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 괜찮을까" 고민하는 젊은이들… K팝 여전사가 구하러 나섰다]
['골든'과 '소다팝'에 가슴이 뛰는 이유]
[병든 세상 치유하는 발랄한 K무당들]
[외국인 관광객 2000만명 시대, 수조원대 경제 효과]
["냄새 날까 감췄던 김밥, 이젠 '먹방'에 환호… 이건 역사적 여정"]
['메이드 인 코리아'만 K콘텐츠? 편견 버려야]
[케데헌 속 까치 호랑이가 바로 '이 작품' 안에 있네]
"이대로 괜찮을까" 고민하는 젊은이들… K팝 여전사가 구하러 나섰다
전 세계적 돌풍 몰고 온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 신드롬 7대 비결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는 케이팝 데몬헌터스 속 가상 걸그룹 헌트릭스. 진짜 본업은 수백년 간 대 이어 악령을 무찔러온 퇴마사다. /넷플릭스
이런 핵폭탄급일 줄이야. 먼저 세계를 뒤집어놨고, 한국은 뒤늦게 뒤집히는 중이다. 넷플릭스의 K팝 판타지 영어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K-Pop Demon Hunters·이하 케데헌)’ 얘기다.
케데헌은 지난 6월 20일 190국에서 34개 언어로 공개된 지 3개월여 만에 누적 시청 수 3억3000만뷰를 돌파했다. 세계 최대 동영상 스트리밍 플랫폼인 넷플릭스 28년 사상 ‘3억뷰’는 ‘오징어게임(2021년·2억6520만뷰)’과 ‘웬즈데이(2022년·2억5210만뷰)’도 가보지 못한 고지다.
넷플릭스가 한국에 상륙한 2016년 1월 “‘미드 공룡’이 한국 엔터테인먼트 생태계를 초토화하러 온다”고 우려했는데, 10년도 안 돼 한국계 제작진과 배우·가수가 대거 투입된 한국물이 세계 최대 흥행작이 됐다.
케데헌은 글로벌 대중음악계도 접수했다. 주제곡 ‘골든(Golden)’은 미국 빌보드 차트 핫100에서 6주째 1위, 영국 싱글 차트에선 7주째 1위를 달리고 있다. 빌보드·싱글 차트 동시 석권은 BTS나 블랙핑크 등 어떤 K팝 그룹도 달성 못 한 기록이다. 특히 전 연령 관람가의 만화 주제곡이 빌보드 1위에 오른 건 1993년 ‘알라딘’ 주제가(A Whole New World) 이후 32년 만이다. 케데헌 속 노래 네 곡이 한꺼번에 빌보드 탑10에 든 것도 영화 사상 전례 없던 일이다.

K팝 여전사 3인방을 내세운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데헌이 각종 신기록 행진 중이다. /그래픽=송윤혜 기자
세계인이 ‘골든’을 따라 부르거나 ‘소다팝’에 맞춰 춤추고, 케데헌 속 한국 전통문화와 음식이 ‘핫템’이 됐다. 외국 관광객이 케데헌의 배경인 서울로 몰려오고, 한국 기업과 지자체들은 케데헌 낙수 효과에 즐거운 비명이다.
넷플릭스는 벌써 후속작과 실사영화 제작 논의에 들어갔다. 외국 유력 매체들은 케데헌을 최고 권위 음악상인 그래미상과 영화상인 오스카상 유력 후보로 꼽고 있다.
예상 못 한 케데헌 현상. “뻔한 K팝 걸그룹 판타지” “유치한 애들 만화”라며 심드렁했던 어른들도, “한국이 만들어 한국이 돈 버는 것도 아닌데 왜 흥분하느냐”던 평론가들도 자세를 고쳐 앉고 있다. ‘케데헌 세계관’을 들여다본다는 건 기성세대가 이해 못 하던 젊은 세대의 고민과 꿈, 그리고 우리 스스로 평가절하했던 K 소프트 파워를 다시 보는 일이 될지 모른다.
케데헌 신드롬, 주인공들의 한국어 대사로 안내한다. “자, 가자 가자 가자!”
1. 빛과 어둠, 영웅의 희생… 보편적 서사의 힘
케데헌의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은 세계적 인기를 누리는 한국의 3인조 걸그룹 ‘헌트릭스(Huntrix)’. 무대에선 화려한 아이돌 가수지만, 진짜 본업은 수백 년 대 이어 악령을 무찔러온 퇴마 사냥꾼(hunter)이다. 인간 영혼을 탐식하는 악마계 수장 귀마(鬼魔)는 헌트릭스를 무력화하려 5인조 꽃미남 보이그룹 ‘사자 보이즈(Saja Boys)’를 결성해 인간계에 투입한다.

헌트릭스의 미라(오른쪽)가 가야곡도를 모티브로 한 검을, 루미(가운데)는 조선시대 사인검을, 조이(왼쪽)는 무구인 작은 신칼로 싸운다. 멤버들의 노리개와 검은 모두 철저한 고증을 거친 것. 넷플릭스
변수는 헌트릭스 리더 ‘루미’가 선대 헌터와 악령 사이에 태어난 반(半)악령이라는 출생의 비밀. 루미가 자신의 약점을 의식하는 순간 목소리를 잃고 공연을 망치면서 팀워크는 깨지고, 악령을 봉인해온 장치인 ‘혼문(魂門)’도 뚫린다. 하지만 이들은 결국 내면의 힘을 되찾아 팬들과 세상을 구한다.
기본 뼈대는 역대 수퍼 히어로물을 통해 익숙한 서사 구조다. ‘슈퍼맨’부터 ‘배트맨’ ‘해리 포터’ ‘쿵푸 팬더’까지 메가 히트작엔 초자연적 힘을 지닌 영웅이 등장한다. 빛과 어둠의 싸움, 희생과 구원, 내면의 성찰과 깨달음을 주제로 한 영웅담은 주요 종교나 각국 설화·고전에서도 반복되는 서사다.
특히 영웅이 어떤 걸림돌 탓에 능력을 발휘 못 해 벌어지는 갈등과 극복의 과정은 스토리를 극적으로 만든다. 케데헌은 개성 강하고 인간미 풍기는 여전사 3인방을 내세워 이 공식을 착실히 따라간다.
2. 이중 정체성 고민하는 젊은층 위로

