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세계에서 다섯째로 넓은 나라… ]
[브라질 제국 페드루 2세]
브라질, 세계에서 다섯째로 넓은 나라…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이 우리나라 대통령의 초청을 받고 한국을 공식 방문하면서 두 나라 관계가 새로운 단계로 나아갔어요. 룰라 대통령이 한국과 브라질의 관계를 기존의 ‘협력 관계’에서 한 단계 발전한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하겠다고 밝힌 것이지요.
룰라 대통령은 “첨단 기술을 가진 한국과 풍부한 자원과 청정에너지를 가진 브라질은 서로 협력할 분야가 매우 많다”고 말했어요. 브라질은 나이오븀과 니켈, 희토류 같은 핵심 광물이 풍부한 나라예요. 단순히 한국에 자원을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반도체와 배터리 같은 첨단 산업 생산 과정에도 참여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어요. 또 브라질은 세계 최대 쇠고기 수출국 중 하나로 한국 시장 확대도 추진하고 있어요.

브라질은 남아메리카(남미) 지역에서 가장 넓은 나라예요. 브라질의 면적은 약 851만㎢로 한반도 면적의 약 38배에 달해요. 세계에서 러시아, 캐나다, 미국, 중국에 이어 다섯째로 넓습니다. 오늘날 브라질은 세계적 농업 국가이자 자원 강국으로 알려져 있지만, 지금 모습에 이르기까지 굴곡이 많았죠. 식민지 시대와 노예제 사회, 독립과 산업화, 그리고 민주주의 발전 과정을 거쳤습니다.

지난달 17일(현지 시각)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삼바 축제에서 삼바 학교 단원들이 공연을 하고 있어요.
나무 이름에서 ‘브라질’ 따왔어요
1500년 4월 22일 포르투갈 탐험가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은 인도로 향하던 항해 도중 폭풍을 만나 우연히 남미 지역의 한 해안에 도착했어요. 이곳이 오늘날 브라질입니다. 그는 이곳을 포르투갈령으로 선언하고 ‘테라 드 베라 크루스(참된 십자가 섬)’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브라질이라는 이름은 ‘파우 브라질(브라질나무)’에서 유래했는데, 붉은색 염료를 얻던 나무가 이곳에서 많이 났기 때문이에요. 당시 유럽에서는 브라질나무를 귀하게 여겼죠.
포르투갈은 이 지역을 식민지로 정하고 원주민들을 노예로 삼아 유럽에 필요한 사탕수수, 커피 등 농작물을 재배시켰어요. 이 과정에서 원주민 수백만 명이 질병과 노동 등으로 사망하게 돼요. 그들의 문화와 전통은 파괴됐고, 토지도 대부분 빼앗겼어요. 아프리카인 수백만 명도 브라질로 끌려와 혹독한 노예 생활을 했어요.
현재 브라질의 다양한 인종과 문화도 이때 형성된 것이죠. 브라질의 대표적 춤과 음악인 ‘삼바’와 ‘카니발’ 축제 역시 아프리카계 브라질 문화가 그 바탕에 있답니다.

브라질 상파울루 식물원에 있는 브라질나무입니다.
포르투갈 왕족이 브라질 독립을 이끌다
포르투갈의 브라질 식민 지배는 스페인, 프랑스, 영국 등 유럽 열강이 라틴아메리카(중·남미) 지역에 경쟁적으로 식민지를 만들도록 부추겼죠. 이후 19세기 전반 중·남미에는 독립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어요. 특히 시몬 볼리바르, 호세 데 산 마르틴 같은 ‘크리오요(신대륙에서 태어난 유럽 백인)’들이 주도해 스페인 지배를 받던 식민지들이 차례로 독립하게 됐어요. 이와 달리 브라질은 포르투갈의 왕족이 브라질 독립 운동을 주도했어요.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1807년 유럽에서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으로 진격해 오자, 포르투갈의 실질적 지배자였던 주앙 6세는 가족과 함께 고향을 떠나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 정착했어요. 이 시기 그는 브라질 문화 발전에 힘썼고, 리우는 번영했죠. 그러다 1821년 본국의 정치 상황이 복잡해지자, 그는 아들에게 브라질 통치를 맡기고 포르투갈로 돌아갑니다. 당시 브라질은 이미 크게 성장해 포르투갈에 대한 발언권과 자치권이 확대된 상태였죠.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긴 포르투갈 본국 의회가 브라질을 다시 식민지로 되돌리려 했지만, 브라질 통치를 맡았던 주앙 6세의 아들이 1822년 브라질의 독립을 선언해 버립니다. 바로 브라질의 초대 황제 페드루 1세예요. 이후 그의 아들인 페드루 2세 때까지 브라질은 약 70년간 번영을 누립니다. 하지만 농장 중심 경제 체제와 노예제 사회는 계속 이어졌어요.

