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10년 유배 생활… 추사를 '예술 거장'으로 완성시켜]
[봉원사에 숨은 비밀.. 명필 원교와 추사에 얽힌 왜곡된 전설]
추사 김정희, 10년 유배 생활… 추사를 '예술 거장'으로 완성시켜
제주도 세계유산본부가 지난 13일 서귀포시 제주추사관에서 ‘추사(秋史), 가문에서 피어난 예술’ 특별전을 개막했어요. 내년 1월 17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는 19세기 조선의 대표 학자이자 예술인인 추사 김정희(1786~1856)의 탄신 240주년을 기념해, 추사가 유배 생활을 했던 제주에서 충남 예산 김정희 종가의 보물급 유물을 공개하는 자리입니다. 추사는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19세기 조선 ‘국가대표 지식인’
추사는 ‘추사체’라는 글씨로 유명한 서예가입니다. ‘금석(金石)학자’이자 화가였고, 실학자이자 역사학자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불교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한마디로 거장이자 종합 예술인이었던 셈이죠. ‘금석학’이라는 말이 좀 어렵죠? 금속이나 돌에 새겨진 옛 글을 대상으로 언어와 문자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예를 들어 추사는 고려 말~조선 초 승려인 무학대사와 관련된 것으로 당시 알려졌던 북한산 비봉의 비석이 사실 신라 진흥왕이 세운 순수비(임금이 살피며 돌아다닌 곳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라는 사실을 입증했어요.
“추사는 그저 글씨 잘 써서 유명한 사람이 아니다. 19세기 조선 학문의 수준을 보여주는 국가대표 연구자라고 평가해야 한다.” 추사 연구가인 박철상 한국문헌문화연구소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중국 청나라 때 발전한 ‘고증학’은 옛 문헌이나 유물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바탕으로 이론을 펼치는 학문인데, 추사는 중국 고증학에 자신의 독창적인 학문을 더해 외래 문화를 창조적으로 해석했다는 것입니다. 당대 중국에서도 명망을 쌓고 인기를 누렸던 ‘예술계 원조 한류 스타’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는 호(본명 외에 쓰는 이름)가 많았는데, 추사 외에 완당(阮堂)이란 호도 유명합니다.

추사가 제주도 유배 시절 그린 '세한도'. 작은 집 양옆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그려져 있어요.

추사가 말년에 쓴 서예 대표작 '차호호공'이에요. '잠시 밝은 달을 불러 세 벗을 이루고, 좋아서 매화와 함께 한 산에 사네(且呼明月成三友 好共梅花住一山·차호명월성삼우 호공매화주일산)'라는 문장을 두 폭의 종이에 썼습니다. 차호호공은 두 폭의 앞 두 글자를 조합한 이름입니다.
제주 유배 중 그린 걸작 ‘세한도’
추사는 젖을 떼자마자 붓을 가지고 놀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일곱 살 때 ‘입춘대길(立春大吉)’이라 쓴 글을 문에 붙여 놨더니 지나가던 좌의정 채제공이 명필이라고 칭찬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추사는 어려서부터 실학자 박제가에게 학문을 배웠습니다. 1809년(순조 9년) 유교 경전 사서오경에 대한 지식을 평가하는 시험인 생원시에 장원으로 급제했고, 이듬해 아버지 김노경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따라가 중국 최고의 학자였던 옹방강·완원 등을 만나 학문을 접하고 교류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33세 때인 1819년 과거 시험에 급제했고, 이후 20여 년 동안 관료 이력을 순탄하게 쌓았습니다.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에게 학문을 가르쳤으며, 40대엔 충청도 암행어사(지방 관료 비밀 감찰관), 50대 초반엔 성균관 대사성(성균관장)과 병조참판·형조참판(지금의 국방부·법무부 차관)에 올랐습니다.
