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국에서 전략국으로, 신냉전 망루에 선 김정은의 의도]
[32년 만에 ‘한반도 비핵화’ 침묵한 中… 李 ‘북핵 구상’ 산 넘어 산]
[열병식의 북-중-러 정상… 反서방 내건 ‘모래성 연대’]
[기이해지는 김씨 왕조, 북 세습 때마다 한반도 풍파 겪어]
고립국에서 전략국으로, 신냉전 망루에 선 김정은의 의도
북-중-러 정상, 권위주의 연대 ‘신냉전’ 과시
김정은, 다자외교 무대 데뷔로 새 위상 노려
신냉전 구조 속 갈림길에 선 한국 외교
단기 대응 넘어 다층적·장기 전략이 관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3일 중국 전승절 80주년 열병식 참관을 위해 톈안먼(天安門) 망루에 섰다. 그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사이에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세계 언론은 이 장면을 “권위주의의 퍼레이드”라고 불렀고, 일부는 “신(新)냉전의 개막식”이라고 규정했다. 중국은 전승절 80주년 기념식을 단순한 역사 행사가 아닌 국제 정치의 흐름을 바꾸는 전환점으로 만들었다. 유라시아 심장 지대를 관통하는 세 국가의 정상들은 국제 질서의 균열을 드러내며 지역 안정의 기초를 흔드는 상징적 장면을 연출해 냈다.
김 위원장은 이번 회동에서 새로운 위상을 드러냈다. 그는 집권 이후 국제사회에서 제재와 압박, 비난 속에 철저히 고립된 지도자로 남았다. 국제 무대에서 북한은 늘 주변 국가로 취급받았다. 톈안먼 망루에서 김 위원장은 상황을 반전시켰다. 그는 자신이 속할 ‘블록’을 찾았고, 그 중심에서 ‘리더’의 자리를 차지했다. 김 위원장은 북한을 피곤한 ‘불량국가’에서 국제 질서를 흔드는 ‘전략국가’로 격상시켰음을 행동으로 천명했다.
북-중-러는 각자의 필요 때문에 결속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이어가기 위해 무기와 군수 보급을 확보해야 했다. 중국은 미국과 서방의 포위망을 흔들 전략적 카드를 절실히 찾았다. 북한은 체제 생존과 안보 보장, 사실상의 핵보유국 인정을 갈망했다. 서로의 필요가 맞아떨어지자 세 정상은 단순한 이해관계를 넘어 전략적 연대를 형성했다. 냉전 시절에도 이들은 협력했으나 상호 불신이 깊었다. 지금의 연대는 훨씬 계산적이고 전략적이며 무엇보다 공개적이다.
일부 평론가는 이번 회동에 대해 오월동주(吳越同舟·적대적인 세력이 서로 협력함) 식의 잠정 동행이라고 평가절하한다. 이런 해석은 위협의 본질을 놓친다. 북-중-러는 단순한 반미 연대라고 보기 어렵다. 그들은 미국 중심 국제질서에 구조적으로 도전하며 새로운 규칙을 세우겠다고 선언한다. 이들은 국제 규범을 무시하거나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자국 이익을 절대화하며 필요하면 무력 사용도 정당화한다. ‘트러블메이커’의 정치적 유전자를 공유한 이들이 손을 잡으면 협력은 ‘권위주의 블록’으로 진화한다.
냉전은 과거의 기억으로 머물지 않는다. 북-중-러 세 정상은 새로운 냉전을 현재 진행형으로 재정의하며 손을 맞잡았다. 핵을 가진 독재자, 전쟁 중인 제국의 황제, 권위주의의 맹주는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겠다”는 선언을 행동으로 옮겼다. 정치 체제는 달라도 전략적 이해는 일치했고, 군사·경제·외교 전반에서 공조는 빠르게 확대됐다. 이번 망루의 장면은 단순한 기념식이 아닌 새로운 시대의 서막이었다.
