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원 맥주]
[인류 최고 파트너, 말의 역사]
수도원 맥주
왜 성직자는 수도원에서 술을 만들었을까?
40일 금식 버티기 위해 '액체 빵' 먹었어요
세계적으로 음주량이 점차 줄고 있다고 합니다. 술을 즐기지 않는 젊은 세대가 증가했기 때문인데, 주류 업체들은 판매량이 떨어져 걱정입니다. 지난달에는 역사가 1000년에 달하는 독일 벨텐부르거 수도원 양조장이 경영난에 시달리다 민간 회사에 팔린 일도 발생했어요. 이 양조장은 수도원 양조장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곳입니다. 그런데 종교인들이 금욕 생활을 하면서 기도에 집중하는 수도원에서 왜 술을 만든 걸까요?

독일 벨텐부르거 수도원 양조장에서 만든 맥주입니다. /위키피디아
수도원은 4세기 이집트의 수도사 파코미우스가 공동 수도 생활을 한 데서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어요. 이후 유럽 전역으로 확산된 것이죠. 중세에 가톨릭 교회에서 성직 매매나 면죄부(면벌부) 판매 같은 부정부패가 나타나자, 일부 수도원은 성경 필사나 육체적 노동 같은 고행을 통해 ‘초기 신앙으로 돌아가자’는 개혁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어요. 신앙은 권력과 돈이 아니라 신의 말씀과 검소한 삶으로 증명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던 것이죠.
수도원 맥주도 이런 과정에서 등장했어요. 기독교에는 예수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절 전 40일 동안 기도와 단식을 하는 ‘사순절’이 있어요. 이때 수도원에서도 금식했죠. 사순절 규칙상 액체는 섭취할 수 있었대요. 이때 수도사들이 만들어 마신 것이 바로 맥주였어요. 맥주는 곡물의 영양을 가득 담고 있으면서도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음료였으니까요. 맥주는 기원전 4000년부터 메소포타미아·이집트 등 지역에서 물에 탄 곡물을 발효해 마시기 시작했어요. 깨끗한 물이 귀했던 과거부터 흔히 마셔왔던 것이죠.
수도사들은 직접 농사 지은 곡물로 맥주를 만들어 저장했고, 사순절 금식 기간 동안 맥주를 ‘액체 빵’이라고 부르며 마셨죠. 특히 17세기에 독일 뮌헨의 파울라너 수도원에서는 곡물 등을 추가해 더욱 열량이 높고 오래 보관할 수 있는 맥주를 만들었대요. 이 맥주의 알코올 도수는 8%까지 높아졌어요. 파울라너 수도원이 만든 이 맥주는 특유의 진한 맛으로 큰 인기를 얻게 됐죠. 수도사들은 이 맥주에 구원자라는 뜻의 이름 ‘살바토르(Salvator)’를 붙여줬어요. 현재 세계적으로 유명한 독일 맥주 파울라너도 파울라너 수도원 양조장에서 시작된 것이랍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 이야기에도 맥주가 등장해요. 독일의 수도사였던 마르틴 루터는 1517년 면죄부 판매가 정당하지 않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95개조 논제’를 발표합니다. 이 사건이 유럽 전역으로 퍼지면서 교황 중심 체제가 흔들리게 됐어요. 그러자 1521년 신성 로마 제국 의회인 보름스 국회는 루터를 소환합니다. 이 자리에서 황제는 그에게 95개조 논제를 철회하라고 요구했지만, 루터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당시 독일 브라운슈바이크의 영주였던 에리히 공작이 루터에게 지지의 의미로 맥주를 보냈다는 일화가 전해져요.
-황은하 상경중 역사 교사, 조선일보(26-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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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고 파트너, 말의 역사
인류 보폭 넓힌 초원의 발굽, 문명의 길 바꿔놓은 말의 힘

힘차게 질주하는 말 무리. 말은 고대 세계 문명의 ‘인터넷’이었다. 사진 출처 동아일보DB
인류 역사에서 말처럼 사람과 함께 살며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은 동물은 없을 것이다. 약 5500년 전 유라시아 초원의 목축인들이 말을 길들이는 순간, 인류의 보폭은 수십 배로 넓어졌고 대륙은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됐다. 풀을 먹으며 세상을 속도로 연결한 말은 고대 세계의 인터넷과 같은 존재였다. 그 변화는 한반도로도 이어져 이곳의 역사 또한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말의 해, 세계와 한반도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말의 발자취를 되짚어 보자.
