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國史-文化]

[경천사지 십층석탑] [원각사지 10층 석탑] [조선 불교 탄압 전말사]

뚝섬 2025. 9. 14. 05:41

[경천사지 십층석탑]

[원각사지 10층 석탑] 

[조선 불교 탄압 전말사]

 

 

 

경천사지 십층석탑..

 

"천하에 둘도 없이 정교"… 한국 건축사상 기념비적 유산 

 

13.5m 높이의 경천사지 십층석탑. 1348년 조성된 이 탑은 기존 불탑 전통을 활용해 새로운 형식을 창안하고 이를 완성도 있게 구현했다.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1만여 점 전시품 가운데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인터넷에 노출되는 빈도가 높은 편에 속한다. 전시실 입구로 들어가 ‘역사의 길’이라 부르는 중심 회랑을 따라 걷다 보면 그 끝에서 이 탑을 마주하게 된다. 높이 13.5m에 달하는 압도적 크기의 탑 주변은 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붐빈다.

 

경천사는 개성 부근 부소산 기슭에 세워졌던 사찰이다. 창건 연대는 알려지지 않지만, 고려 예종(재위 1106~1122) 이래 여러 왕이 방문한 기록이 있어 12세기에 주요 사찰로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인다. 십층석탑은 충목왕(재위 1345~1348) 4년인 1348년에 조성됐다. 탑에 새겨진 명문에는 원나라 황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내용과 더불어 강융과 고용봉이 대시주(大施主)로 등장한다. 두 사람은 원나라 권력자와 가까웠고 높은 지위와 권세를 누렸다.

 

일부 친원 세력의 정치적 의도가 다분한 기획이었지만, 이 탑은 우리나라와 원나라 불탑 전통을 활용해 새로운 형식을 창안하고 이를 완성도 있게 구현했다는 점에서 기념비적인 건축물이다. 우리나라 석탑은 사각·팔각 등 일정한 기하학적 형태를 층층이 반복하는 게 일반적 문법이다.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이에 변화를 줘 기단부터 3층 탑신까지는 사면에 돌출부가 있는 형태를, 4층부터 10층까지는 단순한 방형을 반복해 올렸다. 여러 면에 걸쳐 이어지는 탑 표면에는 부조가 빈틈없이 새겨졌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은 이 조각을 두고 “인물이 살아 있는 듯하고 형용이 또렷또렷해 천하에 둘도 없이 정교하게 만들었다”고 찬탄했다. 재료는 대리석인데, 우리나라 석탑에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화강암보다 물러 이러한 세밀한 조각을 하기에 좋았다.

 

탑의 부조는 탑과 같은 높이에 섰을 때 시선이 충분히 닿는 기단부에서 3층 탑신까지의 내용이 가장 풍부하다. 기단부에는 동아시아 불교계의 전설적 셀럽인 현장법사의 구법 여행이 비중 있게 표현돼 있다. 탑신부 1~3층에서는 여러 부처의 설법 모임이 펼쳐진다. 각각의 부처는 불전(佛殿)처럼 보이는 건축물 안에 앉아 보살과 청중에게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경천사지십층석탑 굿즈. /국립박물관문화재단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많은 이를 매료시켰다. 조선 시대 세조 때인 1464년 이 탑을 거의 완벽하게 모방한 원각사 십층석탑을 세웠다. 1907년에는 일본 궁내대신 다나카 미쓰야키가 일본으로 무단 반출하기도 했다. 1918년 우리나라로 돌아온 후 1960년 경복궁 안에 세워졌고 다시 대대적 수리, 복원 과정을 거쳐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됐다. 근래에는 매주 수요일 야간 개장 때 미디어 파사드 쇼의 주인공이 되고 있다. 여기에서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화려한 조명과 색채를 입은 색다른 모습으로 관람객과 만난다.

