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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 5월 4일 정몽주 피살] [절망서 革命이룬 정도전처럼.. ]

뚝섬 2024. 5. 19. 05:39

[1392년 5월 4일 정몽주 피살, 선죽교 ‘팩트 왜곡’의 전말] 

[절망서 革命이룬 정도전처럼.. ] 

 

 

 

1392년 5월 4일 정몽주 피살, 선죽교 ‘팩트 왜곡’의 전말

 

[이문영의 다시 보는 그날]

정몽주 피살 장소로 알려진 개성의 선죽교. 하지만 실제로는 집 근처에서 살해당했다. 조선 후기 그의 충심을 극적으로 부각하는 분위기 속에서 ‘피로 물든 선죽교’ 이야기가 꾸며졌다. 동아일보DB


정몽주는 고려의 마지막 충신이라 불린다. 공민왕 9년(1360년)에 스물네 살의 나이로 장원급제해 정계에 등장했다. 공민왕 13년에 이성계의 여진족 정벌에 따라갔다. 이후 이성계와 동지가 됐다.

성리학에 해박하여 남들을 압도했다. 고려 말 대학자인 이색은 정몽주를 가리켜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처음엔 그의 해석을 의심하던 사람들도 뒤에 성리학 책이 중국에서 들어온 뒤 정몽주의 주장이 다 맞는 것을 보고 승복했다.

정몽주는 몸을 사리지 않는 뛰어난 외교관이기도 했다. 사신으로 명나라로 떠났다가 배가 침몰하는 비운을 맞았다. 정몽주는 바위섬에서 마구를 베어 먹으며 열사흘을 버틴 끝에 구조되었다. 이런 일을 당하면 다시 바다로 나가기가 꺼려질 만도 한데, 그는 일본에 가는 것도 서슴대지 않았다. 정몽주를 핍박하던 권신들이 일부러 그를 사신으로 뽑은 것이다. 당시 왜구가 극성해서 많은 백성이 잡혀간 상태였다. 정몽주는 험난한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가서 잡혀갔던 백성 수백 명과 함께 돌아왔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여 실질적으로 고려의 권력을 차지했을 때까지만 해도 정몽주는 이성계 편이었다. 정몽주는 고려의 개혁을 바라고 있었고 이를 위해서라면 왕을 폐위시키는 데도 거침이 없었다. 충신이라고 보기에는 이상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충신이 섬기는 왕을 쫓아내겠는가?

그러나 이성계가 한걸음 더 나아가 왕위를 노리기 시작하자 정몽주는 등을 돌렸다. 이로써 그는 만고의 충신으로 남게 됐다. 새로 왕좌에 앉은 공양왕은 정몽주의 편이었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오른팔 정도전, 조준 등을 실각시키고 권력의 중심에 섰다. 이를 두고 볼 수 없었던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태종)이 결국 정몽주를 살해하고 만다.

정몽주는 선죽교에서 살해당했다고 전해온다. 선죽교에는 정몽주가 흘린 피가 돌에 스며들어 있다고도 한다. 돌에 피가 스며들어 수백 년을 내려온다는 게 가능할까? 조선 초의 기록을 살펴보면 선죽교는 전혀 등장하지 않으며, 그가 집 근처에서 이방원이 보낸 자객들에게 살해당했다는 것이 명백하다. 성종 때 남효온(1454∼1492)은 개성에 갔을 때 정몽주가 집 근처에서 살해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피살됐다는 이야기는 오늘날로 보면 ‘가짜 뉴스’에 속한다. 정몽주라는 충신을 기리기 위해서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질적인 증거가 필요했고, 그에 적합한 선죽교가 선택됐던 것이다. 대나무가 절개를 상징하기 때문이고, 다리에서 자객이 기다린다는 것은 극적인 장면이기 때문이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하지 않던가. 선죽교 전설이 생겨나서 재밌다고 지금까지 전해져 온 게 무슨 중요한 문제냐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재미있다고 해서 엉터리 정보가 사실인 것처럼 돌아다니면 올바른 판단을 내려야 할 때 쉽게 음모론에 빠지는 사고방식을 가지게 된다. 정몽주는 선죽교 이야기를 통해 신격화돼버리고, 이는 정몽주에 대해 제대로 된 평가를 내리는 데 방해가 될 뿐이다. 정몽주는 그저 맹목적인 충신이 아니었다. 정몽주의 복잡한 이면을 선죽교 전설은 묻어버리고 만다. 마찬가지로 가짜 뉴스는 언제나 재미 속에 진실을 묻어버린다. 재미있다고 모든 것이 용납될 수는 없다.

-이문영 역사작가, 동아일보(24-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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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서 革命이룬 정도전처럼.. 

 

수퍼 기업 되려면 위기의식 있어야

명예욕·명분론에 집착하다 유배지서 가혹한 자기성찰…

백성을 '위한' 입장에 서다 백성'' 입장을 깨달아 

 

세계 기업들 평균수명은 13년에 불과하고, 30년이 지나면 80%가 사라진다고 한다. 위기는 기업의 변수가 아니라 상수(常數). 그렇다면 위기 자체가 아니라, 위기에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위기가 없으면 혁신도, 도전도, 창조도 없다.

