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암사(鳳巖寺).. 1년에 단 하루, 금지된 절의 문이 열린다
한국 불교의 자존심 문경 봉암사
1947년 성철 스님 등 "부처님 법대로 살자"
49재·천도재 없이 1년 내내 참선 수행
부처님오신날에만 열리는 산문

문경 봉암사 '진공문' 앞에서 본 태고선원. 뒤로 희양산의 바위 봉우리가 보이는 이곳에선 1년 내내 쉬지 않고 선승들이 정진한다. 1년 중 부처님오신날 단 하루만 일반인에게 개방하기에 경내는 인적 없이 조용하다. /사진=김한수 기자
1년에 단 하루만 산문(山門)을 개방하는 절이 있다. 경북 문경 봉암사다. 보통 사찰은 사시사철 24시간 개방해 불자와 방문객이 드나든다. 그러나 봉암사는 예외다. 이유가 있다. 이곳은 ‘조계종립 특별선원’이다. 1년 내내 선승(禪僧)들이 수행에만 매진하는 곳. 49재, 천도재도 없다. 특별하고 비밀스럽고 성스러운 곳이다. 그래서 한국 불교에 위기가 찾아왔을 때마다 뜻있는 수행자들은 이곳에 모여 마음 자세를 가다듬고 초심과 불교의 본래 의미를 추스르곤 했다.
우리나라 천년 고찰들은 대개 수려한 풍광의 화룡점정(畵龍點睛) 역할을 한다. ‘어떻게 이런 곳을 찾아냈을까’ 싶을 정도로 좋은 산의 가장 알맞은 위치에 축대를 쌓고 법당을 지었다. 그 위치는 산의 3~4부 능선일 때도 있고, 거의 꼭대기일 경우도 있지만 법당 앞에 서보면 왜 그 자리일 수밖에 없는지 알 수 있다. 옛 스님들의 안목에 혀를 내두를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봉암사도 그렇다.
중부내륙고속도로 문경새재IC를 나와서 봉암사 방향으로 차를 달리다 보면 내비게이션은 아직 4㎞가 남았다고 알려주는데, 벌써 저 멀리 우뚝 솟은 우람한 바위 덩어리가 먼저 방문객을 맞는다. 희양산(999m)이다. 그 바위산 아래에 봉암사가 있다.
신라 구산선문 중 ‘희양산문’ 근거지
봉암사의 시작은 신라 헌강왕 5년(879년) 지증 국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 선불교 뿌리인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하나인 ‘희양산문’의 근거지가 이곳이다.
신라,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지역 대표적 사찰이었던 봉암사가 한국 불교의 ‘자존심’으로 대접받게 된 건 광복 이후이다. 지금으로부터 80년 전인 1947년 봉암사에 눈 푸른 선승들이 찾아들었다. 성철·청담·자운·향곡·혜암·성수·법전 스님 등이다. 이들이 봉암사를 찾은 이유는 하나였다.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 젊은 선승들의 ‘한국 불교 정체성 회복 선언’이자 혁명 선언이었다. 이 실험은 훗날 ‘봉암사 결사(結社)’로 불리게 된다.
당시 불교계는 혼란스러웠다. 조선조 500년 동안의 억불 정책에 더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황폐화된 상태였다. 게다가 온갖 민간신앙이 사찰에 다 들어와 있었다. 성철 스님 등은 “법당에 잡신이 들어앉을 수는 없다.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 외에는 전부 정리하자”고 해서 다 치웠다.
성철 스님 등 ‘봉암사 결사’로 현대 한국 불교의 틀 만들어
성철 스님은 시간이 한참 흐른 1982년 해인사에서 당시를 회고하는 법문을 한 적이 있다. 그 회고에 따르면 ‘부처님 법’을 기치로 든 당시 선승들의 성향은 근본주의적이었다. 하나하나 점검해서 원칙에 어긋나는 것은 모두 돌려놓으려 했다. 유명한 ‘공주(共住) 규약’이다.