 

-김혜원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장, 조선일보(25-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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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각사지 10층 석탑

 

흰색 대리석으로 만든 탑… 삼장법사·손오공 조각 

 

일제시대에 촬영한 원각사지 석탑. 조선 후기 이후부터 맨 꼭대기 3개 층이 없는 상태였어요. /국립중앙박물관

 

지난 1일은 3·1운동이 일어난 지 104주년이 되는 날이에요. 1919년 3월 1일 민족 대표들은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태화관에 모여 독립을 선언했죠. 탑골공원에서는 학생과 시민들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며 독립 만세를 외쳤고요. 탑골공원이 지금처럼 불린 것은 1992년 이후의 일이고, 예전에는 탑(塔)을 뜻하는 영어 단어 '파고다(pagoda)'를 따서 파고다 공원으로 불렸어요. 지금 이곳에는 원각사지 10층 석탑과 절의 창건(創建) 내력을 적은 비석이 남아 있죠. 원각사가 어떤 절이고, 석탑은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지 좀 더 알아볼까요.

세조가 세운 정치적 상징물

원각사(圓覺寺)는 고려 때 흥복사(興福寺)라 불리던 절이 있던 곳으로, 조선 전기에 국왕이 주도해서 만든 유일한 사찰이에요. 1464년 세조는 한양 도심에 대규모 사찰을 세우도록 했고, 1467년에는 대리석으로 거대한 탑을 만들었어요. 조선은 성리학을 건국 이념으로 채택하면서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을 추진했어요. 새로운 도성인 한양을 건설하면서 4대문 안에는 원칙적으로 불교 사원을 세우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죠. 하지만 조카인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세조(재위 1455~1468)가 즉위 10년을 기념하는 정치적 상징물로 원각사와 거대한 탑을 세운 거예요.

이후 원각사는 국왕이 병에 걸렸을 때 기도하는 장소였고, 가뭄이 들었을 때는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는 기우제(祈雨祭), 장마가 계속되면 비가 멎기를 빌던 기청제(祈晴祭)를 드리는 장소이기도 했어요. 또 명(明)과 일본 사신들이 자주 찾던 곳이었어요. 명나라 사신들은 자주 원각사를 찾아 향을 피우며 부처에게 예를 다하고 많은 재물을 시주했어요. 일본 사신들은 원각사 석탑이 천하의 최고라고 들었다며 별도로 관람을 요청하기도 했대요.

그러나 조선 시대 유학자들이 보기에 한양 도성 한복판에 우뚝 솟아있는 원각사 석탑은 유교적 세계관이 구현된 한양의 경관을 해치는 건축물로 반드시 없애야 할 대상이었어요. 세조가 죽은 뒤 이러한 원각사의 운명은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었어요. 1504년 연산군은 원각사에서 모든 승려를 내쫓고, 이듬해 장악원(掌樂院·궁중의 음악과 무용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을 이곳으로 옮겨버렸죠. 이때부터 원각사에서 사찰의 기능은 사라지게 됐어요. 더 시간이 흐르면서 원각사 석탑과 비석을 제외한 목조 건물들은 무너지거나 철거됐죠.

1919년 3·1운동 당시 원각사 석탑은 가장 상층부 세 층이 없는 상태였는데요. 여러 속설이 있지만 임진왜란 때 일본 장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상층부 세 층을 가져가려고 내렸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죠. 현재와 같은 모습은 1946년 미군이 가장 위쪽 지붕돌을 복원하여 완성한 것이에요.

흉물에서 한양의 랜드마크로

원각사는 없어졌지만 석탑과 비석은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여전히 한양 도심에 굳건하게 서 있었어요. 원각사지 석탑은 백색 대리석으로 만든 석탑이라 '백탑(白塔)'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유학자들에게는 끝까지 유교적 이념이 구현돼야 할 한양의 경관을 해치는 '비미(非美·아름답지 못함)'한 존재로 인식됐어요.

유학자들의 부정적 인식은 1880년대 문화 개방과 함께 들어온 서양인들에 의해 완전히 바뀌어요. 그들은 인구 25만명이 거주하는 한성 도심에 백색 석탑이 홀로 솟아 있는 기이한 경관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어요. 원각사 석탑은 더는 흉물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한양의 유일한 볼거리로 유명해졌어요.

서양의 이방인들은 원각사지 석탑을 카메라로 촬영하거나 그림으로 묘사했고, 자신들이 듣고 본 이야기를 책으로 남겼어요. 예를 들어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저술한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은 직접 촬영한 석탑 사진을 남겼고, 영국의 유명한 여류 여행가 이저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 Bishop)은 4차례나 조선을 방문해 "원각사 석탑이 원래 13층이었는데 제일 상층부 세 층이 300년 전 일본의 침략(임진왜란)으로 석탑 옆에 내려졌다"는 당시 소문을 기록으로 남겼어요.

