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 체제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사람들]
[남쪽에서만 '사람이 먼저다'?]
거대 체제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사람들

안드레아스 거스키, 평양 IV, 서울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소장.
현란한 색실로 온갖 무늬를 수놓은 거대한 카펫이 눈앞에 펼쳐진 듯 압도적인 이 장면은 현대 사진의 거장 안드레아스 거스키(Andreas Gursky·1955년생)가 찍은 북한의 ‘아리랑 공연’이다. 거스키가 평양을 방문했던 2007년에 ‘아리랑 공연’은 기네스북에 세계 최대 공연으로 등재됐다. 대집단체조와 예술 공연을 결합해 80분 동안 김일성 일가의 역사적 활약을 찬양하고 북한 체제를 선전하는 이 전대미문의 정치극에 동원된 참가 인원은 10만명, 회당 관객수는 15만명을 웃돈다.
수만 명의 ‘체조대’가 운동장에서 한 몸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동안 중고생 2만명으로 구성된 ‘배경대’는 카드섹션으로 마치 동영상을 틀어 놓은 것처럼 빠르고 박진감 넘치는 화면을 연출한다. 거스키의 사진 상단, 노란 태양빛이 붉은 구름을 뚫고 장쾌하게 뻗어나가는 장면이 바로 ‘배경대’의 솜씨다. 거스키는 이 모두를 한눈에 조망하는 시점을 구현하기 위해 당국으로부터 특별 허가를 얻어 경기장 최상단에서 촬영을 했다.
거스키는 주로 시카고 선물거래소, 홍콩 상하이 은행, 아마존 물류 창고, 네덜란드 튤립 농장 같은 자본주의 세계의 심장부를 사진에 담았다. 단순 패턴이 반복되는 추상 같으면서도 수천, 수만에 이르는 개개의 인물과 사물이 어느 것 하나 뭉개지지 않고 또렷하게 포착된 게 그 사진의 특징이자 매력이다. 이 작품 또한 들여다보면 바닥에 납작 엎드린 무용수들이 제각각 자리를 찾아 다리를 뻗었고, 배경대 중에도 미처 다 못 뒤집은 카드가 있다. 거대한 체제, 그 아래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미력한 사람들이 서로 다른 모습으로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우정아 포스텍 교수·서양미술사, 조선일보(22-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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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에서만 '사람이 먼저다'?
30년 전에도 외면한 北 '집단체조'… 文 대통령 손뼉 치고, 연설까지
"집단체조는 아동노동의 하나" 남들 아는 걸 대통령은 안 보나
1989년 6월 30일 오후 1시 30분 평양에 도착한 전대협 소속 대학생 임수경은 45일간 북한에 머물렀다. 남쪽만 충격을 받은 건 아니었다. 임수경은 "저는 북한 체제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북한이 좋아서 온 게 아닙니다"라 했고, 8월 김일성종합경기장에서 열린 집단체조 '오늘의 조선'을 관람하다가 퇴장했다. 북측이 당황했다고 한다. 집단체조는 북한에 대해 낭만적 동경이 있었을 그 시대 운동권에게도 소화하기 어려운 이데올로기 행사였을 것이다.
집단체조는 국가가 개인의 신체를 동원해 훈련하는 관제(官製) 예술 행위다. 이걸 보고 기괴한 느낌을 받는 게 '자유 시민'의 평균 정서다. 2000년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미국 국무장관은 북한에서 집단체조 '백전백승 조선노동당'을 관람했다가 여론의 매를 맞았다. 2009년 북한에 억류된 미국 여기자들 구명을 위해 방북했던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아리랑' 공연 관람을 제안받았지만 거절했다.
"장군님 모시고 행사하는 그날을 그리며 아픈 것도 참고 훈련합니다." 북한 집단체조에 참가하는 소녀와 가족의 삶을 다룬 BBC 다큐멘터리 '스테이트 오브 마인드(어떤 나라)'에서 북한 소녀 박경선은 이렇게 말했다. 2002년 아리랑 축전 연습에는 '2억 시간'이 들었다. 유치원생부터 성인까지 10만명이 컴퓨터 '픽셀'처럼 원하는 그림을 만들어내는 북한 집단체조는 상상하기 힘든 노동이 들어간다.
유엔북한인권위원회는 이걸 '아동 노동'의 하나로 봤다. 정권이 어린이를 동원한 집단체조로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신체와 정신을 훈련해 "수령님 보여드릴 기대에 몸과 마음이 부들부들 떨리게" 만드는 나라는 북한뿐일 것이다.
방북한 문재인 대통령이 19일 밤, 북한의 최신판 집단체조 '빛나는 조국'을 관람한 후 15만명 앞에서 연설했다. "그 감격을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김 위원장과 북녘 동포들이 어떤 나라를 만들어 나가고자 하는지 가슴 뜨겁게 보았습니다." 놀랍게도 대통령은 북한 주민들의 눈물, 땀, 고통, 공포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18일 평양에 도착했을 때, 도심 카퍼레이드를 할 때, 20일 백두산 등반길에도 사실 대통령은 그랬다. 대통령이 움직일 때마다 환영 인파가 수만 명 나왔다. 대통령 얼굴에 보름달이 떴다.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비슷한 옷차림에 같은 꽃을 들고, 발 동동 구르는 '타이밍'까지 기막히게 맞추던 그들이 대통령 눈에는 '자발적 시민들'로 보였을까.
〈회장님 초청 VIP 방문 행사 안내. 오전 6시 현장 대기. 여성은 원피스에 화장 필수. 환영 꽃 지참. VIP 도착하면 함박웃음, 발 동동 구르며 환호할 것. 행사 예상 시간: 3시간〉 우리 어느 기업에서 이런 공지를 올렸다고 가정해보자. 기업 회장은 '갑질'로 몰려 새벽닭이 울기 전에 3번 압수 수색 당하고, 집안 3대가 여론과 사법의 심판대에 섰을 것이다.
줄 맞춰 '국민 체조'를 하고, 상급 학교 진학을 위해 '체력장'을 치르던 시대가 있었다. '산업화를 위한 신체 개조 작업' '육체에 대한 국가의 통제' '변형된 파시즘' '일제의 유산'…. 이런 비판을 받고 사라졌다. 한국에서 국민체조 꼴이 보기 싫은 사람이라면, 북한의 집단체조에는 몸서리를 치는 게 정상이다. 불가피하게 봤다면 그 자리를 빨리 떠야 했다. "손님으로 가서 잔칫상을 엎을 수는 없지 않으냐"고 말하려면 표정 관리 좀 해야 했다. 문 대통령은 북한의 봉건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신체 갈취 시스템'에 왕관을 씌워줬다. '사람이 먼저'라는 말은 남쪽에서나 하는 말이었나 보다.
-박은주 디지털편집국 사회부장, 조선일보(18-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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