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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과 소금] [오늘 ‘김치의 날’… 해외시장 진출 전략 세워야] ....

뚝섬 2025. 12. 2. 09:40

[김장과 소금]

[오늘 ‘김치의 날’… 해외시장 진출 전략 세워야]

[우리가 먹는 속이 꽉찬 김장 배추, 우장춘의 ‘김치 혁명’ 덕분이었다]

 

 

 

김장과 소금

 

새콤하고 감칠맛 나는 김치 맛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겨울이 다가오면 우리 주변은 김장 준비로 분주해져요. 커다란 대야에 배추가 가득 담기고, 양념과 각종 채소가 쌓여 있는 모습은 마치 겨울을 준비하는 특별한 행사를 보는 것 같아요. 이 행사의 첫 단계가 무엇인지 알고 있나요? 바로 배추를 소금에 절이는 과정이에요. 그저 배추에 소금을 뿌려둔 것뿐인데, 단단하던 배추가 시간이 지날수록 힘없이 축 늘어지고 접을 수 있을 만큼 부드러워지죠. 이 놀라운 변화는 눈에 보이지 않는 원소들이 움직이기 때문에 일어나요.

 

오늘은 맛있는 김치를 만드는 비밀인 ‘소금’이 어떻게 배추를 변화시키고, 김치 맛을 만들어내는지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배추 속 양념 길 여는 삼투 현상

 

배추는 생각보다 물이 아주 많은 채소예요. 전체의 90% 정도가 물이에요. 이 물은 대부분 세포 안의 ‘액포’라는 공간에 저장돼 있어요. 액포에 물이 가득 차 세포가 팽팽해져서 배추를 씹으면 아삭아삭한 거예요. 이렇게 물이 많이 머금고 있는 배추는 소금을 만나면 금방 반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셈이에요.

 

소금은 염화나트륨(NaCl)이라고도 하는데요. 나트륨(Na)과 염소(Cl)라는 두 원소로 만들어진 물질이에요. 이때 두 원소는 서로 전자를 하나씩 주고받아 나트륨 이온(Na⁺)과 염소 이온(Cl⁻)으로 변해 단단한 결정이 된답니다.

 

소금이 배추를 씻고 남은 표면의 물에 닿아 녹기 시작하면, 물이 두 이온을 하나씩 끌어당겨 떨어뜨려요. 그러면 배추 바깥쪽은 이온이 많은 고농도 상태가 되고, 배추 세포 안쪽은 물이 더 많은 저농도 상태가 됩니다. 이렇게 안과 밖의 농도가 달라지면 자연스럽게 물이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물은 농도가 낮은 곳에서 농도가 높은 곳으로 이동하며 균형을 맞추려고 해요. 이런 현상을 ‘삼투 현상’이라고 하지요.

 

삼투 현상이 일어나면 배추 세포 안의 물이 세포 밖으로 빠져나가 배추는 숨이 죽어요. 하지만 이런 변화가 단순히 배추를 무르게 만들기만 하는 건 아니에요. 물이 빠져나가면서 배추 속 세포가 쪼그라들고 세포와 세포 사이 양념이 잘 스며들 수 있는 미세한 통로가 열린답니다. 그래서 배추를 잘 절일수록 양념이 속까지 고르게 스며들어 김치의 맛이 균일해져요. 절이지 않으면 겉만 짜고 속은 싱거운 김치가 된답니다.

 

부패균 물리치는 소금

 

배추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다양한 미생물이 살고 있습니다. 음식을 상하게 만드는 부패균도 있지만, 김치를 맛있게 만들어 주는 젖산균도 있답니다. 배추를 소금에 절이면 부패균은 짠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대부분 사라지지만, 젖산균은 소금에 강하기 때문에 살아남아요. 소금에 절인 배추는 젖산균이 자라기 좋은 환경이 되고, 이것이 김치의 맛을 만들어내는 토대가 되지요.

 

반대로 배추를 소금에 제대로 절이지 않으면 부패균이 쉽게 자라 김치가 금방 상할 수 있어요. 또 발효가 제대로 안 되어 맛이 탁해질 수도 있지요. 그래서 절임 과정은 김치의 맛에 중요할 뿐 아니라 김치를 안전하게 오래 보관하기 위해서 아주 중요한 단계랍니다.

 

김치 맛을 만드는 젖산균

 

소금에 절인 배추를 양념과 버무려 통에 넣어 밀폐하면 김치통 안엔 산소가 거의 없어요. 젖산균은 산소가 없어도 잘 사는 특별한 미생물이기 때문에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합니다. 젖산균은 배추 속에 남아 있는 포도당을 분해해 에너지를 얻는 과정에서 부산물로 젖산을 만들어 내요. 바로 이 젖산이 김치의 새콤한 맛을 결정하지요.

 

이 과정을 우리는 ‘발효’라고 불러요. 김치가 발효되면 신맛이 나는 젖산이 늘어나면서 산성도가 높아지는데요. 산성 환경 속에서 나쁜 세균은 대부분 살아남기 어려워요. 젖산 덕분에 김치는 냉장고가 없던 옛날에도 상하지 않고 겨울 내내 보관할 수 있었답니다.

