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안보, 지정학적 필수 과제로 생각하라]
[국제 유가 폭등에도 판매가 동결, 소비 부추기는 정부]
[전기가 비싼 나라에 산다는 것]
에너지 안보, 지정학적 필수 과제로 생각하라
[朝鮮칼럼]
중동 의존의 위험 비용
얼마나 큰지 체험 중인데 대만해협도 불안하다
미국·호주·유럽 등으로 에너지 동맹 다변화 필요
전략적 전환 시작해야

중국이 대만 포위훈련을 실시한 작년 12월 29일 대만 해안경비대 소속 경비함(오른쪽)이 화위다오 인근 해역에서 중국 해안경비함을 감시하고 있다. 미국 랜드연구소는 2028년 대만해협과 남중국해가 봉쇄되는 가상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한국이 맞닥뜨릴 위기를 시뮬레이션했다. /대만 해안경비대, AFP연합뉴스
랜드연구소는 2025년 9월 서울에서 ‘한반도 에너지 지정학’을 주제로 정책 게임(Policy Game)을 개최했다. 산업계 리더와 안보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2028년 9월 대만해협과 남중국해가 봉쇄되는 가상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한국이 맞닥뜨릴 에너지 위기와 공급망 교란의 정치·경제·안보적 파급 효과를 단계별로 시뮬레이션한 것이다.
정책 게임은 다소 낯선 개념일 수 있으나, 이는 랜드연구소가 지난 60여 년간 미국 정부와 군을 위해 개발된 군사적 위기 대응 시나리오 ‘Table Top Exercise(TTX)’를 발전시킨 형태다. 군사 중심의 ‘워게임(war game)’에서 출발했지만, 안보의 개념이 경제·기술 분야로 확장되면서 정책 게임이라는 형식으로 진화했다. 예컨대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교란이나, 인공지능(AI) 기반 사이버 공격 등 복합 위기 상황을 가정하고, 10명부터 많게는 30~40명이 넘는 그룹이 한자리에 모여 여러 차례 시뮬레이션을 해본다. 참가자들은 이 과정에서 각기 다른 기관의 역할을 맡아 복합 위기에 대응하는 전략을 모색하며, 예상치 못한 변수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정책 대응 역량을 키워 나간다.
랜드연구소가 에너지 안보 정책 게임의 첫 대상국으로 한국을 택한 이유는 명확하다. 지정학적 요충지이면서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90~95%에 달하는 구조적 취약성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반도체·중공업·석유화학 등 주력 산업은 안정적 에너지 공급 없이는 작동하기 어렵다. 이 시나리오의 시점을 2028년 9월로 설정한 것은 그해 5월 대만 대선 이후 고조될 수 있는 대만해협 긴장을 염두에 둔 전략적 판단 때문이다.
참가자들은 대만해협과 남중국해 봉쇄가 현실화하면, LNG 터미널·정유 시스템·통신망에 대한 AI 기반 사이버 공격이 동시에 일어날 수 있음을 확인했다. 디지털 인프라에 크게 의존하는 한국은 복합적 위협에 노출돼 있으며, 위기 시 에너지 배급, 동맹국 및 주변국과의 조율, 통신망 관리 등 핵심 사안에 대한 신속한 결단이 국가 안정성을 좌우한다는 것을 절감했다. 정책 게임을 통해 에너지 공급망과 해상 경로, 데이터 시스템의 다변화가 전략적 필수 과제임을 확인했고, 공공·민간의 긴밀한 협력과 동맹국과의 조율이 위기 대응력과 회복력을 높여준다고 판단했다. 무엇보다 대만해협 변수는 한국의 에너지 안보가 지정학적 안정성과 분리될 수 없음을 분명히 보여줬다. 한국은 에너지 안보를 물류 문제가 아닌 국가 및 지역 전략의 핵심 축으로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
최근 호르무즈 해협 봉쇄 사태는 이러한 취약성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이란 전쟁으로 촉발된 봉쇄는 수입 원유의 약 95%를 해당 항로에 의존하는 한국 경제에 치명타를 가했다. 중동발 에너지 흐름의 차질은 생산비와 물류비 상승을 불러왔고, 수출 경쟁력을 약화시키며, 방산 제조 준비 태세까지 흔들고 있다. 중동 의존의 전략적·경제적 위험 비용이 얼마나 큰지 생생히 체험한 것이다.
