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時事-萬物相]

[우크라이나 종전 협상과 부패 스캔들] [돈바스 국경 긋기] ....

뚝섬 2025. 11. 24. 10:19

[우크라이나 종전 협상과 부패 스캔들]

[돈바스 국경 긋기]

['별의 순간'을 잡은 옐친이 시장 경제 개혁에 성공했더라면… ]

 

 

 

우크라이나 종전 협상과 부패 스캔들

 

존엄성을 상실하느냐, 아니면 동맹(미국)을 잃느냐 기로에 섰다.”(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이번 안이 최종 평화적 해결의 기초가 될 수 있다.”(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최근 제시한 종전안에 대한 양국 정상의 반응은 이렇게 달랐다. 이번 안이 얼마나 러시아에 유리한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우크라이나 내에선 ‘사실상 항복 문서’라는 불만이 들끓고 있다.

▷28개 항으로 돼 있는 종전안의 핵심은 루한스크와 도네츠크를 합친 돈바스 지역을 “사실상 러시아 영토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전쟁 초반부터 돈바스는 최대 격전지였다. 우크라이나 국토의 8%를 차지하는 돈바스는 석탄, 철강 등 원자재가 풍부한 산업의 중심지이자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전략적 요충지다. 러시아는 주민의 약 40%가 러시아계라는 점을 앞세워 돈바스를 점령하는 데 주력했고, 우크라이나는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런 지역을 고스란히 넘겨주라는 건 우크라이나인들에겐 참기 어려운 굴욕이다.

종전안에는 “우크라이나가 나토(NATO)에 가입하지 않는다는 점을 헌법에 명시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나토의 동진(東進)에 결사반대하는 러시아에 맞서 젤렌스키 정부가 나토 가입을 추진한 게 전쟁을 촉발한 직접적인 계기였는데, 미국이 러시아 손을 들어준 것이다. 종전안에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재침공하면 군사적 대응과 국제적 제재를 복원한다’ 등의 내용이 있긴 하지만 손에 잡히는 안전 보장 방안은 없다. 뉴욕타임스의 지적대로 “전쟁 중단 외에는 우크라이나에 별 이득이 없는” 협상이다.

 

▷트럼프가 이렇게 일방적인 종전안을 들이밀 수 있었던 건 전시에 벌어진 역대급 부패 스캔들로 인해 젤렌스키 정부가 흔들리고 있어서다. 국영 원자력기업에서 발생한 1억 달러(약 1470억 원) 규모의 횡령 사건을 주도한 젤렌스키의 한 측근은 집에 황금 변기를 둘 정도였다고 한다. 전직 부총리도 이 과정에서 약 20억 원을 챙긴 혐의로 구속됐다. 4년째 이어지고 있는 전쟁으로 전방 지역 주민 3분의 1은 먹을 것도 부족한 판에 고위층은 뒷돈 잔치를 벌였으니 국민이 분노하고 국론은 갈라질 수밖에 없다. 이런 약점을 트럼프가 파고든 것이다.

이번 종전안의 초안은 트럼프의 사위 재러드 쿠슈너와 푸틴의 최측근이 만들었다고 로이터통신 등이 전했다. 미국도 자국의 이득을 챙기는 걸 잊지 않았다. 해외에서 동결된 러시아 자산 1000억 달러를 우크라이나 재건에 투입하되 그 수익의 절반은 미국이 가져가기로 했다. 반면 민간인만 약 5만 명이 죽거나 다친 피해국 우크라이나는 종전 협상에서는 소외되는 형국이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냉혹한 국제사회에서 집안 단속조차 제대로 못 한 약소국이 설 자리는 좁아 보인다.

 

-장택동 논설위원, 동아일보(25-11-24)-

______________

 

 

돈바스 국경 긋기

 

프랑스 북부 알자스-로렌은 원래 독일의 모태였던 신성로마제국 영토였다. 하지만 17세기에 프랑스가 무력 점령하며 두 민족이 섞여 살게 됐다.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질 때마다 주민의 국적도 바뀌었고 서로를 추방했다. 1871년 보불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승리하자 독일 땅이 됐고 1차 세계대전 이후엔 승전국 프랑스 영토가 됐다. 2차 대전 초기에는 독일이, 전쟁이 끝난 뒤 다시 프랑스가 차지했다. 이곳의 풍부한 지하자원이 다툼의 배경이었다. 알자스-로렌에만 프랑스 철광석의 90%가 매장돼 있다. 

