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國史-文化]

[마지막 황제, 순종] .... [덕혜옹주 오빠들의 말년]

뚝섬 2025. 8. 29. 05:23

[마지막 황제, 순종]

[망국 직전 대한제국에는 훈장이 발에 걸리도록 많았다]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 등극 40주년 기념식

[시진핑이 생각하는 중국? 그런 건 없다]

[덕혜옹주 오빠들의 말년]

 

 

 

마지막 황제, 순종

 

주권 뺏긴 '허수아비' 임금… 6·10 만세운동 기폭제 됐죠

 

서울 광화문 서쪽에 있는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이 개관 20주년 기념으로 ‘창덕궁의 근사(謹寫)한 벽화’라는 특별전(10월 12일까지)을 열고 있어요. 여기서 ‘근사’란 ‘경건한 마음으로 그림을 그려 바친다’는 뜻입니다. 김은호·노수현·이상범 등 20세기 초 국내 최고 화가들이 비단에 그려 창덕궁 여러 건물 실내에 붙였던 대형 벽화 6점을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아놓았죠. 금강산과 총석정 같은 절경, 봉황과 백학을 그린 모습이 관람객의 입을 벌어지게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누구를 위한 그림이었을까요? 1926년 숨을 거두기까지 이곳에서 살던 사람, 바로 조선 왕조의 27대 마지막 임금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1874~1926, 재위 1907~1910)입니다. 

❶창덕궁 희정당 벽에 걸렸던 '총석정절경도'예요. 해강 김규진(1868~1933)의 작품으로, 금강산 총석정 전경을 파노라마 형식으로 그렸습니다. ❷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의 사진. 육군 대장복 차림으로, 1909년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❸순종이 탔던 어차. 미국 제너럴모터스(GM)사가 제작했습니다. ❹1909년 촬영된 사진으로, 순종이 부산을 순행하는 모습입니다. 당시 부산 백성들은 부산에 방문한 순종이 일본으로 납치되는 것이 아닌지 의심했어요. 그래서 이를 막기 위한 결사대도 만들어졌죠. /국립고궁박물관·국립중앙박물관

 

어려서부터 잔병치레, 세자·태자만 32년

 

왕세자란 임금의 아들 중에서도 임금 자리를 이을 것으로 정해진 사람입니다. 조선에선 왕세자(황태자 포함) 자리에 오래 있었던 사람이 많습니다. 이들은 대체로 정작 임금 노릇은 짧게 하거나 아예 임금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는 특징이 있죠. 왕세자 기간이 길었던 인물 5위는 인종(24년 7개월), 4위 사도세자(26년 1개월), 3위 문종(29년 4개월), 2위 경종(29년 11개월)이었습니다. 그럼 1위는? 바로 순종입니다. 왕세자와 왕태자·황태자 기간을 합친 기간이 32년 5개월에 달합니다.

 

아버지 고종과 어머니 명성황후 사이에서 순종이 태어났을 때는 이미 고종이 즉위한 지 10년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명성황후가 낳은 자녀 중에서 유일하게 어려서 죽지 않았고, 고종의 여러 자식 중 유일한 정실(본처)이 낳은 아들이었어요. 아버지 고종이 43년 동안 임금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세자로서 임금이 되기 위한 교육도 오래 받았지만, 순탄치 않았죠. 어려서 천연두에 걸리기도 했고 잔병도 많았다고 해요.

 

21세 때인 1895년 친모 명성황후가 일본인에게 시해당한 을미사변을 겪은 데 이어, 대한제국의 수립으로 황태자가 된 다음 해인 1898년 큰 역경이 그에게 닥칩니다. 바로 ‘김홍륙 독차 사건’이죠. 러시아 통역관 출신으로 위세를 떨치던 김홍륙이란 사람이 임금에게 앙심을 품고, 고종과 황태자가 마시는 커피에 아편을 탄 것이었습니다. 평소 커피를 즐겨 마시던 고종은 바로 뱉어냈지만, 이미 많이 마신 황태자는 피를 토하고 기절했습니다. 목숨은 건졌지만 치아가 많이 빠져 틀니를 해야 했고, 슬하에 자식을 보지 못한 것도 이 사건 때문이란 추측도 있어요. 심지어 ‘총명한 사람이었는데 이후 바보가 됐다’는 말까지 나왔죠.

 

허수아비 황제 노릇 3년 1개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삼은 일제에 의해 아버지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면서, 순종은 1907년 대한제국의 2대 황제가 됩니다. 즉위식이 열렸던 장소가 최근 복원된 덕수궁 돈덕전이에요. 하지만 이미 1905년의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대한제국은 순종 즉위 직후 군대마저 강제 해산되는 처지가 됩니다. 웬만한 권한을 다 빼앗긴 ‘나라라고 볼 수 없는 나라’의 허울뿐인 황제가 됐던 것이죠. 그나마 겨우 3년 1개월 갔습니다. 게다가 주위에 있는 신하라고는 거의 다 ‘친일 매국 대신’뿐이었습니다. 순종은 밀사를 외국에 보내 호소하거나 의병 세력과 은밀히 연락했던 아버지 고종 수준의 저항도 하지 않았습니다.

 

황제 자리에 있을 때 순종이 한 일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중 하나가 지방을 순행(巡幸·임금이 나라 안을 두루 살피며 돌아다니던 일)한 일이죠. 1909년 1월 7~13일 대구·부산·마산 등을, 1월 27일~2월 3일 평양·의주·개성 등을 궁정 열차를 타고 순행했습니다. 이것을 ‘남서순행’이라고 하는데, 반일 감정을 잠재우고 ‘문명 개화’를 업은 일본의 통치를 합리화하려는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의도가 들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제의 의도와는 반대로, 황제를 맞은 전국 각지 백성 사이에서 애국심이 고취되는 상황이 일어나기도 했어요.

