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病的 집착, 無知한 집착, 불쌍한 집착]
[‘87 체제’ 39년… 관용과 절제 잃은 정치권에 개헌 맡길 수 있나]
[제헌의원들 사랑방에서 느낀 것]
病的 집착, 無知한 집착, 불쌍한 집착
[강천석 칼럼]
대통령 사건 공소취소
보완 수사권 폐지
선거 지고 대표 눌러앉기
다 부질없고 어리석다
서른여섯 살 郡의회 前 의장의
"짱돌·화염병 586 정치인과 이별"
이 외침에 메아리 있기를

이재명 대통령과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가 지난 4월 청와대에서 열린 여야정 민생경제협의체 회담 및 오찬에서 손을 맞잡고 있다. /뉴시스
집념(執念)과 집착(執着)은 글자 하나 차이이고 뜻도 비슷하다. 사전(辭典) 속 뜻풀이는 그게 그거라 차이가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면 쉽다. 한 일에 몰두해도 집념 곁에는 자제력(自制力)이라는 브레이크가 달려 있어 안전 운행이 가능하다. 집념이 선을 넘어 집착 상태에 이르면 브레이크 없이 액셀러레이터만 단 차처럼 어디를 들이받고서야 멈춘다.
모든 대통령은 집념과 자제력이 동행(同行)할 때 업적을 쌓았고, 자제력이 무너져 집착만으로 국가를 운영하면서 추락했다. 1940년대 말~50년대 초 중국 대륙은 공산화됐고, 반도 북쪽에 공산 정권이 들어섰고, 주한 미군은 남쪽에서 철수했다. 이 붉은 해일(海溢) 앞에서 이승만이 무릎을 꿇었더라면 남쪽 좌파(左派)들이 그토록 원했던 조선 통일이 그때 이뤄졌을 것이다.
좌파의 기대와 달리 이승만은 남쪽에서만이라도 자유민주 정부를 세우고 지켜내겠다는 집념 하나로 해방 후 혼란과 북한의 남침을 이겨내고 나라를 구했다. 한미 동맹이란 안보의 둑도 이때 쌓았다. 이 시기 대통령과 국회 사이엔 크고 작은 물의가 잇따랐지만, 마지막엔 김병로 대법원장이 버티던 사법부의 의견을 존중하고 브레이크를 밟았다. 이렇게 나라를 구했던 집념이 ‘나 아니고는 안 된다’는 집착으로 변해 가면서 3·15 부정선거를 낳고 4·19 혁명을 맞았다. 이승만이 멈춰야 할 때 멈췄더라면, 우리는 광화문 광장에 선 그의 동상(銅像)을 마주할 수 있었을 것이다.
1950년대 후반 국민학교(지금 초등학교) 교실엔 한 반에 90명이 우글거렸다. 점심시간이 되면 3분의 1은 조용히 교실을 빠져나가 운동장 양지 쪽에서 참새처럼 몸을 웅크리고 해바라기를 했다. 도시락을 싸 온 아이들도 김치와 보리밥만으로 버티기엔 해가 너무 길었다. 시대의 과제는 자유에서 가난 극복으로 넘어갔다. 자유가 소중했지만, 밥은 먹어야 했고, 청년에겐 일자리가 필요했다.
5·16 쿠데타를 이끈 박정희는 가난과 대결했다. 정치를 모르던 내 어머니도 얼굴이 까맣고 색안경을 쓴 이 농사꾼 아들에게 기대를 걸었다. 그 시절 박정희는 수천 년 내려온 가난의 굴레를 벗겠다는 집념의 덩어리 같았다. 청년들은 수천㎞ 떨어진 서독의 수백m 내려가는 탄광 갱도에서 석탄을 캤고, 처녀들은 그곳 병원에서 사망한 사람의 몸을 알코올로 닦으며 그렇게 번 돈을 한국으로 보냈다. 70년대 중반 배곯던 아이들은 사라졌고 조국 근대화 청사진은 경공업 중심에서 중화학 공업 육성으로 옮겨갔다.
박정희의 국가 발전 노선을 평가하는 사람들도 국회를 무력화(無力化)하고 사법부를 머슴으로 길들이고, 국민의 대통령 선출권을 박탈한 유신(維新)이 반(反)헌법적 쿠데타라는 걸 인정한다. 그들은 유신은 1기(期)로 끝냈어야 한다고 후회한다. 2기에 접어들면서 대통령 곁 브레이크는 모두 고장 나고 조국 근대화의 집념은 장기 집권에 대한 집착으로 변해 절벽을 굴렀다.