여기서 한국은 더 큰 과제를 떠안는다. 한국은 지정학적 갈림길에 섰다. 단순히 한미일 협력을 강화한다고 이 권위주의 블록에 맞서기 어렵다. 북-중-러의 결속이 구조적 도전인 만큼 한국은 대응 전략을 ‘즉각적 압박’이나 ‘상징적 외교’에 한정하지 말고 장기적 시야를 가진 전략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보여주기식 군사 억지나 이벤트성 회담만으로는 위기를 돌파하기 어렵다.
한국은 미국과의 동맹을 유지하면서도 중국과 러시아를 동시에 관리할 유연한 외교를 구사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북한 문제도 단순한 적대 프레임을 넘어 다층적 전략 속에서 다뤄야 한다. 한국이 ‘페이스메이커’로서 동북아 안정을 주도할지, 아니면 권위주의 블록의 ‘트러블메이커’에게 외교적으로 농락당할지는 우리의 정책 선택에 달려 있다. 정책 선택을 미루면 한국은 주도권을 잃고 외교적 공간을 스스로 포기하게 된다.
‘신냉전’이란 용어는 여전히 논쟁적이다. 다만 선언이 없다고 해서 현실이 사라지지 않는다. 과거 냉전도 명확한 선언 없이 시작됐다. 이념보다 이해가 먼저 움직였고, 전략이 무력보다 앞섰으며 군비 경쟁은 뒤를 따랐다. 오늘의 상황은 그 초입과 놀라울 만큼 닮았다. 지금은 글로벌 경제의 상호 의존성이 높고, 정보와 기술의 확산 속도가 과거보다 훨씬 빠르다. 갈등이 격화하면 파급력은 과거보다 더 크고, 속도는 즉각적으로 나타난다. 한국은 이 변화의 한복판에서 단순한 방관자가 아니라 능동적 행위자가 되어야 한다.
한국은 중요한 장면을 목격했다. 김 위원장이 시 주석과 푸틴 대통령 사이에 선 톈안먼 망루의 장면은 단순한 사진이 아니다. 세 정상의 모습은 국제 질서 변화를 알리는 행동의 신호였다. 그 사진 한 장은 21세기 국제정치사의 전환점을 상징하는 서막으로 기록될 것이다. 한국의 외교적 선택은 바로 그 역사의 한복판에서 이루어진다.
-김정 북한대학원대 교수, 동아일보(25-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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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년 만에 ‘한반도 비핵화’ 침묵한 中… 李 ‘북핵 구상’ 산 넘어 산
중국이 시진핑 국가주석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4일 정상회담 결과를 발표하면서 ‘한반도 비핵화’를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시 주석이 “한반도 평화와 안정 수호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고만 밝혔다. 중국은 그간 북한 문제를 거론할 때마다 ‘한반도 평화·안정 수호, 한반도 비핵화, 대화·협상을 통한 문제 해결’이라는 한반도 3원칙을 확고하게 견지해 왔다. 그런데 시 주석이 6년여 만에 김 위원장을 만나 혈맹 복원을 공식화한 자리에서 비핵화 대목을 쏙 뺀 것이다.
장쩌민, 후진타오 주석 등 중국 최고 지도자들은 1차 북핵 위기가 터진 1993년부터 한반도 비핵화 입장을 거둔 적이 없다. 시 주석도 2018∼2019년 5차례에 걸친 북-중 정상회담에서 예외 없이 한반도 비핵화를 거론했다. 이번에 이 표현 자체가 사라진 것은 북한의 핵 보유를 묵인하는 신호로 해석할 수 있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핵을 영원히 내려놓지 않겠다’는 김 위원장과, 그를 열병식에 불러 반(反)서방 연대를 과시한 시 주석의 이해관계가 맞물린 결과이기도 하다. 나아가 김 위원장은 시 주석에게 대만 문제처럼 미중이 첨예하게 맞붙는 사안에서 확실히 중국 편을 들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김 위원장은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북-중 경제 협력 강화는 물론이고 32년을 이어 온 중국의 ‘북핵 불용’ 원칙에 균열을 내는 이득을 챙겼다.