 

일본의 강요가 있기는 했지만, 순종은 1909년 창경궁을 창경원이라는 유원지로 바꿔 백성에게 처음으로 궁궐을 개방하는 기록도 남겼습니다. 11월 1일 창경원 개원식엔 초대 한국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엿새 전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됐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죠. 순종은 정약용과 박지원처럼 재평가가 필요한 역사 인물에게 새로 시호를 내려 주기도 했으나, 너무 늦은 일이었습니다.

 

항일 활동 없었으나 죽음이 6·10 만세 기폭제 돼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멸망합니다. 이것은 순종이 일왕에게 합병을 청원하는 형식이었지만 순종의 조칙(임금의 명령을 일반에게 알릴 목적으로 적은 문서)에는 끝내 그의 국새가 찍히지 않았어요. 이후 순종은 ‘이왕(李王)’으로 격하돼 창덕궁에서 살았습니다.

 

씁쓸한 얘기지만, 순종은 20세기 초 한반도에 밀려온 근대 문화를 가장 먼저 호화롭게 경험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국립고궁박물관 1층에는 어차(御車)라는 이름의 진귀한 초창기 자동차가 전시돼 있는데, 순종 부부가 타고 다니던 황금 문양으로 장식된 7인승 대형 리무진입니다. 또 순종은 창덕궁 인정전 동행각에 옥돌대(당구대)를 설치하고 월요일과 목요일마다 당구를 즐겼다고 해요. 요즘 4구 기준으로 200점 실력이었다고도 하는데 당시로선 상당한 수준이었죠. 미식가였던 아버지 고종과는 달리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이 없었지만 일본인 요리사가 만들어 준 프랑스 요리만큼은 즐겼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일제에 저항하지 않았어요. 이복동생 의친왕은 상하이 임시정부로 망명을 시도했다 실패했지만 순종은 그런 것조차 하지 않았죠. 다만 1926년 4월 그가 죽은 뒤 ‘병합은 내 뜻이 아니었으니 조약을 파기해 광복하라’는 유언이 미국 한인 신문인 신한민보에 실렸습니다. 그래도 임금의 죽음을 애통해했던 나라 잃은 백성은 장례일에 “독립 만세”를 외쳤어요. 이것이 6·10 만세운동입니다.

 

-유석재 역사문화전문기자/기획·구성=윤상진 기자, 조선일보(25-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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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 직전 대한제국에는 훈장이 발에 걸리도록 많았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망국 직전 대한제국에는 훈장이 발에 걸리도록 많았다

대한제국 망국기훈장 남발 전말기

 

망국과 훈장 이야기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 황제가 된 고종은 제국 선포 2년 6개월 뒤인 1900년 4월 19일 ‘훈장조례’를 발표하고 근대 훈장 제도를 실시했다. 대한제국 훈장은 크게 일곱 등급이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격이 높은 훈장은 금척대훈장(金尺大勳章)이었다.

 

두 황제 광무제 고종과 융희제 순종은 모두 이 금척대훈장을 받았다. 황제들을 제외한 인물로 첫 번째 금척대훈장을 받은 사람은 1904년 대한제국을 방문한 독일 헨리 친왕이다.(1904년 3월 20일) 헨리 친왕 서훈 나흘 뒤 또 다른 외국 인사가 금척대훈장을 받았는데, 신분은 일본 후작(侯爵)에 일본 추밀원 의장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이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인물은 민영환(1905년 12월 1일)과 조병세(1905년 12월 2일)다. 두 사람 모두 생전이 아니라 자결한 다음날에 받았다. ‘금척’은 도대체 무엇이며,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본다. 이름하여 ‘망국 대한제국 훈장 남발 전말기’다. 

1918년 1월 13일 덕수궁 석조전 앞에서 촬영한 영친왕 이은 귀국기념사진. 조선총독부와 조선 왕실, 그리고 조선귀족들 얼굴이 보인다. 앞줄 가운데에 옛 황제 고종(모자 든 사람)이 앉아 있고 그 왼쪽으로 영친왕 이은,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콧수염)가 앉아 있다. 고종 오른쪽으로 순종, 의친왕 이강과 총독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사부로가 앉아 있다. 이들은 모두 대한제국으로부터 최고등급 훈장인 금척대훈장과 이화대훈장을 받은 사람들이다./서울대박물관 

 

위 사진 주요 인물과 서훈 이력.

 

대한제국 망국기 훈장 남발 전말기

 

금척 신화와 조선왕국

 

‘임금이 등극하기 전 꿈에 신인(神人)이 금으로 만든 자(금척·金尺)를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와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가지고 나라를 바룰 사람은 공(公)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하였다. 그 뒤에 어떤 사람이 집 밖에 이르러 이상한 글을 바치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지리산 바위 속에서 얻었습니다” 하여 보니 이렇게 적혀 있었다. “목자(木子)가 돼지를 타고 내려와 다시 삼한(三韓) 강토를 바로잡을 것이다.”’(1392년 7월 17일 ‘태조실록’)

 

전주 이(李)씨 이성계가 고려 왕조를 타도하고 새 왕조를 연 역성혁명을 정당화하는 설화다. 木(나무 목)과 子(아들 자)가 든 사람이 금으로 만든 자, 곧 변하지 않는 금척을 법도로 삼아 새 지도자가 되리라는 예언이다. 500년이 지난 1902년 26대 왕 고종 50세 축하잔치에서 무동들의 축하공연 제목도 ‘몽금척(夢金尺)’, ‘꿈에 금척을 보았다네'였다.(1902년 양력 5월 30일 ‘고종실록’) ’몽금척' 또한 500년 전인 1393년 7월 26일 정도전이 지어 태조에게 바친 노래다. ‘금척(金尺)’은 그렇게 조선 내내 권위와 권력을 상징했다.