이런 유산을 물려받은 김영삼·김대중의 민주화 집념은 확고했다. 두 사람 시대를 거치며 한국 민주주의는 제도적 틀을 잡았다. 두 사람도 ‘집착’이 ‘집념’을 밀어냈을 때 과오를 저질렀다. 특히 북한의 문(門)을 열겠다는 김대중의 집착은 20년 후 수십 개의 핵폭탄을 든 김정은이라는 괴물(怪物)을 키웠다.
지금 이재명 대통령과 정청래 민주당 전 대표는 상대를 꺾으면 자기 목도 부러지는 ‘바보 레슬링’을 벌이고 있다. 트럼프의 백악관 앞마당 프로레슬링은 어처구니없지만 쇼라서 국가에 해(害)를 끼치진 않았다. 집착이란 말 앞에는 ‘병적(病的)’이란 단어가 놓이는 경우가 많다. 대통령이 자기 재판을 무효화시키려고 공소취소 입법을 시도하는 것은 ‘병적 집착’이다. ‘병적’이기 때문에 지금 아니면 가까운 훗날 더 큰 화(禍)를 불러온다.
정 전 대표는 ‘경찰 독재’를 구경이라도 해봤나. 자유당 독재 시대 부정선거는 내무부와 경찰의 합작품(合作品)이었다. 유신 독재 시절 정치를 쥐락펴락한 정보부 권력의 토대는 경찰이 상납(上納)한 정보였다. 권력 기관 상호 견제의 원리를 무시하고 경찰에게 정보 권력과 수사 권력을 함께 몰아주겠다는 보완 수사권 폐지는 민주 정치의 자살(自殺)과 다름없다. 정말 ‘무지(無知)한 집착’이다. ‘병적 집착’이 이기든 ‘무지한 집착’이 이기든, 나라는 망가진다.
이 와중 변두리 극장에서 장동혁이 벌이고 있는 대표 자리 눌러앉기 나 홀로 투쟁은 ‘불쌍한 집착’일 따름이다.
서른여섯 살 군(郡) 의회 의장 출신으로 민주당 대표 경선에 나선 김보미 후보는 “AI 시대에는 화염병과 짱돌을 들던 586들과 아름다운 이별을 하자”고 외쳤다. 김 후보 말대로 ‘공정·민주·세대교체·미래·청년(靑年)이 사라진 5무(無) 정당 민주당’ 안에선 실패로 끝날 도전이지만, 그의 외침에 한 표(票) 던지고 싶다.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출마에 나선 김보미 전 강진군 의원이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전당대회 준비 관련 입장 발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AI 시대에는 화염병과 짱돌을 들던 586들과 아름다운 이별을 하자”고 외쳤다. /뉴시스
-강천석 고문, 조선일보(26-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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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체제’ 39년… 관용과 절제 잃은 정치권에 개헌 맡길 수 있나

국회 여야 대표와 원내대표들이 1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78회 제헌철 경축식에서 제헌헌법 낭독 및 도장 날인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현행 헌법은 1987년 민주화운동의 산물이다. 1948년 제헌헌법 이후 39년이 흐르는 동안 8번의 개헌이 있었다. 1987년 마지막 9차 개헌 이후 다시 39년이 흘렀지만, 논의만 무성할 뿐 개헌까지 가진 못했다. 그런 가운데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해 제헌절 “국회가 ‘국민 중심 개헌’의 대장정에 나서 달라”고 주문했다. 하지만 여야는 개헌 특위도 구성하지 못한 채 1년을 허비했다. 정치권이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영역에 나타난 시대 변화를 반영하는 국가의 틀로서의 헌법을 정비하는 책무에 손 놓은 것이다.
조정식 국회의장은 17일 제헌절 경축식에서 “이번 22대 국회 내에 10차 개헌을 매듭지을 것을 제안한다”며 개헌론에 다시 불을 붙였다. 서둘러 개헌추진기구를 출범시키고 내년 공론화를 거쳐 개헌안 뼈대를 완성하자는 제안이다.
그간 개헌론이 번번이 좌초한 것은 민주주의 토대인 상호 관용과 절제를 잃은 정치권이 정치적 유불리를 따지면서 합의안 마련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은 서로를 “내란 옹호 정당” “헌정 파괴 세력”이라며 청산의 대상으로 여긴다. 서로를 정당한 대화 상대로 인정하지 못하면 개헌 협상 테이블부터 차리기 어렵다. 올해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국민의힘을 제외한 여야 6개 정당이 헌법 전문을 고치는 개헌안을 발의해 본회의에 상정했지만, 국힘이 불참해 ‘투표 불성립’으로 표결이 무산됐다.