그러다 1840년(헌종 6년) 윤상도라는 사람이 몇몇 관료를 탐관오리라고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본인이 벌을 받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추사는 그 상소 초안에 관련됐다는 이유로 고초를 겪게 됐습니다. 목숨이 위태로워질 지경에 이르자 우의정 조인영이 ‘추사를 살려 달라’는 상소를 올려 겨우 죽음을 면했습니다. 대신 지금의 서귀포시 서부 지역인 제주 대정현으로 유배를 가야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제주도는 머나먼 오지였고, 풍토와 음식도 맞지 않아 고생스러운 생활이었죠. 유배 2년 만인 1842년 육지에 있던 아내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추사는 ‘다음 생에 다시 부부가 된다면 내가 먼저 가겠소’라는 애통한 시를 짓기도 했습니다.

서울 강남구 봉은사의 판전 현판. 추사가 글씨를 썼습니다. 판전은 불경을 새긴 경판을 보관하는 건물이에요.
힘든 유배지는 추사의 예술적 경지가 크게 발전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한국 미술사 불멸의 걸작인 국보 ‘세한도(歲寒圖)’를 그린 것도 이 시기였습니다. ‘추운 날씨가 돼서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 수 있다’는 ‘논어’의 구절을 표현한 그림입니다. 사람은 고난을 겪더라도 뜻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죠. 창문 하나 난 조그만 집 옆에 앙상한 가지가 달린 비스듬한 소나무와 잣나무를 표현한 이 작품은 쓸쓸한 분위기 속에서도 선비의 기개를 물씬 느낄 수 있습니다.

조선 시대 화가 이한철이 1857년 그린 추사 김정희의 초상. /국가유산청·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추사의 세 가지 키워드… 세한도·금석학·추사체
1848년 12월 추사는 8년 3개월 동안의 제주 유배에서 풀려나게 됐습니다. 1849년 서울로 돌아왔을 때 63세였죠. 당시로선 이미 노년에 접어든 나이였습니다. 용산 강변에 살며 학문과 글씨를 더욱 갈고닦았고, 석파 이하응(훗날의 흥선대원군) 같은 제자를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851년(철종 2년) 정쟁에 휘말려 추운 함경도 북청으로 다시 유배를 가야 했습니다.
다행히 이번 유배는 이듬해 풀렸지만 추사의 삶이 4년밖에 남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최후의 시기 늙고 병든 추사는 ‘계산무진(谿山無盡·시냇물과 산은 끝이 없다)’, ‘판전(板殿·서울 강남구 봉은사 판전 현판)’ 같은 걸작 글씨들을 쏟아냈습니다. 추사는 평생 벼루 10개에 구멍을 내고 붓 1000여 자루를 닳게 할 만큼 끝없이 글씨를 쓰고 또 썼다고 합니다. 그리고 1856년 70세의 나이로 경기 과천의 과지초당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추사는 기나긴 고난을 겪은 끝에 완성된 거인이다. 젊어서는 오만했고 출세 가도를 달렸지만, 세파에 휘둘리며 제주로 북청으로 10년 동안 유배되는 과정에서 관용과 평범의 미덕을 깨닫게 됐다. 그 산물이 바로 추사체였다.” 유 관장에 따르면, 때론 강철을 뚫을 듯하기도 했고 중국 요리 난자완스처럼 기름기가 끼기도 했던 추사의 글씨는 유배를 겪은 뒤 힘 있는 골격과 울림이 강하고 필획이 천연스러운 고졸(古拙·예스럽고 소박한 맛이 있음)의 경지에 이르게 됐다는 것입니다.
추사 연구가 박철상 소장은 추사를 ‘세한도’ ‘금석학’ ‘추사체’ 세 가지 키워드로 설명합니다. 추사의 학문과 사상이 농축된 그림이 ‘세한도’입니다. 추사의 금석학 연구는 중국 학자들이 자발적으로 한국사를 공부하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추사체는 옛 한(漢)나라 시대의 글자를 복원하고 여러 서체의 특징을 가미해 자신만의 원리에 따라 썼던 드높은 경지의 글씨로 평가받고 있죠.