미국 싱크탱크들의 강점은 미래 위기를 끊임없이 시뮬레이션하고 그에 맞는 다각적 해결책을 사전에 설계한다는 데 있다. 한국도 이번 호르무즈 사태를 교훈 삼아 몇 년 후 대만해협에서 유사한 상황이 벌어질 경우를 대비해야 한다. 에너지 안보 다변화를 위한 장기 로드맵을 지금부터 그려야 한다. 한국 정유 인프라의 약 70~80%는 중동산 중질 원유 처리에 최적화돼 있지만 구조적 전환이 불가피하다. 미국을 비롯해 호주·서아프리카 등 안정적 공급원을 중심으로 경질 원유의 비중을 점진적으로 확대하고, 한국의 방위산업과 첨단 제조업의 일부를 경질 원유 공급망과 연계해야 한다. 헬륨과 나프타 같은 핵심 소재의 대체 공급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미국뿐 아니라 유럽, 신흥 에너지 생산국과의 기술 이전 및 투자 협력도 강화해야 한다.
무엇보다 비(非)화석 에너지 다변화가 시급하다. 2024년 2월 체결된 한·미·일 소형모듈원자로(SMR) 및 첨단 원자력 기술 협력 협정을 적극 활용해 걸프 지역 의존도를 줄이고 인도·태평양 지역의 에너지 회복력을 키워야 한다.
한국의 에너지 안보는 더이상 경제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지정학적 불안정성이 고조되는 시대, 에너지 전략은 국가의 지속 가능성과 동맹의 신뢰를 가늠하는 척도다. 그 전략적 전환을 시작해야 할 시점이다.
-오미연 美 랜드연구소 한국 석좌 겸 국방안보선임연구원, 조선일보(26-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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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유가 폭등에도 판매가 동결, 소비 부추기는 정부

3차 석유 최고가격제 시행 사흘째인 12일 서울 성북구의 한 주유소에 유가 정보가 표시돼 있다. 한국석유공사 유가정보시스템 오피넷에 따르면 이날 오전 10시 기준 리터(ℓ)당 전국 휘발유 평균 가격은 전날 대비 0.73원 상승한 1992.27원으로 집계됐다. 전국 최고가는 2498원, 최저가는 1839원이다. /뉴스1
국제 유가 급등에도 정부가 2주일 단위로 시중 판매가 상한선을 정하는 ‘석유 최고가격’을 동결했다. 최근 2주간 국제 석유제품 가격은 휘발유 1.6%, 경유 23.7%, 등유 11.5%씩 급등했지만 지난 10일 3차 고시에서 이를 반영하지 않고 2주일 전과 같은 수준을 유지했다. 앞선 2차 고시 때도 국제 가격 상승분을 온전히 반영하지 않은 채 리터당 210원을 올리는 데 그쳤다. 국제 유가에 연동해야 할 판매가 결정 메커니즘이 무너진 것이다.
문제는 이같은 인위적 가격 억제가 국민들에게 에너지 위기에 대한 잘못된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란 전쟁이 격화되던 지난 3월 넷째 주 휘발유와 경유 판매량이 각각 25%, 16%씩 급증했다. 일부 사재기 수요가 섞여 있었겠지만 세계적인 에너지 절약 추세와 달리 우리의 석유 소비가 늘어난 것은 우려스러운 일이다. 이란 전쟁 이후에도 자동차 통행량이 줄어든 정도 외에 일상에서 에너지 비상사태에 따른 절박함은 찾아보기 힘든 실정이다. 정부가 최고가격제와 같은 가격 통제로 위기의 실체를 가리면서 소비자가 절약 필요성을 체감하지 못한 결과다.
인위적 가격 억제는 국가 재정 부담으로 이어진다. 정부는 이번 추경에서 정유사 손실분 등을 메워주는 데 5조원을 배정했다. 화물차 기사 등 생계형 수요자뿐 아니라 부유층을 포함한 모든 소비자에게 무차별적으로 기름값 보조 혜택이 돌아가는 구조는 재정 집행의 공정성도 훼손한다. 산업부는 “현재 재원에 비춰 부담되지 않는다”고 밝혔지만 고유가 장기화 가능성을 감안할 때 지나친 낙관론으로 보인다.