지난 14일 서울광장에서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소재로 열린 2025 서울 헌터스 페스티벌에서 국내외 K-POP 팬으로 구성된 댄스팀 선수들이 케데헌 속 안무를 선보이고 있다. /뉴시스
미 월스트리트저널은 케데헌이 “대중문화의 시대정신(zeitgeist)을 사로잡은 영화”라고 짚었다. 기후변화와 저성장 등 거대 위기에서 자신감과 지향점을 잃은 2030 MZ세대와 10대 알파 세대의 고민을 정면으로 다뤘다는 것.
그중에서도 소셜미디어 범람 속 남에게 내보이는 가면 인격(페르소나)과 상처 입은 진짜 자아의 불일치로 방황하며 “대체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이중 정체성’ 문제가 핵심으로 떠올랐다.
케데헌은 이 난제를 대중문화의 영향력이 커진 21세기 감성에 맞게 풀어냈다. 주로 여성인 무당들이 퍼포먼스로 악귀를 쫓아냈다는 데 착안해 ‘걸그룹 헌터’라는 주인공을 만들고, 그들의 이중 정체성이 빚는 크고 작은 고민을 그렸다. 일제강점기 ‘저고리 시스터즈’부터 ‘S.E.S’까지 역대 인기 여성 그룹이 사실 은밀히 이어진 헌터 계보였다는 설정은 동서양 어디에도 없던 영웅 서사를 탄생시켰다.
특히 루미는 전통의 계승자이자 파괴자. 그는 “약점은 감추라”는 기성세대의 압박에 번민하지만, “깨진 조각도 빛나/더 이상 숨지 않아”라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기로 결단하고 우정과 신뢰, 연대의 힘으로 새로운 혼문을 세운다.

케데헌의 저승사자 모티브 아이돌 그룹 '사자 보이즈'. 걸그룹과 보이그룹의 선악 구도라는 초기 설정이 한국 젠더 갈등을 상징한다는 해석도 있다./넷플릭스
케데헌 속 걸그룹과 보이그룹이 선악 구도로 맞서는 설정이 한국의 극심한 젠더(gender·성별) 갈등을 상징한다는 해석도 있다. 하지만 양측의 리더인 루미와 진우가 같은 반인반수로서 수치심·죄책감·자기혐오에 시달려왔다는 공통분모를 발견, 공감하고 위로하며 서로를 구원하는 장면은 묵직한 메시지를 던진다.
3. K전통, K풍경, K정서… 한국 문화가 주는 신비로움
익숙한 전개에도 세계가 “독창적”이라며 열광하는 건 케데헌이 ‘한국’을 전례 없는 방식으로 전면에 내세웠기 때문이다. 라면과 김밥, 한국어, 서울이 소품으로 등장하는 수준이 아니다. 한국 전통과 현대, 한국인의 무의식이 핵심 플롯이 돼 99분간 러닝타임을 쉴 틈 없이 지배한다. 가히 ‘K의, K에 의한, K를 위한 작품’이라 할 만하다.
한 전통문화 산업 종사자는 “그간 외국이 만든 영화에 한국이 나오면 ‘이번엔 뭘 또 어설프게 끼워넣었을까’ 조마조마했는데, 케데헌 첫 장면부터 조선 시대 건축과 의복이 완벽히 고증돼 있어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케데헌 속 헌트릭스가 '골든'을 부르며 화려한 무대를 펼칠 때 조선 왕이 썼던 일월오봉도가 배경으로 등장했다. /넷플릭스
민화 호작도에서 튀어나온 호랑이와 까치, 도깨비·물귀신과 저승사자, 액션 신에 등장하는 사인검과 월도·곡도, 제주 신칼과 방울종 등 무구(巫具), 무대 배경인 일월오봉도와 단청을 실물과 비교한 전문가들도 감탄한다.
김헌식 문화평론가는 “헌트릭스 멤버들이 당초무늬 매듭 등 서로 다른 오방색 노리개를 달았더라”라며 “칼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 효과에도 실제 전통 문양을 환상적으로 적용했다”고 했다.
현대 한국의 풍경과 생활상 역시 몇 번을 돌려봐도 새로운 게 보일 정도로 깨알 같다. 남산타워와 낙산공원, 잠실종합경기장, 명동거리와 청담대교 등 서울의 명소는 물론 지하철의 분홍색 임신부석과 차 없는 거리, 공중목욕탕의 초록 때수건, 어묵 볶음 위 부추 두 줄기, 국밥 먹을 때 수저 밑에 깐 냅킨, 한국 여성들의 선캡과 수면 바지, 심지어 데뷔 순서에 따라 선·후배 따져가며 90도 인사를 하는 K팝 군기 문화까지 생생히 살려냈다.