1822년 브라질 독립을 선언한 페드루 1세가 환호하는 군중에 둘러싸인 장면 그림이에요. 프랑스·브라질 이중 국적 화가인 프랑수아 르네 모로의 1844년 작품입니다.
군사 쿠데타로 공화국이 된 브라질
1889년 브라질은 군사 쿠데타를 통해 공화국으로 바뀌게 됩니다. 하지만 처음엔 일부 지역 대지주들이 정치 권력을 나눠 가지면서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정착하기 어려웠죠. 이후 20세기 들어 급격한 변화가 이어졌는데요. 제툴리우 바르가스는 1930~1945년, 1951~1954년 두 차례 대통령을 지내며 독재 체제를 바탕으로 브라질 산업화를 추진했어요. 하지만 1950년대 헌법상 대통령 권력이 약화되고 인플레이션으로 국민의 삶이 최악으로 치닫자, 그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브라질은 농업 국가에서 공업 국가가 되려고 계속 노력했어요. 그 덕분에 상파울루와 리우데자네이루 같은 대도시가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답니다. 또 자동차와 철강 산업도 발전하기 시작했어요. 1964년 다시 쿠데타가 일어나 군사 정권이 들어서면서 약 20년 동안 독재 체제가 이어졌는데요. 이 시기 정치적 자유는 크게 제한됐지만, 경제 성장을 위한 노력은 끊이지 않았죠. 이후 1985년 군사 정권이 물러나고 민주 정부가 들어서면서 오늘날 브라질 민주주의의 기초가 마련됩니다.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브라질 대통령. /EPA 연합뉴스·위키피디아·AFP 연합뉴스
3선에 성공한 룰라 대통령
21세기 들어 브라질은 신흥국으로 성장했어요. 특히 노동자 출신이었던 룰라가 2002년 대통령이 되면서 빈곤층 지원 정책도 확대됐죠. 룰라 정부는 ‘보우사 파밀리아(가족 보조금)’ 정책을 실시했는데요. 이는 국가가 저소득층 가정에 기금을 주는 대신 수혜 가정은 반드시 자녀를 학교에 보내고, 정기적으로 건강 검진을 받도록 하는 내용이랍니다. 이를 통해 룰라는 서민들의 큰 지지를 얻었어요, 그 결과, 그는 2006년 재선, 2022년 3선에 성공하면서 현재 세 번째 대통령 임기를 보내고 있어요.
브라질은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도 많아요. 여전히 빈부 격차가 크고 도시 빈민 문제가 심각하며 정치적 갈등도 이어지고 있지요. 그럼에도 브라질은 풍부한 자원과 넓은 영토, 젊은 인구를 바탕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큰 나라로 평가받고 있어요. 룰라 대통령의 이번 방한은 이런 역사 속에서 성장해 온 브라질이 새로운 국제 협력 관계를 모색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죠.