부처님 때의 발우(밥그릇)는 와철(瓦鐵) 즉 질그릇이나 쇠였다며 나무 발우를 금했다. 가사 장삼도 비단은 금하고, 가사의 색은 선명한 붉은색을 버리고 누르스름한 괴색(壞色)으로 정했다. 과거의 비단 가사와 장삼, 목발우는 절 마당에 모아 불태웠다. 장삼은 송광사에 있는 보우 국사의 장삼을 모델로 자운 스님이 새로 만들었다. 지금 조계종의 가사와 장삼은 이때 정해졌다.

봉암사 극락전. 목탑 형식의 건물로 '봉암사 결사' 당시엔 성철 스님이 머문 곳이라고 한다.6.25 전쟁 중에도 소실되지 않고 남았다. /사진=김한수 기자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자” 엄격한 규칙
천도재, 49재를 받지 않는 전통은 봉암사 결사 때부터 생겼다. 사찰의 주요 수입원을 스스로 거부한 것. 대신 일일부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 일하지 않으면 먹지 않았다. 밥도, 땔나무도, 밭 매는 것도 스님들이 직접 했다. ‘무엇이든 우리 손으로 한다’는 정신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과도한 면이 없지 않지만 그렇게 혁명적인 방식이 아니었다면 왜색 불교의 구태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봉암사 결사는 그러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깊은 산중의 봉암사에는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1949년부터 공비가 출몰했다. 이 때문에 결사는 2년여 만에 끝났다. 그러나 그 정신은 면면히 이어져 결사에 참여했던 스님들 가운데 4명의 종정과 7명의 총무원장이 나왔다.
결사 참가자 중 종정 4명, 총무원장 7명
성철 스님은 1982년 법문에서 “그 당시 우리가 살면서 부처님 법대로 한다고 하면 너무 외람된 소리지만, 부처님 법에 가깝게는 살아야 안 되겠나 그것이었다”며 “우리(스님들)가 부처님 법을 바로 지키고 부처님 법을 바로 펴서 신도들을 교화하면 이들이 모두 신심을 내고 하여 우리 스님들이 잘 안 살려야 잘 안 살 수 없습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가장 잘 사는 것이 스님들이다, 이 말입니다”라고 했다.
이 같은 정신은 1969년 ‘제2차 봉암사 결사’로 이어졌다. 고우·법진·법화·법연·무비·영명 스님 등 30대 스님들이 역시 ‘부처님 법대로 살자’며 모여들어 다시 간화선 수행 운동을 벌인 것. 이들은 21세기 들어 전국선원수좌회를 결성해 ‘간화선 수행 지침서’를 발간하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간화선 수행을 지도하는 등 수행 운동을 이어갔다.
조계종 종립 특별선원 지정
이런 수행의 기풍을 지키기 위해 조계종은 1982년 봉암사를 특별 수도원으로 지정하고 1984년 종립 특별 선원으로 정해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고 1년 내내 선승들이 수행에만 전념하도록 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지금도 봉암사는 한국 불교의 자존심으로 남아 있다. 선승들 사이에선 ‘봉암사에서 한 철 살았다’는 것은 자부심의 표현이다.
부처님오신날(24일)을 앞두고 봉암사의 허락을 받아 미리 다녀왔다. 언제나처럼 병풍처럼 봉암사를 감싸고 있는 희양산이 먼저 반겼다. 이 바위산에는 철분이 많이 함유돼 벼락도 많이 떨어진다고 한다. 속된 표현으로 ‘터가 센’ 것이다. ‘사찰이 아니면 도적의 소굴이 됐을 것’이란 말도 있다. 그래서 민간이 살기에는 적당하지 않다. 수행자들에게는 딱 맞는 공간이다.