케데헌 속 진우(왼쪽)와 루미가 낙산공원 성곽길을 걸으며 일종의 데이트를 하는 모습. 한국 현대 생활상과 한국인의 정서가 세심하게 포착된다. /넷플릭스
특히 케데헌 속 한국 젊은이들이 “남들 앞에선 완벽해야 한다” “난 자랑스럽지 않은 존재”라거나 “혼자 잘 살려고 가족을 배신했다”는 지극히 ‘한국적인’ 자기 검열과 죄책감으로 번민하는 모습은 폐부를 찌른다. 귀마는 바로 그 수치심을 이용해 인간과 악령을 조종한다.
4. 중독성 강한 K팝의 향연
케데헌의 또 다른 주인공은 음악이다. 총 8개의 노래는 단순한 배경음악을 넘어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주역이다. 이 곡들이 동시에 빌보드에 진입하자 싱어롱(sing-along·함께 부르기) 버전이 제작됐고, 각국 영화관에서 싱어롱 상영회가 열리고 있다.
밖에서도 “완성도 있는 음악이 문화적 특이성 속에서도 보편성에 대한 신뢰를 높였다”(타임), “K팝이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는 초자연적 무기가 돼 영화의 감동을 증폭시킨다”(BBC)는 호평이 나온다.
헌트릭스와 사자 보이즈가 선보인 노래들은 K팝 댄스곡의 전형적인 요소들을 고루 섞은 덕에 처음 들어도 익숙하다. 귀에 꽂히는 팝 비트와 멜로디, 치밀하게 짜인 노래와 랩, 중독성 있는 후렴구 등이 그것. 루미의 고뇌와 열망을 담은 노래 ‘골든’은 고난도 고음을 웅장하게 배치, 고양감과 해방감마저 느끼게 한다.

최근 서울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케데헌 음반이 깔린 모습. '골든'은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 '핫 100' 1위에 6주째 올라있다. 사자보이즈가 부른 '유어 아이돌'과 '소다 팝'은 각각 4위와 5위에 올랐다. /뉴스1
영미권 팝을 한국화한 K팝은 글로벌 음악계에서 별도의 장르가 됐다. 오랜 연습생 생활과 합숙, 살인적인 투어 일정, 실력파 보컬·섹시·큐트·반항아 등 멤버 간 역할 분담, 고된 훈련으로 완성된 칼군무, 엄격한 사생활 관리, 팬의 부모들도 좋아할 반듯한 이미지와 ‘선한 영향력’ 등 K팝 특유의 문화가 케데헌에 세밀하게 고증돼 몰입감을 높인다.
5. 팬들의 경험을 섬세하게 포착
기성세대가 ‘케데헌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최대 난관은 1020세대의 팬덤(fandom) 문화일지 모른다. 21세기 팬 집단 문화를 모르거나 얕잡아보면 그 감정선을 따라가기 어렵다.
케데헌 속 K팝 팬들은 단체 티셔츠에 야광봉을 들고 공연과 팬 사인회에 몰려들고, 실시간 댓글로 응원하며, 스타의 희로애락과 세계관에 동화된다. 이 ‘고강도 덕질’은 BTS 팬클럽 ‘아미’ 등의 실제 모습과 다르지 않다.
헌트릭스도 “팬들을 위해”를 외치며 휴식과 사생활을 포기하고, 팬들의 사랑에 감동해 눈물 흘리며, 팬을 위협하는 악령들을 무찌른다. 걸그룹이 그저 무대 위 소비 상품이 아니라 팬들의 또 다른 가족이자 수호자인 셈. 팬들의 열정은 인류를 위해 ‘혼문’을 지키는 에너지원이 된다.

노박 조코비치(세르비아)가 이달 초 미국 뉴욕에서 열린 US오픈 남자 단식 4강 진출을 확정하고 케데헌 속 '소다팝' 안무를 추고 있다. 그는 "딸에게 배웠다"고 했다./US오픈 유튜브
뉴욕타임스는 “케데헌의 간과하기 쉬운 미덕은 팬덤에 대한 깊은 이해와 존중”이라며 “팬들의 경험을 매우 섬세하게 포착해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허무는 데 성공했다”고 분석했다. 또 자아를 잃은 덕질은 귀마에게 잡아먹히는 독성을 띤다는 점도 시사한다.
6. 전략적인 알고리즘 폭격
케데헌 인기엔 넷플릭스의 자본 집약적 제작·유통 환경, 소셜미디어 알고리즘 폭격 전략 등 기술적 측면도 작용했다. 수십억이 보는 넷플릭스를 통한 동시 공개는 감동이 세계에 시차 없이 공유되며 실시간 글로벌 팬덤을 형성하게 했다.
OST는 처음부터 글로벌 시장과 숏폼을 겨냥해 만들어졌다. 제작사 소니는 ‘골든’ 안무 영상을 먼저 공개해 온라인 바이럴(viral·소문)을 만들었다. 뒤이어 본편이 공개되자 폭발적인 영화·음원 동시 스트리밍으로 이어졌다.
요즘 사람들이 “내 유튜브·인스타가 케데헌으로 도배됐다”고 하는데, 이는 영화와 노래, 사용자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영상까지 한꺼번에 쏟아지며 ‘지금 가장 핫한 콘텐츠’로 검색 알고리즘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해외 팬들이 케데헌 속 루미가 김밥을 통째로 베어 무는 장면을 패러디해 온라인에 올라고 있다. /틱톡
7.가상을 현실로... 체험형 콘텐츠 양산
케데헌은 애니메이션이지만 노래·배경·음식·소품 등 거의 모든 것을 현실에서 구현하고 체험하도록 설계됐다.
가상 아이돌이 부른 노래는 실제 가수·셀럽들의 커버 챌린지를 낳고, 박물관에선 케데헌 속 전통문화 뮷즈를 손에 넣을 수 있으며, 배경이 된 서울의 명소를 돌며 비싸지 않은 음식을 먹어보는 등 가상과 현실을 오가는 ‘몰입형 체험’을 가능케 했다.
-정시행 기자, 조선일보(25-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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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과 '소다팝'에 가슴이 뛰는 이유