중국이 북핵을 인정할 경우 동결-축소-비핵화로 이어지는 이재명 정부의 3단계 북핵 폐기 구상은 난관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가뜩이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한을 ‘핵 국가’라 부르는 상황이다. 북-미 회담이 성사되더라도 자칫 북한의 요구대로 핵 보유를 허용하는 핵군축 협상으로 변질될 수 있다. 여기에 북한의 뒷배인 중국마저 비핵화 외교 궤도에서 이탈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으니, 김 위원장이 미국에 핵 보유를 강변할 여지가 더욱 커진 것이나 다름없다.
정부는 다음 달 열리는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시 주석을 초청한 상태다. 시 주석은 북핵 문제 해결에 건설적 역할을 하겠다고 수차례 공언한 바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APEC을 계기로 개최가 예상되는 한중 정상회담에서 시 주석에게 이를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핵 보유 용인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서 오랫동안 북핵을 규탄하고, 제재에 찬성했던 중국의 책임과도 어긋난다고 지적해야 한다.
-동아일보(25-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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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병식의 북-중-러 정상… 反서방 내건 ‘모래성 연대’

3일 중국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열린 중국 전승절 80주년 기념 열병식에 참석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오른쪽 두번째),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가운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 두번째)이 일어서서 박수를 치고 있다. 신화 뉴시스
3일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열린 중국의 전승절 80주년 기념 열병식에는 시진핑 국가주석의 좌우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나란히 참석했다. 1959년 이후 66년 만에 북-중-러 최고 지도자가 한자리에 모여 ‘반(反)미국, 반(反)서방 연대’를 과시한 것이다. 시 주석은 연설을 통해 “중국은 강권에 굴하지 않으며 폭력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서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은 막을 수 없다”고 밝혔다.
열병식에 나란히 선 3국 지도자의 모습은 미국과 서방에 대항하는 권위주의 독재자 간 밀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미국 주도의 일극(一極) 체제가 흔들리면서 그 패권 도전에 나선 중국이 반서방 진영을 한자리에 불러 모아 세를 과시한 것이다. 신냉전 시대의 출발을 알리는 본격적인 신호탄이란 해석이 나올 만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재집권 이후 더욱 거칠어진 미국식 일방주의가 그런 세 결집을 더욱 가속화했을 것이다.
하지만 저마다 제각각인 세 나라의 처지나 지향점을 살펴보면 당장의 편익을 위한 한시적 밀착에 불과하다는 분석에 무게가 쏠린다. 중국은 미국과 패권 경쟁을 벌이며 새로운 질서의 주도자가 되고자 한다. 전쟁과 도발로 고립된 러시아나 북한과는 그 처지가 확연히 다르다. 당장은 러-북과 함께하지만 그 침략성, 호전성에 거리를 둘 수밖에 없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치르기 위해 북한의 파병과 중국의 측면 지원이 절실하다. 하지만 북한에 대가를 지급할 여력이 충분치 않고, 중국에 국제질서의 주도권을 내줄 생각도 없다.
북한은 이런 중-러 사이에서 이익을 챙긴 가장 큰 수혜자다. 김정은에게 열병식은 중-러 지도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국제 다자무대 데뷔전이었다. 나아가 방중에 어린 딸을 대동해 후계 구도를 과시하기까지 했다. 러시아 파병으로 대가를 톡톡히 챙긴 데다 이젠 종전 이후를 내다보며 소원했던 북-중 관계를 개선하려 한다.
이처럼 생각이 다른 세 정상에게 트럼프 대통령과의 잠재적 딜(거래)은 또 다른 변수다. 3국 정상 모두와 “아주 좋은 관계”라는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푸틴 대통령과 회담했고, 시 주석과도 만날 것을 예고했다. 김정은에게도 끊임없이 대화의 손짓을 보내고 있다. 저마다 미국과의 흥정을 꿈꾸는 처지에서 배반과 이탈은 ‘모래성 3각 연대’의 예정된 미래일 수 있다.
