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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무관 시호 '충무'.. ] [조선 왕 호칭의 조(祖)와 종(宗).. ]

뚝섬 2026. 6. 4. 10:13

[충무공.. 조선의 무관 시호 '충무', 이순신 외에도 11명]

[조선 왕 호칭의 조(祖)와 종(宗), 알고보니 아첨의 결과였다고?]

 

 

 

충무공.. 조선의 무관 시호 '충무', 이순신 외에도 11명

 

우리가 잘 아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 외에도 조선 시대에 ‘충무공’이라는 이름을 받은 영웅이 11명이나 더 있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나라를 지킨 이들에게 국가가 내린 가장 특별한 영예이자 역사적 성적표였던 ‘충무’라는 ‘시호(諡號)’의 비밀을 살펴보겠습니다. 동아시아에서는 죽은 사람의 한평생을 평가하고, 그의 인생에 맞는 글자를 골라 특별한 이름을 내려줬는데 이를 ‘시호’라고 부르죠. 

 

수 양제(가운데)의 모습을 담은 그림입니다. '양(煬)'은 지나치게 사치스럽고 폭군처럼 백성을 괴롭혔다는 뜻을 담은 시호예요.

 

수나라 양제, ‘양’은 폭군을 의미

 

시호의 기원은 고대 중국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왕이나 제후가 죽은 다음, 그의 일생을 평가해서 잘 다스린 왕에게는 ‘문(文)’ ‘성(成)’ 등의 글자를, 반대로 나라를 망친 왕에게는 ‘영(靈)’ ‘양(煬)’ 같은 글자를 시호로 줬습니다. ‘문(文)’은 보통 학문을 숭상하고 교양 있게 나라를 통치했다는 의미예요. ‘성(成)’은 큰 업적을 이루거나 나라를 안정적으로 발전시켰다는 뜻입니다. 반면, ‘영(靈)’은 변덕스럽고 이상한 일을 많이 벌였다는 부정적 의미를 갖고 있으며, ‘양(煬)’은 지나치게 사치스럽고 폭군처럼 백성을 괴롭혔다는 뜻이죠. 무리한 고구려 정벌과 사치로 나라를 망쳤다고 평가받는 수나라 양제의 시호에도 ‘양(煬)’ 자가 들어갑니다.

 

시호 제도는 우리나라에선 삼국 시대 즈음 신라에서 사용되기 시작해 조선 때 적극적으로 사용됐습니다. 조선에서 시호를 정할 때는 당대 최고 학자들이 모인 홍문관에서 죽은 사람의 일생을 평가하고 그에 가장 어울리는 글자를 골랐습니다. 같은 사람이어도 누구에게는 좋은 사람일 수 있고, 다른 이에게는 나쁜 사람일 수가 있었기 때문에 때로는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결국 시호는 죽은 사람을 세상이 어떻게 기억하느냐는 지표였고, 때로는 왕조차도 신하들의 여론을 함부로 뒤집을 수 없었습니다.

 

시호는 원래 정2품 이상의 높은 관리들만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이보다 지위가 낮다 해도 특별한 학문적 성취를 이루거나, 무엇보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운 사람들에게도 시호가 주어졌습니다. 이렇게 시호를 내리는 규정이 바뀌게 된 것은 조선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치열한 전쟁을 거치면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웅들을 최대한 기리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충무공 이순신의 초상화. 조선의 충무공은 이순신을 포함해 총 12명이랍니다.

 

무관이 받을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러운 시호

 

신하들이 받을 수 있는 시호는 굉장히 다양했지만, 그중 무관들이 받을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러운 시호 중 하나는 ‘충무’였습니다. 나라에 충성을 다한다는 ‘충(忠)’, 그리고 뛰어난 무력을 가졌다는 ‘무(武)’ 두 가지 좋은 글자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도 충무 시호는 매우 위대하다고 평가받는 인물들이 가졌습니다. 삼국지에서 촉나라의 기둥이었던 제갈공명이나, 남송을 지탱했던 위대한 장군 악비 같은 인물들도 충무 시호를 받았죠.