 

태조 고황제가 기뻐하리라 - 훈장의 시작

 

1899년 양력 6월 17일 광무제 고종은 ‘좋은 본보기를 보이고 명성을 넓혀 사람마다 흠모하면서 정성과 충성을 발휘하도록 복식과 표장에 관한 제도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1900년 4월 17일 황제는 칙령 13호를 통해 훈장 조례를 반포했는데, 훈장은 모두 금척(金尺), 서성(瑞星), 이화(李花) 대훈장과 태극장, 팔괘장, 자응장 6종이었다. 특히 금척대훈장은 극히 예외를 제외하고는 황실만 패용 가능한 훈장으로 명시했다.

 

고종은 이성계의 ‘몽금척’을 상기시키며 “태조 고황제 영혼도 기뻐 복을 내릴 것이나, 나는 주야로 전전긍긍 허물을 끼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으니 각자 힘쓰라”고 명했다.(1900년 4월 17일 ‘고종실록’) 4년 뒤 황제는 대궐 여관(女官)들을 위해 여자 전용 훈장 서봉장(瑞鳳章)을 신설했다.(1904년 3월 30일 ‘고종실록’)

 

500년 왕조의 상징을 ‘훈장’이라는 물건에 구현했으니, 감격스러운 날이었다. 대접받지 못하던 여자들도 수훈 권리를 하사했으니 참으로 근대적인 지도자였다. 하지만 ‘주야 전전긍긍’의 의지와 ‘태조 고황제의 복’은 발현하지 못했다. 

 

대한제국 초대황제 고종. 가슴에는 금척부장(가슴에 붙이는 금척 훈장, 가운데 태극문양)과 서성부장(별 셋 문양)이 붙어 있다./서울역사박물관

 

망국으로 가는 길목 그리고 훈장

 

대한제국이 일본에 넘어간 세 가지 결정적인 조약은 1904년 한일의정서와 1905년 을사조약(2차 한일협약),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다. 기이하게도 그 세 고비마다 대한제국 황실은 광범위하고 납득하기 어렵게 훈장을 남발했다.

 

러일전쟁 발발 직후인 1904년 2월 23일 일본은 대한제국 영토를 자기네 군사기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일의정서를 맺었다. 그리고 3월 20일 일본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가 특파대사 자격으로 고종을 알현했다. 이토는 고종에게 천황 메이지 선물이라며 30만 엔을 상납했다.(영국 외무부 자료, 1904년 3월 31일 ‘조던 공사가 랜스다운 외무장관에게 보낸 편지’)

 

이날 황제는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를 비롯한 일본공사관 직원 ‘전원’에게 훈장을 내렸다. 나흘 뒤 황제가 조령을 내렸다. “이토 히로부미를 특별히 대훈위에 서훈하고 금척대수장을 주라.” 다음 날 황제는 이토가 타고 온 군함 함장 대위 이노우에 도시오와 시바후 사이치로에게도 훈장을 하사했다. 명분은 ‘친목과 친애의 뜻’이었다.(1904년 3월 20~24일 ‘고종실록’) 이듬해 1월 18일 황제는 대한제국에 주둔한 한국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대훈위 이화대수장을 하사했다. 1907년 8월 27일 갓 황제에 등극한 융희제 순종은 하세가와에게 금척대수장을 줬다.

 

국권 망실과 대훈장파티

 

1905년 11월 17일 2차 한일협약, 을사조약이 체결됐다. 외교권이 일본으로 넘어갔다. 조약 협상 ‘이틀 전’(‘뒤’가 아니다) 고종은 일본 육군중장 이노우에 요시토모부터 소위급인 해군 소군의(少軍醫) 오카다 고가네마루까지 모두 65명에게 훈장을 하사했다.(1905년 11월 15일 ‘고종실록’) 국권이 넘어가고 이를 성토하는 상소가 잇따랐다. 황제는 그 숱한 상소를 “크게 벌일 일이 아니다”라며 물리쳤다.(1905년 11월 27일 ‘고종실록’)

 

11월 30일 무관장 민영환이 자결했다. 고종은 12월 1일 민영환에게 대훈위 금척대훈장을 추서했다. 그날 원로 대신 조병세가 자결했다. 다음 날 고종은 조병세에게 대훈위 금척대수장을 하사했다. 대한제국 세 번째와 네 번째 금척대훈장이었다. 

 

(좌) 민영환. 1905년 11월 30일 을사조약에 항의하며 자결한 조병세는 자결 다음날 황제 고종으로부터 금척대훈장을 추서 받았다. (우) 조병세. 1905년 12월 1일 을사조약에 항의하며 자결한 조병세는 자결 다음날 황제 고종으로부터 금척대훈장을 추서 받았다.

 

이듬해 4월 9일 아들 의친왕 이강이 대훈위 금척대수장, 또 이듬해 5월 28일 또 다른 아들 영친왕 이은이 대훈위 이화대수장을 받았다. 1908년 1월 29일 신임 황제인 융희제 순종은 일본 추밀원 의장 겸 육군 대장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총리대신 사이온지 긴모치에게 대훈위 금척대훈장을 수여했다. 훗날 총독부 정무총감이 된 체신대신 야마가타 이사부로는 대훈위 이화대수장을 받았다. 훈장을 받은 사람은 독일인 1명을 포함해 59명이었다.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 정부는 창덕궁 흥복헌에서 마지막 회의를 열고 한일병합조약 체결을 의결했다. 나흘 뒤 황제 순종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궁내부 민병석에게 금척대수장을, 내부대신 박제순과 탁지부 고영희, 농상공부 조중응 따위에게 이화대수장을 하사했다. 모두 10명이었다.(1910년 8월 26일 ‘순종실록’)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이 공포됐다. 나라가 사라졌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 가슴에는 금척부장(가슴에 붙이는 금척 훈장, 가운데 태극문양)과 서성부장(별 셋 문양), 그리고 기타 훈장들이 붙어 있다.