사실 원각사지 석탑은 그보다 약 120년 전인 1348년 만들어진 경천사지 10층 석탑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물게 대리석으로 만든 8각형 석탑으로, 층마다 불교와 관련된 다양한 장면이 정교하게 조각돼 있어요. 경천사지 석탑은 고려 말 원나라에서 유행하던 양식을 받아서 만들어졌고, 원각사지 석탑은 경천사지 석탑을 본떠 만든 거예요.

 

1946년 2월 미군(美軍)이 기중기로 원각사지 석탑 꼭대기 층의 지붕돌을 올리고 있어요. /국립중앙박물관

 

그런데 원각사지 석탑에서 눈길을 끄는 것이 있어요. 가장 아래쪽에 자리한 기단부에 삼장법사와 손오공 등 서유기(西遊記)의 인물들이 조각됐다는 점이죠. 원각사지 석탑의 서유기 장면은 대중에게 친숙한 이야기를 활용해서 불교라는 종교적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려고 한 사례라 할 수 있어요.

그렇다면 원각사지 석탑은 몇 층일까요? 일반적으로 탑의 층수를 셀 때는 기단부(基壇部)와 상륜부(相輪部·원기둥 모양의 장식이 있는 탑의 꼭대기 부분)를 제외하고 몸돌과 지붕돌을 합쳐 1층으로 셉니다. 이렇게 보면 이 석탑은 탑을 받쳐주는 3층의 기단 위에 10층의 탑신부(塔身部·탑의 기단과 상륜 사이, 탑의 몸에 해당하는 부분)를 가진 10층 석탑이라 할 수 있어요. 그 때문에 보물로 지정된 이 석탑의 공식 명칭도 '원각사지 10층 석탑'이에요.

그러나 원각사의 창건 내력을 적은 원각사 비석에는 이 탑을 13층으로 기록하고 있어요. 또 조선 시대에 이 탑의 모델이 된 경천사지 석탑을 10층이 아닌 13층으로 서술한 기록이 남아 있죠. 그래서 이 탑을 '13층'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있어요. 불교에서는 '13층'을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수행의 단계로 보고, 13을 매우 특별하면서도 신성한 숫자로 여기고 있죠. 현재 탑의 층수를 세는 방식처럼 10층으로 보는 것이 좋을지, 그것을 건립한 사람들 의도처럼 13층으로 보는 것이 좋을지는 좀 더 논의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좌) 원각사지 석탑 기단부에 남아 있는 서유기 부조(浮彫·평면 재료 위에 높낮이를 만들어 조각하는 기법). 손오공이 철선 공주에게서 빼앗은 큰 부채를 들고 화염산(火焰山)의 불을 끄고 지나가는 장면이에요. 그 뒤로 현장법사와 저팔계, 사오정이 차례로 서 있어요. /(우) 원각사의 창건 내력을 적은 원각사비(碑). 현재는 마멸이 심해 거의 읽을 수 없지만, 1518년 간행된 ‘속동문선(續東文選)’에 비문을 옮겨 적은 기록이 남아 있어 원각사에 13층 탑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어요. /문화재청

 

-기획·구성=안영 기자/이병호 공주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조선일보(23-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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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불교 탄압 전말사

 

그 많던 절들은 어디로 다 가버렸을까

강원도 원주에 있는 거돈사지. 고려 왕찰이었던 거돈사는 임진왜란을 전후해 폐허가 됐다. 전란 탓도 있지만 축대가 온전하고 불상들 목이 달아난 흔적으로 미뤄볼 때 누군가가 고의로 파괴한 부분도 보인다. 서울 원각사, 양주 회암사는 성리학 세력에 의해 사라진 대표적인 사찰이다. 부패한 불교 세력을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운 조선 사대부는 조선 말까지 불교 말살을 기도했다. 이들은 승려들을 '무위도식하는 자'로 비난하는 동시에 '의승(義僧)'이라 부르며 산성 축성, 왕릉 공사, 종이 제작, 시신 매장 같은 부역에 강제로 동원했다.

