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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다스린 따뜻한 유산] [뜨끈한 바닥 위에서.. ‘K온돌’]

뚝섬 2025. 12. 25. 07:35

[불을 다스린 따뜻한 유산]

[뜨끈한 바닥 위에서 피워낸 문명… 세계를 데우는 ‘K온돌’]

[의자·소파·식탁·침대... ]

 

 

 

불을 다스린 따뜻한 유산 

 

온돌에 불 때는 아궁이.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따끈한 아랫목이 그리운 시절이다. 온돌에 누워 뜨끈하게 지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난다. 기억 저편 절절 끓는 온돌방엔 열기 품은 이불이 도톰하게 깔려 있다. 이불을 살짝 걷으면 장판에는 온돌의 열기에 그을린 흔적이 보인다. 말 그대로 등 따신 자리였다. 그 따스함은 선조의 지혜이자 과학이다.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온돌은 2000년 넘게 우리 민족의 문화로 계승됐다. 당나라 정사 ‘구당서’에는 고구려 풍속으로 “겨울철이면 구덩이를 길게 파서 숯불을 지펴 방을 덥힌다”고 했다. 서양인은 온돌에 누운 조선인을 보며 “오븐의 빵처럼 구워지는 걸 좋아한다”고 했다. 구들장이 뜨거우면 말도 드러눕는다는 속담이 있다.

 

온돌은 단순하면서 과학적이다. 불 때는 아궁이, 구들장을 달구며 불길이 지나는 고래, 연기를 배출하는 굴뚝으로 구성돼 있다. 불 지피는 아궁이는 불을 들이는 곳이다. 온돌의 입구이자 불이 들어가는 곳이니 화구(火口)라 했다. 일반 집에서는 아궁이에 가까운 곳인 아랫목을 상석으로 여겼고 먼 곳은 윗목으로 불렀다.

 

온돌은 쓰임에 따라 구조를 달리했다. 하동 칠불사 아자방은 면벽 수행하는 스님을 위해 네 모퉁이를 높게 잡은 아(亞)자형 온돌방이다. 아자방 아궁이는 지게를 지고 들어갈 수 있을 만큼 크다. 추위를 견디며 수행하는 스님들을 위해 불을 때면 석 달 열흘 동안 온기를 간직한 것으로 유명하다.

 

경복궁 향원정 온돌은 도넛 형태로 가장자리에만 난방이 된다.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며 풍경 즐기기 좋았을 듯하다. 아궁이에 불을 때고 그 온기를 나눈 풍습도 생활 환경이 바뀌면서 아득해졌다. “아버님 댁에 보일러 놓아드려야겠어요”란 광고로 풍습의 변화를 실감했다.

 

이제 온돌도 추억이 됐지만 겨울 추위와 습기를 막던 온돌 문화는 불을 다루는 선조의 기술로 이어진 우리의 따스한 유산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간, 마음에 온돌을 들이며 주변에 온기를 나눠야겠다.

 

-윤주 국가유산청 문화유산·자연유산위원, 조선일보(25-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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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끈한 바닥 위에서 피워낸 문명… 세계를 데우는 ‘K온돌’

 

한국이 ‘온돌의 발상지’인 이유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가 세계적인 인기를 얻자 새로운 관광 코스로 주목받고 있는 찜질방(K-Spa). 한국관광공사 제공

 

찬 바람이 옷깃을 파고드는 계절이다. 이럴 때면 한국인은 본능적으로 뜨끈한 바닥에 몸을 맡기고 싶어 한다. 침대가 널리 보급됐어도 기성세대에게는 ‘아랫목’의 기억이 선명하다. 젊은층도 예외가 아니다. 해외 유학을 가도 필수품으로 챙기는 물건이 전기장판이다. 우리가 온돌을 잊지 못하는 이유는 독특한 난방 방식에 있다. 서구의 라디에이터나 벽난로가 공기를 덥히는 간접 난방이라면, 온돌은 바닥을 데워 그 열기를 몸으로 직접 전한다.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한민족 고유의 난방 시스템이다. 온돌은 난방 기술을 넘어 건축 구조와 생활 방식, 환경과 의복, 사회적 관습에까지 영향을 줬다. 아파트 문화가 자리 잡은 뒤에도 온돌에 대한 한국인의 사랑은 여전하다. 이 기막힌 발명품은 도대체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됐을까.