 

환희작약하는 귀족들

 

1910년 10월 7일 서울 남산 총독부에서 파티가 열렸다. ‘병합에 기여한’ 공로로 조선귀족에 선정된 고관대작 작위 수여식이었다. ‘전 친위부장관 이병무씨가 구한국 육군 부장 정장을 입고 총독부에 올랐다. 금빛 광채를 사방에 떨치며 의기양양하게 1등으로 현관에 마차를 옆으로 대고 정1품 보국 민영소와 전 탁지부대신 고영희와 이재완, 윤택영, 전 내부대신 박제순과 이재극과 전 법부대신 이하영씨 (중략) 전 총리대신 이완용과 전 농상공부대신 조중응과 전 내각 서기관장 한창수씨 등 (중략) 전 탁지부대신 임선준과 전 학부대신 이재곤과 전 시종원경 윤덕영과 전 궁내부대신 민병석씨 등이 당도했다. 얼굴에 번뜩이는 희열(喜悅)은 일장 가관이었다.’(1910년 10월 8일 ‘매일신보’ 2면) 훈장에 작위까지 겹경사가 터졌으니, 저들은 참새가 소리 지르며 날뛰듯 환희작약(歡喜雀躍)했다. 

 

사진에 흘러넘치는 훈장들

 

그리고 8년이 지난 1918년 고종이 아들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1918년 1월 13일 덕수궁 석조전 앞이었다. 공식 명칭은 도쿠주노미야 이태왕(德壽宮李太王)이었고, 아들 순종 명칭은 쇼토쿠노미야 이왕(昌德宮李王)이었다.

 

사진 앞줄 가운데 고종이 앉아 있다. 왼쪽으로 영친왕 이은과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 오른쪽으로는 순종과 의친왕 이강, 부총독 격인 총독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사부로가 앉아 있다. 영친왕 이은과 야마가타는 이화대수장을, 나머지는 금척대훈장 서훈자들이다. 국가는 청산(淸算)당하고 사라졌는데 뙤약볕 아래 금척(金尺)들이 반짝인다. 소름이 끼치지 않는가.

 

'조선귀족' 작위를 받고 얼굴에 희열이 가관이었다라고 보도한 1910년 10월 8일자 '매일신보'.

 

<지면이 좁아서 못 다한 이야기-여자>

 

여자에게도 훈장을 주라는 근대적인 하명에, 여성 전용 서봉장이 신설됐다. 1905년 10월 5일 그 첫 서훈자가 나왔다. 두 명이었는데, 한 사람은 엄씨고 한 사람은 김씨였다. 엄씨는 영친왕을 낳은 황귀비 엄씨였다. 연원군부인이라는 군호를 가진 김씨는 의친왕 이강 아내였다. 두 사람은 지아비와 시아버지로부터 서봉대수훈장을 받았다.(1905년 10월 5일 ‘고종실록’) 1907년 1월 24일 또 다른 여성 서훈자가 탄생했다. 이번에도 황제 고종의 피붙이인 아들 순종의 계비 윤씨였다.

 

1909년 8월 27일 황후가 된 윤씨는 직접 전현직 고관 아내들에게 서봉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11월 12일 다시 한번 여성을 위한 집단 서훈식이 열렸다. 이번에도 태자 스승인 이완용 부인 조씨를 비롯한 고관 아내들이었다. 이번에는 일부 상궁들도 받았다.(1905년 11월 12일 ‘순종실록’)

 

1910년 8월 21일 공식적으로 마지막 서봉장 서훈식이 열렸다. 이 또한 황후가 주재했다.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사람 아내들과 궁내 여관(女官) 45명이 훈장을 받았다. 농상공부대신 조중웅 아내도 포함됐는데, 두 사람이었다. 한 사람은 정경부인 최씨였고 한 사람은 정경부인 미쓰오카(光岡)씨였다.(1910년 8월 21일 ‘순종실록’) 바로 그 다음 날 대한제국은 합병조약 체결을 승인했다. 조약 체결 사흘 뒤인 26일, 며칠 전 아내들이 훈장을 받았던 남편들도 훈장을 받았다.

 

-박종인 선임기자, 조선일보(21-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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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 등극 40주년 기념식

 

허세 가득한 날들이었다

 

황태자, 생일잔치를 청하다

1901년 12월 11일 대한제국 황태자 이척(李坧)이 황제 고종에게 상소를 했다.

'부황(父皇) 폐하의 높고 훌륭한 공덕은 선열보다 빛나고, 크고 깊은 혜택은 후세에 전할 것입니다. 하늘은 이 때문에 말없이 돕고 보답하려고 큰 위업을 맡기고 장수하게 하였으며 한없는 복을 주었나이다. 내년은 부황 폐하가 51세가 되고 왕위에 오른 지 40년이 되는 경사스러운 해옵니다. 소자가 동짓날에 모든 관리를 거느리고 축하를 올리도록 허락함으로써 하찮은 성의나마 조금이라도 펼 수 있게 하여 주시기 바라나이다.'