-정세정 옥길새길중학교 역사 교사/기획·구성=정해민 기자, 조선일보(2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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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제국 페드루 2세
노예제 없애고 근대화 이끌었던 마지막 황제
아버지 페드루 1세가 왕위 떠넘겨 섭정 거친 뒤 16세부터 통치 시작
정치 안정과 근대화로 번영 이끌어
'황금법'으로 노예제 폐지했지만 반대파 쿠데타로 유럽으로 망명
오늘날 훌륭한 황제로 평가받아
삼바와 축구의 나라 브라질이 최근 극심한 정치적 혼란에 빠졌어요. 미셰우 테메르 브라질 대통령이 뇌물을 받은 정황이 드러나면서 테메르 대통령을 탄핵해야 한다는 여론이 커지고 있거든요. 지우마 호세프 전 대통령이 뇌물을 받은 문제로 탄핵이 된 지 9개월여 만에 브라질은 또다시 대통령이 탄핵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16세기부터 포르투갈의 식민 지배를 받은 브라질은 1822년 독립한 후로도 끊임없는 정치적 혼란을 겪었어요. 하지만 브라질 제국 두 번째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였던 페드루 2세(1825~1891) 시기에는 정치적 안정과 근대화를 통한 번영을 누렸지요. 오늘날에도 페드루 2세는 브라질 역사에 가장 자랑스러운 인물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답니다.
◇브라질 독립과 브라질 제국의 수립
약 300년간 포르투갈이 브라질을 지배하면서 브라질은 사탕수수를 대량으로 경작하는 플랜테이션이 크게 발달했습니다. 지주들이 광대한 땅에 노예를 부려 사탕수수를 재배하고 설탕을 만들어 돈을 벌었어요. 플랜테이션을 위해 아프리카에 살던 수많은 흑인이 노예로 브라질에 끌려오기도 했습니다.
플랜테이션으로 포르투갈에 막대한 부를 안기던 식민지 브라질은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나폴레옹이 포르투갈을 정복하면서 포르투갈 왕실이 브라질로 도피했기 때문이죠. 13년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가 포르투갈의 임시 수도가 되기도 했고요. 나폴레옹이 몰락하면서 포르투갈 왕실은 다시 본국으로 돌아갔지만, 정치·경제적으로 성장한 브라질을 더 이상 식민지로 취급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이에 브라질을 왕국으로 격상시키고 포르투갈과 연합 왕국을 수립한다고 선언했답니다. 브라질 왕국에는 폭넓은 자치권을 허용하기로 하였지요.
하지만 포르투갈 의회가 이런 결정에 반대하고 나섰어요. 나아가 연합 왕국 해체와 브라질을 다시 식민지로 격하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지요. 이에 분노한 브라질 국민들은 독립운동에 나섰고, 1822년 브라질에 머물고 있던 포르투갈 주앙 6세의 아들 동 페드루가 브라질의 독립과 브라질 제국의 수립을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브라질 제국의 초대 황제 페드루 1세로 즉위하였어요.
◇근대화와 정치 안정을 이끌다
즉위 초에는 하늘을 찌를 듯하던 페드루 1세의 인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추락하기 시작했습니다. 페드루 1세는 입헌군주제를 선언했지만 독재적인 통치를 펼쳤고, 브라질 내 극심한 정치적 갈등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어요. 급기야 브라질 남부 지역이 우루과이로 독립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낙심한 페드루 1세는 고작 다섯 살이던 아들 페드루 2세에게 황제 자리를 떠넘기고 포르투갈로 떠나버렸어요.
열여섯 살 전까지 섭정(攝政·군주가 직접 통치할 수 없을 때 군주를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통치하는 동안 페드루 2세는 외롭고 불우한 환경에서 황제가 될 수업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하지만 이런 환경 속에서도 페드루는 황제로서 나라를 발전시키겠다는 강한 의무감과 국가에 헌신할 책임감을 갖춘 황제로 자라났어요. 그리고 1841년부터 직접 통치를 시작하면서 그의 뛰어난 능력과 성품이 빛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19세기 브라질 제국을 다스린 페드루 2세는 정치 안정과 근대화 정책, 노예제 폐지 등 여러 뛰어난 업적을 남겼어요. /위키피디아
당시 브라질은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네덜란드를 비롯한 여러 유럽 열강이 식민지를 개척하고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벌이면서 브라질 플랜테이션의 경쟁력이 떨어졌기 때문이었죠. 이에 페드루 2세는 사탕수수와 설탕 대신 커피 생산을 장려해 브라질 경제를 회복시켜 나갔습니다. 오늘날 브라질 커피가 유명한 것도 이때부터 커피 생산을 늘린 덕분이지요.