온돌, 한국만의 발명품이었을까?

사실 ‘바닥을 데워 난방한다’는 발상 자체가 한국의 전유물은 아니다. 열기를 바닥으로 돌려 난방 효율을 높이려는 시도는 인류 역사 곳곳에서 나타났다.
 

 

고대 로마 빌라의 ‘하이퍼코스트’.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서양에서는 고대 로마의 바닥 난방 시설인 ‘하이퍼코스트(Hypocaust)’가 대표적이다. 바닥을 띄우고 그 아래로 뜨거운 공기를 순환시키는 방식으로, 주로 공중목욕탕이나 귀족 저택에 설치했다. 그러나 이는 전통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중세 스페인 카스티야 일부 지역의 난방 방식 ‘글로리아(Gloria)’에 흔적을 남긴 정도였다. 아프가니스탄에는 부뚜막의 열기를 바닥으로 보내는 ‘타와 하네(Tawa khana)’라는 전통 난방 방식이 존재했다. 19세기 미국 남북전쟁 당시에는 야전 병동과 막사 바닥을 덥히는 바닥 난방 시설 ‘크림 오븐’(Crimean Oven·크림전쟁의 발상에서 따온 명칭)이 도입됐다.

 

알래스카 아막낙 유적의 온돌. 사진 출처 제이슨 로저

 

고고학 자료에 따르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온돌의 흔적은 동해에서 북극까지 이어지는 극동 지역에서 발견된다. 아무르강 하류의 수추섬, 그리고 더 북쪽 알래스카 알류샨 열도의 아막낙 유적에서는 약 4000년 전 바닥을 온돌로 만든 흔적이 발견된다. 혹독한 추위와 싸워야 했던 북방 해안가 주민들은 이미 수천 년 전부터 바닥을 데울 궁리를 했던 것이다. 자료가 충분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극동 지역의 난방 방식이 한반도 온돌의 먼 기원이 됐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수많은 시도는 한국처럼 널리 퍼지지 못하고 조용히 사라지기 일쑤였다. 이는 구조의 어려움 때문이다. 온돌에는 열의 전도, 복사, 대류를 복합적으로 활용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자칫 불완전 연소 가스가 실내로 유입될 경우 치명적인 사고로 이어지기 쉽다. 게다가 지속적인 땔감 공급도 뒷받침돼야 한다. 한국에서 온돌이 널리 자리 잡은 것은 이러한 기술적 한계를 극복하고 생활문화로 발전시켰음을 뜻하니 온돌의 발상지로 평가받을 만하다.

 

두만강 ‘겨울왕국’, 온돌 완성지

 

연해주 불로치카 유적의 옥저인 온돌. 국립문화유산연구원 제공

 

온돌 기술은 기원전 4세기, 지금의 북한 두만강 유역 일대에서 번성한 ‘옥저(沃沮)인’들의 등장과 함께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고고학에서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로 불린다. 이들은 겨울에 혹독한 추위를 견뎌야 했기에 험준한 산맥을 바람막이 삼아 앞으로 너른 평야가 있는 곳에 거대한 마을을 일궜다. 그리고 주변의 풍부한 삼림 자원을 이용해 취사와 난방을 동시에 해결하는 일석이조의 ‘주거 혁명’인 온돌을 완성했다.

이렇듯 온돌의 도입은 두만강 유역에서 추운 겨울을 견디며 농경을 유지하고, 안정적인 마을을 이루는 핵심 동력이었다. 기원전 4∼3세기 무렵에는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는 ‘철기 저온기’가 찾아왔다. 보통 추워지면 농사짓기에 더 불편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다. 기온 하강으로 해수면이 낮아지면서 강 하구 주변에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넓은 평야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온돌은 이런 기후 환경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인간의 치열하면서도 지혜로운 적응의 산물이었다.

