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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억 벌어도 퇴사는 없다"… '파이어' 안 하는 요즘 부자들]

뚝섬 2026. 6. 14. 05:45

"100억 벌어도 퇴사는 없다"… '파이어' 안 하는 요즘 부자들

 

진정한 '부자 몸조심'
숨은 백만장자 직장인들

 

최근 한 공기업 직원이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에 올린 글이 화제가 됐다. 모 발전 공기업 직원이라고 밝힌 A씨는 ‘1년 동안 100억 버는 게 가능하구나’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오늘 그냥 계산해 봤는데 최근 1년 수익 100억 달성했다. 이게 가능하네. 내가 했는데도 얼떨떨하다.”

 

88억9964만원의 투자 수익, 659.95% 수익률이 표기된 화면 캡처도 함께 올렸다. A씨는 투자 방식에 대해 “기본적으로 트레이딩이라 거래 금액이 엄청 많다”며 “삼전닉스(삼성전자+SK하이닉스)에 깊은 감사를”이라고 썼다. “왜 아직 회사 다니냐”, “은퇴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반응이 이어졌다. A씨는 “고민할 시간이 필요하다”면서도 “생산성만 따지면 주식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지금 회사를 다니면서 ‘언제 내가 또 전기를 만들어보겠나’라는 생각도 있고 퇴사하면 사람 만날 일이 너무 없어질 것 같기도 하다”고 했다.

 

지난 몇 년간 직장인 사이에서는 근로소득 외에 투자·자산 소득으로 부(富)를 일궈 조기 은퇴한다는, 이른바 ‘파이어(FIRE)족’이 선망의 대상이었다. ‘경제적 자립(Financial Independence)’을 토대로 ‘조기 은퇴(Retire Early)’하는 것이 로망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최근 들어 분위기가 달라졌다. 부동산 값 폭등과 코인 열풍, 주식 광풍을 거치며 ‘경제적 자유’를 얻은 사람이 많아졌다. 그럼에도 A씨처럼 회사를 떠나지 않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자산을 삶의 안전판으로 삼은 채 계속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김대리가 100억을 벌었다던데?”

 

5대 은행 중 한 곳에서는 최근 영업점에 있는 B씨가 주식 투자로 100억원을 벌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B씨는 당초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했다가 사의를 거둬들였다고 한다. 직원들 사이에서는 ‘부럽다’는 여론이 ‘왜 안 그만둬?’로 변했다가 ‘꽤 합리적인 선택인 것 같다’는 쪽으로 바뀌었다. 이 은행 본점에서 근무하는 C씨는 “그만둘 이유가 없는 것 아니냐”며 “회사의 연봉과 복지, 업무 강도 모두 괜찮은 편이라 나 같아도 조용히 회사 다니는 길을 택했을 것 같다”고 했다.

 

대기업 맞벌이 커플인 박모(43)씨는 13~14년 전부터 공격적으로 서울 아파트에 투자한 덕에 강남 한복판에 30평대 아파트를 마련했다. 부부는 여전히 알뜰하게 산다. 박씨는 “대출 상환과 또 다른 투자 기회를 잡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회사에 최대한 오래 다니면서 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50억원을 호가하는 아파트에 살지만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은 필수적인 캐시 플로라는 것이다.

 

K-에밀리와 숨은 백만장자 직장인들

 

하나금융연구소가 대한민국 부자들의 금융 행태를 분석해 최근 발표한 ‘2026 대한민국 웰스리포트’에 따르면, 최근 10년 이내에 금융자산 10억원 이상을 형성한 한국 신흥 부자 가운데 직장인 비율이 가장 높았다. 연구소는 이들 부자들을 ‘어디에나 있는 백만장자’라는 의미의 ‘K-에밀리(Korea Everywhere Millionaires)’로 명명했다. 총 243명을 분석했다. 그 결과 직업별로는 회사원·공무원이 30%였다. ‘샐러리맨’이 기업체 운영자·자영업자(24%)나 전문직(23%)보다 많았다.

