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장산의 주 능선 자락
박정희 대통령이 터 잡아줘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본관. 거북선 모양인데 그 뱃머리가 천장 산을 향해 있다. 산에 사는 거북이는 산에 알을 낳는다.
"한국외국어대학교가 서울 이문동에 교사를 지을 당시 설립자는 본관 뒤 작은 언덕을 소중히 여겼다. 천장산(天藏山) 지맥 하나가 내려와 그 땅 기운이 오롯이 뭉쳤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천장은 본디 천장지비(天藏地秘)의 줄임말이다. 하늘이 숨기고 땅이 감추는 길지를 말한다. 외대 본관은 그 작은 언덕에 기대어 세웠다."(오한진 외대 명예교수)
이후 작은 언덕은 '미네르바 동산'으로 불렸다. 수업이 빌 때면 학창 시절 필자도 그 언덕에 기대곤 하였다. 학교
축제날 밤이면 달궈진 젊은 남녀들로 '미네르바 동산'이 후끈거렸다. 수년 전 '미네르바 동산'은
헐리고 그곳에 고층 본관이 들어섰다. 아쉽다.
외대 옆 회기동에 자리한 경희대학교는 연산군의 생모 윤씨 무덤 '회릉'이 자리한 곳이다. 회기동이란 동명도 여기서 유래한다. 천장산의 다른 지맥이다. 윤씨는
1482년 사약으로 죽은 뒤 이곳에 묻혔다. 부인에게 사약을 내린 성종은 "사후 100년 동안 윤씨 문제를 언급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6년 후 1488년(성종 19년) 김석산이
임금의 명을 어기고 "중국의 풍수이론 '38장법(三十八將法)에 따르면 흉지가 된다"는
상소를 올린다. 풍수 전문이 아닌 천문 전공인 그가 상소를 올린 까닭은 알 수 없다. 마치 얼마 전 청와대가 풍수상 흉지라는 주장이 제기된 것과 같은 일종의 음모론으로 추측한다. 이로 인해 1488년은 조선 전역에서 풍수 논쟁이 벌어졌다. 문신이자 당대 최고의 풍수 실력자 윤필상·서거정·임원준·최호원 등이 논쟁에 참여하였고 현장을 찾았다. 이후 윤씨 무덤은 별 탈 없이 존치되다가(현재 경희의료원 자리), 1960년대 경희대가 건물을 신축하면서 고양 서삼릉으로 옮겨진다. 최근
경희대는 문재인·김정숙 대통령 부부를 배출한 터로 풍수계에서 새삼 주목받고 있다.
경희대 인근의 홍릉수목원은 본래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뒤 처음 묻힌 곳이다(1919년 금곡
홍릉으로 이장). 천장산 주 능선 자락이다. 한동안 버려졌으나, 이 땅을 다시 주목한 이가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었다. 1966년
그는 미국 존슨 대통령 지원으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을 설립한다. 박 대통령이 이곳을 연구원 터로 잡아주었다. 본관이 지어지는 동안
박 대통령은 2주에 한 번씩 찾아 1박을 하면서 현장을 감독하였다. KIST 본관 설계는 건축가 김수근이 맡았다.
본관 건물의 입지와 모양이 특이하다. 거북선 모양인데 그 뱃머리가 주산 천장산을 향해 있다. 거북이가 천장산을 바라보는 형국이다. 물에 사는 거북이는 강변이나
해변에 알을 낳으나, 산에 사는 거북이는 산에 알을 낳는다. 건물
머리가 산을 향하게 한 이유이다. 풍수에서 산은 인물을 주관한다[山主人]고 하였다. 좋은 인물을 많이 배출하라는 염원이 담긴 건축물이다.
그 후 인근에 KIST 말고도 KAIST·KDI·산업연구원 등 많은 국책연구원이 들어섰으며, 이곳을 거쳐 나간
인재들이 학계·정·관계의 최고 지도자들로 지금도 활동한다. 2003년 정부의 지역균형발전 정책으로 대부분
지방으로 이전되면서 이 일대가 공동화되었다.
KIST는 이 땅의 풍수적 진가를 알고 있었다. 과학과 풍수와의 만남일까? 많은 연구기관이 떠나갔음에도 KIST를 비롯해 외대·경희대·서울시립대
등 박사 8000명과 학생 12만명이 이 일대를 연구 터전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지난해 말에는 인근 대학 및 연구원 등
17개 기관이 '홍릉 클러스터링'(단장 윤석진 KIST 부원장)을 만들었다. 대한민국
발전의 핵심 브레인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였다. 그렇게 되리라 믿는다. 좋은 땅은 좋은 인물을 더 크게 키우기 때문이다.
-김두규 우석대 교양학부 교수, 조선일보(19-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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