 

그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충무공 이순신이지요. 이순신은 임진왜란 때 조선 육군이 연패하는 동안 옥포대전을 시작으로 거의 모든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도중 누명을 쓰고 잠시 파직되기도 했지만, 조선 수군이 궤멸의 위기에 빠졌을 때 명량대첩에서 겨우 13척의 배를 이끌고 수백 척 배를 가진 왜군을 이겼습니다. 이순신이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사옵니다’라고 올린 보고 때문에 12척의 배로 싸운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 명량대첩에는 수리를 마친 배 1척이 추가되면서 총 13척이 투입됐다고 해요.

 

이순신이 충무라는 시호를 받은 건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1598년)에서 전사한 지 무려 45년 뒤인 인조 21년이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생전 모함으로 옥살이를 하고 백의종군(벼슬 없이 군대를 따라 싸움터로 감)을 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고,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정국도 혼란스러웠습니다. 이런 여러 사정 속에 시호가 내려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지요.

 

경남 진주에 있는 충무공 김시민 동상이에요. 김시민은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었죠./충무공 정충신의 영정이에요. 정충신은 신분이 낮았지만 무과에 합격해 정묘호란 때 장군으로 활약했어요. /위키피디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충문’ 시호를 받은 대표 인물은

 

우리에게 익숙한 충무공 이순신을 포함해 조선 역사상 충무 시호를 받은 인물은 총 12명입니다. 임진왜란 3대 대첩(한산도 대첩·행주대첩·진주대첩) 중 하나인 진주대첩에서 싸운 김시민의 시호도 충무공입니다. 김시민은 관군·백성 연합군 약 4000명을 이끌며 3만명의 일본군과 싸워 진주를 지켜냈습니다. 이 덕분에 일본이 호남 지역을 점령하지 못하고, 전쟁의 흐름이 조선에 유리하게 바뀌었죠. 비록 김시민은 이 전투에서 전사했지만,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덕에 전라도의 곡창지대를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결국 김시민도 충무공이 돼 그의 업적이 오늘날까지 기억되고 있죠.

 

또 한 명의 유명한 충무공은 정충신입니다. 정충신은 원래 신분이 낮아 높은 벼슬길에 오르기 어려웠어요. 어린 시절에는 권율 장군의 부대에서 심부름을 하며 지냈는데, 어느 날 적의 움직임을 알리는 중요한 편지를 목숨을 걸고 전달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해요. 이를 계기로 권율은 정충신의 용기와 재능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이후 정충신은 학문과 무예를 꾸준히 익혔고, 결국 무과에 합격한 정충신은 정묘호란 때 최고위급 장군으로 활약하며 나라를 지켜 충무 시호를 받았습니다.

 

한편, 칼이 아닌 붓으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에게 주어진 시호에는 ‘문성(文成)’과 ‘충문(忠文)’ 등이 있습니다. 특히 ‘충문’은 ‘충무’와 짝을 이루죠. 문성 시호는 한반도에 처음 성리학을 소개한 안향과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 율곡 이이가 받았습니다. 충문 시호를 받은 대표적 인물은 성삼문이에요. 삼촌인 수양대군(훗날의 세조)에게 사실상 왕위를 빼앗기고 폐위된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처형당한 충신 여섯 명을 ‘사육신’이라고 부르는데요. 성삼문은 사육신 중 한 명이었습니다. 숙종 때 단종이 복권되면서 사육신을 비롯한 신하들도 시호를 받게 됩니다. 시대를 가리지 않고 옳은 일을 한 사람들의 이름을 역사가 영원히 기억하도록 하자는 나라의 메시지였던 셈이죠.

 

-이한 작가·'한잔 술에 담긴 조선' 저자/기획·구성=정해민 기자, 조선일보(26-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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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 호칭의 조(祖)와 종(宗), 알고보니 아첨의 결과였다고?