파티까지는 아니더라도 송덕문(致詞·치사) 정도는 받아주시라는 것이다. 이에 고종은 "크게 벌이자는 말이 아니니 특별히 허락한다"고 겸손하게 상소를 받아들였다.(1901년 12월 11일 '고종실록')

황태자는 이후 두 주일 동안 "이 김에 잔치도 벌이자"고 문무백관과 함께 네 번씩이나 거듭 청했다. 마침내 고종이 대답했다. "지금 백성이 처한 처지에서 헤아리면 짐의 마음이 편안하겠는가? 그뿐만 아니라 내년 가을에 해도 결코 늦지 않다(以今民事 其能安於朕心乎 且待明秋 亦固未晩)."(1902년 12월 25일 '고종실록')

12월 26일 황태자는 경운궁(덕수궁) 중화전에서 황제에게 송덕문을 올렸다. 음력 정월 초하루인 1902년 2월 8일 고종은 중화전에서 축하를 받고 사면령을 반포했다. 허세(虛勢) 가득한 날들이 시작됐다.

 

황제, 즉위 기념식을 명하다

 

대한제국 초대, 2대 황제 고종(왼쪽)과 순종(촬영 일자 미상). /국립고궁박물관

 

2월 18일 고종은 황태자로부터 새로운 존호(尊號)를 받았다. 새 존호는 '乾行坤定 英毅弘休(건행곤정 영의홍휴)'. 이로써 고종 황제 존호는 '통천융운조극돈륜정성광의명공대덕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입기지화신열외훈홍업계기선력건행곤정영의홍휴(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가 되었다. 50자다. 순조(77자), 영조(70자)에 이어 셋째로 긴 존호다. 고종 사후에 열두 글자가 추가됐다.

3월 5일 존호를 받은 기념으로 황제는 또 사면령을 반포했다. 이날 고종이 내린 조칙에는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백성이 굶주리고 나라 저축이 거덜 나서(不獲已勉從 朕實愧焉), 근심 걱정으로 비단옷에 쌀밥이 편안치 않지만 억지로 따랐으니 짐이 실로 부끄럽게 여겼다(不獲已勉從 朕實愧焉).'(1902년 3월 5일 '고종실록') 그런데, 의심스럽다.

2주일이 지난 3월 19일 고종은 이렇게 조령을 내렸다. '올가을에 등극 40년 경축 예식을 거행하려고 한다(玆於本年秋間 將行御極四十年稱慶禮式矣).' 세부 절차를 의정부와 궁내부, 예식원, 장례원에서 마련하라는 명도 함께 내렸다. 존호 진상 이후 40주년 기념식 이야기는 기록에 없다. 황제 본인이 내린 결정이었다.

 

잔치를 벌이다

3월 29일 왕족인 완평군 이승은이 황제에게 기로소(耆老所)에 들라고 상소했다. 나이 칠십을 기(耆)라 하고 여든을 로(老)라 한다. 기로소는 관료들 가운데 기로(耆老)한 자들을 예우하는 기관이다. 지금 서울 세종로사거리 교보빌딩 부근에 있었다. 왕은 달라서, 태조는 예순에 숙종은 쉰아홉, 영조는 쉰하나에 기로소에 들었다. 그 예를 따라 고종도 들라는 청이었다. 나흘 뒤 황태자가 기로소 입소와 함께 입소 잔치를 상소했다. 입소 잔치 이름은 양로연(養老宴)이다. 황제는 입소 요청은 받아들이고 잔치는 거절했다. 4월 13일 황태자 이척이 "떳떳한 규례이니 빠뜨릴 수 없는 일(彝典之不可缺者)"이라며 다시 잔치를 청했다. 고종은 '간약하게(簡約)' 치르라며 받아들였다.(1902년 4월 13일 '고종실록') 결정은 곧 이행되었다.

5월 4일 오후 1시 고종이 지붕이 누런 황제 가마(黃屋寶輦·황옥보연)를 타고 경운궁 대안문(大安門·현 대한문)을 나왔다. 황토현(현 동화면세점 일대) 신작로에는 군병이 완전군장으로 도열했다. 군악대가 나발과 북을 연주했다. 기로소 행사를 마친 황제는 오후 4시 환궁했다.(1902년 5월 5일 '황성신문') 다음 날 황제는 세 번째 사면령을 반포했다.

 

1902년 12월 3일 오전 9시 대한제국 수도 한성에 있는 황궁 경운궁 중화전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고종의 망육순(望六旬) 겸 즉위 40주년 축하 잔치였다. ‘망육순’은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 쉰한 살을 뜻한다. 전국에 콜레라가 창궐하면서 본행사인 즉위 40주년 기념식은 연기를 거듭하다가 취소됐다. 그해 대한제국 총예산은 758만5877원(세출 기준)이었다. 축하 행사에 든 비용은 100만원이었다. 적외선 필터 촬영.

 

그달 30일 아침 경운궁 함녕전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다음 날 아침 또 잔치가, 밤에 또 잔치가, 6월 1일 아침과 밤 또 잔치가 열렸다. 잔치는 6일, 18일에 또 열렸다. 19일 밤에는 제국 영빈관인 대관정(大觀亭·현 프라자호텔 뒤편)에서 '각 공사, 영사와 신사를 청하여 기악(妓樂)으로 잔치를 벌였다.'(1902년 6월 21일 '황성신문') 잔치에는 평양, 선천, 진주 기생 30명과 서울 기생 50명이 동원됐다. 매천 황현에 따르면 정부는 잔치를 위해 프랑스제 촛대와 밥그릇을 구입했다. 잔치 시리즈에 투입된 예산은 6만9246원8전4리였다.