'케이팝 데몬 헌터스' 걸그룹 헌트릭스. /넷플릭스
‘케이팝 데몬 헌터스’ 걸그룹 헌트릭스가 BTS를 넘어설지도 모르겠다. 이들이 부른 ‘골든’은 빌보드 ‘핫100’에서 6주째 정상을 지키고 있다. 음악 팬들은 테일러 스위프트가 아니고서는 이들을 꺾을 수 없을 거라는 농담을 한다. 다른 수록곡들도 ‘핫100’ 5위(소다 팝)·6위(유어 아이돌)·10위(하우 잇츠 던)에 올라 있다. 폭넓은 대중이 큰 폭으로 움직이지 않고는 이룰 수 없는 성과다.
여느 인기 OST가 그렇듯 영화 스토리와의 시너지를 먼저 거론할 수 있다. ‘골든’은 수치심과의 절박한 대결 앞에서 진정한 자신을 찾는다는 주제가 공감대와 함께 벅찬 해방감을 안긴다. 주인공들에게 감정 이입해 영화를 보고 나면 이 노래에 가슴 설레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저승사자 보이그룹 ‘사자 보이즈’가 부른 ‘소다 팝’도 그렇다. 이 노래를 즐길 때는 자신을 약간 내려놓아야 한다. 극 중 인물들이 ‘소다팝’에 빠지는 순간은 마술적이면서도, 유치해 보일 정도로 코믹하게 묘사된다. 관객 역시 이 간지러운 매력에 사로잡히려는 자신과의 갈등 앞에서 자존심을 내려놓게 된다. 초인적 능력을 지닌 주인공들도 굴복하는 싸움이니까. 그 패배는 재미있고 유쾌한 것이니까. 그리고 노래를 들을 때마다 동기화의 기억은 살아난다. 가벼운 즐거움에 자신을 내맡긴다는, 팝이 줄 수 있는 궁극적 가치의 순간을 재현하도록 말이다.