 

사실상 원칙 같은 건 없었다, 그때마다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을 뿐  

 

조선 21대 왕 영조(英祖·왼쪽)와 25대 왕 철종(哲宗). 왜 영조는 '조(祖)'인데 철종은 '종(宗)'인지, 이 글을 읽으면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조선시대 27명의 임금 중에서 어떤 이는 ‘조(祖)’, 또 어떤 이들에겐 ‘종(宗)’이라는 칭호가 붙습니다. 도대체 무슨 차이이고, 또 왜 그런 칭호가 붙는 것인가? 이것을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학교 선생님과 전문가 등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또 물어봤습니다만 번번이 만족스런 대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야 속시원히 그 의문이 풀리게 됐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연구편찬실장과 사료조사실장을 역임하고 한국고지도연구학회장을 맡고 있는 이상태 박사의 신간 ‘여기가 서울 거기야’를 통해서였습니다. 이 책에서 영감을 얻어 조금 더 조사해 봤습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나라를 세우거나 거기에 준하는 업적을 쌓은 사람은 ‘조’, 그렇지 않은 다른 임금은 ‘종’이라 불리는 것으로 막연히 알고 있었습니다. 태조(太祖)는 나라를 세웠으니 당연히 ‘조’가 되겠죠. 그런데 7대 세조(世祖)는 왜 ‘조’인 거지? 그래서 ‘나라에 큰 변란이 있었거나 변란 수준의 일을 자기가 벌인 왕’에 ‘조’자를 붙인다고 설명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 논리대로라면 14대 선조(宣祖)가 ‘조’인 것은 그런대로 이해가 갔습니다.

 

그런데 16대 인조(仁祖)는 왜 또 ‘조’인가요? 병자호란을 극복했으니 ‘조’인가요? 만약 광해군을 내쫓아 망할 뻔한 나라를 재건했다는 논리라면 11대 중종(中宗)이 ‘종’인 것과는 형평성이 어긋난 것이 아닙니까. 뭐, 인조도 그런대로 이해를 하고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21대 영조(英祖)와 22대 정조(正祖), 23대 순조(純祖)가 잇달아 ‘조’인 것은 누구도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영조는 자기 아들을 죽인 변란이 있어서라고 누군가는 말했는데, 그러면 정조는? 그리고 그 아들 순조는? 영·정조는 그렇다고 쳐도 순조는 대체 뭘 했기에 나라를 재건하는 수준의 업적을 쌓았다는 말인지?

 

정리를 해 보자면 고려의 경우에는 34명의 왕 중에서 초대 태조(왕건) 말고는 ‘조’자를 붙인 예가 없지만, 조선은 27명의 왕 중에서 태조(이성계) 말고도 세조(7대), 선조(14대), 인조(16대), 영조(21대), 정조(22대), 순조(23대)까지 ‘조’를 붙인 임금이 6명이나 되는 것입니다심지어 실제로 왕노릇을 한 적이 없는 추존왕 중 장조(사도세자), 문조(효명세자)에게도 ‘조’가 붙습니다.

 

자, 알고보니 사실은 이랬습니다.

 

원칙대로 하자면 고려와 같이 하는 것이 맞습니다. 창업 개국한 임금과 (실제로는 왕위에 오른 적이 없는) 그의 4대조까지만 ‘조’자를 붙이는 게 원칙이었다는 겁니다. 따라서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는 목조(穆祖), 증조부 이행리는 익조(翼祖), 할아버지 이춘은 도조(度祖), 아버지 이자춘은 환조(桓祖)로 추존됐습니다. 이 네 명에 이성계를 포함해 ‘조’가 다섯 명. 여기에 세종 때 지은 ‘용비어천가’는 세종의 아버지 태종까지 여섯 명을 칭송하며 첫 문장을 리드미컬하게도 ‘해동 육룡이 나르샤’로 썼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후의 임금은 쫓겨나서 ‘군(君)’으로 격하되지 않는 한 모두 ‘종’자를 붙이는 게 맞을 터겠죠. 그러나 또 다른 원칙이 있었습니다. ‘유공왈조(有功曰朝) 유덕왈종(有德曰宗)’이라는 것이죠. 나라에 공이 많으면 ‘조’, 나라에 덕이 많으면 ‘종’자를 붙인다는 겁니다. 이것을 줄여서 조공종덕(祖功宗德)’이라고도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죠. 돌아가신 전하께서 공이 있었던가 덕이 있었던가? 이것은 대단히 애매하고 주관적인 기준이라고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문제는 ‘조’가 ‘종’보다 좀더 명예로운 호칭이라고 여겨졌다는 데 있습니다.

