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셉트에 갇힌 미식의 자유]
[‘겉바속촉’ 아닌 ‘겉딱속질’… K-치킨에 필요한 한 끗 섬세함]
콘셉트에 갇힌 미식의 자유

얼마 전 광화문의 한 중식당. 실내에 들어서자 프랜차이즈답지 않은 점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은은한 조명과 탁 트인 실내, ‘데이트 맛집’이란 후기가 어울렸다. 북경오리가 나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얇게 잘리기 전 온전한 모습으로 누운 오리가 등장했고, 오리발 모양의 작은 금속 잔이 식탁에 놓였다. 잔 안에는 ‘NO.32153’라고 적힌 종이가 들어 있었다. 이 가게에서 요리된 3만2153번째 오리라는 뜻. 생소한 장면의 뜻을 생각하는 찰나, 이 나간 그릇이 결정타를 날렸다. 깨진 그릇을 바꿔 달라 하니 종업원은 “중국에선 복(福)을 상징한다”고 했다. 중국 문화에 문외한 일행들로선 “그런 거냐?”며 어색함을 적당한 웃음으로 넘겼다.

얇게 썰기 전의 북경오리 모습./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번호 달린 오리와 깨진 그릇의 조합은 참 신선했다. 더 신선한 충격은 그걸 경험한 이들의 반응이었다. “지인이 안 알려줬으면 깨진 그릇 바꿔 달라고 할 뻔했는데, 다행이었다” “서울에서 경험하는 진짜 중국 문화”.... 일부는 이런 후기를 남긴 것을 봤다. 그러나 서울 한복판, 국내 대형 식품 기업이 운영하는 프랜차이즈에서 경험하는 진짜 중국 문화라니. ‘굳이’라는 생각을 지우기 어려웠다. 이 지독한 콘셉트를 의심하는 사이, 오리 맛에 대한 기억은 어느새 사라졌다. 3만2153번. 장발장 죄수번호(24601) 같은 그 숫자만이 머리에 남았다.
지독한 콘셉트가 지배하는 시대다. 최근 생기는 식당에 가보면, Z세대인 기자도 받아들이기 난감한 요소가 많다. 간판이 없는 것까진 간신히 적응이 됐는데, 이젠 출입구가 안 보이는 곳도 생기기 시작했다. 방이동 먹자 골목 한가운데엔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과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이라 적힌 정승이 우뚝 솟아 있다. 그곳이 칵테일바라는 것을 최근에야 알았다. 심지어 부적과 불상(佛像)이 놓여 있는데, 문 여는 방법을 알지 못해 애먹는 이도 여럿이다. 메뉴 이름은 양·용·소·뱀.… 12지신에서 따왔다고 한다.
무언가를 의심하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유독 우리의 식문화에서 의심은 죄가 된다. 돈 내고 시간 내서 함께하는 식사 자리에서 작은 의심은 분위기 망치려고 작정한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식당의 콘셉트가 점점 지독해지고 있다. 말을 아끼는 이들의 피로감은 늘어만 간다.
혼자 밥 먹을 때만큼은 제대로 된 현실을 즐기고 싶은 이가 점점 늘어나는 이유다. 한동안 방송 프로그램과 유튜브를 장악했던 여러 콘셉트의 먹방 인기가 시들해지고 있다. 지나치게 많지도 적지도 않은 양을 먹는 영상들이 최근 인기를 얻는 것이다. 가령 차력쇼처럼 통대창 10줄을 먹는 게 아니라, 한 조각 먹고 배부르다 하는 게 아니라, 적당히 먹고 “느끼해서 못 먹겠다”는 영상에 공감 댓글이 더 많이 달리고 있다.
광화문의 식당 밀집 지역에 있는 그 중식당을 자주 지나친다. 지금쯤이면 3만5000보다 큰 죄수 번호가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곳을 다시 가게 된다면, 이 말 한마디는 하고 싶다. “복은 사양할게요.”
-이영관 기자, 조선일보(25-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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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바속촉’ 아닌 ‘겉딱속질’… K-치킨에 필요한 한 끗 섬세함