 

K-에밀리는 외형적으로 평범해 보인다. 44%는 30평형대 이하 아파트에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하지만 소득과 자산 규모는 일반 대중과 차이가 난다. K-에밀리 가구의 자산 규모는 60억원대, 연평균 소득은 5억8000만원으로 근로·재산 소득 외에도 추가적인 소득원을 확보하고 있었다. K-에밀리의 투자 포트폴리오를 보면 주식과 ETF(상장지수펀드), 금·예술품 등 실물 자산, 코인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40대에 은퇴하자? 그 이후는?

 

한동안 ‘파이어족’이 사회적 화두였다. 쌓아둔 부를 토대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인생 2막을 꿈꾸는 사람이 늘어났다. 파이어족은 미국에서 등장하기 시작해 한국에서도 확산됐다. 절약과 투자를 통해 50대 이전 은퇴를 목표로 삼았다. 끝없는 경쟁과 장시간 노동, 치솟는 집값에서 자유로워져 직장을 떠날 수 있다는 상상은 강력한 매력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은퇴 이후였다. 조기 은퇴가 마냥 장밋빛 미래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세계 곳곳의 조기 은퇴자들 상당수가 공통적으로 토로하는 고민이 있다. 자산이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수명이 길어지는 데다 인플레이션과 금융시장의 변동성으로 불안감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갑작스러운 의료비 지출이나 주거 환경 변화, 사고 등으로 예측 불가능한 목돈이 나가는 상황도 위협 요인으로 꼽힌다. 이런 경제적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심심함과 고립감, 정체성의 상실 역시 조기 은퇴자들이 자주 호소하는 어려움이다. 직장은 단순히 돈을 버는 곳이 아니라 누군가를 만나고 사회의 소속감을 느끼는 공간이기도 하다.

 

소셜커머스 업체를 운영하는 ‘사업가’인 이모(48)씨는 ‘사회적 역할’을 위해 사업을 이어가는 경우다. 이씨는 부모님께 물려받은 자산을 기반으로 주식·코인 투자로 거액을 번 뒤, 일부는 부동산으로 옮겨 놓았다. 당장 자신의 수입이 0원이라도 세 자녀, 다섯 식구가 먹고사는 데 전혀 지장이 없다. 이씨는 “아이들이 커가면서 아빠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설명할 필요는 있더라”며 “상당한 자산을 일군 직장인 친구들에게도 아침에 일어나 출근할 수 있는 ‘대기업 타이틀’은 절대 놓치지 말라고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에서는 국산 ‘국민차’를 끄는 김 부장이 외제차를 모는 정 대리를 타박하다가 국산 경차를 타는 송 과장을 칭찬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실 송 과장의 경차는 출퇴근용, 주말에는 고급차를 탄다. 요즘 부자들의 특징으로 꼽히는 지점이다. 과거에는 자산을 크게 불린 사람들이 고급차를 타고 회사를 그만두며 부를 드러냈다. 반면 요즘 직장인 자산가들은 조용하다 못해 고요하다. 어제와 같은 평범한 옷차림으로 출근하고, 직함도 그대로다. 승진에 욕심 내지 않는 경우도 많다. 책임과 임무가 과해지면 그만큼 내 살림을 돌볼 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동료들은 그가 자산가라는 사실을 모르는 채 지내기도 한다. 5대 그룹의 인사 담당 임원인 D씨는 “갈수록 ‘경제적 자유’를 얻은 직원들이 늘어나는 현상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며 “이들은 회사에 대한 의존도가 크지 않다 보니 기존의 보상 체계만으로는 동기를 부여하기 쉽지 않은 측면이 있어 고민”이라고 말했다.

 

비슷하게 일본에서도 거액의 자산을 보유하고도 평범한 직장 생활을 이어가는 ‘숨은 백만장자 직장인(가쿠레 오쿠리비토)’ 현상이 주목받고 있다. 은퇴 이후 사회와 단절되고 활력을 잃어가는 것보단 사회와 연결고리를 유지하고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늘어나며 생긴 현상이다. 경제적 자유가 곧 조기 은퇴를 의미하지 않는 시대가 된 셈이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자의든 타의든 ‘노파이어족(영원히 은퇴하지 않는 사람들)’이 투자와 소비, 저축과 연금까지 대한민국 경제 지도를 바꾸고 있다.

 

-김경화 기자, 조선일보(26-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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