 

의승(義僧): 임진왜란 때 의병의 한 형태로 참전한 승려들을 지칭하는 말. 조선 후기에는 남한산성 및 북한산성 등에서 교대로 상번하던 지방 승군들을 통칭하는 용어로 쓰임(한국학중앙연구원 '역주 조선왕조실록')

―특징: 죽을힘을 다한다(盡其死力·진기사력)(1669년 6월 20일 '현종실록')

―사회적 대우: '놀고먹는 자 중 으뜸'(倖民中僧尼爲最·행민중승니위최)(송시열, 1669년 1월 4일 '현종실록')

 

그랬다. 승려를 '군(軍)'이라 칭하며 부역에 데려다 쓰고, 죽을힘 다해 임무를 완수하는 그들을, 그들을 부려먹는 사대부들은 놀고먹는 놈이라 불렀다. 승려들이 남한산성, 북한산성 만들고 종이 만들어 사대부 읽을 책들 찍는 사이에 그네들이 살던 대찰(大刹)은 방화로 사라졌다. 누가 태웠나. 그 사대부들이 태웠다.

조선 왕조 개국과 척불(斥佛)

1392년 7월 17일 이성계가 개경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다섯 달 뒤인 12월 6일 양광도(광주와 양주)와 경상도 안렴사(도지사) 조박과 심효생이 "상중에는 부처 공양을 금하겠다"고 보고했다. 임금이 고개를 저으며 이리 말했다. "대유학자 이색도 부처를 숭상했거늘, 이 무리들은 무슨 글을 읽었건대 부처를 좋아하지 않는가?"(1392년 12월 6일 '태조실록')

왕조를 바꾼 역성혁명 동지는 성리학으로 중무장한 신흥 사대부였다. 타도 대상인 고려 말 실세는 불교 세력이었다. 혁명 구호는 당연히 억불(抑佛)이었다. 이론에 대한 공격보다는 불교 세력이 저지른 악행을 문제 삼았다. 옛 지배 세력 뿌리를 뽑아야 새 지배 질서가 구축될 수 있었으니까.

 

성리학 사대부 집단은 집권 초부터 끝없이 왕들에게 척불(斥佛)을 요구했다. 혁명에 군사력을 제공한 전주 이씨 왕족은 그게 이상했다. 왜 불교를? 하지만 조선은 왕권과 신권의 연합 왕국이다. 대개 역대 왕들은 사대부 의견을 따랐다. 이들이 내세운 논리는 '아비도 군주도 없는(無父無君·무부무군) 불충불효의 교를 방치하면 천리(天理)가 멸망한다'였다.(성균관 생원 101명 집단 상서(上書), 1424년 3월 12일 '세종실록')

1516년 승려, 법전에서 사라지다

개국 초기부터 승려들은 부역에 동원됐다. 한양 신 도읍, 경복궁 건설에도 승려들이 동원됐다. 하지만 기준은 있었다. '마음 수양하는 자' '강론하는 자'는 제외되고 '초상집에서 옷과 음식을 기웃대는' 하등 승려들만 동원됐다.(1395년 2월 19일 '태조실록') 이들에게는 승려 신분증인 도첩(度牒)을 부여했다.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앉힌 사림파는 이 '도첩' 자체를 폐지하라고 요구했다. 승려 자체를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재위 4년째인 1509년 9월 29일 중종에게 사헌부가 도첩제 폐지를 요구했다. 중종은 거부했다. 요구는 하루도 빠짐없었다. 10월 25일 왕에게 사헌부 관리가 이렇게 물었다. "사설에 빠지셨나이까(惑於邪說乎·혹어사설호)?" 왕은 또 거부했다. 이틀 뒤 사간원 대간이 말했다. "대단히 실망이외다(尤爲缺望·우위결망)." 7년 뒤 중종은 결국 '경국대전'에서 도첩제 항목을 삭제하는 데 동의해버렸다.(1516년 12월 16일 '중종실록')

승려들, 산성을 쌓다

이괄의 난을 치른 인조 정권은 내란과 오랑캐 후금 침략에 대비해 남한산성을 쌓았다. 1624년 7월부터 1626년 11월까지 진행된 축성 공사에는 100% 승려들이 투입됐다. '놀고먹는 인원을 투입했는데, 명승 각성(覺性)이 팔도에서 온 승려들을 총섭했다.'(장유, '남한성기'(1643), 서치상, '벽암각성과 남한산성의 축성조직', 한국건축역사학회 2009년 9월 학술발표회) 비슷한 시기에 벌어진 평양성 축성 공사에는 충청·강원·황해 승려 600명이 징발됐다.(1624년 6월 27일 '인조실록') 숙종 때 북한산성 축성 공사도 100% 징발된 승려들 작업이었다. 이들을 통칭 '축성승군(築城僧軍)'이라 한다.
 