악령계 저승사자들이 꽃미남 그룹으로 변신한 ‘사자 보이즈’ /넷플릭스
노래 자체의 힘도 분명하다. ‘골든’의 비트가 잦아들면서 등장하는 모티프(“I’m done hidin’, now I’m shinin’ like I’m born to be”)는 빙글빙글 맴도는 듯한 아르페지오(여러 음을 동시에 내는 대신 한 음씩 차례로 이어 부르는 방식)로 치달아 오른다. 이어 폭발하는 후렴은 그야말로 찬란한 고양감을 쏟아붓는 듯하다. 힘을 가득 실은 반복, 아찔한 고음, 빠른 리듬으로 미끄러지는 서정, 단호한 확신과 의지의 선언으로 꽉 차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다는 듯 앞의 모티프를 다시 끌어와 이번엔 한층 밝은 색채감과 더 높은 고음으로 반복한다.
‘소다팝’ 역시 청량미를 중심으로 하면서도, 훅 들어오는 힘, 귀여운 활기, 사근사근한 다정함 등 새로운 ‘맛’을 끝없이 들이민다. 이제는 정립된 K팝 작법이자, 그것이 우수하게 구현된 예다.
특이한 점은 이 노래들이 한국어를 사용하는 방식이다. 영어 위주의 가사에 중요한 대목마다 한 번씩 한국어를 툭 던져 넣는다. 어찌 보면 기존 K팝에서 주요 대목을 영어로 처리하는 것을 거울에 비춘 것 같기도 하다. K팝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에게 어색함을 주지 않으면서도 ‘뭔가 K팝스러운 느낌’을 유지한다. 결국 이 노래들은 외국에서 제작된 K팝 소재 영화라는 작품의 특성을 닮아 있다. K팝이 주는 가장 매력적인 순간들을 조금은 글로벌 팝의 시선에서 포착하고 있다. 그것이 대중과 더 큰 공명을 일으키고 있다고 하겠다.
-미묘 대중음악평론가, 조선일보(25-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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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든 세상 치유하는 발랄한 K무당들
MZ 팬들이 불러낸
한국 무속의 귀환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 등장하는 무당. 매기 강 감독은 “헌트릭스와 무당은 모두 귀신을 쫓는 존재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고 말했다. /넷플릭스
‘BTS 때문에 살 수 있었다!’ BTS의 글로벌 팬덤 아미들은 그런 이야기를 자주 한다. 그 이유는 비주류로서 죽고 싶을 만큼 차별받던 이들이 대부분 BTS의 팬이 됐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라(Love Yourself)’는 메시지를 담은 BTS의 노래는 그저 음악의 차원을 넘어 그들의 삶을 위로하고 구원하는 힘을 발휘했다.
K팝에 드리워진 구원의 이미지는 그래서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무당의 후예들을 등장시키게 된 계기가 됐다. K팝이 춤과 노래로 대중을 구원하듯이, 무당들 역시 춤과 노래가 섞인 굿으로 마음이 아픈 이들을 치유한다. 무당은 서구의 구마사제처럼 귀신(악령)과 싸우는 존재가 아니다. 대신 원귀의 억울한 사연을 들어주고 한 상 잘 차려 먹인 후 노잣돈을 얹어 가야 할 곳으로 보내주는 역할을 한다. 파이터가 아니라 카운슬러에 가깝고, 킬러가 아닌 힐러다. 그래서 작품 속 무당의 리더에 해당하는 루미는 저승사자 모습의 적수 진우와 싸우지 않는다. 대신 그 영혼을 구원해줄 뿐.
케데헌이 보여주듯, 무당이 가진 힐러이자 카운슬러의 면모는 최근 들어 젊은 세대들이 무속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이다. 대학로나 해운대, 전주 한옥마을처럼 젊은 세대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김없이 ‘점집’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삼삼오오 점을 보는 젊은이들을 볼 수 있다. K컬처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요즘에는 아예 ‘외국어 가능’ 간판을 단 점집들도 적지 않다. 젊은 세대에게 무속은 무겁지 않다. 기분 전환을 위해 가볍게 찾고 때론 고민 상담에 가까운 카운슬링을 받는다. 무속인들도 마찬가지다. 위압적인 모습이 아니라 상담하듯 친절하게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는 조언을 해준다.
이러한 현실적인 변화 때문일까. 최근 K콘텐츠에서 무당은 훨씬 발랄해졌다. 1970~1980년대만 해도 ‘미신 타파’의 분위기 속에서 무당들은 ‘저주받은 존재’로 그려지곤 했지만, 최근에는 롱코트 휘날리며 귀신과 맞서는 수퍼히어로(파묘)이자, 저주받은 연인을 위해 목숨을 거는 인물(견우와 선녀)로도 그려진다. ‘신들린 연애’ 같은 연애 프로그램에서는 무속인들을 우리와 똑같이 ‘사랑하고 사랑받고픈 존재’로 다루기도 한다. ‘전설의 고향’에 단골로 출연하던 오싹한 저승사자의 이미지가 ‘도깨비’의 세련된 모습으로 재해석되듯, 무당의 이미지도 확연히 달라졌다.
물론 여전히 무속에 대한 무거운 시선은 남아있다.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의 주술 의혹을 소재로 한 정치 풍자극으로 조악한 연출에도 무려 78만 관객을 모았던 ‘신명’ 같은 작품이 이를 말해준다. 하지만 젊은 세대는 다르다. 급변하는 한국 사회에서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그들에게 무속은 카운슬러 역할을 대리해주는 존재가 됐다. 종잡을 수 없는 미래의 답답함을 무속은 훨씬 직관적인 답변과 상담으로 다독여 준다.
무속이 때로는 무겁게 느껴지는 건, 어쩌면 이를 바라보는 이들의 엇나간 욕망 때문이 아닐까. 주술적인 힘까지 동원해 무언가를 얻으려는 욕망. 그런 점에서 일상 카운슬러로 발랄해진 무속의 귀환은 반가운 점도 있다. 작지만 숨통 하나를 틔워주는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K팝 팬들이 노래 한 곡에 다시 살아갈 힘을 얻듯이 누군가에게는 구원일 수도 있는.
-정덕현 문화평론가, 조선일보(25-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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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관광객 2000만명 시대, 수조원대 경제 효과
기업·지자체까지 번진 케데헌 낙수 효과
주요 관광지에 있는 편의점 CU 매장에는 지난 7월부터 김밥을 사러 오는 외국인들이 부쩍 늘었다. 7~8월 CU에서 해외 결제 수단으로 김밥을 구매한 건수는 작년 같은 기간의 3배가 됐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이하 케데헌)’가 6월 20일 공개된 이후 나타난 현상으로, 케데헌 주인공이 좋아한 김밥을 맛보려는 외국인들이다.
농심이 넷플릭스와 협업해 지난달 29일 농심몰에서 출시한 ‘케데헌 한정판 신라면’ 1000세트는 판매가 시작된 지 1분 40초 만에 완판됐다. 신라면컵 디자인에 케데헌 주인공인 루미·미라·조이 캐릭터를 입힌 것으로 캐릭터당 2개씩 총 6개가 들어 있는 세트다. 해외에서도 이 한정판을 “사고 싶다”는 요청이 쇄도했다.

