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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카이사르] [팍스 로마나(Pax Romana)]

뚝섬 2023. 4. 9. 05:45

[율리우스 카이사르] 

[팍스 로마나(Pax Romana)]

 

 

 

율리우스 카이사르

 

로마 전성기 문 연 정치가… 그의 이름서 '7월' 유래

 

1899년 프랑스 화가 리오넬 로이어가 그린 갈리아 전쟁의 한 장면. 카이사르(오른쪽 붉은 옷)를 찾아온 갈리아 부족장 베르생제토릭스(왼쪽)의 모습. /위키피디아

 

최근 미국이 고대 유물 29점을 그리스에 반환했어요. 그중 가장 주목을 받은 것은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기념 금화입니다. 이 금화는 2020년 경매에서 동전 사상 최고가인 350만달러(약 45억5000만원)에 팔렸어요. 기원전 42년 주조된 것으로 알려진 이 동전은 고대 로마의 정치가 브루투스가 카이사르를 암살한 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한 것이에요.

그의 죽음을 다룬 금화가 제작될 만큼 카이사르는 로마에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미친 최고 권력자였죠. 숱한 명언을 남겼고 지금도 그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7월을 영어로 'July'라고 부르는데 이는 7월에 태어난 그의 이름(율리우스·Julius)에서 따온 것이죠. 하지만 그의 최후는 비참했습니다. 그의 삶을 한번 따라가 볼게요.

힘 약한 정치 세력에서 출발

카이사르는 기원전 100년쯤 로마의 전통적인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어요. 하지만 그가 16살일 때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며 사실상 가장이 됐죠. 당시 로마는 군대 출신 장군들이 정치권력을 잡고 있었어요. 그 중심에는 귀족파였던 술라가 있었습니다. 귀족파와 대립하고 있었던 민중파는 술라의 세가 확대되면서 계속 힘이 약해졌어요. 이때 민중파의 지도자였던 마리우스가 카이사르의 고모부였기 때문에 카이사르 또한 고난을 겪을 수밖에 없었지요. 그럼에도 카이사르는 민중파 정치인이었던 킨나의 딸 코르넬리아와 결혼해 스스로 민중파임을 숨기지 않았답니다.

그러다 기원전 84년 킨나가 갑자기 죽고 곧이어 기원전 82년에는 술라가 최고 권력자인 종신 독재관 자리에 오릅니다. 이후 술라는 민중파를 대대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어요. 술라는 일찌감치 카이사르의 리더십을 알아보고 그를 제거하려 했어요. 코르넬리아와 이혼하고 자기 부하로 들어오면 살려주겠다고 회유하기도 했죠. 하지만 카이사르는 이를 거부합니다.

술라가 죽고 나서도 카이사르의 고난은 계속됐어요. 술라의 부하 장군이었던 폼페이우스가 권력을 잡았는데 그 역시 카이사르를 압박했거든요. 카이사르는 이러한 불행 속에서도 차근차근 지도자로서 역량을 키워나갔어요. 기원전 76년에는 학문의 중심지였던 로도스 섬으로 유학을 떠나 수사학(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을 공부했어요. 그는 연설의 대가가 됐어요.

삼두정치로 발판 마련

당시 로마를 장악하고 있던 정치인은 폼페이우스만이 아니었어요. 술라 밑에서 재력가가 된 크라수스도 있었죠. 그런데 당시 입법 기관이었던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나라를 쥐고 흔드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어요. 카이사르는 이를 눈치 채고 폼페이우스·크라수스와 함께 '삼두(三頭)정치'를 시작했어요. 세 사람이 로마를 분할 통치하자는 것이었죠. 여러 면에서 불리하고 힘이 약했던 카이사르는 삼두정치를 바탕으로 기원전 59년에는 집정관(당시 관직 중 최고 지위)에 당선됐어요.

카이사르는 이 동맹을 더 견고하게 하고자 16살밖에 되지 않은 자신의 외동딸 율리아를 30살이나 많은 폼페이우스와 결혼시키기까지 했습니다. 집정관 임기를 마친 카이사르는 로마 북쪽에 있는 갈리아 지역으로 떠났어요. 이미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지지 세력이 확고했던 동방을 피해 갈리아에서 세력을 키운다는 목표였죠. 카이사르는 기원전 58년부터 기원전 51년까지 총 8년 동안 갈리아 정복 전쟁을 하며 이 지역을 로마 영토로 만들었습니다.

