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을 위한 '쇼'를 만드느라 3억원 가까이 든 셈이에요. 주 52시간은커녕 매일 야근한 직원들은 국가가 보상해주나요?"
지난 29일 만난 한 중견기업 직원 A씨는 퀭한
얼굴이었다. 그는 1월 초부터 미국 라스베이거스로 출장을
가 2주간 CES(국제전자제품박람회) 행사를 준비하고 진행했다. 한국에 돌아와 행사 결과를 정리하던 A씨는 산업자원부로부터 "한국판 CES 행사를 할 테니 참가하라"는 전화를 받았다. 대기업들이 통보받았던 날보다 사흘 늦은 시점이었다는 건 뒤늦게 알았다고 한다.
그만큼 준비 기간이 부족했다.
부랴부랴 선박에 선적한 제품을 내려 비행기로 실어날랐다. 수천만원의 배송 비용을 추가로
물었다. 행사를 도운 대행사와 하도급 업체까지 비상이 걸려 일주일 내내 새벽까지 야근을 했다. 급하게 나온 도면을 보고 부스를 설치하는 데에는 2억원이 넘게 들었다. A씨는 "'대통령이 관심을 갖고 지시한 사항'이라는데 이를 거부할 회사가 어디 있느냐"며 "출장 여독이 풀리기도 전에 밤샘을 계속해 겨우겨우 일정을 맞췄다"고
말했다.
하지만 29일 행사장을 찾은 대통령은 A씨 회사의
부스에 들르지 않았다. 그와 함께 행사를 준비한 20여명의
직원은 "대통령이 행사장에 왔다 갔다"는
말만 전해 들었다. 혁신 제품과 기술을 보여준다는 CES의
취지와 달리 급조된 행사장에서는 제품 시연을 제대로 할 수 없어 관람객을 끌기도 어려웠다. A씨는 "결국 우리는 대기업 들러리였던 셈"이라며 "미국 CES 행사에서는 다양한 나라의 바이어들이 우리 제품에
관심을 가진 데다가 각종 상을 받아 뿌듯하고 보람이 있었는데 한국판 CES는 기업도, 관람객도 만족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최근 청와대는 "대통령에게 '저녁이
있는 삶'을 주자"며 대면 보고를 줄이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대통령 역시 취임 이후 삶의 질,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일과 삶의 균형을 뜻하는 신조어) 등을
강조해왔다. 직장인들도 저녁이 있는 삶을 꿈꾼다. 직장인의
저녁을 망치는 것은 퇴근 무렵에 떨어지는 갑작스러운 상사의 지시, 자발적 참여를 가장한 회식 일정, 돌발 상황으로 발생하는 야근 등이다. 요즘 기업에서는 이런 게 사라진
지 오래다. A씨는 "대통령의 '관심'을 충족할 '쇼'를 만드느라 기업은 수억원의 돈을 썼고, 직장인 수십·수백명은 저녁
시간을 빼앗겼다"며 "퇴근 무렵 '보고서 만들어 갖고 오라'는 상사보다 대통령의 '관심'이 더 무섭다는 걸 알았다"고
말했다.
한국판 CES 쇼의 뒷면에는 주 52시간과 워라밸을
포기하며 밤샘 야근을 한 직장인들이 있다. 이들의 한숨을 청와대는 알까.
-이미지 국제부기자, 조선일보(19-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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