깐부치킨이 돌연 화제의 중심에 섰다.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덕분이다. APEC 개최 직전인 10월 30일,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서울 강남구 깐부치킨 삼성점에서 회동했다. 김승일 깐부치킨 대표가 직접 매장을 청소하고 접객을 하는 등 이야깃거리가 많았다.
미국 실리콘밸리 인근의 한국식 치킨집 ‘99치킨’을 좋아하는 황 CEO는 “KFC는 ‘코리안 프라이드 치킨’”이라 말할 정도로 한국 치킨 마니아다. ‘젠슨 황 효과’로 전국 매장이 177곳(직영 8곳, 가맹 169곳)에 불과한 깐부치킨이 엄청난 ‘바이럴’을 탔다. 가맹 문의 등이 빗발치자 본사는 ‘당분간 신규 가맹점을 모집하지 않는다’는 공지를 올리기도 했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한다’는 표현이 진리인 현실, 기회가 왔을 때 보란 듯이 확장해도 모자랄 판국에 정반대로 가다니…. 참신하고 흥미로운 행보였다. 궁금한 마음에 깐부치킨에서 프라이드치킨(2만 원)을 시켜 먹었다. 가맹점 수가 많지 않고, 수도권에 집중된 브랜드였지만 마침 집 근처에 매장이 있었다.
주문 후 30분이 채 되지 않아 배달된 따뜻한 치킨을 맛보니 흥미로웠다. 꽤 묽은 반죽을 입혀 튀겨낸 덕분에 겉은 얇고 바삭했다. 속살은 가슴살처럼 퍽퍽함을 피할 수 없다고 믿는 부위마저 대체로 촉촉했다. 치킨의 미덕이라 불리는 이른바 ‘겉바속촉’이 구현된 것이다. 간마저 적절했다. 유일한 단점은 치킨 믹스(튀김옷 가루) 특유의 향이 거슬린다는 것이었다.
이게 되는구나. ‘K-치킨’이 세계로 뻗어나간 지 20년은 족히 흘렀지만, 정작 국내에서 먹는 치킨은 만족스럽지 못할 때가 많았다. 원인은 과조리와 간의 부족에 있다.
1kg 안팎의 닭을 튀기다 보니 ‘닭이 작아 한국 치킨은 맛없다’는 주장도 그럴싸하게 들리지만, 절반만 정답이다. ‘튀기면 운동화도 맛있어진다’는 우스갯말이 있을 만큼, 튀김은 식재료를 보호하면서도 맛을 끌어올리는 조리법이다. 작은 닭도 예외가 아니다. 문제는 조리의 섬세함을 좇지 않는 한식 전반의 경향에 충실하게 너무 바싹 튀겨버려 상당수 치킨이 뻣뻣하다. 집에서 치킨을 종종 해먹는데 69°C까지 닭고기 내부 온도가 오르도록 튀긴 뒤 여열로 74°C까지 올리면 촉촉함을 잃지 않는다.
간의 부족은 ‘염지’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됐다. 염지는 식재료를 소금이나 설탕물에 담가 삼투압으로 간을 맞추면서 동시에 수분을 채워 넣는 밑준비 공정이다. 작은 닭을 튀기는 우리 식문화에서는 간과 촉촉함,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을 필수 공정이다. 그러나 2014년경 한 방송이 염지를 문제 삼은 이후, ‘우리는 염지를 하지 않습니다’를 자랑처럼 내거는 치킨집이 나올 정도로 인식이 나빴다. 아직도 고기에 간을 안 해 싱거운 치킨이 많다.
묵은 오해는 버릴 때가 됐다. 다들 ‘겉바속촉’을 입버릇처럼 외치지만, 사실 겉은 딱딱하고 속은 질긴 ‘겉딱속질’ 치킨이 대부분이다. 양계 산업의 이익 산출 등으로 인해 현재의 작은 닭을 고수해야 한다면, 그만큼 섬세한 조리와 염지가 필수다. 한 마리 가격이 배달비를 포함해 대개 2만 원대 중반을 넘는 상황에서, 이는 K-치킨이 나아갈 유일한 길이다.
-이용재 음식평론가, 동아일보(25-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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