고조선에서 시작된 기마문화
만주와 한반도에 기마의 전통이 유입된 최초의 흔적은 약 3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유라시아를 호령하던 최첨단 무기인 전차(chariot)가 몽골 초원을 거쳐 만주로 들어왔다. 하지만 너른 평원에서만 효과를 내는 전차의 특성상 실제 전차의 흔적은 현 중국 랴오닝성 서쪽 일대에서만 발견된다.
말 뒤에서 전차를 모는 형태가 아니라 직접 말등에 올라탄 기마인의 흔적은 기원전 6세기경 고조선에서 꽃을 피웠다. 랴오닝성 선양시 남쪽에 위치한 정가와자 유적의 고조선 귀족 무덤에서 말의 굴레를 포함한 마구 장식 세트와 말뼈가 함께 발견됐다. 이 무덤의 주인공은 화려한 금속 단추가 달린 장화를 신고, 몸에는 청동 거울을 주렁주렁 달았다. 그리고 말의 머리에는 유니콘을 연상시키는 뿔 모양의 ‘말상투’(나팔형 청동기)를 장식했다. 기마 전사의 역할뿐 아니라 거울을 걸고 화려한 의식을 거행하는 샤먼의 역할도 했으니 말은 단순한 운송 수단을 넘어 권위의 상징이었다.
샤먼의 도구가 된 마구
마구는 고조선에서 한반도로 들어오면서 샤먼과 함께하는 도구로 성격이 달라졌다. 전차병이 허리춤에 걸어 고삐를 고정할 때 쓰던 고삐걸이와 방울은 샤먼이 흔드는 청동 방울(팔주령 등)로 바뀌었고, 태양처럼 회전하던 전차 바퀴의 이미지는 샤먼의 권위를 상징하는 청동 거울(다뉴경)로 재탄생했다. 말의 이마에 뿔처럼 붙이던 나팔형 청동기도 사용되었지만, 이미 말 자체는 사라진 상태였다.
유라시아의 살벌한 전쟁 기술이 동방의 산악지대에 이르러서는 제의를 위한 성스러운 도구로 승화된 것이다. 사실 한반도는 험준한 산악 지형이 많고 목초지도 많지 않아 실제로 말을 키우기 쉬운 환경은 아니었다. 그러나 신라, 고구려, 부여 등 건국신화에 말이 등장하고, 지금도 굿을 할 때 방울이 필수인 것을 보면 고대부터 말은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 왔다.
주몽의 말과 과하마(果下馬)
말이 실생활의 동반자로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기원전 2세기 위만조선 때다. 우거왕이 한나라에 화해를 청하며 태자와 함께 말 5000필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고구려의 시조 주몽 역시 궁 안에서 말을 돌보는 역할을 했다고 돼 있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등장하는 말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서양 영화에 등장하는 거대한 명마를 떠올리기 쉽지만 실제 모습은 전혀 달랐다. 우리 역사에는 동해안 동예의 특산물로, 과일나무 아래를 지나갈 정도로 작은 말을 뜻하는 ‘과하마’가 등장한다. 고구려 벽화 속 말 역시 키 150cm 이하의 작은 몽골말 형태에 가깝다. 이러한 작고 지구력이 강한 말은 흉노에서 시작해 원 제국에서도 탔던 몽골말과 일맥상통한다.
그런데 동예는 동해안 지역으로, 실제로 말을 탔다는 고고학적 증거는 전혀 없다. 이는 아마도 말을 전문적으로 길렀다는 의미일 것이다. 고고학이 밝혀낸 특별한 말의 증거가 있다. 강릉 강문동 유적에서 발견된 말뼈로 만든 복골(불에 그을려 점을 치는 도구)이다. 중국 상나라나 초원의 유목민들도 소나 양의 뼈를 사용했지, 귀한 말의 뼈로 점을 치지는 않았다. 게다가 이곳에서는 재갈이나 안장 같은 마구도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즉 동해안 일대는 말을 기르는 종마장과 같은 역할을 했고, 그 뼈를 제사나 점복에 사용할 만큼 귀하게 여겼다는 의미다.