 

발효가 진행되는 동안 김치에서는 여러 가지 맛 변화도 함께 일어나요. 김치 양념에 빠질 수 없는 젓갈에는 단백질과 효소가 들어있는데 김치가 익는 동안 효소가 단백질을 분해해요. 이때 생기는 아미노산은 감칠맛을 내죠. 마늘·생강·고추 등 야채는 김치 특유의 깊은 향을 더한답니다.

 

소금과 원소·미생물이 완성하는 한국의 대표 음식

 

배추를 소금에 절이는 과정은 나트륨·염소 이온, 미생물 등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일어나는 정교한 과학적 작용이에요. 소금 한 줌이 배추 속 물을 움직이고, 김치를 맛있게 만드는 미생물이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김치의 맛과 향, 그리고 오래 보관될 수 있는 힘까지 만들어 내죠. 결국 작은 원소와 미생물이 만드는 변화가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을 완성하는 것이랍니다. 이번 김장철, 배추에 소금을 뿌리면서 배추 안에서 어떤 과학이 일어나는지 떠올려본다면 김장이 더 특별하고 흥미로운 시간이 되지 않을까요?

 

-이동훈 작가·'대충 봐도 머리에 남는 어린이 원소 상식' 저자/기획·구성=정해민 기자, 조선일보(25-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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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김치의 날’… 해외시장 진출 전략 세워야

 

최근 2022 카타르 월드컵을 앞두고 우리 정부가 선수단을 위해 카타르 현지에 김치를 공급하는 것과 관련해 중국의 ‘김치 공정’이 또다시 시작됐다. 중국 관영 매체 환구시보는 이 소식을 전하면서 김치의 중국어 표기인 ‘신치’(辛奇)가 아닌 쓰촨성의 절인 배추를 뜻하는 ‘파오차이’(泡菜)로 표기했다. 관영 언론 기사화를 통해 중국 누리꾼들의 댓글 여론을 만들어 여론을 호도하는 전형적 김치 공정 수법이며 억지 주장이다.

 

김치에 대한 중국의 문화 공정을 두고 보아서는 안 된다. 소중한 우리 자원을 지키고, 날로 인기가 높아지는 김치를 해외에 어떻게 알릴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다. 국내 김치 수출액은 2016년 7900만달러에서 지난해 세계 약 90국에 1억5990만달러로 늘어나 5년 만에 2배가 되었다. 김치의 우수성과 다양한 효능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정부 차원의 조직적 대응이 필요하다. 2010년 설립된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세계김치연구소는 김치 관련 연구 개발을 통해 핵심 기술을 개발, 산업 현장에 전수하고 있다. 연구소는 최근 구글 측에 항의해 번역기에서 ‘김치용 배추’를 영어로 번역했을 때 나오는 ‘Chinese’를 삭제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11월 22일은 제3회 ‘김치의 날’이다. 김치 재료 하나하나(11월)가 모여 면역력 증진, 항비만, 장내 환경 개선 등 22가지(22일)의 효능을 나타낸다는 의미다. 지난해 8월 미국 캘리포니아주를 시작으로 올해에는 버지니아주, 뉴욕주, 워싱턴DC 등에서 이날을 김치의 날로 제정했다. 중국의 김치 공정에 대응해 김치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알리는 체계적 전략을 세워야 한다.

 

-서경덕·세계김치연구소 홍보대사·성신여대 교수, 조선일보(22-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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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먹는 속이 꽉찬 김장 배추, 우장춘의 ‘김치 혁명’ 덕분이었다

 

[민태기의 사이언스토리] 

 

과거 김치는 소중한 식량이었다. 연구에 따르면 1970년대 우리나라는 1인당 하루 평균 무려 300~400g의 김치를 먹었다. 같은 시기 1인당 양곡 소비량이 하루에 450~520g(그중 쌀이 350g)이었으니, 김치는 쌀 못지않은 주식이었다. 2020년 쌀 소비량은 122g, 김치 소비량은 57g으로 줄었지만, 여전히 김치는 쌀, 우유에 이어 셋째로 많이 먹는 음식이다. 육류 소비가 늘어나며 먹거리가 다양화되기 전까지 김치가 어려운 시절을 버티게 해준 것이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우장춘의 김치 혁명 덕분이다. 

 

1898년 9월, 서울의 일본 공사가 본국에 다급히 연락을 보낸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일본에 망명했던 우범선이 한국으로 돌아와 몰래 잠입했다는 것. 당시 한국은 독립협회의 의회 요구와 만민공동회로 요동치고 있었다. 일본은 이들과 우범선이 연락하며 뭔가를 꾸미는 것을 포착한다. 하지만 미묘한 정세에 우범선이 다시 주목받으면 일본이 난처해질 수 있어 본국의 지휘를 요청한 것이고, 우범선을 설득해 일본으로 보낸다. 이때 일본에는 태어난 지 5개월 된 아들이 있었다. 그가 바로 우장춘이다. 우범선은 우장춘의 호적을 한국에 올려 놓는다.

