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지킨 위스키·와인·막걸리 양조장
술로 보는 호국의 의미

지평리 전투가 끝난 뒤 훈장을 받는 프랑스 병사들 뒤로 지평양조장 건물이 서 있다. /양평군청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전란 속에서 군인들의 곁을 지킨 뜻밖의 물자가 있다. 바로 술이다. 술은 공포를 달래주는 마취제였고, 사기를 북돋는 도구였으며, 위생 상태가 좋지 않은 전장에서 비교적 안전하게 섭취할 수 있는 음료였다. 술뿐만이 아니라, 술을 만드는 양조장과 증류소도 호국 활동에 참여했다. 스카치위스키와 프랑스 와인, 한국 막걸리가 그 주인공이다.
스코틀랜드의 위스키 산업은 전쟁터와는 거리가 먼 산업처럼 보이지만, 두 차례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의 전쟁 수행을 뒷받침한 중요한 후방 자산이었다.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5년, 영국은 심각한 ‘포탄 위기’를 겪고 있었다. 무연화약인 코르다이트 생산에 필요한 아세톤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때 곡물을 발효·증류하던 위스키 산업의 노하우가 군수 영역으로 동원됐다. 증류소들은 정부의 통제 아래 식용 주정 대신 산업용 알코올을 공급했고, 일부 대형 곡물 증류소는 군수용 아세톤 생산 시설로 전환됐다. 이는 영국이 화약 생산에 필요한 자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됐다.
위스키 산업의 공헌은 2차 세계대전에 이르러 더욱 뜻밖의 분야로 확장된다. 바로 수많은 병사의 생명을 구한 항생제 페니실린이다. 당시 전장의 병사들은 총탄보다 상처 부위의 세균 감염으로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 문제는 페니실린을 생산하는 푸른곰팡이를 대량으로 배양할 시설과 기술이 부족했다는 점이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기업이 바로 조니워커로 유명한 디아지오의 전신 DCL(The Distillers Company Limited)이었다. DCL은 오랫동안 곡물을 발효하고 효모를 배양하며 축적한 미생물 관리 기술을 페니실린 생산에 활용했다. 술을 만들던 발효 탱크와 기술자들은 이제 병사들의 생명을 구하는 항생제를 생산하는 데 투입됐다. 그렇게 생산된 페니실린은 전장에서 감염으로 쓰러지던 수많은 연합군 병사의 목숨을 살리는 데 기여했다.
프랑스 샴페인은 첩보전의 도구가 됐다. 나치 독일 점령기 샹파뉴 지역의 레지스탕스는 독일군의 와인 주문 속에서 군사적 단서를 읽어내고 있었다. 1941년 말, “매우 더운 지역”으로 보낼 대규모 샴페인 주문이 접수됐다. 고온에 견딜 수 있는 특수 코르크와 포장을 요구한 이례적인 주문이었다. 레지스탕스는 이를 롬멜의 북아프리카 작전과 관련된 징후로 해석했다.
샴페인 주문에서 포착된 단서는 영국 정보기관으로 전달됐고, 이는 연합군이 독일군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데 활용됐다. 결국 연합군은 수에즈 운하와 중동 유전지대를 지켜냈다. 오늘날 이 일화는 와인 산업 역시 전쟁과 저항의 역사에서 한 역할을 담당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로 회자된다.
한국의 막걸리 양조장 역시 호국의 현장이었다. 경기도 양평의 지평양조장은 6·25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격전 가운데 하나인 지평리 전투의 한복판에 있었다. 몽클라르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 대대와 미군 2사단 23연대는 양조장을 지휘소로 삼아 결사 항전을 벌였다. 사방에서 밀려드는 중공군의 공세 속에서도 연합군은 끝내 방어선을 지켜냈고, 치열한 백병전 끝에 지평리를 사수하는 데 성공했다.
지평리 전투는 한국전쟁의 중요한 분수령으로 평가된다. 중공군 개입 이후 후퇴를 거듭하던 연합군이 처음으로 공세를 저지하며 자신감을 회복한 전투였기 때문이다. 이후 UN군은 전열을 재정비해 반격에 나섰고, 전쟁의 주도권을 다시 가져올 수 있었다. 이러한 인연을 기려 지평양조장은 지금도 참전용사와 후손들을 초청해 추모 행사를 이어가고 있다.
오늘날 스카치위스키와 프랑스 와인, 지평양조장의 경제적 위상은 압도적이다. 스카치위스키는 2024년 한 해에만 약 11조원(54억 파운드)을 수출하며 영국 산업의 든든한 한 축을 맡고 있다. 프랑스 와인은 연간 수출액이 18조원이며 문화의 아이콘이다. 지평양조장은 단일 양조장으로는 국내 최고 수준의 막걸리 매출을 올리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사람들은 종종 큰 성공을 거둔 이를 보며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역사 속 술과 양조장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문득 ‘전생이 아니라 현생에서 나라를 구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위스키와 와인, 막걸리가 알려주는 호국의 의미다.
-명욱 세종사이버대 바리스타앤소믈리에학과 교수, 조선일보(26-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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