한반도 남쪽에 전래된 온돌 기술

 

경남 사천시 늑도 유적의 온돌. 동아대박물관 제공

 

방의 온돌이 한반도 남쪽으로 전래된 것은 기원전 1세기 무렵이다. 남한에서 가장 이른 온돌의 흔적은 예상 밖의 장소, 바로 경남 사천시 늑도 유적의 주거지에서 발견된다. 따뜻한 남해안의 작은 섬에서 온돌이라니 다소 의아하지만, 늑도는 당시 동아시아 국제 교역의 중심지라 여러 지역의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늑도의 온돌은 두만강 유역에서 정교하게 구축된 구조와는 차이가 있다. 아마 두만강 유역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살면서 자신들이 익숙한 난방 방식을 나름대로 재현한 결과로 보인다.

온돌이 남한 전역으로 본격 확산된 시점은 고구려가 남하하던 서기 5세기부터다. 고구려 군사들은 남한의 전략적 요충지마다 산등성이에 보루를 구축했는데, 이 보루 유적에서는 예외 없이 온돌이 발견됐다. 이후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들어서면 산속 사찰에서도 온돌이 널리 쓰이게 됐다. 살을 에는 추위를 자랑하는 한국의 겨울, 산이 많은 한반도 지형과 함께 온돌은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온돌은 개경과 남부 지방의 중상류층을 중심으로 점차 보급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기까지도 온돌은 여전히 귀한 난방 방식이었다. 온돌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시점은 조선 후기다. 17세기 전 세계를 강타한 ‘소빙기’로 혹한이 잦아지면서 온돌 수요가 급증했다. 동시에 양반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면서 온돌은 표준 난방시설이 됐다.

흉노는 온돌을 사랑했지만…

온돌의 여정은 한반도에만 머물지 않았다. 이 기술은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질러 흉노에게까지 전해졌다. 초원의 지배자였던 흉노는 기원전 2세기 무렵, 바이칼호에서 몽골에 이르는 여러 지역에 거대한 성지를 만들었다. 유목을 하던 흉노인들에게 이 성지는 각종 물품을 제작하고 교역을 하는 거점이었다. 흉노인들이 만든 성터에선 거의 예외없이 한반도와 만주에서 건너간 온돌이 확인된다. 일렬로 규칙적으로 배치된 집에 마치 기성품처럼 온돌이 있었으니, 이는 흉노가 새 거점 도시를 조성할 때 온돌을 일괄 설치했음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흉노의 온돌은 실크로드를 따라 중앙아시아 일대로 확산된 흔적마저 보인다.

그러나 유라시아 초원에서의 온돌은 오래가지 못하고 흉노가 몰락한 직후 자취를 감췄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나무 때문이었다. 몽골 초원지대는 숲이 빈약해 목재 자원이 제한적이었다. 온돌은 열효율이 좋지만 막대한 땔감을 필요로 하는 난방 방식이다. 풍부한 삼림을 가진 만주나 한반도와 달리, 초원에서는 땔감의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던 셈이다. 이 지역에 온돌이 다시 등장한 것은 1000년이 지난 뒤, 발해 유민들이 몽골 일대로 옮겨와 정착하면서부터다. 온돌은 말 그대로 한국인의 DNA에 새겨진 생존의 기술이었다.

찜질방’으로 퍼지는 온돌 문화

최근 중국은 여러 분야에서 한국과 불필요한 기원 논쟁을 벌이고 있다. 온돌도 예외가 아니다. 일부에서는 온돌이 중국 동북 지역, 즉 만주에서 시작됐으니 중국 기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만주에서 쓰이던 온돌은 중국의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지 못했다. 단순히 ‘어디서 처음 나왔느냐’가 아니라, 온돌이 발달하려면 혹독한 기후와 풍부한 삼림이라는 환경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점을 간과한 주장이다.

온돌은 험준한 산악 지형과 뚜렷한 사계절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한반도 주민들의 치열한 생존 경험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온돌 문화는 오늘날 ‘찜질방(K-Spa)’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세계 곳곳에 퍼지고 있다. 따뜻하게 몸을 누일 수 있는 집에서 인간의 역사는 시작되고 마무리된다. 그런 점에서 온돌이야말로 혹독한 추위를 견디며 문명을 일궈낸 한국의 문화가 이어지는 유산이 아닐까.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동아일보(25-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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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소파·식탁·침대...

