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國史-文化]

[부석사 고려불상 앞에서 빈 소원] ['사요나라, 아라시'와 성숙한 팬덤]

뚝섬 2026. 6. 2. 07:19

[부석사 고려 불상 앞에서 빈 소원]

['사요나라, 아라시'와 성숙한 팬덤]

 

 

 

부석사 고려 불상 앞에서 빈 소원

 

쓰시마에서 훔쳐온 고려 불상
양국의 갈등 키울 악재였지만
오히려 협력의 계기로 승화해
몽유도원도 다시 볼 계기 되길
 

 

왜구에게 약탈당했다가 647년 만에 고향에 돌아왔지만 소유권 분쟁 끝에 일본으로 반환된 금동관음보살좌상이 복제돼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고향인 충남 서산 부석사에 봉안됐다. 사진은 17일 열린 불상 복제본 봉안식 모습. /연합뉴스

 

소유권 분쟁은 법정에서 시비를 가리는 사건 중에서도 다툼이 치열하고 판결 후에 감정의 앙금도 크게 남는다고 한다. 개인 간 다툼도 그러한데 조상이 남긴 유산을 둘러싼 분쟁은 말할 것도 없다. 2012년 일본 쓰시마섬의 사찰 간논지(觀音寺)에서 한국 절도범들이 훔쳐 국내로 들여온 14세기 고려 불상 금동관음보살좌상을 두고 벌어진 소유권 분쟁도 양국 관계에 큰 상처를 낼 수 있는 사안이었다. 높이 50㎝에 불과한 아담한 불상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두고 극단적으로 대립했다. 원 소유주임을 주장하는 충남 서산의 부석사 측은 불상 안에서 고려 시대에 만들었다는 기록이 나왔고 정황상 왜구가 약탈해 간 게 분명하니 돌려줄 수 없다고 했다. 반면 간논지 측은 불상을 왜구가 약탈했다는 명확한 증거가 없고 수백 년간 일본 소유였다며 반환을 요구했다.

 

송사가 10년이나 지속되며 양측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게다가 이런 싸움이 터지면 두 나라엔 불행했던 과거사를 핑계 삼아 ‘토착왜구’니 ‘혐한’이니 하며 갈등을 부추기는 이도 적지 않다. 일본에 있는 우리 옛 문화유물을 들여와 전시할 때면 두 나라 사이엔 미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국내에선 “빌려올 게 아니라 아예 환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컸고, 일본에선 “환수를 요구하는 나라에 빌려줬다가 돌려받지 못하면 어쩔 거냐”며 대여 자체를 못마땅해한다. 이런 이들에게 고려 불상 사건은 싸움의 불을 키울 좋은 연료였다.

 

훔쳐온 고려 불상 때문에 서로 상처만 낼 뿐인 싸움을 또 보게 되는 것 아닌가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2023년 10월 우리 대법원이 간논지에 불상을 돌려주라고 최종 판결한 것을 계기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한낱 절도범 때문에 문화 교류의 토대마저 허물 수는 없다는 목소리가 두 나라에서 힘을 얻었다. 부석사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간논지에 연락해 불상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다만 ‘100일 법회’를 열고 싶으니 기다려 달라고 했다. 간논지는 기다리겠다고 했다. “돌려주지 않으려고 시간을 버는 것”이라며 의심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았지만 부석사를 믿기로 했다.

 

불상은 약속대로 작년 1월부터 그해 5월 부처님 오신 날 법회까지 마치고 대한해협을 건너갔다. 복원된 신뢰는 협력으로 승화됐다. 간논지는 부석사가 불상을 복원하고 싶다고 하자 불상의 3차원 데이터를 정밀 측정해 전달했다.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복원된 불상 봉안식이 지난달 17일 부석사에서 열리자 간논지 측 승려가 참석해 축하했다. “재판을 하며 갈등도 있었지만 서로 배려하는 마음으로 오늘의 인연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 말 그대로다. 자칫 반목과 원한의 상징이 될 뻔한 고려 불상이 양국의 이해와 교류를 굳건히 하는 상징으로 거듭났다.

 

불상을 둘러싼 갈등이 비등하던 시기, 일본에선 한국과 더 이상 고미술품이나 유물 교류를 할 수 없다는 격앙된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실제로 일본에 있는 고려 불화를 들여와 전시하려던 계획이 엎어졌다. 지난해 일본 덴리대가 소장한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빌려와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하려 했다가 무산된 것도 불상 도난 사건이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1447년, 조선의 안평대군이 꿈에서 본 광경을 그린 ‘몽유도원도’. 1592년 일본군 시마즈 요시히로가 약탈해 일본으로 가져갔다. /공유마당

 

복원된 고려 불상은 부석사 설법전에 모셔져 있다. 지난 주말 찾아가 보니 설법전 앞에 안내판이 서 있었다. 두 사찰이 송사로 인한 다툼을 딛고 힘을 합쳐 불상을 세운 과정이 소개돼 있었다. 안내문을 읽은 방문객들이 공감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불당에 들어가 불상 앞에서 합장했다. 나도 불상 앞에 서서 소원을 빌었다. 간논지 사태를 슬기롭게 해결한 두 나라 사이에 신뢰가 쌓인다면 2009년 이후 한국 땅을 밟지 못하는 ‘몽유도원도’를 다시 볼 기회도 오지 않을까.

