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년을 을씨년스럽게 열며]
[“정의 아니면 불의”… 이분법적 논리가 분열 키운다]
을사년을 을씨년스럽게 열며
[임용한의 전쟁사]
올해는 을사년이다. 작년에 을사사화, 을사보호조약을 언급하며 정치적으로 불길한 일이 생길 것 같다고 하는 괴담이 돌더니 계엄 사건이 터졌다. 올 상반기는 정치적으로 격동의 시간이 펼쳐지게 됐다. 이 결과가 어떻게 되든 정치·경제적 영향은 오래갈 것 같다. 오래간다기보다는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혹은 고통스러운 방향이든 중요한 변화의 축이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필 뱀의 해이다 보니 미로 같은 세상과 끝을 알 수 없는 결과가 더욱 상징적이다. 우리는 뱀의 몸통과 같은 구불구불한 질곡을 지나 밝은 세상으로 가고 있는 것일까? 이 뱀의 입으로 들어가는 중일까?
뱀은 우리 문화에서는 사랑받지 못하는 동물이다. 서구 문명의 절반인 기독교 문명에서도 뱀은 사악한 존재다. 그러나 나머지 절반 헬레니즘 문화에서 뱀은 의외로 존중을 받는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는 신성한 뱀이 새장 안에서 살았다. 의학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상징은 뱀이 감겨 있는 지팡이이다. 구급대의 표식이 된 헤르메스의 지팡이 케리케이온도 두 마리의 뱀이 감고 있다. 아테네 여신상의 발아래 청동뱀이 놓여 있기도 하고, 폼페이 로마 주택의 부엌 벽화에는 빠짐없이 뱀이 그려져 있다.
이중적인 의미도 있다. 뱀의 지혜는 교활함을 뜻한다. 갈라진 혀는 정치인과 사기꾼의 혀를 상징한다. 사람들은 교활함을 미워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려면 교활해야 한다고 말한다. 상대의 교활함은 악이고 우리의 교활함은 능력이다. 갈라진 혀와 내로남불은 이젠 우리 사회에서는 정의가 되었다.
뱀과 을사라는 단어에는 죄가 없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의 생각과 손이 만든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거리에서 한탄하던 상황이 우리 시대에도 펼쳐지고 말았다. 이 좁은 협로를 뱀처럼 뚫고 나가는 2025년이 되길 바란다.
-임용한 역사학자, 동아일보(25-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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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아니면 불의”… 이분법적 논리가 분열 키운다
정치-사회적으로 대립 구도 심화… 극단적 논리가 갈등의 씨앗으로
온라인은 ‘현대판 아고라’ 역할… 혐오 담긴 의견도 빠르게 재생산
내 생각만 옳을까 돌이켜보고, 다른 의견 수용하며 자정작용을
사회 양극화가 심해지고 정치는 이분법적 사고로 나뉜 이들이 혐오의 발언을 쏟아내며 갈등을 빚고 있다. 정치 사상가 해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 중 하나로 ‘정치적 삶’을 꼽으며 타인과의 상호 작용을 통한 건전한 공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중용(中庸)이라는 유학 경전에 ‘순임금은 묻기를 좋아하고, 천근한 말이라도 살피기를 좋아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구절 뒤에는 ‘양극단을 모두 살펴 가장 적절한 것을 백성에게 적용했다’는 말이 이어집니다.
순임금은 태평성대를 이룬 성군으로 손꼽힙니다. 순임금의 이런 태도가 그의 시대를 태평성대로 이끌지는 않았을까요. 오늘날처럼 양극단에 서 있는 사람들이 첨예하게 대립할 때는 이 중용의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 정의와 불의, 이분법적 게임의 문제점
세상이 혼란스러울 때는 불안을 틈타 혐오의 말들이 바이러스처럼 퍼집니다. 혐오의 말은 정의 구현이라는 탈을 쓰고 나타나기도 합니다. 독일의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한 명분도 정의 구현이란 탈을 쓰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정의로, 상대방을 불의로 규정한 뒤 불의하다고 규정한 자에 대한 혐오를 조장했습니다. 나치는 유대인에 대한 혐오감을 조성한 뒤 이를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이용했습니다. 나치에 동조했던 사람들이 그러했듯 혐오의 말에 쉽게 동조하는 사람은 타인의 욕망 실현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정의와 불의, 이분법적 논리에 동조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정의는 실현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분열을 더욱 극심하게 만들 뿐입니다. 이분법적 게임의 결과 승패가 갈리게 되면 겉으로는 승자가 패자를 복종하게 만드는 모습을 만들어 냅니다. 하지만 승자가 패자의 마음까지 얻기엔 한계가 있습니다. 게다가 이분법의 게임에서 승자는 누군가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그 깊은 상처는 또 다른 갈등의 씨앗이 될 뿐입니다.
● 정치적 공론장 내 상호작용
혐오의 말들이 빠르게 번진다는 것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공론화 과정에서 자정 작용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치 사상가 해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 중 하나로 정치적 삶을 꼽으며 공론장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에서 이루어진다고 봤습니다. 공적 영역에서의 활동은 정치적 행위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상호작용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회의 장소였던 아고라는 대표적인 공론장입니다. 아고라에서 그리스인들은 자유롭게 의견을 표현하고 토론하며 정치적 공론장을 열었던 것입니다.
아고라에서 활동했던 인물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이 바로 소크라테스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스스로 모른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란 말입니다. 이는 그리스 정치인들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모른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야말로 진리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라고 봤습니다.
스스로 모른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공론의 영역에서 어떻게 남들과 상호작용을 할까요. 이들은 자기 자신이 아는 것을 표현하는 데 힘쓰진 않을 것입니다. 자신이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남에게 묻고 또 들으려고 할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순임금이 행했을 법한 공적 영역에서의 활동을 추론해 봅시다. 잘 묻고, 잘 들으며, 잘 살피는 것이 순임금의 활동이지 않았을까요? 순임금의 지혜란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혐오의 길로 빠지지 않는 길
현대사회에서 대표적인 공론장 중 하나는 온라인입니다. 현대판 아고라인 온라인에도 그리스 시대처럼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사람들은 혐오의 말들을 재생산하기도 합니다. 온라인에서 잘 묻고, 잘 들으며, 잘 살피는 곳이 있는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온라인의 정치적 공론장은 팬덤을 기반으로 형성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팬덤을 기반으로 한 상호작용은 편협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의와 불의를 구분하고 불의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는 사건들을 접할 때마다 그들이 말하는 정의에는 사적 분노나 사적 복수심이 포함돼 있는 건 아닐까라는 의심이 듭니다. 또 공적인 정의 구현을 목표로 한다 해도, 그 과정에서 혐오를 조장한다면 그 역시 정의롭다 말할 수 있을까요. 다른 사람의 욕망도 나의 욕망만큼 중요하다는 것, 나의 판단과 가치관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야말로 상호 혐오의 길로 빠지지 않게 하는 길이라 생각됩니다.
-박권주 진주 대아고 교사, 동아일보(25-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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