 

아파트와 함께 입식 문화가 들어왔다

 

[디자인 연구자 박해천의 호모 아파트쿠스] 

 

한 광고 대행사에 있는 온돌회의실. 집처럼 편안한 분위기에서 아이디어를 낼 수 있도록 만들었다. 아파트와 함께 입식 문화가 들어왔고 실내 사물 배치 방식도 달라졌다. /이노션 

 

1985년 H씨는 자신이 발행인으로 있던 여성지 '샘이 깊은 물'에 '거실과 앉음 자세'라는 에세이를 발표한다. 한국인 특유의 좌식 문화를 다룬 그 글에서 H씨는 20세기 중반 이후 현대적 교육 시설과 사무 환경의 도입으로 공적 영역에서 '의자에 앉는 문화'가 꾸준히 확산되었지만, 사적 영역, 특히 주거 공간에서는 여전히 '방바닥에 앉는 문화'가 지배적이라고 지적한다.

실제로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자보다 바닥에 앉는 것이 더 편하다고 느꼈다. 그러다 보니 의자에 앉더라도 두 다리를 의자 위로 올려 개고 앉는 경우가 흔했고, 오래 앉아 있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H씨는 이를 두고 '엉덩이의 귀소성'이라고 불렀다. 오랜 시간 동안 형성된 좌식 문화의 습속이었다.

1970년대 입식 문화를 탑재한 양옥의 보급도 이 엉덩이의 귀소성을 이겨내지 못했다. 이를테면 양옥에 거주하는 많은 이들이 여전히 안방에서 밥상을 받아 식사했고, 아랫목에 앉거나 누워 텔레비전을 시청했다. '안방극장'이라는 표현은 좌식 문화의 강력한 패권을 확인해주는 지표나 다름없었다.

더디게 진행되던 입식 문화로의 이행은 1980년대를 거치면서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서울 곳곳에 들어선 아파트 단지 덕분이었고, 응접 세트와 식탁 세트, 침대가 제각각 아파트의 거실, 주방, 안방으로 침투해 기존 가구들과 격전을 벌인 결과였다. 물론 이 가구들이 힘을 발휘하는 데는 아파트 난방 시스템도 한몫 거들었다.

아파트를 경유한 입식 문화의 확산은 실내의 사물 배치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연한 일이었다. 일반적으로 좌식의 방 문화에서는 손에 닿는 거리 안에 일상 사물을 배치하는 것이 중요했다. 여기에서 '상'은 거주자가 필요에 따라 자신이 앉은 자리 앞으로 사물을 옮겨 놓는 데 매우 요긴하게 활용되었다.

반면 입식의 실내 공간에서는 손이 닿지 않는 거리에 사물을 배치해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의자나 소파에 앉았다가 곧바로 일어나 두세 걸음 이동한 후 다시 돌아오는 것이 용이했고, 따라서 앉은 자리와 약간 거리를 두고 사물을 배치해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손에 닿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것이 더 중요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아파트의 거주자들은 사물을 배치하는 데 이전보다 좀 더 면밀하게 시각적 질서를 고려해야 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 질서를 조율하는 눈의 높이가 이전과는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제 사물의 외형은 방바닥에 앉아 올려다보는 시선이 아니라, 의자나 소파에 앉아 수평으로 응시하거나 바로 선 자세에서 내려다보는 시선과 균형을 맞춰야만 했다.

골동품 수집가로도 유명했던 H씨는 다른 글에서 전통 가구의 비례가 바닥에 앉은 자세의 눈높이를 고려해 제작되어 소파나 의자 같은 가구와 어울리기 쉽지 않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입식 문화의 확산 때문에 엉덩이의 귀소성이 눈의 질서 지향성으로 대체되리라는 것을 알아챘을까? 한국의 현대적 디자인이 아파트에서 도약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이 새로운 시선 덕분이었는지도 모른다.
 

 

-박해천 동양대 디자인학부 교수, 조선일보(18-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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