지금 세계는 미국발 불확실성의 확산에다 중-러 강대국의 도전, 불량 정권의 도발까지 예측불허의 혼란 속에 있다. 향후 국제질서가 신냉전 체제가 될지, 다극(多極) 체제가 될지, 강대국 간 결탁 체제가 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우리로선 정세를 예의 주시하고 자강의 힘을 쌓으면서 전략과 방책을 가다듬어야 하는 시기임은 분명하다.
-동아일보(25-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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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해지는 김씨 왕조, 북 세습 때마다 한반도 풍파 겪어

2025년 9월 2일 오후 중국 수도 베이징 베이징역에 전용열차편으로 도착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차이치 중국공산당 중앙서기처 서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의 환영을 받고 있다.뒤에 딸 김주애(점선)가 서 있다./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북한 김정은이 3일 중국 전승절 열병식에 참석해 시진핑, 푸틴과 나란히 천안문 망루에 올랐다. 북·중·러 정상이 66년 만에 한자리에 모인 것 이상으로 관심을 끈 일은 김정은이 딸 주애를 데리고 나타난 것이다. 김주애는 베이징역에서 외무상 최선희보다 앞에 섰다. 이제 12세 정도인 김주애가 사실상 ‘후계자’ 자리에 선 듯한 모습이다.
북 김씨 왕조는 후계자를 최우선으로 중국 지도부에 소개하곤 했다. 1980년 후계자로 확정된 김정일은 3년 뒤 방중해 덩샤오핑 등을 만났다. 김정은도 2010년 김정일을 따라 후진타오 주석과 인사했다고 한다. 북 왕조가 살아남으려면 중국이라는 뒷배와 맺은 관계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지금 북한은 무역의 95%를 중국에 의존한다. 그런 중국에 김주애를 신고하는 것이 방중 목적 중 하나일 것이다.
김주애는 2022년 김정은의 ICBM 발사 시찰 때 처음 등장했다. 그때만 해도 조선 시대 남존여비가 그대로인 북한에서 ‘딸 후계자’는 어려우리라는 견해가 많았다. 탈북민들도 그렇게 얘기했다. 그런데 2023년 북 열병식에서 김정은 옆자리에 앉더니 군 장군이 한쪽 무릎을 꿇고 주애에게 귓속말을 하는 모습도 나왔다. 2024년엔 김여정이 주애에게 허리를 숙이고 자리를 안내하기도 했다. 북 선전 도구의 수식어도 ‘사랑하는 자제분’에서 ‘존경하는’으로 바뀌었다. 확실하진 않지만 김주애로 4대 세습하려는 정황으로 볼 수 있다.
근대 이후 특정 일가가 국가 권력을 4대 세습하려는 곳은 북한이 유일하다. 그런 김씨들의 최대 관심사가 무엇이겠나. 자신들이 권력을 잃는 순간 어떻게 된다는 것을 본인들이 가장 잘 안다. 핵도 궁극적으로는 김씨 왕조 수호용이다.
아무리 북 주민들이 무지몽매하게 세뇌당했다고 해도 세습에 따르는 불만이 없을 수 없다. 그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김씨들은 없는 외부의 적을 만들어 주민들을 겁박하고 있다. 북 주민들은 정말 한국과 미국이 쳐들어온다고 믿는다 한다. 이 거짓을 실제처럼 만들려면 도발이 필요하다. 그 도발에 희생된 우리 국민은 수 없이 많다.
김씨들은 세습용 ‘업적’을 만들기 위해 도발을 감행하기도 했다. 김정일의 아웅산 테러와 KAL기 폭파 테러, 김정은의 천안한 폭침과 연평도 포격이 그 예다. 노예화된 북 주민들의 비극, 우리 국민이 당하는 위협은 본질적으로는 북 김씨 왕조의 세습이 빚어내는 문제다. 시진핑과 푸틴은 그런 김정은에게 뒷배가 돼줄 수 있을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김씨 왕조가 후계자를 우상화하면서 세습 작업을 본격화하면 한반도 모두가 고통과 불안을 겪었다. 김주애의 베이징 등장이 그 전조일지도 모른다.
-조선일보(25-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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