케데헌 흥행이 불러올 경제적 파급 효과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다. 영화 속에 등장한 서울 명소에는 외국인 관광객이 몰리고 있다. 기업들은 케데헌을 활용한 글로벌 마케팅 방안을 마련하느라 분주하다. 케데헌의 경제 효과가 수조원대에 달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외국인 관광객 23.1% 급증
7월 한 달간 서울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은 136만명으로 작년 같은 기간보다 23.1% 늘었다. 서울시는 ‘케데헌 열풍’의 결과로 해석했다. 현대경제연구원은 6월 낸 보고서에서 올해 외국인 관광객이 역대 최고치인 2009만명에 달할 것으로 예상했다. 노시연 연구위원은 “케데헌의 인기를 따로 반영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 관광객 수는 이를 상회할 수 있다”며 “올해·내년에 걸쳐 관광객 유입 등 낙수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구글 트렌드에 따르면 케데헌 공개 직후 ‘한국’ 검색량은 거의 2배 수준으로 증가했다. 작년 12월 비상계엄 선포 직후 ‘한국’ 검색량보다도 많다. ‘Korea Food’ 검색량 역시 케데헌 이후 75% 증가하는 등 사상 최고 수준이다. 글로벌 예약 플랫폼 클룩에 따르면 6월 20일부터 8월 10일까지 예약 데이터를 직전 두 달과 비교했을 때 세신 상품은 11%, K팝 댄스 클래스는 40%, K팝 아이돌 스타일링 체험 상품은 200% 늘었다.
7~8월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은 외국 관람객은 작년 같은 기간보다 19% 늘었다. 국립중앙박물관 뮷즈인 ‘까치호랑이 배지’는 7월 한 달간 3만8140개 팔렸다. 5월엔 80개, 6월엔 160개가 팔렸다. 케데헌에 나오는 호랑이와 까치 캐릭터가 인기를 끌면서 판매량이 갑자기 늘어난 것이다. 외국인들도 구매 대열에 대거 합류했다.
가을 축제를 앞둔 지자체도 ‘케데헌 특수’를 노리고 있다. 26일부터 사흘간 열리는 상주세계모자페스티벌은 ‘갓’을 앞세웠고, 김천은 다음달 25~26일 열리는 ‘김밥축제’ 장소를 넓히고 셔틀 운행 규모를 늘리는 등 확대 개편했다. 구미라면축제는 11월 7~9일 열린다.
1세대 아이돌 장관 시대
정부의 정책적 대응도 이어지고 있다. 대통령 직속 ‘대중문화 교류 위원회’가 신설되고, 1세대 아이돌 격인 박진영 JYP 대표가 공동위원장에 임명됐다. K컬처를 국가 성장 동력, 미래 먹거리로 육성해야 한다는 의지가 담긴 것으로 해석됐다. 정부는 ‘K관광 혁신 전담 태스크포스(TF)’를 출범시켜 케데헌 열풍을 비롯한 K컬처 확산을 관광 상품으로 연결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재명 대통령의 취임 100일 기자회견 때 출입기자들에게 나눠준 비표에는 케데헌 속 캐릭터 ‘더피’가 그려져 있었다.
K콘텐츠 지원을 위한 입법도 활발하다. 더불어민주당 민형배 의원은 설화·전통놀이·한복 등 전통문화를 결합한 케이팝, 웹툰, 애니메이션, 드라마 등을 ‘전통융합콘텐츠’로 규정하고 정부의 지원 근거를 명시한 이른바 ‘케데헌법(콘텐츠산업 진흥법 일부 개정안)’을 발의했다. 국민의힘 김미애 의원은 7월 ‘K컬처 복합거점지구’ 지정 근거를 만든 이른바 ‘K컬처 3법’을 냈다. 케데헌 열풍 같은 현상이 일회성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있는 것이다.
딜로이트컨설팅에 따르면 넷플릭스의 국내 콘텐츠 투자는 2016~2020년 약 5조6000억원의 사회경제적 파급 효과와 1만6000개 일자리 창출 효과를 유발했다. 케데헌과 ‘오징어게임’ 등 메가 히트작이 이어지면서 파생 효과는 더 확장됐을 가능성이 크다. 국내 콘텐츠산업 수출액은 2021년 기준 124억5000만달러로, 통계 집계 이후 매년 최고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변진호 이화여대 교수(경영학)는 “한국이 가진 융통성·개방성을 살리면 케데헌 열풍 같은 흐름을 이어갈 수 있다”며 “규제를 줄여 K컬처를 기반으로 글로벌 감성을 실험하는 플랫폼으로 진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경화 기자, 조선일보(25-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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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새 날까 감췄던 김밥, 이젠 '먹방'에 환호… 이건 역사적 여정"
'케데헌' 만든 경계인들
한국계 교포 아티스트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감독·프로듀서·주연 성우·가수 전원, 그리고 제작진 대부분이 한국계 미국인·캐나다인으로 구성돼 있다. 한국적 뿌리와 글로벌 감각을 두루 갖춘 교포가 K컬처의 재생산과 글로벌 확산을 주도하며 ‘하이브리드 파워’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다섯 살 때 이민을 떠난 매기 강(강민지) 감독은 “내 여권은 캐나다지만 마음속으로는 100% 한국인”이라며 “한국 문화의 세계화를 진지하게 추진하려면 한국과 동시에 다른 문화도 깊이 이해하는 창작자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런 건 우리밖에 못 만든다”