 

우장춘이 다섯 살이던 1903년, 우범선은 암살된다. 한때 우장춘은 보육시설에 맡겨지며 어려운 시절을 보낸다. 그 사정을 알게 된 조선총독부의 주선으로 도쿄제국대학 부속 농학실과(일종의 전문학교)에 겨우 진학한다. 이때까지 우장춘은 그렇게 뛰어나지 않은 평범한 학생이었다. 우장춘이 유명해진 것은 1935년의 논문이다. 전혀 다른 종(種)인 배추와 양배추를 교배하면 제3의 종 유채(油菜)가 만들어짐을 보이며 다윈의 이론에 수정을 가하게 된다. 전문학교 출신인 우장춘은 이 논문으로 도쿄제국대학의 박사 학위를 받으며 단숨에 국제적인 명성을 얻는다. 그리고 한국에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우범선의 아들이라는 수식어도 따라붙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교토에서 대형 종자 회사의 연구농장장으로 일하던 우장춘은 사표를 내고 칩거했다. 한국행을 결심하고 있었다. 나라는 해방되었지만, 종자를 일본에 의존했던 한국 농업은 무너지기 일보직전 상황이 됐다. 한국은 우장춘이 절실했지만, 데려오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가족들의 반대도 심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남긴 호적으로 본적이 ‘서울’임을 증명하며 재일 조선인 수용소로 들어가 한국행을 준비했다. 남은 가족들의 생계에 보태라고 일본 고위 공무원 5년 치 연봉에 해당하는 100만엔을 한국 정부에서 보냈지만 이 돈을 한국에 가져갈 종자를 사고, 서적과 실험기구를 사는 데 다 써버렸다. 주위의 걱정에 “가족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버텨나갈 것입니다. 이 나라에 뼈를 묻을 것을 여러분에게 약속합니다”라고 했다. 빈말이 아니었다. 1950년 3월의 일이다.

 

3개월 뒤 한국전쟁이 일어났지만, 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미친 듯이 종자 개발에 집중했다. 식량 해결을 위해서는 채소, 특히 김치의 주재료인 배추와 무 종자 확보가 우선이었다. 1950년 겨울, 딸의 결혼식으로 우장춘이 일본으로 향했다. 사람들은 그가 전쟁 중인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다시 돌아와서 연구에 매진했다. 종자밭 확보를 위해 1951년 제주를 방문했다. 제주가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되자, 대신 귤 재배를 추진했다. 대체지로 선택된 진도에 1952년부터 배추와 무 종자밭을 가꾸었다. 인민군이 물러간 강원도에는 감자를 키웠다. 그에게 전쟁은 핑곗거리조차 안 되었다.

 

1954년 드디어 무와 배추 종자가 생산되기 시작한다. 우장춘은 조선의 전통 배추, 중국에서 전래한 호배추, 일본에서 수입한 배추들이 모두 김치에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육종 기술로 한국의 토양과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배추 품종을 만들어 낸 것이다. 우리가 먹는 속이 꽉찬 김장 배추는 그가 수많은 교배와 연구를 거쳐 만들어냈다. 고추 종자까지 개발했다. 하지만 세간의 불신은 상당했다. 이때 들고나온 것이 ‘씨 없는 수박 시식회’이다. 흔히 우장춘은 씨 없는 수박으로 알려졌지만, 이는 교토대학 기하라 히토시 교수의 업적이다. 단지 우장춘은 육종학의 위력을 시범으로 보인 것이다. 이런 노력 끝에 그의 종자들이 퍼지며 한국은 마침내 ‘씨앗 독립’에 성공한다.

 

우장춘이 교토에 남겨진 가족들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958년 4월. 이때 결혼을 준비하던 넷째 딸이 신랑감을 우장춘에게 소개한다. 그의 이름은 이나모리 가즈오(盛和夫).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그는 12월 결혼했고, 이듬해 4월 교세라(Kyocera, 교토 세라믹)를 창업했다. 교세라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운 이나모리는 교세라 홈페이지에 우장춘과의 인연을 남겼다. 무일푼이던 시절 예비 장인을 만나 격려받고 힘을 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교세라 홈페이지에 장인 우장춘을 ‘김치의 은인’이라 기록했다. 지난 8월 사망한 이나모리는 수원에 묻힌 우장춘의 묘를 생전에 여러 차례 방문했다.

 

1959년 우장춘은 한국에서 사망했다. 사망 사흘 전 훈장이 수여되었다. 병상의 우 박사는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며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 우범선의 묘는 일본에 있지만, 그의 묘지는 수원으로 정해졌다. 약속대로 한국에 뼈를 묻었다.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한국에 왔을 때 전쟁이 벌어졌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왜 이토록 한국의 식량 문제 해결에 몰두했는지는 알 수 없다. 어떠한 정치적 이념이나 수사보다 과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완성하는 길이라 믿었을 것이다.

 

-민태기 에스앤에이치연구소장·공학박사, 조선일보(2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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