 

그럼 태조가 아니면서 가장 먼저 ‘조’자가 붙은 임금인 7대 세조는 왜 ‘조’라 불리게 됐나 살펴보겠습니다. 세조의 묘호는 당초 신종(神宗), 예종(睿宗), 성종(聖宗) 중에서 하나 골라 선택하기로 했었는데(지금 솔직히 저 神자와 聖자를 보니 대단히 역겨워집니다), 세조의 차남으로 임금이 된 예종이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대행 대왕께서 국가를 재조(再造)한 공덕은 일국의 신민으로 누가 알지 못하겠는가? 묘호를 세조라고 일컬을 수 없는가?”

 

신하들도 모두 찬성해 ‘세조’가 됐다는 것입니다. 아하, 불과 14개월 동안 왕위에 있었던 예종이란 임금이 한 일이라곤 남이를 죽인 일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하나 더 있었군요. 정말 기가 찬 일이라고밖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처음이 어렵지, 그다음부턴 별로 어렵지 않은 법입니다. 14대 선조는 임진왜란의 책임을 물어 오히려 군으로 강등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처음엔 선종(宣宗)이었다가 아들 광해군이 ‘선조’로 개칭했다는 것입니다. 왜? ‘나라를 빛내고 임진왜란을 평정해 전에 없던 큰 공을 세웠으므로 마땅히 조라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망할.

 

16대 인조는 처음부터 ‘조’였습니다. 묘호를 열조(烈朝)라고 했는데 ‘덕을 지키고 업(業)을 높였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중국 오대십국 중 남당(937~975)의 창업 군주의 시호가 열조여서 중복을 피하기 위해 ‘인조’로 바꿨다는 것입니다(그냥 자결해서 ‘열사’가 됐더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지만).

 

가만히 보면 전란이 일어나 나라가 거의 멸망에 이를 뻔했던 임금들이 ‘그래도 나라가 망하지는 않았잖느냐’는 이유로 ‘조’가 된 셈이어서 실로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이렇게 따지자면 IMF 위기를 가져왔지만 나라가 망하지는 않았던 대통령은 ‘삼조(三祖)’라 부르고, 나라의 공산화 위기와 에너지 위기를 가져왔지만 그래도 나라가 아주 망하지는 않았던 대통령은 ‘인조(寅祖)’라 불러야 하는 것인지 원…

 

그러면 영조와 정조는 어떻게 된 것일까요? 두 임금은 원래 영종(英宗)과 정종(正宗)이었습니다. 이건 19세기 말까지도 계속 그렇게 불렸던 호칭이었는데, 영종은 1889년(고종 26년) 봉조하 김상현의 상소를 계기로 ‘영조’로 묘호를 바꿨습니다. 왕계(王系)의 정통성을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정조는? 1897년 대한제국이 건립된 뒤 정종에서 정조로 바뀌었습니다.