메가 히트 주제곡 ‘골든’의 작곡·가창을 맡은 이재(김은재·34)는 미국에서 건너와 SM엔터테인먼트 연습생으로 12년간 활동했다. 데뷔에는 실패했지만 이 좌절의 경험은 훗날 ‘골든’의 자양분이 됐다. 그는 미국 포브스 인터뷰에서 “나는 아이돌 연습생이었고 한국 관용어를 잘 알고 한국 드라마도 많이 본 데다 모국어는 영어”라며 “이런 배경이 노래를 만들 때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한때 약점으로 여겨진 교포들의 이중 정체성이 ‘K’의 비약적 확산으로 강점이 된 것이다. 이재는 “초록조차도 노랑과 파랑이 섞인 아름다운 색”이라며 “내가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걸 그렇게 생각한다”고 했다.
유창한 영어 실력과 친밀한 한국적 감수성을 겸비해 ‘케데헌’ 남자 주인공 성우에 캐스팅된 안효섭(폴 안·30)처럼 글로벌 콘텐츠가 늘어날수록 양쪽 능력을 발휘할 기회는 커지고 있다. ‘케데헌’에서 한의사 캐릭터 성우로 참여한 미 배우 대니얼 대 킴(김대현·57)은 “교포가 된다는 것은 다른 두 문화의 ‘수혜자’가 된다는 의미”라고 했다.
◇지금이 절호의 찬스였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 주인공 헌트릭스 3인방 성우를 맡은 한국계 미국인 배우 메이 홍, 아덴 조, 유지영(왼쪽부터). /넷플릭스
‘경계인’이라는 정체성은 그러나 양날의 검이었다. 헌터와 데몬의 경계에서 갈등하는 영화 속 주인공 ‘루미’의 모습에도 이같은 내적 혼란이 투영돼있다. 매기 강 감독은 “초등학생 시절 선생님이 어디서 왔느냐고 묻기에 ‘사우스 코리아’라고 알려줬는데도 지도에서 못 찾았다”며 “그때부터 우리나라를 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고 했다.
이 열망은 한국 문화를 알리려는 구체적 노력으로 이어졌다. 매기 강은 “할리우드에서 10여 년 일하면서도 좀처럼 기회가 없었는데 한국 노래와 영화·드라마가 세계적으로 주목받게 된 지금이 기회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헌트릭스 ‘미라’의 노래를 담당한 래퍼 오드리 누나(추해원·26)는 팟캐스트에 출연해 루미의 김밥 먹방에 쏟아지는 환호에 격세지감을 느꼈다고 털어놨다. 그는 “어릴 적 냄새 나는 김밥과 도시락을 숨기면서 자랐다”며 “이렇게 성장한 한국 문화를 보는 건 정말 북받치는 일”이라고 했다. “내가 여기 있을 수 있기까지 조상들이 겪어야 했던 험난함을 생각하면 이 사실을 당연시할 수 없다”며 “이건 K팝의 부상만이 아니라 매우 역사적인 여정”이라고도 했다. 어려서 잦은 인종차별에 시달렸던 텍사스 출신 아덴 조(40·루미 성우)는 “한국인으로서 멋진 걸 다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코리안이라는 ‘원팀’

방금 나온 국밥 뚝배기를 맨손으로 잡아 젓가락으로 떠먹으려는 주인공 루미. 한국인은 이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 다행히 오류는 바로 잡혔다. /넷플릭스
그러나 거리가 멀면 오차는 발생할 수밖에 없는 법. 간극은 ‘현장’에서 채워야했다. 철저한 고증을 위해 프로듀서 아그네스 리(이정아)는 한국인 스태프들과 전국을 누볐다. 태권도장을 운영했던 부친의 소개로 정확한 액션 신을 구현하려 제작진과 국기원을 찾아 태권도 기술을 참관하기도 했다. 소파가 있는데 굳이 땅바닥에 앉아 컵라면을 먹는 주인공, 수저를 놓기 전 식탁에 깔아둔 냅킨, 주차 금지 표지판 앞에 불법 주차된 자동차 같은 한국적 디테일은 이런 노력 덕에 가능했다. 루미가 갓 나온 뜨거운 국밥 뚝배기를 맨손으로 잡고, 심지어 젓가락으로 먹는 오류도 걸러낼 수 있었다.
K팝 열풍의 산실인 한국 연예 기획사와의 협업으로 제작은 탄력을 받았다. 빅뱅·블랙핑크 등을 키워낸 더블랙레이블 프로듀서 테디, 안무가 리정 등과 긴밀히 손발을 맞췄다. 이 같은 시너지는 한국 가수들에게도 기회가 되고 있다. 극중 사자 보이즈가 부른 ‘유어 아이돌’과 ‘소다팝’을 만든 한국 가수 빈스(이준석·36)는 “요즘 해외 작곡가들한테 연락이 많이 온다”며 “선망의 대상이었던 아티스트와 프로듀서들이 한국을 자주 찾는 것을 보면서 K팝이 니치(Niche·틈새) 장르가 아니라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외곽에서 중심으로

'케이팝 데몬 헌터스' 한 장면. 시즌2의 기대감도 커지고 있다. /넷플릭스
교포의 활약은 전방위에서 계속되고 있다. 영화로 제작된 소설 ‘파친코’ 작가 이민진, 지난해 에미상 8관왕에 빛나는 영화 ‘성난 사람들’의 감독 이성진, 역시 지난해 전미 비평가협회상 등을 쓸어담은 영화 ‘패스트 라이브스’의 감독 셀린 송(송하영) 등 한국적 색채가 크게 부각되는 작품들이 잇딴 성공을 거두면서 ‘K’의 국제화는 거세지는 중이다. ‘케데헌’도 시즌2를 둘러싼 힌트가 쏟아져나오고 있다. ‘데뷔: 케이팝 데몬 헌터스 스토리’라는 제목의 단편 애니메이션도 제작 단계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영화사 패러마운트픽처스는 ‘케데헌’ 주연 성우 중 한 명인 한국계 미국 배우 유지영과 한국계 미국 가수 에릭 남을 앞세운 K팝 영화 제작에 돌입했다. K팝 걸그룹이 되기 위해 TV 오디션에 참가하는 한국계 미국 소녀의 이야기. 협업 파트너 하이브 아메리카 측은 “할리우드 주요 영화 제작사 중 모든 촬영을 한국에서 하는 영화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밝혔다. 연출을 맡은 재미교포 벤슨 리(이경수·56) 감독은 “이 영화는 에너지, 열정, 마법, 이를 지지하는 엄청난 커뮤니티를 지닌 K팝에 대한 나의 러브레터”라고 했다.
-정상혁 기자, 조선일보(25-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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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드 인 코리아'만 K콘텐츠? 편견 버려야
‘케이팝 데몬 헌터스(이하 케데헌)’는 까치 호랑이·김밥·낙산공원 등 지극히 한국적인 것을 소재로 한다. 그러나 일본 소니그룹의 미국 자회사 소니픽처스 애니메이션이 제작을 주도하고, 넷플릭스가 공동 투자와 독점 유통을 맡았다는 점에서 ‘재주는 K콘텐츠가 부리고 돈은 해외 자본이 쓸어간다’는 지적도 나온다.