루비콘강을 건너다

기원전 54년 폼페이우스의 아내이자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가 출산 중 사망합니다.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를 이어주던 율리아가 죽으면서 둘 사이는 급속도로 멀어졌어요. 1년 후 크라수스마저 세상을 떠났죠. 원로원은 카이사르의 인기가 나날이 높아지자 폼페이우스 쪽에 힘을 실어줬어요.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에게 무제한의 권한을 주는 법안을 발의했고, 갈리아에 있던 카이사르에게는 군대를 해산하고 귀국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로마 국경선인 루비콘강 앞에 다다랐을 때 그는 고민에 빠졌어요. 군대를 이끌고 강을 건너는 것은 사실상 쿠데타였기 때문이죠. 이때 그는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군대와 함께 강을 건넙니다. 결과는 카이사르의 대승(大勝)이었습니다. 강력한 그의 군대는 아무런 저항 없이 로마로 들어갔어요. 궁지에 몰린 폼페이우스는 이집트까지 달아났고 그곳에서 살해당합니다.

이제 카이사르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그는 반대 세력에게 관용을 베풀며 로마를 개혁하기 시작합니다. 신전과 각종 공공건물을 세웠고 부채 삭감, 세금 제도 개선 등 정책을 실시했죠. 또 그는 이집트인들이 사용하였던 태양력을 로마에 도입해 새로운 달력을 만들었어요.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쓰는 달력의 기초가 된 율리우스력이에요.

비참한 최후

하지만 이러한 모든 정책은 그를 중심으로 한 독재 체제에서 실행됐어요. 그는 임기가 평생인 종신 독재관이 됐어요. 이제 카이사르는 왕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카이사르가 권력을 독차지하는 것에 반대하던 원로원 의원들과 카이사르를 시기하던 사람들은 그를 죽이기로 결심했어요.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는 반대파에게 23곳이나 칼에 찔리며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어요. 여기에서 카이사르의 유명한 말 하나가 또 등장합니다. 카이사르는 죽기 직전 자신을 죽이러 온 무리 틈에서 브루투스를 발견했어요. 그는 카이사르의 연인 세르빌리아의 아들이었어요. 죽기 직전 그를 본 카이사르는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말을 남겼어요.

카이사르가 죽자 그의 후계자들이 암살자 무리를 몰아냈습니다. 카이사르의 뒤를 이은 옥타비아누스는 그를 신격화해 명예를 회복시켰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후에 로마 최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된 인물입니다.

(위 왼쪽에서부터 시계 방향으로) 카이사르, 술라, 폼페이우스, 옥타비아누스 조각상. /(가운데) 1888년 영국 화가 윌리엄 홈즈 설리번이 그린 ‘브루투스 너마저(카이사르의 죽음)’ 그림. /위키피디아 / (우) 카이사르 암살 기념 금화. /연합뉴스

 

-기획·구성=안영 기자 서민영 계남고 역사 교사, 조선일보(23-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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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스 로마나(Pax Romana)

 

도시국가서 시작해 지중해 제패… 후계자 미리 선포해 정치적 안정
북아프리카, 영국까지 영토 넓혀… 파리·런던 도심도 이때 생겨
 

 

얼마 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미국 뉴욕시립대 교수가 "트럼프 대통령의 무한 독주로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가 몰락하고 있다"고 주장했어요. '팍스 아메리카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향력이 커진 미국이 세계의 평화 질서를 유지하는 상황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말인데요. 고대 로마제국이 평화와 번영을 누렸던 '팍스 로마나(Pax Romana)'에서 따온 말이에요. 2000여 년 전 세계 질서를 유지하던 로마제국 모습은 과연 어땠을까요?

◇지중해 일대 지배한 로마

로마는 기원전 8세기 이탈리아 반도 중부를 흐르는 테베레강 하류의 작은 도시국가로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왕이 다스렸으나 기원전 6세기에 귀족들이 왕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세웠어요. 공화정은 왕 이외의 개인 또는 집단이 통치하는 정치 형태예요.

 

로마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카이사르가 갑자기 암살되면서 19세에 로마제국을 떠안게 됐어요. 아우구스투스가 통치했던 때부터 로마제국의 전성기, 팍스 로마나가 200여 년간 지속됩니다. /위키피디아 

 

로마는 주변 나라들과 전쟁을 벌이며 영토를 확장해갔어요. 기원전 3세기에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했고 포에니전쟁(기원전 264~146년)에서 승리한 후로는 지중해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어요. 기원전 1세기에는 카이사르가 갈리아 지방(오늘날 프랑스 일대)을 정복하고 세력을 키워 권력을 잡았어요. 하지만 카이사르의 독재를 우려한 반대파는 공화정을 지키겠다며 그를 살해했지요.

카이사르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27년에 로마제국의 첫 황제가 돼요. 존엄한 사람이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얻고 로마를 다스렸지요. 역사가들은 아우구스투스가 로마를 통치하게 된 시기부터 기원후 180년까지의 200여 년을 로마의 평화 시대, 팍스 로마나라고 불러요.

◇로마제국의 전성기, 오현제 시대

옥타비아누스가 죽자 로마는 황제가 암살당하거나 내전이 벌어지는 등 잠시 정치적 혼란을 겪기도 했어요. 하지만 기원후 96년, 네르바가 67세 나이로 황제 자리에 오르면서 로마는 다시 안정을 되찾았지요.