-유석재 역사문화전문기자/기획·구성=정해민 기자, 조선일보(26-02-19)-
_________________
봉원사에 숨은 비밀.. 명필 원교와 추사에 얽힌 왜곡된 전설
[박종인의 땅의 歷史]
정말 추사는 名筆 이광사 현판을 떼버리라고 했을까

전남 해남에 있는 대흥사에도 대웅전 현판인 ‘대웅보전’(사진)은 원교 이광사가 썼고 ‘무량수각’ 현판 글씨는 김정희가 썼다. 서울 봉원사에 가면 두 명필 원교 이광사와 추사 김정희 글씨를 볼 수 있다. 대웅전 현판은 이광사, 대방(大房)에 있는 현판 두 개는 김정희 글씨다. 세간에서는 제주 유배길에서 대흥사에 들른 김정희가 초의선사에게 이광사 글씨를 깎아내리며 떼라고 했다가 유배 후 성숙해진 마음으로 그 글씨를 다시 걸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전혀 근거가 없다.
서울 봉원사는 원래 지금 연세대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1752년 영조가 그 자리에 사도세자 아들인 손자 의소세손 묘를 쓰면서 지금 안산 기슭으로 이건됐다. 그래서 이후 사람들은 봉원사를 ‘새절’이라고 불렀다. 1884년 갑신정변 주역 서재필도 “새절에서 개화승 이동인을 만났다”라고 했고(김도태, ‘서재필 박사 자서전’, 을유문화사, 1972, p83~85) 1970년대까지 주민들도 ‘새절로 소풍 간다’고 했다.
영조 때 왕찰이었던 사찰인지라 크고 작은 권세의 흔적이 남아 있다. 조선 개국 공신 정도전은 이 절 명부전(冥府殿) 현판을, 조선 망국 대신 이완용은 명부전 주련(柱聯) 글씨를 남겼다. 대원군 옛 별장 아소정(我笑亭)을 이건한 대방(大房)에는 흥선대원군 스승 추사 김정희 흔적이 남아 있다. 김정희 현판 두 개, 김정희 스승인 청나라 학자 옹방강 현판이 하나 걸려 있다. 추사 현판 가운데 행서로 쓴 ‘珊糊碧樹(산호벽수)’를 봉원사는 ‘珊糊碧樓(산호벽루)’라 소개하고 많은 이 또한 그렇게 잘못 알고 있다. 필자도 마찬가지였다. ‘산호벽수’는 ‘산호 가지와 벽수 가지처럼 서로 잘 어울려 융성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제일 큰 법당인 대웅전에 걸린 ‘大雄殿(대웅전)’ 현판 필자는 원교 이광사다. 추사가 졸필(拙筆)이라고 맹비판한 추사 선대(先代) 명필이다. 이제 이 이광사와 김정희에 얽힌, 사실로 굳어버린 전설 혹은 괴담(怪談)을 알아보기로 한다.

대웅전 현판(원교 이광사)
해남 대흥사, 원교 그리고 추사
김정희가 역모에 연루돼 제주도로 유배를 간 1840년 이야기다.