그 해 굶주린 경기도민들이 인조릉 장릉 송림을 침범하여 나무껍질을 모두 벗겼다. 능병들은 이를 막지 못했다. 송림 밑에서 쭈그리고 앉아 죽은 사람이 줄을 잇고 있었다.(황현, '매천야록' 3권, '경기도의 기근') 황실이 양로연을 치르면서 연일 북을 치고 풍악을 즐기자 사람들은 궁중으로 기와조각을 던졌다. 고종은 그때까지 투석(投石)의 변이 있었던 것도 몰랐다.('매천야록' 3권, '耆老社, 養老宴會의 投石')

 

평양행궁과 기념비각

"동서양 나라들 중에 수도를 두 개 두지 않는 나라가 없나이다. 황제 폐하께서 세우신 터전은 크고 원대하여 옛날보다 뛰어나건만 유독 이 제도만은 아직 시행하지 못하였나이다." 기로소 입소 사흘 전 특진관 김규홍이 상소했다. 고종은 "별도로 편의 여부를 물어서 처분을 내리겠다"고 답했다.(1902년 5월 1일 '고종실록') 닷새 뒤 고종이 말했다. "짐이 이에 대해 생각해 온 지가 오래되었다. 평양은 기자(箕子)가 정한 옛 도읍으로 예법과 문명이 여기서 시작되었다. 더구나 그곳 백성이 모두 바라고 기꺼이 호응하는 데에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고종이 행궁 건설 비용으로 내려보낸 돈은 내탕전 50만 냥이었다.(5월 14일 '고종실록') 양로 잔치가 한창이던 6월 3일 평양 행궁이 착공됐다. 궁궐 이름은 풍경궁(豐慶宮)으로 정했다. 360칸 규모였다.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비 설립도 이어졌다. 1902년 9월 설립된 조야송축소라는 관변 조직이 주도한 이 이벤트는 이듬해 2월까지 공무원 1770명으로부터 3만원을 모금했다.(1903년 2월 27일 '황성신문') 1903년 9월 2일 기로소 앞에 기념비각이 설치됐다. 이게 서울 세종로 사거리에 서 있는 '기념비전(紀念碑殿)'이다. '군수가 부호를 택하여 강제로 모금하기도 했고 군수가 착복하기도 했다.'('매천야록' 3권) 고종 탄생일인 양력 8월 28일은 만수성절이라는 이름으로 또 잔치가 벌어졌다.

 

칭경 40주년 기념식

 

즉위 40주년 기념식 공식 명칭은 '어극40년칭경예식(御極四十年稱慶禮式)'이다. 1902년은 1863년 열한 살에 왕위에 올라 황제로 40년을 맞은 해였다.

고종은 이해 10월로 예정된 축하연을 각국 사절이 참석한 국제 행사로 치르려고 했다. 메인 행사인 칭경 40주년 기념식은 10월 18일, 외부 인사 초청 행사인 외진연은 10월 19일, 궁중 내부 행사인 내진연은 10월 22일로 예정됐다.

몇 차례 연기됐던 내외 잔치는 12월 3일 경운궁 중화전에서 외진연을 시작으로 성대하게 거행됐다. 관청들은 문을 닫았고 상점들은 태극기를 게양했다. 7일에는 경운궁 관명전에서 내진연이 거행됐다. 잔치는 14일까지 관례에 따라 낮밤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정작 메인 행사인 기념식은 열리지 않았다. 이유가 있다.

 

창궐한 콜레라, 나랏돈 100만원

'태양이 어떻게 생겼는지 거의 잊어버릴 지경이다. 콜레라는 원산의 말할 수 없는 오물, 이름 없는 악취와 지독한 날씨 때문에 노동 현장을 강타한 것 같다.'(1902년 9월 7일 '윤치호 일기') 콜레라가 대한제국을 덮친 것이다. 이로 인해 9월로 예정됐던 잔치는 거듭 연기됐다.

1903년 4월 30일로 연기됐던 즉위 기념식 또한 또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해 4월 10일 일곱째 아들 이은(李垠)이 천연두에 걸린 것이다. 결국 대한제국 정부는 칭경 기념식 행사를 취소하고 각국 정부에 이를 통고했다. 행사를 위해 지방에서 불렀던 임시혼성여단 부대도 해산하고 원대 복귀했다. 1904년 2월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쟁이 터졌다. 나라는 남의 전쟁터로 변했다. 칭경 기념식은 완전히 무산됐다. 평양 행궁도 미완으로 끝났다.

1902년 8월 10일 칭경예식사무소가 의정부에 보낸 공문에는 칭경 행사 비용이 100만원으로 나와 있다. 명목은 칭경시각항목(稱慶時各項費)이다.(각사등록 근대편, '예식 때 각종 비용에 대한 예산외 지출 청의서') 1902년 대한제국 총예산은 758만5877원(세출 기준)이었다.(1902년 2월 7일 '황성신문') 나랏돈 13.2%가 사라졌다. 평양 행궁은 1913년 병원으로 변했다.

황제국이 되려면

위엄은 보였는가. 황제국은 되었는가. 위엄을 보이면 황제국이 되는가. 1450년 세종 32년 집현전 부교리 양성지가 상소를 올렸다. '모름지기 (적에게) 한번 대승(大勝)하여야 옳을 것이옵니다(須一大勝 而後可也). 저들이 우리 병력이 서로 대적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연후에야 감히 가볍게 군사를 일으키지 못하여 봉강(封疆)을 가히 지킬 수 있습니다.'(1450년 1월 15일 '세종실록') 나랏돈을 13% 쓰면서 잔치를 벌인다고 부강해지지 않는다는 충언이었다. 참된 위엄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경고였다.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조선일보(18-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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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이 생각하는 중국? 그런 건 없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했다는 "한국은 사실 중국의 일부였다"는 말은 실수가 아니다. 중국인들이 가진 일반적 역사관이다. 때론 공격이 최상의 방어가 될 수 있다. 중국과 역사전쟁이 그러하다. 소수민족 문제를 가진 중국의 아킬레스건은 '실체로서 중국은 없다'는 사실이다. 진, 한, 수, 당, 원, 명, 청과 같은 통일왕조가 있었지, 중국이란 나라는 없었다. 국가로서 중국의 탄생은 1911년 중화민국 건국이다.