네르바는 황제로서 로마를 통치한 기간이 3년밖에 되지 않아요. 그러나 로마에 기여한 공은 매우 컸어요. 네르바는 황제 자리를 놓고 권력 투쟁과 내란이 발생하지 않도록 유능한 사람을 양자로 맞아들인 뒤 일찌감치 후계자로 선포하는 제도를 만들었죠. 네르바 이후 네 명이 이 방식을 통해 황제가 되었는데 이 시기 로마는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로웠어요. 네르바를 포함해 이후 네 황제가 로마를 다스렸던 시기를 오현제(五賢帝) 시대라고 해요. 현명한 다섯 황제라는 뜻이죠. 

 

트라야누스 시대의 로마 최대 영토-트라야누스는 로마제국의 영토를 최대로 늘린 황제였어요. 현재의 영국 남부, 이집트 일부, 북아프리카의 지중해 연안까지 통치했죠. 

 

네르바 다음 황제는 트라야누스였어요. 군인 출신이었던 그는 정복 전쟁을 활발히 벌였어요. 그 결과 로마 역사상 최대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지요. 로마의 숙적 파르티아를 공격해 수도를 함락하기도 했어요. 그가 전쟁만 했던 것은 아니에요. 나라의 농지를 빌려줘 농민들이 먹고살 방편을 마련해줬어요. 그 대가로 받은 이자로 가난한 어린이들을 국가에서 부양하는 제도를 만드는 등 복지 정책에도 힘을 쏟아 로마인들에게 사랑을 받았지요.

트라야누스가 죽자 조카인 하드리아누스가 즉위했어요. 그는 영토 확장에 힘썼던 트라야누스와는 달리 정복한 영토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데 집중했어요. 우선 동쪽의 파르티아와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게르만족·켈트족 등 이민족을 상대로 한 소모전을 멈추기 위해 성벽을 쌓아 침략을 막도록 했어요. 이때 브리타니아(오늘날 영국)에 만들어진 하드리아누스 성벽은 훗날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를 구분하는 경계가 되었지요.

오현제 중 제4대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거쳐 161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황제가 됐어요. 그는 이민족과 전쟁이 많았던 시기에 로마를 통치했죠. 전쟁터 막사에서 틈틈이 글을 써 철학책 '명상록'을 남기기도 했어요. 중국 후한의 수도 뤄양에 사절단을 보내기도 했지요. 아우렐리우스는 중국의 역사서에 대진국(중국에서 로마를 부르던 말) 왕 안돈(安敦)이라고 기록돼 있어요.

◇팍스 로마나가 남긴 것들

팍스 로마나 시절엔 북부 지역 일부를 제외한 모든 유럽이 로마제국의 영토가 되었어요. 오늘날 유럽 주요 국가의 대도시인 프랑스 파리, 영국 런던, 오스트리아 빈 도심이 이때 만들어졌지요. 또 영토가 커지면서 제국 곳곳을 이어주는 도로를 건설해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나오게 되었지요. 군인들이 행군하기 위해 만들어진 그 길로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 같은 문화를 공유하며 '유럽은 하나'라는 인식이 생겨나기도 했지요.

아우렐리우스가 말년에 욕심을 부려 후계자를 잘못 정하면서 팍스 로마나는 허무하게 끝나게 돼요. 네르바 때 만들어진 황제 계승 방식을 따르지 않고 아들 코모두스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던 것이죠. 황제가 된 코모두스는 나랏돈을 제 것인 양 펑펑 쓰고, 그것도 모자라 부자들에게서 강제로 재산을 빼앗았어요. 설상가상으로 스스로 신화 속 영웅 헤라클레스의 후예라고 주장하며 자기를 신으로 받들라고 했어요. 결국 친위대가 192년 코모두스를 암살했죠.

이후 북쪽에서는 게르만족이 국경선을 뚫고 쳐들어와 로마를 약탈하고, 동쪽에서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쳐들어와요. 로마에서는 대규모 전염병이 돌기도 했죠. 50여 년간 황제가 26명 바뀌는 등 혼란은 잦아들지 않았어요. 결국 로마는 서서히 몰락해 4세기 말에는 서로마와 동로마로 분리됐고, 5세기 중엽 서로마는 게르만족에게 멸망당하고 말아요. 이후 동로마(비잔티움 제국)가 잠시 번성하기도 했으나 과거의 영광을 완전히 되찾지는 못했습니다.

[카이사르의 어린 후계자,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는 유언장에 조카인 옥타비아누스를 제1후계자로 지정했어요. 카이사르가 암살당했을 때 옥타비아누스는 19세에 불과했죠. 옥타비아누스는 당시 이미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안토니우스와 손을 잡고 공화파 귀족들을 숙청해갔어요. 그렇게 권력을 장악해가며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27년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받아요.
기획·구성=유소연 기자

 

-공명진 숭문중 역사 교사/기획·구성=유소연 기자, 조선일보(18-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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