‘전주⋅남원을 거쳐 완도로 가던 길에 해남 대흥사에 들러 초의선사를 만났다. 기개가 살아 있어, 대흥사 현판 글씨들을 비판했다.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놓은 것이 원교 이광사인데 어떻게 안다는 사람이 그가 쓴 대웅보전 현판을 버젓이 걸어놓을 수 있는가.” 추사는 있는 대로 호통을 치며 신경질을 부렸다. 초의는 그 극성에 못 이겨 원교 현판을 떼어내고 추사의 글씨를 달았다고 한다. 1848년 12월 63세 노령으로 귀양지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른 추사는 초의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옛날 내가 떼어내라고 했던 원교의 대웅보전 현판이 지금 어디 있나? 다시 달아주게. 그때는 내가 잘못 보았어.”’(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산사순례’, 창비, 2018, p128, 129)
위 내용은 같은 저자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창작과 비평사, 1993, p88~89)와 ‘완당평전’ 1권(학고재, 2002, p337~338), 2권(p517~518)에 동일하게 실려 있다. ‘완당평전’ 후 유홍준이 새로 낸 김정희 평전 ‘추사 김정희’(창비, 2018, p242, p355~356)에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유홍준은 이렇게 평했다. ‘추사 인생의 반전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법도를 넘어선 개성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그는 외로운 귀양살이 9년에 체득한 것이다.’(‘산사순례’(2018), p130)
자신만만 오만방자하던 50대 김정희와 그 필체가 귀양살이 후 성숙해져가는 과정을 말하는 대표적인 에피소드다. 신문, 방송 할 것 없이 모든 매체는 이를 자기계발과 성숙을 말하는 글 소재로 삼아 글을 써왔다. 그런데 결론은 이렇다. 이 이야기는 허구(虛構)다.

해남 대흥사에 있는 추사 김정희 편액 ‘無量壽閣’.
천하명필 원교 이광사
소론인 이광사는 노론이 판치던 영조 때 몇 가지 역모 사건에 연루돼 전남 완도 신지도로 유배 가서 거기에서 죽었다. 영조 31년 ‘형(경종)을 죽이고 왕이 된 역적 영조’라는 대자보가 나주 객사에 걸린 ‘나주 괘서 사건’이 터졌다. 수사 과정에서 이광사 이름이 튀어나왔다.(1755년 3월 6일 ‘영조실록’) 그가 체포된 직후 자결을 결심했던 아내 문화 류씨는 엿새 뒤 남편이 처형됐다는 유언비어에 목을 매고 죽었다.(이광사, ‘원교집’ 권7, ‘망실 유인 문화류씨 묘지명(亡室孺人文化柳氏墓誌銘)’), 죽지 않은 이광사는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당했다. 그때 이광사는 “뛰어난 재주가 있으니 원컨대 목숨은 살려달라”고 청해 사형을 면하고 유배형을 받았다.(이규상(1727~1799), ‘병세재언록’, 민족문학사연구소 역, 창작과비평사, 1997, p127)
그 뛰어난 재주가 글씨였다. 명필이었다. 그래서 부령 유배지에서 ‘지방인들을 많이 모아 글과 글씨를 가르치자’(1762년 7월 25일 ‘영조실록’) 다시 전남 진도로, 신지도로 떠돌며 유배 생활 끝에 죽었다. 신지도 시절에도 팔도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그 글씨를 받아갔다.

봉원사 명부전. 현판은 정도전, 기둥에 있는 주련은 이완용 글씨다.
웬만한 남도 큰 절에는 이광사 글씨로 쓴 현판들이 걸려 있다. 강진 백련사, 해남 대흥사, 고창 선운사, 구례 천은사가 대표적이고 서울 봉원사도 그중 하나다. 영조를 역적이라 칭한 역적 글씨가 영조가 왕찰로 삼은 봉원사 대법당에 걸려 있으니 아이러니다. 그 간난고초 속에서도 이광사는 ‘서결(書訣)’이라는 서법 책을 남겼고, 그 모든 고초와 비극을 목격한 아들 이긍익은 역사서 ‘연려실기술’을 기술했다.
후배 천하명필 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는 영조의 서녀 화순옹주의 외가 후손이다. 집안은 노론이다. 청나라에서 신문물을 배운 김정희는 이광사와 전혀 다른 필법으로 새 명필 반열에 올랐다. 이광사는 1777년에 죽었고 김정희는 1786년생이니 본 적은 없다.