양주 회암사지. 16세기 후반 명종~선조 연간에 유생 집단에 의해 소실됐다.

 

승려들을 징발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군역의 고통이 혹심해 이를 피해 승려가 된 자가 10 중 6~7'(1636년 8월 20일 '인조실록')이기 때문이었다. 가혹한 수취 체제로 백성이 절로 도망갔으니 이들을 부려야 한다는, 이 악순환적 논리에 승려들은 부역승이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일반 백성이 사흘 걸릴 일을 사력(死力)을 다해 하루 만에 끝내는'(1669년 6월 20일 '현종실록') 우수한 노동자였다. 게다가 식량을 스스로 마련해야 하는 무임금 노동자였다. 이들은 단순히 승군이라 불리다가 숙종 때 '의승(義僧)'으로 통칭됐다.

축성이 끝나면 승군 일부는 성에 남아 성을 방어했다. 절을 짓고, 높은 누각을 지어 무기고로 사용했다.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에는 병영 겸 절 용도로 만든 '승영사찰(僧營寺刹)'이 각각 10군데, 11군데 있었다. 사찰 건축 또한 승려들이 맡았다. 이를 '모승건찰(募僧建刹·승려를 모아 절을 지음)'이라고 불렀다. 승영사찰 근무 또한 각도에서 차출된 승려들이 맡았으니, 이 제도를 '의승입번(義僧立番·승군이 교대로 복무)'이라고 했다.

이름이 뭐든, 승려는 노동력에 불과했다. 의승들 군량미와 각종 비용은 모조리 소속 사찰 부담이었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2년 뒤인 1639년 '의승'이라는 말에 으쓱해진 전라도 승군이 깃발을 세우고 장수라 칭했다. 그러자 인조는 "실로 큰 변고이니 의법조치하라"고 명했다.(1639년 1월 7일 '인조실록')

승려들, 왕릉을 만들다

광해군 때 일부 지역을 시작으로 대동법(大同法)이 시행됐다. 각종 공물을 현물 대신 쌀로 받는 세제다. 단, 두 예외가 있었으니 왕릉을 만드는 산릉역(山陵役)과 중국 사신 접대를 위한 조사역(詔使役)은 여전히 쌀이 아닌 부역으로 메꿨다. 그리고 공물을 만들던 여러 부역이 쌀로 바뀌면서 조선 정부는 필요한 현물을 승려들 부역으로 충당하기 시작했다.

이 산릉과 조사 작업에 주로 투입된 인력이 '농사에 바쁜 백성이 아닌', 의승들이었다. 1718년 숙종 세자빈 심씨 산릉에는 1000명이, 1720년 숙종 사후 산릉 작업에는 승군 2000명이 징발됐다. 작업 기간 먹을 식량은 승군 각자가 준비했다.(1718년 2월 20일 '숙종실록', 1720년 6월 14일 '승정원일기') 시신 매장, 도토리 줍기, 제방 공사, 벌목, 석재·벽돌 제작, 군량 운송에도 모두 승군이 동원됐다.

승려들, 종이를 만들다
 

 

종이 만드는 지역(紙役)을 혁파해준 양산 통도사 주지 덕암당 혜경 공덕비.

 

왜란과 호란 이후 종이 만들던 국립 조지서는 파괴됐다. 하지만 종이 수요는 급증했다. 대동법 이후 농민들은 종이 재료인 닥종이 밭을 논으로 바꿔버렸다. 종이는, 절에서 만들게 됐다. 그 '지역(紙役)'이 하도 지독해서 지치고 쇠약해진 승려들이 다 도망가 폐사되는 절도 속속 생겨났다.(1786년 7월 24일 '비변사등록')

1800년대 후반 양산 통도사 또한 폐사될 위기에 빠졌다. 그때 주지 덕암당이 6개월 동안 머리를 길러 평민으로 위장하고 서울로 가서 권력가 권돈인을 만나 담판을 지었다. 1838년 무렵 권돈인이 경상관찰사로 와서 지역을 혁파했다. 그 '어마어마한' 혜택에 감격한 통도사는 이 두 사람 각자를 위해 공덕비를 세웠다.