그 이전까지 중국은 특정 나라를 지칭하는 게 아니라 사마천 '사기'로부터 이어지는 24정사(
正史)의 계보가 만든 역사공동체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조선을 침입한 건 중국이 아닌 만주족이 세운 청이다. 명은 1644년 망할 때까지 중국으로 존재했다. 명이 망한 후 중국은 어디 있었는가? 청은 지역으로서 중국을 지배했지만, 조선 지식인들은 중국 보편 문명으로서 중화는 조선이 계승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생겨난 게 조선중화사상이다.

한국은 무엇인가? 한국이란 국가 명칭은 고종이 대한제국으로 왕조 이름을 바꾼 것에서 비롯했다. 대한은 삼한(
三韓)에서 유래했다. 고조선의 조선 대신 삼한 정통론에 입각해 왕조를 제국으로 개조했다. 조선이란 국호를 정해준 명 태조 홍무제는 기자조선을 염두에 뒀지만, 조선 건국 세력은 단군조선 후예라는 자의식을 갖고 있었다. 대한으로 국호 변경은 중화 질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제국을 선언한 것이다.                   

 

고종(왼쪽)과 순종(오른쪽) 모습. 1904년경 찍은 사진이다. /조선일보 DB 

 

전통시대 중국은 주변 민족을 오랑캐로 차별하는 문명 개념이었다. 오늘날 중국은 배제가 아닌 팽창을 목적으로 그 개념을 재사용한다. 중국 정사에서 고구려사는 중국사가 아니다. 그런데 오늘날 중국은 영토 안에 있었던 모든 이민족 역사를 자국사로 편입하는 역사 정책을 편다. 그것도 모자라서 이젠 한국사 전체에 대한 야욕을 드러낸다.

이런 중국의 역사 침략에 맞서 한국사의 주권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한국사란 한국 민족의 역사라고 말하는 건 세계화 시대 다문화사회를 위한 답이 될 수 없다. 그건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한 정의였다. 세계화 시대엔 민족사가 아니라 '조선중화'처럼 보편 문명과 연결을 통해 한국인의 문화적 DNA를 진화시켰던 과정의 역사를 써야 한다. 역사 침략에 맞서 역사 주권을 지키기 위해선 세계 속 한국의 좌표를 설정하는 글로벌 한국사 정립에 나서야 한다.

 

-김기봉 경기대 사학과 교수, 조선일보(17-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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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 오빠들의 말년

 

해방 후에도 무관심 속에서 말년을 마친 조선의 마지막 왕족..

고종 황제가 예순의 나이에 얻어 일제의 탄압에서 끝까지 지켜주고 싶었던 귀한 딸 덕혜옹주.
그러나 고종 황제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덕혜옹주의 삶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처음으로 그녀의 일생을 다룬 영화 '덕혜옹주'가 개봉하는 이 시점. 덕혜옹주를 포함한 고종 황제 슬하 사남매(
四男妹)의 마지막 모습은 어땠을까.

네덜란드 헤이그에 파견된 3명의 특사. 왼쪽부터 이준·이상설·이위종. 

 

역사의 소용돌이 

 

1907년 고종(高宗)은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이준과 이상설, 이위종 등 특사(特使) 3인을 몰래 파견한다. 일본의 침략을 폭로하고 국권 회복을 도모하려 했지만 일본의 방해로 실패한다. 이를 계기로 고종은 순종에게 강제로 양위(讓位)한다. 1910년 한일합병조약(韓日合倂條約)체결로 조선의 519년 역사는 끝난다.

 

고종 황제 어진(御眞)과 덕수궁 일부 모습. 

 

1919년 덕수궁에서 노년을 보내던 고종은 평소처럼 식혜를 먹은 후 돌연사한다. 향년 68세였다. 뇌출혈 또는 심장마비로 서거했다는 '자연사설'과 '자살설', 식혜에 독이 들었다는 '독살설' 등이 있지만, 아직 고종의 사인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고종에게 13명의 자녀가 태어났지만, 순종과 의친왕, 영친왕, 그리고 덕혜옹주를 제외하고는 어린 나이에 모두 죽었다.

 

고종이 대한제국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 남은 4명의 자녀는 어떤 일생을 보냈을까? 

 

순종(純宗) 

 

본명 이척(李坧). 1874년 출생. 고종과 명성황후(明成皇后) 슬하에 태어나 유일하게 성년이 넘도록 생존한 적자(嫡子)이다. 그러나 그도 어릴 때부터 병약했다. 1907년 일본에 의해 강제로 황제에 오른 후부터 나라를 뺏기기 전까지 3년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 일제 통감(統監)의 내정간섭으로 통치자로서 무능할 수밖에 없었다. "짐이 확연히 스스로 결단을 내려 한국의 통치권을 종전부터 친근하게 믿고 의지하던 이웃 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해 밖으로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안으로 민생을 보전하게 하니…" 순종 3년 8월 22일 조령(詔令)이 내려진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일제)의 식민지가 된다.