 

▶옛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업지대인 주데텐란트도 독일인이 이주해 오며 분쟁의 씨앗이 됐다. 20세기 초 체코 인구가 1300만명이었는데 주데텐란트에만 독일계 300만명이 정착했다. 히틀러가 ‘위대한 독일 재건’을 선언하며 주데텐란트를 합병하려 들자 이곳의 독일계 주민들이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이를 지켜본 체코인들 뇌리에 독일계는 매국노 배신자라는 인식이 자리 잡았고, 2차 대전 후 주데텐란트에서 독일인이 쫓겨나는 계기가 됐다.

 

우크라이나에선 러시아와 마주 보는 돈바스가 그런 곳이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석탄·철강 산업이 일어나자 러시아인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훗날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되는 흐루쇼프도 러시아를 떠나 돈바스의 금속 공장에서 청년기를 보냈다. 돈바스 내 러시아계 인구는 1920년대 60만명에서 1950년대 250만명으로 폭증했고 러시아계 비율도 40%까지 치솟았다. 돈바스가 오늘날 친러 성향을 띠게 된 이유다. 우크라이나의 EU 가입을 반대하며 친러 정책을 펴다가 쫓겨난 야누코비치 전 대통령도 돈바스 출신이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러·우 전쟁을 끝내는 조건으로 돈바스 전역을 러시아에 넘기라고 요구했다. 트럼프도 푸틴 편을 들었다. 러시아는 강대국이고 이미 돈바스 대부분을 점령했다는 이유를 들었다. 반면 유럽 국가들은 돈바스에 러시아계가 많이 산다는 이유로 2차 대전 이후 그어진 국경을 흔들어선 안 된다고 반대한다.

 

국경이 새로 그어질 때마다 비극이 반복되고 새로운 분쟁의 빌미가 된 것이 유럽사다. 2차 대전 이후 승전국들은 폴란드와 독일 사이에 흐르는 오데르강과 나이세강을 국경으로 정하며 강 동쪽의 독일 땅을 폴란드와 소련에 줬다. 두 강의 오른쪽에 살던 독일계 1000만명이 삶의 터전에서 쫓겨났다.

그 과정에서 최대 100만명이 학살·굶주림·질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런 비극이 돈바스에서 재연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김태훈 논설위원, 조선일보(25-08-25)-

______________

 

 

'별의 순간'을 잡은 옐친이 시장 경제 개혁에 성공했더라면…

 

소련이 갑자기 붕괴할 리 없고 푸틴도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에~'로 가상의 시나리오 그려보는 '반사실적 사고' 필요해

 

34년 전 1991년 8월 19일에 있었던 일이다. 크림반도에서 여름휴가 중이던 소련 최고 권력자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갑작스럽게 별장 안가의 모든 전화가 끊긴 사실을 확인한다. 그는 측근이라 믿었던 KGB 의장 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를 애타게 찾았다. 하지만 정작 그 KGB 의장이 주도한 쿠데타가 진행 중이었다. 이른바 소련의 1991년 ‘8월 쿠데타’다.

 

KGB 의장을 포함한 공산당 보수파가 주도했던 쿠데타는 불과 사흘 만에 실패로 끝났다. 고르바초프의 정적이었던 보리스 옐친은 모스크바 시내로 들어온 탱크에 올라선 장면이 소련을 넘어 전 세계로 퍼지면서 러시아 민주화의 상징이 되었다. KGB에 의해 억류되었던 고르바초프가 모스크바로 돌아왔을 때, 이미 권력은 옐친에게 넘어간 뒤였다.

 

실패한 쿠데타는 역설적으로, 국제 정세에 어둡고 공익보다는 사익을 추구한 데다가 알코올 중독자이기까지 했던 옐친에게 ‘별의 순간’을 안겨줬다. 소련은 쿠데타 실패 이후 4개월 만에, 여전히 냉전기 적대국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던 미국 국무부나 CIA 최고위직이 당황할 정도로 갑작스럽게 붕괴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세계사적 의미와는 별개로 소련 해체는 한때 제국 시민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던, 그리고 최소한 밥은 굶지 않았던 소련 시민에게는 재앙과도 같은 일이었다. 옐친이 주도했던, 연방을 갈가리 찢어서 민족별로 독립 국가를 꾸리고 민주화의 흥에 취한 순간은 잠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위태로웠던 경제가 망가지면서 금세 밥을 굶는 일이 벌어졌다.