아니나 다를까, 초입엔 오래된 안내판들이 서 있다. 봉암사와 문경시, 문경경찰서 이름으로 붙인 옛날 안내판엔 “등산, 수렵을 목적으로 오신 분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돌아가 달라”며 ‘위반할 경우 벌금 50만원의 형사처벌’을 경고한다. 문경시장과 봉암사 주지 명의의 안내판은 “아쉽지만 돌아가 달라”고 권하고 있다.
절 입구 고풍스러운 일주문(보물 지정)은 수리·복원 중이어서 아쉽지만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앞쪽엔 ‘희양산 봉암사’, 뒷면엔 ‘봉황문’이란 현판이 걸린 일주문인데 벌레가 먹었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봉암사 전각 가운데 6·25전쟁의 참화를 피한 것은 일주문과 고려 태조 때 지었다는 극락전뿐이다.
스님들이 감자·배추·무·상추 가꿔
절 입구엔 널따란 채소밭이 펼쳐져 있다. 비닐을 씌운 밭고랑에선 파릇파릇한 싹이 제법 자라고 있다. 마침 밀짚모자 쓴 스님이 밭에서 나온다. 주지 원근 스님이다. 스님은 “감자요, 감자”라고 설명한다. 이 밭에선 감자, 고추, 무, 배추, 상추, 호박, 가지, 토마토 다 심어 키운다고 했다. 수행하는 틈틈이 울력(공동 노동)으로 재배하는 것.
가람 배치는 단순하다. 큼직큼직한 전각들이 오밀조밀하지 않고 널찍널찍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풍경 자체가 남성적이다. 철저히 수행에 맞춘 공간이다. 이 절을 창건한 지증 대사를 기리는 탑비와 탑은 전각을 씌워 보존하고 있다. 신라 헌강왕 때인 942년 세운 탑비는 최치원이 글을 쓴 것으로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과정, 공인 그리고 선종의 전래 과정을 적은 귀한 비석으로 국보로 지정돼 있다. 비석의 돌은 남해 바닷속에서 캐낸 바위로 만들었다고 한다.
돌계단 위엔 극락전이 서 있다. 일주문과 함께 6·25 전란 피해를 입지 않은 건물로 보물로 지정돼 있다. 법주사 팔상전을 2층으로 줄여놓은 것 같은 모습의 목탑인데 몸체에 비해 머리가 큰 모습이 ‘가분수(假分數)’처럼 보인다. 봉암사 결사 당시엔 성철 스님이 이 극락전에서 지냈다고 한다.
옛 대웅전은 앞쪽엔 ‘금색전(金色殿)’이라는 새 이름표를 달고, ‘대웅전’ 현판은 뒤쪽에 걸었다. 이 금색전 앞에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돼 보물로 지정된 삼층석탑이 서 있다. 삼층석탑 앞에 서면 석탑과 금색전, 그리고 희양산이 한 앵글에 들어온다. 포토존으로 유명하다.
대웅보전 등 전각엔 풍경(風磬)은 달려 있는데 바람판(추)이 없다. 주지 스님은 “바람이 떼어 갔다. 굳이 새로 달지 않았다. 그 덕에 풍경 소리가 아니라 바람 소리를 듣는다”며 웃었다.
서쪽으로 담장 너머 아홉 칸짜리 큼직한 전각이 보인다. 봉암사 수행의 심장 격인 태고선원이다. 태고선원은 남쪽과 동쪽에 문이 하나씩 있다. 남쪽 문엔 ‘진공문’, 동쪽 문엔 ‘묘유문’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합하면 ‘진공묘유(眞空妙有)’, ‘참되게 비어 있기에 오묘한 온갖 현상이 존재할 수 있다’는 대승불교의 핵심 교리를 담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찰의 선원은 여름(하안거)과 겨울(동안거) 석 달씩 집중 수행 기간이 있다. 그렇지만 봉암사는 1년 내내 안거가 이어진다. 하안거와 동안거 사이의 봄·가을에도 ‘산철결재’라 하여 선승들의 수행은 이어진다. 평시에는 70여 명이 수행하고 음력 4월 보름부터 시작될 올해 하안거엔 60여 명이 참가한다고 한다.