 

대한제국이란 나라가 새로 세워진 셈이니 이번에도 위로 4대를 ‘조’로 격상시켜야 되겠죠? 그래서 고종이 의붓아버지로 삼은 효명세자(순조의 아들)는 당초 추존왕 묘호 익종(翼宗)에서 ‘문조(文祖)’로, 문조의 할아버지 정종은 ‘정조’로, 그 아버지 사도세자는 일단 ‘장종(莊宗)으로 추존됐다가 ‘장조(莊祖)’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고종 위로 4대까지 ‘조’로 바뀐 것입니다. 대한제국 수립 이전에 바뀐 영조까지 포함하면 고종 위로 5대까지 ‘조’가 됐습니다. 아래 조선 후기 왕실 가계도를 보시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조선 후기 숙종에서부터 고종까지의 왕실 가계도. 철종은 순조의 의붓아들로, 고종은 문조(효명세자)의 의붓아들로 입적됐다. /위키백과 캡처

 

고종은 당연히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자신의 묘호에도 ‘조’가 붙으리라 여겼겠지만 죽기 전에 나라가 망해버렸으니… 그럼 24대 헌종과 25대 철종은 왜 그냥 ‘종’으로 남은 것일까요? 헌종은 문조(효명세자)의 친아들이었고, 철종은 순조의 의붓아들로 입적됐으므로 문조의 의붓동생이 된 것이었습니다. 고종은 문조의 의붓아들로 입적된 것이니 고종 입장에선 헌종은 형, 철종은 숙부가 됩니다. 직계 조상이 아니니 굳이 ‘조’로 격상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남은 사람은 23대 순조 한 명입니다. ‘아, 순조도 대한제국 때 순조로 격상됐나보다’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아니었습니다.

 

순조는 그 이전부터 이미 순조였던 것입니다. 네? 뭐라고요? 아니, 순조라는 임금이 도대체 뭘 했다고…

 

순조의 묘호는 처음엔 분명 순종(純宗)이었습니다. 그런데 1857년(철종 8) 지돈녕 벼슬의 이학수란 사람이 이렇게 상소했습니다.

 

순종 대왕은 사교(邪敎)를 막고 홍경래 난을 평정하는 등 국가에 공이 많았으므로 ‘조공종덕’의 원칙에 따라 묘호를 순조로 바꿔야 합니다. 조는 공로(功勞)요 종은 덕화(德化)로서 두 가지가 모두 성대하고 아름다워서 조가 반드시 종보다 우월한 것은 아니고 종이 반드시 조보다 깎이는 것은 아니지만 특별히 당면한 시기에 의해 그 칭호를 달리했을 뿐입니다.”

 

이어서 이런 말도 했습니다.

 

“우리 세조 대왕과 인조 대왕께서는 계통을 이은 임금으로 조라고 일컬었으며, 선조 대왕은 종계를 바르게 밝혔고 왜란을 평정했기 때문에 조라고 일컬었으니, 이는 참으로 우리 선군들께서 이미 시행했던 전례였고 우리나라의 예제(禮制)에도 역시 마땅했습니다.”

 

참으로 ‘K사회생활’의 진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건 그냥 고도의 아첨일 뿐이었습니다. 당시 순조의 계비인 순원왕후가 대왕대비로서 생존해 있었을 때였으니 잘 보이기 위해 아첨을 했던 것입니다. 아무도 반대하는 신하가 없는 상황에서 묘호는 순조로 바뀌었습니다.

 

이학수의 상소 중에서 ‘사교’란 천주교를 말하고, ‘사교를 막았다’는 것은 즉위하자마자 일어난 1801년의 신유박해를 말합니다. 이 임금을 ‘순조’라고 부르는 것에는 천주교인들이 흘린 피도 함유돼 있는 셈입니다.

 

이제 조선시대의 ‘조’와 ‘종’은 과연 어떻게 다른가 정리해 보면, 한마디로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태조를 제외하면, 별 원칙 없이 그때그때 정치적 상황에 의해 ‘종(宗)’이거나 종이었어야 할 임금 몇 명이 ‘조(祖)’로 바뀌었다.”

 

진상을 알고 나니 속이 좀 쓰라린 것 같기도 합니다. 세조, 선조, 순조의 경우엔 이미 조선시대에도 ‘조’로 바꾼 것이 사람들의 비난의 대상이 됐다고 합니다. 결국 그런 식의 ‘묘호 인플레’는 아첨의 결과였다는 것이죠.

 

-유석재 기자, 조선닷컴(25-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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