그런 그가 이광사 필법에 대해 이렇게 비판한다. ‘세상이 다 원교의 필명(筆名)에 온통 미혹(震耀‧진요)돼 금과옥조처럼 떠받드니, 참람하고 망령됨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큰 소리로 외쳐 심한 말을 꺼리지 않는구나. 원교는 천품이 남보다 뛰어났으나 재주만 있고 배움은 없었다(其天品超異 有其才而無其學‧기천품초이유기재이무기학).’(김정희, ‘완당전집’ 6권 ‘원교필결 뒤에 쓰다(書圓嶠筆訣後‧서원교필결후)’) 금석학과 역대 중국 필법을 연구한 추사였다. 조선에 얽매인 원교 글씨가 그에게는 촌스럽게 보였고, 게다가 반(反)영조 세력인 소론 이광사를 명필로 칭송하는 세상이 이 명문 노론에게는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추사의 유배와 곤장 36대
그 추사가 1840년 8월 한 역모에 연루돼 수사를 받았다. 김정희는 의금부에 체포돼 다른 공범 혐의자들과 함께 고문을 받았다. 고문 방식은 신장(訊杖), 널찍한 몽둥이로 패면서 심문하는 방식이었다. 피의자 생명에 치명적인 고문이라, 조선은 개국 초부터 신장은 한 번에 30번을 때리지 못하고 한 번 신장을 때린 뒤에는 사흘 뒤에야 다시 때릴 수 있도록 법으로 정했다.(1417년 5월 11일 ‘태종실록’, 1511년 4월 11일 ‘중종실록’ 등)
그래도 심문 도중 물고(物故‧맞아 죽음)되는 사례가 빈번하자 정조는 ‘흠휼전칙(欽恤典則)’을 만들어 몽둥이 규격을 정했다. 고문 수사를 할 때 쓰는 몽둥이는 길이 105㎝(3척5촌·1척=30㎝ 기준)에 손잡이는 길이 45㎝(1척5촌), 지름 2.1㎝(7푼)이며 매를 때리는 부분은 길이 60㎝(2척)에 너비는 2.7㎝(9푼) 두께는 1.2㎝(4푼)였다.(1778년 1월 12일 ‘정조실록’) 때리는 방법은 ‘엄중(嚴重)하게.’(‘속대전’ 형전 ‘형신추국(刑訊推鞫)’)
그 신장을 김정희는 여섯 차례에 걸쳐 모두 서른여섯 대를 맞았다. 1840년 8월 23일 5대, 다음 날 7대, 25일 3대, 29일 5대, 30일 7대 그리고 9월 3일 9대.(1840년 8월 23일~9월 3일 ‘일성록’‧석한남, ‘다산과 추사, 유배를 즐기다’, 가디언, 2017, p99~100, 재인용) 오늘내일 상간으로 김정희는 물고될 처지였으나 우의정 조인영의 청원에 목숨을 건지고 제주 유배형을 받았다.(1840년 9월 4일 ‘헌종실록’) 함께 신장을 얻어맞으며 심문당하던 김양순은 4차례에 걸쳐 신장 61대를 맞다가 죽었다.(1840년 8월 27일 ‘헌종실록’) 그리고 김정희가 의금부 도사와 동행해 멀고 먼 유배길을 떠났다. 유배형 가운데 가시나무 울타리 속에 갇히는 위리안치(圍籬安置) 형이었다.
고문 받은 몸으로 떠난 유배길
‘몸에 형구(刑具)가 채워지고 매를 맞아서 곤욕을 받는 것인데, 나는 이 두 가지를 다 겸하였습니다. 40일 동안 몸에 형구가 채워지고 매를 맞는 참독(慘毒)을 만났으니, 고금천하에 어찌 혹시라도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김정희, ‘완당전집’ 3권, ‘권돈인에게 보내는 편지’4)
제주로 가려면 완도에서 배를 타야 한다. 제주에 도착한 후 김정희가 동생 김명희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김정희는 9월 27일 아침 완도에서 배를 타고 석양 무렵에 제주에 도착했다.