높이 5m 마애불…목탁 소리 바위도
1년 내내 수행이 이어지지만 적당한 휴식은 필요한 법. 봉암사 서쪽 계곡으로 난 산길은 스님들이 오랜 좌선으로 굳어진 몸을 풀고 맑은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포행할 때 즐겨 찾는 코스. 이 길을 따라 희양산 방향으로 천천히 오른다. 맞은편에서 한 노승이 휘적휘적 내려온다. 1969년 봉암사에 들어온 이래 봉암사를 떠나지 않고 지금도 산내 암자인 백련암에서 수행하는 법연 스님. 점심 공양 겸 포행(걷기)을 나온 것. 스님과 헤어져 조금 올라가자 왼편 계곡에 커다란 마애불상이 서 있다.
시냇가에 너른 바위가 펼쳐진 가운데 집채만 한 바위가 여럿 서 있다. 그중 수직벽을 가진 바위에 정교하게 미륵불이 새겨져 있다. 17세기 조선 현종 때 의천 스님이란 분이 새겼다고 전해진다. 마애불상 아래 너른 바위 가운데 작은 절구처럼 동그랗게 파인 부분이 있고 그 안에 어른 주먹만 한 자갈이 있다. 자갈로 파인 부분을 두드리면 목탁 소리가 난다고 하는데 듣기에 따라서는 목탁 소리 같기도 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두드렸으면 저렇게 파였을까 싶다.
다시 봉암사로 내려와 동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동방장(東方丈)’이란 편액이 걸린 전각이 보인다. 봉암사의 가장 어른이 머무는 방이다. ‘영원한 수좌’로 꼽힌 적명 스님(1939~2019)이 머물렀던 방이고, 제2차 봉암사 결사를 주도한 고우 스님(1937~2021)이 원적에 든 곳이다.
봉암사 동편 언덕길을 오른다. 잘 정리된 잔디밭에 부도(사리탑) 5기가 나란히 서 있다. 고우 스님과 적명 스님의 부도도 여기에 있는데 5기의 모양이 다 다르면서도 기품이 있다. 더 동쪽으로는 서암 스님의 사리탑이 자리하고 있다.
연등도 촛불로 부처님 오신 날 하루만
기자가 봉암사를 방문한 것은 지난 월요일(18일)이었다. 부처님오신날(24일)까지 불과 1주일도 남지 않은 때였다. 이때쯤이면 여느 사찰 대웅전 앞마당은 연등으로 덮여 하늘이 안 보인다. 그런데 봉암사 대웅전 앞마당엔 연등이 없었다. 연등을 걸기 위한 줄도 설치되지 않았다. ‘연등을 걸지 않나’ 싶었지만 주지 스님은 “봉암사도 연등을 단다”고 했다.
봉암사 연등은 다른 절과 다르다. 유일하게 산문을 여는 부처님오신날 아침부터 연등을 접수받아 그날 밤에 대웅전 앞마당과 금색전 앞마당에 3000개쯤 건다. 그런데 전등이 아니라 초로 밝힌다. 초는 밤사이 타오르다 8시간 후쯤 스스로 꺼진다고 한다.
오롯이 수행에만 정진하는 스님들이 사는 곳이기에 단 하루 부처님오신날에는 봉암사 일대가 인산인해를 이룬다. 수행의 기운을 느끼려는 인파다.
평소 봉암사 경내에서는 휴대전화가 안 터진다. 위치에 따라 문자만 겨우 가능하다. 그렇지만 부처님오신날엔 휴대전화 중계 차량도 들어온다. 1년에 단 하루 열리는 봉암사를 찾아오는 손님들을 위한 배려다. 연등이 불을 밝힐 무렵 닫히는 산문은 1년 후에야 다시 열린다.

경북 문경 희양산에 자리한 봉암사 마애미륵여래좌상 위로 은하수가 뜨고 있다. /사진=박상훈 기자
-김한수 기자, 조선닷컴(26-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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