삼국-고려시대 전략자산

복원된 신라의 말 갑옷. 삼국시대 말은 중장기병의 핵심 장비여서 갑옷을 입었다. 사진 출처 동아일보DB
말 갑옷은 삼국시대에 본격화된 중장기병(重裝騎兵)의 핵심 장비였다. 무거운 것을 얹지 못하는 말의 특성상, 말 갑옷을 제작하려면 가볍고 단단하게 벼리는 우수한 철 기술이 필수였다. 따라서 말 갑옷을 소유한다는 것은 강력한 국가권력과 경제력을 보여주는 지표였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는 생생한 갑옷의 모습이 남아 있고, 신라·가야·백제의 고분에서는 각자의 개성을 담은 말 갑옷이 출토된다. 이들은 경쟁적으로 말 갑옷을 만들고, 심지어 무덤에 부장하기도 했다. 이는 당시 말이 단순한 전쟁 중 탈것을 넘어 국가의 운명을 결정짓는 전략적 자산이자 지배층의 권위를 상징하는 귀중한 존재였음을 보여준다.
고려시대로 시선을 돌리면 우리는 세계사를 뒤흔든 몽골제국의 말과 마주하게 된다. 몽골의 말은 서양의 미끈한 명마에 비하면 배가 불룩하고 다리는 짧다. 하지만 눈 덮인 초원의 마른 풀뿌리만 먹고도 영하 40도의 추위를 견디며 며칠씩 달릴 수 있다. 극한의 환경을 버텨내는 지구력과 회복력을 갖추도록 수백 년에 걸쳐 체계적으로 개량된 셈이다.
몽골 침략 이후 고려에도 말 목장이 설치되면서 말 사육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몽골은 현 제주를 비롯한 주요 요충지에 원 제국의 직영 목마장을 설치하고 대규모 방목 체계를 도입했다. 특히 1276년 탐라의 다루가치는 우량마를 기르는 목장을 열고 전문 관리인인 목호(牧胡)를 배치했다. 이 과정에서 유목민들의 첨단 말 사육 기술이 한반도에 이식되는 계기가 됐다.
공권력, 국력의 척도가 된 말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말은 전쟁터를 넘어 왕권을 상징하며 일상과 문화의 깊숙한 곳으로 스며들었다. ‘용비어천가’에는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탔던 여덟 마리의 명마 ‘팔준’이 등장한다. 조선시대에 여러 차례 그려진 ‘팔준도’ 속 말들은 전장을 누비는 모습이 아니라 평화롭게 초원에서 쉬는 모습이다. 전쟁을 모두 끝내고 한가로이 쉬는 말을 표현함으로써 정권의 정당성과 왕의 덕을 상징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마패. 마패에 새겨진 말의 수는 암행어사가 행사할 수 있는 공권력의 크기를 뜻했다. 사진 출처 한국문화재사진연구소
이 밖에도 조선 선비의 자존심이었던 갓과 망건에는 말의 꼬리털인 말총이 사용됐다. 암행어사가 찼던 ‘마패(馬牌)’는 역참에서 말을 빌릴 수 있는 증명서였다. 마패에 새겨진 말의 마릿수는 그 관리가 행사할 수 있는 공권력의 크기를 뜻했다.
이처럼 말은 우리 문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였지만, 동시에 조선에서 말 사육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실록에는 말 역병이 돌아 대량으로 폐사해 역참과 군사 운용에 차질이 생길 것을 우려하는 기록이 수차례 등장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나라가 황폐해지면서 만성적인 말 부족에도 시달려야 했다. 쌀농사에 집중했고, 말이 필요한 마을과 도시는 주로 평야에 집중돼 몽골처럼 대규모 목초지를 운영하기에는 비용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 후기 들어 국력 약화와 함께 더욱 심화됐으니, 말은 곧 국력의 척도였던 셈이다.
AI라는 새로운 야생마
5500년 전 인류가 제어할 수 없는 속도를 지닌 야생마를 길들이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인류는 포기하지 않았다. 말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등에 ‘안장’을 얹어 그 야생의 힘을 통제하는 법을 터득했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힘을 제어하는 순간, 말은 인류 문명의 속도를 바꾼 최고의 파트너가 됐고 세계사를 바꾼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됐다.
지금 우리는 또 다른 거대한 야생마 앞에 서 있다. 바로 인공지능(AI)이다.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는 속도와 그 파괴력은 수천년의 야생마를 떠올리게 한다. 말의 역사에서 보듯 인류는 언제나 자신보다 강력한 힘을 마주했을 때 도망치기보다 그것을 길들이는 ‘지혜의 재갈’을 만들어 왔다. 새로운 도구에 대한 기대와 공포가 교차하는 지금, 우리에게는 지난 수천 년간 말을 다스려 온 그 지혜가 필요하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동아일보(26-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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