를 들고 싶지 않다”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군경을 정치적으로 동원한 계엄 사태는 군경이 독재 정권에 부역해 온 흑역사를 청산하고 믿음직한 국가 방위와 인권 수호 기관으로 거듭나기 위해 수십 년간 기울여 온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군 최고통수권자를 비롯해 군경 지휘부가 줄줄이 내란 혐의로 수사 대상에 오르면서 안보와 치안 공백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작가 한강이 말했듯 그릇된 명령과 올바른 양심 사이에서 “고통을 느끼며 해결책을 찾으려” 했던 젊은 제복들에게 위로와 신뢰를 보낸다. 누구도 그들에게 손가락질을 해선 안 된다.
-동아일보(24-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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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된 소셜미디어
이집트인 와엘 고님은 구글에서 아랍권을 담담하던 컴퓨터 공학자였다. 2010년 그는 페이스북에서 이집트 경찰의 부패를 폭로하고 고문당하고 숨진 칼레드 사이드라는 청년의 시신 사진을 보고 ‘우리는 모두 칼레드 사이드’라는 페이스북 홈페이지를 개설했다. 고님은 여기에 2011년 1월 카이로 광장에 집결해서 독재・부패 정권에 항의하자고 호소하는 글을 올렸다. 100만 명이 그의 메시지에 호응했고 10만 명이 넘는 시민이 집회에 오겠다고 응답했다. 이후 이어진 시위와 저항은 결국 독재자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을 사임케 했다. 고님은 ‘아랍의 봄’이 페이스북에서 시작했다고 평가하며 “사회의 해방을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인터넷”이라고 선언했다.
지난 12월 3일 밤 갑자기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을 때, 많은 시민이 이 소식을 접하고 소셜 미디어를 이용해 비판과 분노를 공유했다. 야당 당수는 유튜브 생중계에서 시민들에게 여의도로 모일 것을 호소했으며, 의원들이 담을 넘어 국회에 들어가는 과정도 생중계됐다. 시민들은 출동한 계엄군에게 휴대전화를 들이대고, 이들이 유리창을 깨고 국회로 진입하고 시민과 몸싸움하는 과정을 찍어 공유하고 유튜브에 중계했다. 계엄 철회를 의결한 국회의장의 유튜브에는 60만명이 접속해서 환호를 올렸다.
무바라크의 사직 후에 출범한 이집트의 새 정권은 얼마 못 갔고, 군부가 다시 정권을 장악했다. 시민들은 종파와 이념에 따라 분열되어 서로를 비난하고 싸우기 시작했다. 이런 증오와 폭력의 메시지를 전파하고 증폭한 것도 페이스북이었다. 페이스북은 빠르게 분열과 싸움을 북돋는 거짓 정보와 선동으로 넘쳐흘렀고, 고님은 침묵했다. 2016년에 테드(Ted) 강연에 나타난 그는 “사회의 해방을 위해서 인터넷부터 해방시켜야 한다”고 자신의 견해를 정정했다. 소셜 미디어가 촉발제 역할을 했지만, 독재 정권을 종식한 것은 위험을 무릅쓰고 거리고 나가 저항한 시민들의 결집된 힘이었다. 이런 결집이 쪼개지면서 소셜 미디어 역시 파국적으로 분열됐다. ‘서울의 겨울’을 종식하고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길 원하는 우리 모두가 한 번은 새겨야 하는 교훈이다.
-홍성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 조선일보(24-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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