 

숫자만 들여다봐도 참담하다. 연방 해체 후 1990년대에 러시아 인구의 대략 70~80%가 빈곤층으로 몰락했다(1980년대는 30%). 러시아인의 기대 수명은 1990년 69세에서 1994년 64.5세로 줄었다. 남성의 경우는 64세에서 58세로 급락했다. 1990년대 말 러시아 아동 인구는 1990년보다 370만명 감소했고, 노동 연령 남성 가운데 340만명이 조기 사망했다. 

 

푸틴(왼쪽)이 자신의 러시아 대통령 취임 첫해인 2000년 옐친 전 대통령을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로이터연합뉴스

 

반면, 과거 소련이 가지고 있었던 유전(油田)을 포함한 자산과 독보적이었던 최첨단 과학 기술 역량 대부분은 외국 자본과 엉겨 붙은 국내의 투기꾼, 또 그들과 구분하기 어려운 마피아 같은 범죄 집단의 소유가 되었다. 이렇게 나라가 결딴나는 데도 옐친은 술만 마셔댔다. 결국, 최소한 밥은 굶지 않았던 과거를 그리워한 시민의 마음을 파고들면서 8월 쿠데타 때 옐친의 편에 섰던 블라디미르 푸틴 같은 독재자가 등장했다.

 

지식인도 재앙을 피하지 못했다. 모스크바로 돌아온 고르바초프에게 옐친의 손을 잡고 소련 해체를 수용하라고 당부했던 민주파 여성 지도자 갈리나 스타로보이토바. 양심적인 지식인이자 현실 감각이 있었던 그조차도 1990년대 조국에서 어떤 지옥도가 펼쳐질지 몰랐다. 7년이 지난 1998년 11월, 그 역시 청부 살인범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당하며 역사의 희생양이 되었다.

 

소련 현대사 연구자 블라디슬라프 주보크가 2021년에 펴낸 ‘소련 붕괴의 순간’(위즈덤하우스)은 그간 소련 해체를 놓고서 막연히 가졌던 통념을 깨는 데 도움이 된다. 소련의 최후를 놓고 다수의 역사학자는 미국과의 군비 경쟁(외부), 민주화 압박과 민족주의 대두(내부)로 어차피 ‘망할 수밖에 없었던 악의 제국’이라는 관점을 오랫동안 유지했다.

 

물론 1980년대 중후반 소련은 심각한 위기 상태였다. 가장 큰 문제는 국고가 바닥나는 재정 위기와 심한 인플레이션을 초래한 엉터리 경제 정책이었다. 수퍼스타급 국외 인기에 취해 바깥으로만 나돌면서 내치를 챙기지 못한 고르바초프의 무능도 한몫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1991년 12월에 소련이 갑작스럽게 무너져야 할 충분조건은 아니었다.

 

주보크는 이 대목에서 고르바초프의 앞선 권력자였던 유리 안드로포프가 애초 구상했던 소련의 개혁 모델이 ‘공산당이 세심하게 관리하는 시장 경제’였다는 사실을 역사 속에서 끄집어낸다. 만약 안드로포프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뜨지 않았다면(1984) 혹은 고르바초프가 안드로포프의 구상을 존중하고 개혁의 속도 조절을 했다면 소련의 모습은 달랐으리라는 주장이다.

 

일리가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소련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낙후했던 중국은 덩샤오핑의 공산당이 관리하는 시장 경제 개혁을 통해서 불과 20년 만에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했다. 만약 소련이 중국처럼 공산당이 주도하는 시장 경제 개혁에 성공했다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보통 사람의 삶은 달랐을 것이다. 21세기 세계사와 한반도 지정학도 아주 많이 달라졌을 테고.

 

이런 접근 방법을 ‘반사실적 사고(Counterfactual Thinking)’라고 부른다.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상황이나 사건을 놓고서 ‘만약에~’ 가정하고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가상의 시나리오를 그려보는 일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라는 통념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시간 낭비처럼 보이겠지만, 뜻밖에 과거의 사건을 재평가하고 지금과 다른 미래를 계획하는 데 도움이 된다.

 

30대 초반에 조국의 붕괴를 목격한 이 역사학자는, 이후 30년간 강대국의 최후를 치열하게 복기하며 이렇게 경고한다. 겉보기에 안정적으로 보이는 모습에 속지 말고 미래의 갑작스러운 충격에 대비하라.’ 한반도와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과연 얼마나 안정적일까? 지금 우리에게도 반사실적 사고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반사실적 사고(Counterfactual Thinking): 이미 일어난 과거의 사건을 놓고서 ‘만약 ~했다면 어땠을까?’라고 생각하며 실제와 다른 대안적 결과를 상상하는 인지 과정.

 

- 강양구 지식 큐레이터, 조선일보(25-08-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