조선의 건국자 정도전도 가시밭길 속에서 진정한 자신과 만났고, 정치가로서 진실한 사명을 발견했다. 그로부터 조선 건국의 혁명 운동이 시작되었다.

1375년 여름 33세의 정도전은 나주를 향해 귀양 길을 떠났다. 이후 10, 그는 유리(
流離) 방랑하면서 삶의 신산을 절절히 맛보았다. 1374년 공민왕이 죽었을 때 중국 대륙은 대변동기였다. 명나라가 건국되고, 몽골족인 원나라는 초원으로 쫓겨났다. 하지만 중원의 앞날은 아직 오리무중으로, 누구와 손을 잡는가는 고려의 운명이 달린 문제였다. 이인임을 중심으로 한 전통 세력은 친원 정책을, 정몽주를 중심으로 한 젊은 성리학자들은 친명 정책을 주장했다. 치열한 권력투쟁 끝에 성리학자들은 죽거나 쫓겨났다. 정도전도 그 한 사람이었다.

남도로 가는 길은 멀고 뜨거웠다. 해골이 뒹굴고, 논밭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왜구의 칼날 아래 피가 대지를 적시고, 굴비처럼 묶여 노예로 끌려가는 백성의 통곡이 하늘에 닿았다.

나주에 도착한 정도전은 동루에 올라, 시골 부로(
父老)들에게 일장 훈시를 했다. "내가 죄를 얻어 귀양 온 몸이지만, 부로들은 나라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 얼마 뒤 아내의 편지가 왔다. "일찍이 공부에 전심할 때 당신은 밥이 끓든 죽이 끓든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방 안에 가득한 아이들은 배고프다고 울었지만, 나는 언젠가 당신이 잘될 것을 믿고 참고 견뎠습니다. 당신이 마침내 과거에 합격했을 때, 온 집안이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당신이 유배를 떠난 뒤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세상은 우리를 손가락질하고 있습니다. 군자의 길이 참으로 이런 거라면, 나는 진실로 슬픔을 참을 수 없습니다." 정도전의 눈에 눈물이 흘렀다.

유배지에서의 삶은 혹독했다. 어느 날 한 야인(
野人
)이 그의 집을 찾아와 물었다. "유학자란 어떤 사람이오." 그의 종자(從者)는 대답했다. "학문은 천지고금에 통달하고, 행실은 곤경에 빠질지언정 불의를 범하지 않으며, 포부는 평천하에 있는 자요." 그러자 야인이 말했다. "실상이 없으면서 이름만 있으면 귀신도 미워하고, 실상이 있어도 밖으로 드러내면 남들이 성내는 바요. 귀신이 미워하지 않아도 반드시 사람의 노여움을 살 것이니, 참으로 위태합니다."

어느 날 정도전은 들에서 한 촌부를 만났다. 밭을 매던 촌부는 허리를 펴고 말했다. "예부터 때를 모르고 바른말을 좋아하면서 몸을 보전한 사람은 없었소. 그대는 다행히 목숨은 건졌으니, 이제부터라도 조심하면 화를 면할 것이오."

정도전은 세상에 절망했다. 나라·가족의 위기에 앞서 그 자신의 위기였다. 하지만 유배지 부곡의 천민들은 그런 그를 따뜻한 마음으로 대했다. 마을 사람들은 철 따라 토산물을 얻으면 술과 마실 것을 가지고 와 함께 즐겼다. 정도전은 스스로 물었다. "나는 세상의 버림을 받고 멀리 귀양 와 있는 몸이다. 동네 사람들이 왜 나를 이처럼 대접하는 걸까. 나를 불쌍히 여겨서인가, 아니면 시골 사람들이라 몰라서인가. , 부끄럽구나."

그의 의식에 큰 전환이 찾아왔다. "나라가, 임금이, 유학자가 백성을 돌보는 것이 아니구나. 진실은 그 반대다. 남들이 만든 음식을 먹는 자는 남의 책임을 맡아야 하고, 남이 만든 옷을 입는 자는 남의 근심을 알아야 한다." "백성은 국가의 근본이자 군주의 하늘이다."

동루에서 일장 훈시하던 정도전은 이제 없었다. 그는 마침내 함흥으로 이성계를 찾아갔다. 유배지에서 정도전은 가혹할 정도로 자신을 성찰했다. 야인과 촌부의 눈에 비친 그는 실상은 없고 이름만 있는 껍데기거나, 혹은 명예욕으로 화를 초래하는 어리석은 자, 명분만 가지고 권력과 싸우다 죽음을 자초하는 순진한 사람이었다. 또 그는 자신이 일찍이 백성을 '위한' 입장에 섰지만, 백성'' 입장에 서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한 자각과 부끄러움으로부터 혁명이 시작되었다. "○와 ○만 빼고 다 바꿔라"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그 절박한 위기의식에서 '수퍼 글로벌 기업'이 탄생했다.

-김영수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조선일보(14-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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