학문과 과학, 예술 분야에도 깊은 관심과 재능을 가졌던 페드루 2세는 유럽에 유학생을 보내 선진 문물을 배우게 하고 학교를 세워 브라질 근대화를 위해 노력하였어요. 브라질에 철도, 전신 시설이 놓이고 증기선 운항이 늘어난 것도 페드루 2세 덕분이었지요. 페드루 2세는 1840년 직접 카메라를 들여와 브라질 최초의 사진사가 되기도 했습니다.
페드루 2세는 뛰어난 정치력으로 브라질 정치 상황도 안정시켰어요. 독재적으로 정치를 하지 않고 보수파와 자유파의 의견을 모두 존중했습니다. 두 파를 교대로 내각에 등용해 정치적 화합을 위해 노력했지요. 언론·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시민의 기본권을 보호하는 데에도 힘썼고요. 그 결과 페드루 2세는 브라질 국민으로부터 높은 인기와 존경,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노예제 폐지가 부른 제국의 붕괴
하지만 오랜 세월 페드루 2세의 통치가 이어지자 브라질 사람들은 그의 뛰어난 통치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고, 그만큼 그의 인기도 서서히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1889년, 페드루 2세는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 유럽으로 추방되고 말았습니다. 페드루 2세가 노예제를 폐지한 것이 그 발단이 되었어요.
브라질은 페드루 2세 통치 시절에도 노예제가 만연하였어요. 플랜테이션으로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쥐고 있던 지주들에게 노예는 없어선 안 될 존재였기 때문이죠. 반면 인권을 중시하고 근대화를 추진했던 페드루 2세는 집권 초부터 노예제 폐지를 위해 노력했답니다. 그 결과 1850년대에는 대서양 노예무역 금지법이 마련됐고 1871년에는 여자 노예가 낳은 아이를 노예가 아닌 자유 시민으로 인정하는 법도 제정되었지요. 하지만 지주들의 강한 반대에 막혀 노예제 폐지까지 나아가지 못했고, 그 결과 브라질은 라틴아메리카 국가 중 유일하게 노예제가 있는 나라가 되었어요.

1888년 5월 노예제 폐지 법안이 통과되자 환호하는 브라질 군중의 모습. /위키피디아
고심하던 페드루 2세는 정치적 반대를 무릅쓰고 1888년 노예제를 폐지하는 황금법(아우레아법)을 만들었어요. 그러자 지주들은 군인들을 부추겨 '제국을 무너뜨리고 공화국을 수립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쿠데타를 일으켰답니다. 1889년 11월 15일 쿠데타가 성공하면서 브라질 제국이 무너지고 브라질 공화국 수립이 선언되었어요. 페드루 2세를 지지하던 브라질 국민 대부분에게도 깜짝 놀랄 일이었지요. 쿠데타 소식을 들은 페드루 2세는 "그럼 이제 나는 은퇴하면 되겠군. 그동안 너무 열심히 일해서 아주 피곤해. 이참에 쉬어야겠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틀 뒤 그는 가족과 함께 유럽으로 추방되었지요.
프랑스로 망명한 페드루 2세는 1891년 병으로 급작스럽게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유해는 약 30여 년이 지난 1920년에야 브라질로 돌아올 수 있었지요. 공화국이 수립되고 오히려 브라질이 정치·경제적 위기에 처하면서 페드루 2세의 업적을 높게 평가하는 여론이 높아졌기 때문이었지요. 페드루 2세의 유해는 그의 이름을 딴 도시 페트로폴리스에 안장되었고, 오늘날까지 그는 브라질의 발전과 번영을 이끌었던 황제로 기억되고 있어요.
-윤형덕 공주 한일고 역사 교사/기획·구성=배준용 기자, 조선닷컴(17-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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