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해도 괜찮아'라는 응원가]
[늦기 전에 마음껏 놀아라]
'실패해도 괜찮아'라는 응원가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정문의 모습. /뉴스1
서울대가 1000억원을 들여 풀겠다고 나선 6대 난제(難題)가 최근 공개됐다. ‘인공지능(AI)도 망각할 수 있는가’ ‘생명의 시계를 조절할 수 있는가’ ‘삶의 의지를 분자 수준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등이다. 난제 해결에 도전하는 연구진엔 최장 5년간 최대 5억원을 지원한다.
이 ‘SNU 그랜드 퀘스트’ 사업을 석 달 전 보도할 때 ‘실패할 연구’라는 제목이 달리자 교수들로부터 연락이 빗발쳤다. ‘실패할 연구’가 아니라 ‘실패해도 되는 연구’라는 것이다. 국가 과제 심사에서 두 번 이상 떨어진 교수들을 지원하는 서울대 공대 사업에 대해 기사를 썼을 때도 반응이 비슷했다. ‘실패한 연구’라고 썼더니 “과제 선정에 실패한 것이지, 연구 자체가 실패한 것은 아니다”는 항의가 폭주했다. 한국 학계에서 ‘실패’가 얼마나 민감한 단어인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서울대가 수행한 국가 R&D 과제의 성공률은 2021년과 2022년 100%였고, 2024년에도 99.5%였다. 실패한 연구가 거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진실은 연구비를 따내지 못할까 봐, 일류 학술지에 논문을 싣지 못할까 봐 애초에 ‘성공할 연구’만 선택해 온 결과다. 학계 정설과 어긋나거나 국가 과제 트렌드가 아닌 연구는 지원을 받기 어렵다.
이번 그랜드 퀘스트 사업의 핵심은 결과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점이다. 연구 과정을 학계에 공유하기만 하면 된다. 난제를 설계한 교수들도 해법의 실현 가능성은 배제하고 질문 자체에만 집중했다. 성공과 실패의 잣대를 치우고 “순수하게 연구 좀 하겠다”는 반가운 선언으로 들렸다.
이는 “우리 애가 상처받으니 운동회에서 등수를 매기지 말자”는 극성 학부모와는 다르다. 서울대는 안정적인 연구 환경만 제공할 뿐 연구자의 도전을 제한하지 않는다. 뻔한 연구는 걸러내고, 예측 불가능한 연구는 환영한다. 즉 난코스가 많은 경기장을 개장하면서 성과 지상주의라는 점수판은 없앤 셈이다.
학계에서 유력한 노벨상 후보로 꼽히는 현택환 서울대 석좌교수는 후학들에게 “연구가 잘 풀리지 않는다고 성장하지 못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부터 질문하는 연습을 하세요”라고 조언했다. 그도 박사 유학 시절 3년 동안 성공한 연구가 없어 맨땅에 머리를 찧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질문을 멈추지 않은 끝에 결국 답을 찾았다.
지금의 고등교육에는 실패하는 훈련이 전혀 없다. 실패에서 배우라고 하지만 아무도 그 방법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는다. 우리 사회가 너무 단기 성과에 매몰돼 조급하게 실패 판정을 내리지는 않는지 돌아봐야 한다. 실패는 학문 탐구 과정의 일부로 충분히 쓸모가 있다. 서울대가 성공과 실패에 대한 평가를 유보하고 마음껏 연구하라고 한 것은 학문 본연의 가치를 회복하는 시도다. 실패해도 괜찮은 연구에 아낌없는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김도연 기자, 조선일보(26-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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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기 전에 마음껏 놀아라
얼마 전 찾은 고향집, 익숙한 공간이 낯설게 느껴졌다. 아스팔트 바닥 때문이었다. 가끔 배드민턴을 치던 잔디는 하얀색 선이 반듯하게 그려진 주차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잔디가 있을 때 더 뛰어다녔어야 했다. 오랫동안 잊고 지낸 거짓말 하나가 떠올랐다. ‘나중에 놀면 된다.’ 대학 가서, 취업하고 놀라는 어른들의 조언. 이 거짓말의 생명력은 아직도 남아 있는 듯하다. 매년 전국에서 놀이터가 수백 개씩 사라지고 있다.

경북의 한 초등학교에서 열린 운동회에서 학생들이 전력질주 하고 있다./뉴스1
그런데 의외의 공간이 놀이터로 변신하고 있다는 걸 아는가. 올리브영 성수 매장 입구엔 지방에서 온 2030과 외국인 수십 명이 매일 오픈 직전 줄을 선다. 물건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다. 놀기 위해서다. 이들은 무료 퍼스널 컬러와 피부 진단 등 각종 체험 서비스에 대기를 걸어놓고, 매장 밖으로 나가 성수동 곳곳을 구경하며 사진을 찍는다. 온라인에서 유행하는 이른바 ‘성수 관광 루틴’이다. 한 지인은 초등학생 딸과 함께 다이소를 ‘참새 방앗간’처럼 방문한다. 생활 잡화부터 화장품, 문구류까지 바구니 가득 마음껏 담아도 부담이 없다. 팍팍한 현실의 제약 없이 온전히 물건을 고르는 재미에 몰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껏 놀 수 있는 공간. ‘올다무(올리브영·다이소·무신사)‘로 불리는 신흥 유통 공룡의 특징이다. 많은 국내 기업이 내수 시장 침체와 고물가로 부진을 겪는 동안에도, 이 기업들은 작년 영업이익이 20~30% 가까이 늘며 고속 성장을 이어갔다. 방한 외국인, 마케팅, 신제품 출시 같은 단어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배경이 바로 놀이의 요소다. 올리브영은 성수 매장 5개 층 중 단 2개 층에만 화장품 매대를 놨고, 무신사는 노래방과 가챠(뽑기) 시설을 채운 2000평 규모의 대형 매장을 성수에 최근 열었다. 평당 매출이라는 효율의 잣대로 보면 ‘낙제점’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비효율적인 공간들이 국내외 젊은 세대를 끌어모으는 놀이터가 된 것이다.
이런 변화를 보며 ‘놀이’와 ‘효율’이란 단어 사이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놀이의 영역이 숫자로 재단되는 효율의 영역과 정반대에 있다는 상식이 깨지고 있다. 잘 놀고 열심히 노는 기업이 살아남는 세상에서, 사람의 일이라고 다를 리는 없다. AI(인공지능)가 수천 년 동안 인간이 정의해 온 효율의 기준을 뒤바꾸는 시대, ‘얼마나 생산적인가’보다 ‘얼마나 잘 노는가’가 인간만의 차별점이 되고 있다. ‘나중에 놀면 된다’는 거짓말은 머지않아 통하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결단은 쉽지 않다. 인생이란 무한 경쟁의 굴레 위에서, 홀로 놀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다. 오랜 관습, 많은 이의 시선을 견뎌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어린 시절 제대로 못 논 사람이 나이가 든다고 저절로 잘 놀게 될 리는 없다. 더 늦기 전에 마음껏 놀아야 한다. 잔디 위의 소년에게 이 말을 건네고 싶다.
-이영관 기자, 조선일보(26-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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