국회를 통한 대의 민주주의의 장점은 토론과 숙의 과정을 거칠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절제력을 잃은 거대 여당은 수의 우세를 앞세운 입법 독주를 되풀이했다. 야당은 설득력 있는 대안을 내놓기보다 무조건 반대로 맞서는 일이 반복됐다. 정치권의 관용과 절제 없이는 고도의 정치적 합의와 국민적 지지가 필요한 개헌은 불가능하다.
1987년 개헌은 우리 헌정사상 첫 여야 협상에 의한 ‘합의 개헌’이었다. 당시 정치권의 견해차는 컸지만, 합의 개헌이라는 국민적 요구를 수용했다. 집권 민주정의당과 제1야당인 통일민주당이 ‘8인 정치 회담’을 열고 돌파구를 마련한 뒤 원내 4당이 참여한 국회 개헌특위가 가동됐다.
올해 2월 국회사무처 여론조사에서 국민 68.3%가 개헌에 찬성한다고 답했다. 과거 ‘통법부’로 불렸던 국회는 87년 체제에서 권한을 크게 키웠다. 하지만 정당들은 합의와 토론보다는 힘겨루기에 더 주력했고, 관용과 절제보단 자기 진영 지지층에 의존한 정치에 빠져들었다. 그 바람에 큰 정치력이 필요한 헌법 개정이란 과제에 접근도 못 하고 있다. 이젠 정치가 국민 눈높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39년의 ‘정치 지체’는 끝내야 한다.
-동아일보(26-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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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의원들 사랑방에서 느낀 것

서울 종로구 통의동에 있는 제헌국회전시관 /정수윤 제공
어머니와 길을 걷다가 우연히 ‘제헌회관’이라는 현판이 보인 건 제헌절 무렵이라서일까. 자하문로 26으로 난 좁은 문을 들여다보니 통로 끝에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정갈한 한옥이 보이고 입구에 ‘制憲同志會’가 눈에 들어왔다. 제헌동지회란 대한민국 제1회 선거로 선출된 제헌국회의원들의 모임이다. 이 한옥은 그들이 1983년부터 2008년까지 사용한 사랑방이었는데, 지금은 가방, 안경, 만년필, 월급봉투, 편지, 당선증 같은 유품과 당시 선거 풍경 및 제헌국회 전반을 두루 관람할 수 있는 전시관이다.
“들어가 보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단체 사진 밑에 실린 글. ‘1948년 5월 10일, 대한민국 최초 총선거로 198명의 제헌국회의원이 선출되었다. 이때 제주도는 4·3사건으로 북제주군 2개 선거구에서 선거가 무효로 처리되었다. 이후 재·보궐선거를 거쳐 모두 209명의 의원이 제헌국회에서 활동하였다.’ 그들은 독립운동가, 교육자, 법률가, 언론인, 종교인, 지역 지도자였으며 가장 먼저 한 일은 국호 정하기였다.

대한민국, 고려공화국, 조선공화국, 한국이 물망에 올랐다. 대한민국의 큰 대(大) 자가 대일본제국, 대영제국을 떠올리게 하는 사대주의라며 반대하는 이도 있었다. “‘대한’이 좋습니다. 왜정하의 ‘조선’은 역사상 치욕이고, 혹자가 주장하는 ‘고려’는 500년 전 옛 나라이올시다.” 당시 회의록이다. 논쟁 끝에 찬성 163표로 우리가 아는 결과가 헌법에 수록된다. 하나하나 치열하게 초석을 쌓아갔다.
제헌국회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국호 정하기였다. 대한민국, 고려공화국, 조선공화국, 한국이 후보였다. /정수윤 제공
‘내가 제헌국회의원이라면?’ 관람객 참여란에는 후손들이 좋아하는 대한민국에 별이 한가득이다. 어머니도 스티커를 붙이며 “나도 대한민국이 제일 좋아” 한다. 오래전 흰 삼베옷을 입고 경건하게 첫 투표에 나섰을 사람들의 마음과 뜻깊은 선거에 당선되어 무거운 책임감으로 직무에 임했을 의원들의 마음을 상상해 본다. 피와 땀과 눈물로 빚은 이 별을, 함부로 할 수 없겠다는 이 시대의 사명도 함께 생각했다.
-정수윤 작가·번역가, 조선일보(26-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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