 

이토 히로부미의 손에 이끌려 강제 유학의 길에 오른 영친왕. 그리고 창덕궁 전경 

 

한일합병조약으로 순종은 황제에서 왕(李王·이왕)으로 강등된다. 그리고 1926년 심장마비로 서거하기 전까지 창덕궁에서 지낸다. 그에게 후손은 없었고, 이왕 직위는 이복동생 영친왕에게 물려준다. 

 

의친왕(義親王)

 

본명 이강(李堈). 1877년 출생. 후궁 귀인(貴人)장씨의 소생이다. 18세 나이에 일본 보빙대사(報聘大使·답례로 외국 방문하는 대사)로 임명된 이후 영국·독일·러시아·이탈리아·프랑스·오스트리아 등을 차례로 방문하고, 미국에서 유학한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후부터 풍부한 국제무대 경험을 토대로 독립운동에 한평생을 보낸다.

 

본지 1920년 6월 30일자 지면 일부 

 

1919년 상해임시정부로 탈출해 독립운동을 이어가려고 했지만, 만주에서 일본 경찰에 발각돼 총독부 관사에 연금(軟禁)된다. 이것이 일명 '대동단(大同團)사건'이다. 끝까지 배일(排日)정신을 지킨 그는 1945년 해방 후 일반인으로 살다가 6·25 전쟁 피난길에서 영양실조에 걸려 1955년 서거한다. 이건(李鍵)·이우(李鍝)를 비롯해 13남 9녀가 태어났으며, 현재까지 고종의 후손으로 대(代)를 잇고 있다. 

 

영친왕(英親王)

 

본명 이은(李垠). 1897년 출생. 태비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엄씨의 소생이다. 후손이 없던 순종이 이복동생 영친왕을 황태자로 책봉하면서 종묘에 모셔진 마지막 조선의 왕족이 된다. 1907년 황태자가 되자마자 이토 히로부미에게 이끌려 일본으로 건너갔고, 육군유년학교와 육군사관학교를 거치면서 철저히 일본식 교육을 받았다.

 

전주역사박물관에 기증된 대한제국 황실 가족 사진 중 하나. 영친왕 내외 사진.

 

1920년 일본 황실의 내선일체(內鮮一體·일본과 조선은 한 몸) 정책에 따라 일본 왕족 이방자(梨本宮方子·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여사와 정략결혼한다. 일본에 붙잡혀 있는 동안 일본 육군 중장에 오른 데다, 순종 서거 후 이왕 직위도 물려받아 경제적 어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어머니 임종도 보지 못했고, 늘 고국을 그리워했다. 해방 직후 재산 국유화, 직위 박탈 등 황족으로서 특권이 모두 폐지됐고, 이승만 정권의 반대로 귀국이 좌절된다. 일본에서도 왕족 명단에 제외돼 '재일한국인(在日韓國人)'이라는 무국적(無國籍) 상태로 어렵게 생활한다.

1963년 11월 22일 영친왕이 볼모로 떠난 지 50년 만에 병든 몸으로 고국땅을 디뎠다. 사진은 영친왕이 탄 앰블런스와 환영하는 군중들. 그리고 같은 날, 이구씨와 이방자 여사의 기자회견. 

 

1963년 박정희 정권에 이르러서야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해 귀국. 귀국 후 국가 보조금을 받아도 뇌 질환 치료비 때문에 가난한 생활이 계속됐고, 1970년 서거한다. 두 명의 아들 이진(李晉)과 이구(李玖)을 두었지만, 장남은 어린 나이에 죽었다. 

 

덕혜옹주(德惠翁主)

 

본명 이덕혜(李德惠). 1912년 출생. 후궁 복녕당(福寧堂) 귀인 양씨의 소생이다. 고종이 늦은 나이에 얻은 막내이자 고명딸(아들 많은 집의 외딸)로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자랐다. 그러나 자신을 지켜주던 아버지를 8세 나이에 잃고, 1925년 일본에 강제로 끌려가 학교를 다닌다. 1930년 몽유증과 조발성치매증(조현증)이 나타나 이복 오빠 영친왕 내외의 집에서 함께 살면서 치료를 받는다. 이듬해 병세가 호전돼 쓰시마섬(對馬島) 도주(島主)의 아들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정략결혼한다. 결혼 1년 만에 딸 정혜(正惠·마사에)를 얻으며 원만하게 생활한다.

 

1962년 1월 26일 덕혜옹주가 오랜 해외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해 창덕궁 낙선재에 정착했다. 하지만, 증세가 점점 심해지면서 1946년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한다. 결국, 1955년 다케유키와 영친왕 내외가 합의 이혼을 결정한다. 딸도 유서를 남긴 채 일본 남알프스 산악지대에서 실종된다.

 

창덕궁 낙선재 일부 모습. 

 

영친왕 내외가 보살피던 덕혜옹주는 이승만 정권의 거부로 귀국하지 못하다가 1962년에 이르러 고국으로 돌아온다. 일본으로 떠난 지 38년 만이었다. 호적은 20년 후 1982년에 생긴다. 귀국 직후부터 5년 동안은 서울대학교 병원에 입원해 치료받는다. 이후 어릴 적 자신을 돌보았던 유모를 다시 만나 창덕궁 낙선재에서 지냈으며, 1989년 서거한다. 이때까지도 정신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고종 황제의 가족 사진. 왼쪽부터 영친왕·순종·고종·순정효황후 윤씨(純貞孝皇后·순종비)·덕혜옹주. /문화재청 제공 

 

궁에서 태어나 일제의 핍박을 받으며 오랜 세월을 보낸 비운의 순종, 의친왕, 영친왕, 그리고 덕혜옹주. 그들은 해방 후에도 무관심 속에서 말년을 마친, 조선의 마지막 왕족이었다.

-참고: 한국학중앙연구원, 국립고궁박물관, 조선닷컴(16-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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