 

-김태훈 논설위원, 조선일보(26-06-02)-

______________

 

 

'사요나라, 아라시'와 성숙한 팬덤 

 

일본 국민 아이돌 아라시의 은퇴 공연이 열린 지난 31일 도쿄돔호텔 창문에 '일본의 보물 아라시, 고마워'라는 등의 포스터가 붙어 있다. /X(옛 트위터)

 

지난 31일 새벽 일본 도쿄 분쿄구 도쿄돔호텔 앞. 캄캄한 거리에 별안간 불빛들이 새어 나왔다. 호텔 투숙객들이 저마다 창문에 글자를 적은 포스터를 붙인 뒤 일제히 객실 조명을 켠 것이다. 창문들엔 이런 문구가 적혔다. “일본의 보물 아라시(嵐·폭풍), 지금까지 고마웠어!”

 

일본 국민 아이돌이자 5인조 남성 그룹 아라시가 도쿄돔에서 은퇴 공연을 연 날이었다. 지방에서 온 팬들이 작별 인사를 위해 소박한 이벤트를 준비한 것이다. 1999년 데뷔해 첫 주에만 앨범이 약 60만장 팔릴 정도로 시대를 풍미한 가수지만, 이날 5만여 석을 채운 팬들의 모습은 신기하리만치 차분했다. 전철역과 공연장을 오가는 수만 명의 행렬은 약속이라도 한 듯 질서 정연했다.

 

이 ‘성숙한 이별’은 아라시의 깊은 배려가 만든 결과다. 아라시가 전격 은퇴를 발표한 것은 1년 전인 지난해 5월 6일. 팬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함이었다. 소속사(쟈니스 사무소) 창업주의 성 착취 폭로로 회사가 공중분해되는 사태에서도, 이들은 뿔뿔이 흩어지기보다 팬들의 상처를 보듬는 길을 택했다.

 

이 지점에서 한국의 대중문화 산업을 떠올리게 된다. 한국 아이돌 산업은 일본보다 출발이 늦었지만 현재 세계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규모는 압도적이다. 가창·안무는 물론 기획·자본력 등 모든 면에서 K팝이 J팝을 뛰어넘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대중의 공공 공간을 대하는 팬덤 문화와 이를 관리하는 기획사의 매뉴얼만큼은 여전히 일본을 배울 필요가 있다. 일본 대형 아이돌은 전통적으로 전철역이나 공항, 방송국 등 일상 공간에서 팬들이 진을 치고 대기하는 행위를 엄격하게 금지한다. 2019년 아라시 소속사 후배 헤이세이점프는 일부 팬의 대중교통 매너 위반을 이유로 콘서트를 전면 취소하는 초강수를 뒀다. 아라시도 길거리에서 멤버들에게 선물을 주는 행위마저 금지하며 ‘오시카츠(推し活·팬덤 문화)’가 공공 예절의 예외가 될 수 없음을 수차례 고지했다.

 

한국의 현실은 어떤가. 아이돌을 비롯한 유명 연예인이 출국하는 날이면 공항은 몇 시간 전부터 몰려든 팬들로 마비가 된다. 최근에는 인기 스타를 보호하겠다는 명목으로 사설 경호원이 일반 승객을 향해 강한 플래시를 쏘거나 일부 시설을 점거하는 등 상식을 벗어나는 일까지 벌어졌다. 스타의 안전을 핑계로 시민의 일상을 방해하고 기획사는 이를 방관하며 마케팅에 활용한다.

 

세상은 1등이 남긴 화려한 기록보다, 그들이 대중 곁에서 어떤 태도로 머물렀는지를 더 오래 기억한다. 세계가 주목하는 K팝이 아라시의 마지막 무대에서 배워야 할 것은 노래나 안무가 아니었다. 시민의 일상을 배려하고 공공의 가치를 존중하는 성숙한 품격이다. 팬덤이 열정 표현을 넘어 사회 속에서 책임과 예의를 다할 때, 진정한 ‘문화 강국’의 문이 열릴 것이다.

 

-도쿄=김동현 특파원, 조선일보(26-06-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