지금의 위기는 단기간에 끝날 사안이 아니다.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최상의 시나리오에서도 전쟁 이전으로의 완벽한 복귀는 없을 것”이라 했고, 국제에너지기구(IEA) 사무총장은 “1970년대 오일 쇼크와 코로나, 우크라이나 전쟁을 모두 합친 것보다 심각한 위기”라고 했다. 밸브만 다시 열면 해결되던 과거와 달리 유전과 정제 시설 등 중동의 에너지 인프라 자체가 파괴되어 완전 복구에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데다 호르무즈 해협의 통제권마저 흔들리는 초유의 상황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시장 가격은 그 자체로 강력한 ‘절약 신호’다. 포퓰리즘적 가격 동결로 시장 기능을 훼손하지 말고, 에너지 가격을 현실화하되 취약 계층에 정교한 ‘핀셋 지원’으로 재정 효율을 극대화해야 한다.
-조선일보(26-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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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가 비싼 나라에 산다는 것
[특파원 리포트]

2022년 3월 일본 경제산업성 사무실에서 직원들이 절전을 위해 전등을 끈 채 일하는 모습. 지진에 따른 발전소 가동 중단과 추위 때문에 전력이 부족해지자 수도권과 도호쿠 지역에 전력 수급 위기 경보가 발령됐다. /교도 연합뉴스
도쿄에 부임한 뒤 전기요금 고지서를 처음 받아봤다. 이곳에 오기 전, 일본은 전기료가 한국의 2배라는 말에 살짝 겁을 먹었다. 그런데 오히려 한국에서 같은 달 냈던 금액보다 30% 줄었다. 계산해 보니 단위당 요금은 일본이 비쌌다. 하지만 이곳에서 쓴 전기량이 서울에서보다 70% 적었다.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한국에선 ‘3대 이모님’으로 불리는 건조기·식기세척기·로봇청소기를 원 없이 썼다. 하지만 이곳에선 건조기는커녕, 대다수 가정에서 쓰는 작은 통돌이 세탁기를 쓰고 있다. 식기세척기는 없는 채로 살고 있고, 냉장고 용량은 한국의 절반 크기다. 한국에선 평범하게 누렸던 것들이 이곳에선 사치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전기료가 절약된 것이다.
생활 속 긴장감도 서울과는 달랐다. 에너지가 비싼 나라에 왔다는 생각에 LED 등은 작은 걸 택했다. 쓰지 않는 방은 수시로 불을 끄고 있다. 이곳은 난방도 전기(온풍기)로 해야 하기에, 추워도 참는 날이 많다. 전기요금 하나로 도쿄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자연스럽게 터득한 셈이다.
통계를 봐도, 서울은 도쿄보다 전기를 많이 쓰는 편이다. 도쿄는 서울보다 경제 규모가 2배 크지만, 총 전력 사용량(2024년 76TWh)은 서울의 1.55배 수준이다. 2010년 1.8배에서 더 줄었다.
일본은 2011년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 직후 탈원전에 나섰다. 이듬해엔 전체 전력의 30%를 담당했던 원자로가 모두 멈추면서 나라 전체가 생존을 위한 절전 모드에 돌입했다. 수도권은 전기 사용 15% 줄이기가 의무화됐고, ‘조명 4분의 1 소등’ ‘엘리베이터 일부 정지’ ‘여름엔 28도, 겨울엔 20도’ 같은 지침이 전국 기업·관청에 내려졌다. 이때 자리 잡은 절전 습관이 일본 사회 곳곳에 뿌리내려 있다. 그래서인지 도쿄의 밤거리는 서울보다 어둡다. 간판·가로등의 조도가 낮기 때문이다.
에너지 안보 위기를 느낀 일본 정부가 2022년 ‘원전 회귀’로 방향을 틀었지만 아직 원전이 전력에 기여하는 건 8~9% 수준이다. 화력·재생에너지 발전을 늘려온 와중에 불안한 국제 정세까지 더해지면서, 일본은 계속 비싼 전기요금을 치를 예정이다.
오랫동안 값싼 전기를 누려온 한국은 이제야 긴장감을 느끼는 것 같다.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터진 에너지 위기가 이젠 정말 내 일이 됐다는 ‘현타’가 온 것이다. 과거 문재인 정부는 탈원전 대못을 박으면서도 지지율을 의식해 전기요금 인상은 뒤로 미뤘다. 그러나 최근에 몇 년 사이 전기요금 현실화가 시작된 가운데, 국제유가 급등과 AI 수요 폭증까지 맞물려 앞으로 더 많은 청구서가 예고되고 있다. 호르무즈발 위기는 혼란스러운 정책 속에서 우리가 누려온 전기료의 기반이 얼마나 허약한지 일깨워준다. 현재의 편리함을 얼마나 포기할 수 있는지 그것은 묻고 있다.
-도쿄=류정 특파원, 조선일보(26-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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