낙산공원에서 사진을 찍는 외국인들. /김지호 기자
이 논란 안으로 더 깊게 들어가면, ‘과연 케데헌은 K콘텐츠인가’ 하는 질문과 맞닥뜨리게 된다. 글로벌 거대 자본이 제작과 유통을 맡아 나온 결과물을 과연 우리 것이라 부를 수 있느냐는 얘기가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제 ‘K’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내릴 때가 됐다”고 입을 모은다. 김교석 대중문화 평론가는 “한국에서 제작도 하고 돈도 지원해서 만든 완성품, 즉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만 한국 문화 콘텐츠라는 인식은 이제 좁은 시야일 수 있다”며 “한국 문화가 주류에 편입돼 세계적으로 소비되고 자연스럽게 물결쳐서 퍼져 나가는 현상 자체를 긍정적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케데헌은 한국적인 것을 소재로 인류 보편적 주제를 끌어내 전 세계적으로 공감대를 형성하고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K콘텐츠의 저력을 입증한 것이라는 평가가 많다.
한국 콘텐츠 수출을 담당하는 한 관계자는 “케데헌을 보고 전 세계 사람들이 서울을 ‘핫한 곳’으로 인식하고, 한식을 먹고 싶게 만든다”며 “이처럼 문화적 소프트 파워가 높아지는 건 경제적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라고 말했다.
다만 문화 강국 도약을 위해선 글로벌 지식재산권(IP) 확장 전략 고민은 여전히 필요하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지난달 17일 ‘2025 세계 지식재산권자 상위 50’ 명단을 분석한 결과 한국 기업은 단 한 곳도 이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미국은 32곳, 일본은 7곳이 포함됐다. 외국 자본에 종속되는 흐름이 가속되면 한국 콘텐츠의 다양성과 질적 성장을 제약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김 평론가는 “이제는 단순히 콘텐츠를 납품하는 단계를 넘어 IP를 확보하는 게 한국 문화 산업이 해결해야 할 숙제”라면서도 “한국의 문화적 소프트 파워가 높아지면 이런 부분에 대해서도 변화를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남정미 기자, 조선일보(25-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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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데헌 속 까치 호랑이가 바로 '이 작품' 안에 있네
소나무 호랑이 까치 무늬 항아리

소나무 호랑이 까치 무늬 항아리. 까치와 호랑이가 그려진 이 청화백자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18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동계올림픽 기념 특별전으로 기획한 ‘동아시아의 호랑이 미술’을 여러 직원과 함께 준비한 적이 있다. 호랑이는 한국·중국·일본 전통 미술에 제법 자주 등장한다. 호랑이가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미술 속 호랑이 모습은 다채롭기만 하다. 상서로운 상상의 동물, 위협적 맹수의 면모를 보일 때도 있지만 온순한 고양이 같을 때도 있다. 실제 호랑이 눈의 동공은 인간처럼 동글게 축소되는데, 일부 그림 속 호랑이는 밝은 곳에 있는 고양이처럼 세로로 긴 모양의 동공을 지니고 있다. 실제 호랑이 눈을 제대로 봤다면 살아남아 이렇게 그림을 그리지 못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동료들과 나누던 기억이 난다.
물론 미술 속 호랑이가 모두 실물 호랑이를 보고 형상화한 것은 아니다. 옛 중국 기록에는 산속 나무 위에 시렁을 만들어 호랑이를 내려다보며 그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조선시대 맹호도의 호랑이는 그림 밖으로 막 걸어 나올 것처럼 실감 나게 묘사되어 실제 호랑이를 보고 그렸을 것만 같다. 호랑이에 대한 직간접적 경험도 중요했겠지만, 일정한 형식이나 도상 속 호랑이는 앞선 시기 미술에 보이는 표현이나 도안을 참고했을 것이다. 요사이 ‘케이팝 데몬 헌터스’로 주목받는 까치 호랑이 그림도 하나의 도상으로 자리 잡은 예다. 조선시대에 인기 있었던 이 도상은 회화·판화·도자기 등 여러 매체로 표현되었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애니메이션 영화에도 등장하게 된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에 종종 소개되는 작품으로 까치 호랑이가 그려진 청화백자가 있다. 그림이 그려진 항아리는 기형과 유색으로 볼 때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호랑이와 까치의 흥미진진한 대치 상황이 몸체 위아래의 장식 문양 사이에 마련된 넓은 공간에서 펼쳐진다. 호랑이는 평평한 바위에 앉아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고 있다. 몸에는 줄무늬뿐만 아니라 동그라미와 점이 군데군데 표현되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예부터 호랑이와 표범을 한 종류로 여겼기에 호랑이를 표현할 때 이렇게 표범 무늬를 넣기도 했다. 호랑이의 매서운 시선은 길게 뻗은 소나무 가지 위에 앉아 있는 한 쌍의 까치를 향하고 있다. 까치 한 마리는 호랑이를 바라보고 있고, 다른 한 마리는 방향을 달리하여 호랑이의 시선을 피하고 있다.
까치 호랑이 그림은 벽사(辟邪), 길상(吉祥)의 의미를 담고 있어 용도가 있는 그림이기도 했지만, 호랑이와 까치가 만들어내는 이러한 재미있는 광경은 이 그림이 오랫동안 널리 사랑받은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김혜원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장, 조선일보(25-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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