유배 죄인을 압송하는 관리들이 작성한 ‘의금부노정기’(연대 미상)에 따르면 서울에서 제주까지 규정된 압송 기한은 13일이다. 반드시 지켜야 하는 의무사항이다. 1672년 현종 때 유배형을 받은 사간원 헌납 윤경교는 유배지에 7~8일 늦게 도착하자 처벌을 받았다.(1672년 8월 29일 ‘현종실록’) 경종 때 갑산으로 유배형을 받은 주청부사 윤양래는 도착이 이틀 늦었지만 ‘쉬지 않고 이동했기’ 때문에 처벌은 없었다.(김경숙, ‘조선시대 유배형의 집행과 그 사례’, 사학연구 55,56호, 한국사학회, 1998) 그런데 김정희는 9월 4일 유배형을 선고받은 뒤 23일 만에 제주에 도착했다. 선고를 받고 늦게 출발했을 가능성이 크다.
고문당한 역적이 유배길을 이탈?
도착 기한이 엄격하게 정해져 있는 유배길, 그것도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떠난 유배길에서 경로를 이탈해 해남 산중 대흥사를 찾을 수 있겠는가. 설사 갔다고 해도 대웅전 현판 필자를 비판하고 끌어내리며 자기 글을 쓸 수 있겠는가. 같이 고문을 당했던 김양순은 매를 맞다가 죽었다. 죄목은 역모였다. 쉬지 않고 걸어도 지체될 길에서 한가하게 친구 만나러 산중으로 들어갈 역모꾼은 없으리라. 그러니 8년 뒤 유배에서 풀린 김정희가 대흥사에 들러 현판을 다시 걸라고 한 이야기도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해남 대흥사 대웅전. 편액 '대웅보전'은 원교 이광사 글씨다.
‘원교 글씨를 보니 웃음이 다 난다’
5년 뒤인 1853년 3월, 김정희가 북청으로 두 번째 유배를 갔다가 경기도 과천으로 돌아온 뒤 초의에게 편지를 보냈다. ‘원교의 대웅전 편액을 다행히 본 적이 있다(大雄扁圓嶠書幸得覽過‧대웅편원교서행득람과). 천박한 후배들이 비평할 바는 아니나 만약 원교의 자처한 바로 논하면 너무도 전해들은 것과 같지 않다. 그가 조맹부체의 덫 안에 추락해 있다는 말을 면치 못하겠으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난다(不覺哦然一笑‧불각아연일소).’(김정희, ‘완당전집’ 5권, ‘초의에게 보내는 편지’37)
대웅전 현판을 떼라고 했다는 언급은 없다. 다시 붙이라고 했다는 정신적 성숙함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난다’는 더한 자신감이 읽힌다. 위 책 ‘완당평전’(2002)에는 ‘이 전설은 고증하지 않기로 한다’고 적혀 있다. ‘추사 김정희’(2018)는 이 에피소드를 ‘두 번째 전설은’이라며 전설로 전언(傳言)하고 있지만 이 책보다 뒤에 나온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산사순례’(2018)에는 ‘전설’이라는 언급이 없다. 아름다운 사실로 굳혀버린 것이다.
이 에피소드를 처음 알린 전 문화재청장 유홍준은 전화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이 전설을 인정하게 되면 전설이 사실이 되는 거다. 굳이 ‘전설에 따르면’이라고 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 전설이 사실이 되었다. 봉원사, 대흥사에 가면 그 현판들을 꼭 일별할 일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
-박종인 선임기자, 조선일보(21-09-29)-
===============================
'[세상돌아가는 이야기.. ] > [國史-文化]'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수도원 맥주] [인류 최고 파트너, 말의 역사] (1) | 2026.02.24 |
|---|---|
| [영조와 관우] [관포지교] (1) | 2026.02.24 |
| ['황금광(狂)' 시대] [황금 광풍 불던 정선, 자유인 리영광과 박춘금] (0) | 2026.02.12 |
| [경주 황룡골의 다실(茶室)] [賤出과 貴人] (0) | 2026.02.09 |
| [광화문 뒤흔드는 초유의 K현판… ] [광화문 국기 게양대] (1) | 2026.0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