사대부들은 절에서 만든 종이로 책을 만들고 황제국 청나라 조공에 충당했다. 1643년 인조 때 청나라로 보내는 조공 종이(방물지)는 8만7000권이었고 1650년 효종 때는 11만5500권이었다.(오경후, '조선후기 승역의 유형과 폐단', 국사관논총 107집, 2005)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1권은 20장을 뜻한다.

지역 사대부까지 승려들을 구박했다. 1785년 7월 13일 충청도 화양동 만동묘 중수공사에 화양동서원 유생들이 상주 승려들을 징발했다. 서원 유생들이 떼로 체포됐다. 유생들은 "하찮은 승려를 부렸기로 이렇게 황묘(皇廟) 역사를 방해하는가"라고 반발했다.(1785년 7월 13일 '정조실록') 왕도 어찌하지 못하는, 선비의 나라였다.

탄압의 극성기, 현종 시대

성리학 교조화가 한창이던 1659년 현종이 즉위했다. 백성이 누릴 권리는 박탈당하고 군사 의무와 토목 의무와 잡역 의무만 잔뜩 짊어진 그 승려들에게 재앙이 닥쳤다. 이듬해 내린 조치는 이러했다. 첫째, 왕실 사찰인 원당(願堂) 철폐(1660년 4월 3일). 둘째, 모든 승려들 환속 조치(12월 19일). 셋째, 왕실 여자들의 절인 자수원과 인수원 철폐. 넷째, 자수원에 있는 열성신패 매립(이상 1661년 1월 5일 '현종실록').

탄압 정도가 아니라 말살을 기도하는 이 정책에, 남한산성 축성 감독인 각성의 제자 처능이 이렇게 상소했다. "종이도 잡물도 승려들이 만든다. 관청에서 겨우 걸어 나오는데 또 동원령이 떨어진다. 어기면 매질을 당한다.”(백곡 처능,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불교 폐지에 대한 상소)', 1661, 오경후, '조선 후기 불교정책과 대응론', 역사민속학, 2009 재인용)

1797년 정조가 이렇게 한탄했다. "승려들이 돈을 마련하는 것이 거북이 등에서 털을 깎아 내는 것과 다름없게 되었구나."(정조, '홍재전서'164, 일득록4 문학4) 왕이 한탄해도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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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원주에 있는 거돈사는 황량하다. 저 너른 터에 신라 양식 석탑 하나와 부처상 사라진 석좌(石座) 하나가 서 있다. 언제 절이 사라졌는지 아무도 모른다. 조금씩 부서지지 않고 단기간에 파괴됐다고 폐사지 흔적은 말한다. 1566년 개성 사는 유생이 이성계가 살던 양주 회암사를 불태우려는 시도가 적발됐다.(1566년 4월 20일 '명종실록') 33년 뒤인 1599년 6월 4일 '선조실록'에서 회암사는 '회암사 옛터'로 변해 있었다. 그 사이 유생들이 방화를 하고 불상 목을 깨뜨려 담벼락 아래 버린 것이다. 절에 있던 무학대사 승탑은 1821년 광주 사는 유생 이응준이 아비 묘를 쓴다고 부서뜨렸다.(1821년 7월 23일 '순조실록') 서울 탑골공원에 있던 원각사는 연산군 때 폐사되고 운평(運平·무희) 1000명과 광희(廣熙·악사) 1000명과 가흥청(假興淸·2급 기생) 200명이 상주하는 궁중 음악원 장악원(掌樂院)으로 변했다.(1505년 2월 21일 '연산군일기') 그런 절이 팔도에 숱하고, 목 달아난 불상이 도처에 흔하다.

아, 막장 이야기로 끝낸다. 1674년 8월 18일 서인에 등 떠밀려 불교를 탄압했던 현종이 죽었다. 그달 27일 전국에서 장정 2650명이 징발됐다. 2650명 모두, 승려였다.(1674년 8월 27일 '숙종실록') 조선 의승 이야기였다.


-박종인 선임기자, 조선일보(20-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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