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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과 대포가 부른 혁명] [조선을 구한 明의 화약] ....

뚝섬 2026. 7. 9. 10:41

[총과 대포가 부른 혁명]

[조선을 구한 明의 화약]

[류큐와 조선의 운명 가른 동맹 외교]

 

 

 

총과 대포가 부른 혁명

 

비잔틴 제국 무너뜨린 대포, 기술혁명의 신호탄


초대형 대포에 콘스탄티노플 함락
15세기 유럽 휩쓴 화약무기 폭풍
백년전쟁은 프랑스 대포가 끝내
갈릴레이 "無知도 대포가 깨부숴"

 

AI 혁명과 함께 새로운 ‘군비 경쟁’이 시작됐다. 더 강력한 GPU와 막대한 메모리를 확보해 생산성·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우수한 지식(AI 모델)과 도구(IT 인프라)가 결합한 ‘컴퓨팅 파워’가 경제·군사·정치 패권의 핵심 열쇠로 떠올랐다. AI 인재 육성과 데이터센터 구축에 대한 천문학적 투자, 반도체 제조 기업의 대호황과 주가 폭등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인류 역사에서 기술 혁신 시기에 반복돼 온 패턴이다. 그 이면에는 강력한 ‘컴퓨팅 파워(계산의 힘)’를 갈망하는 국가와 인물들의 각축이 있었다. –편집자 주 

 

카스티용 전투에서 대포로 무장한 프랑스군에게 잉글랜드군이 격파되는 장면. 보르도 와인 ‘샤토 탈보’는 이 전투에서 전사한 잉글랜드 장군 존 탈보에서 이름을 따왔다. /프랑스 국립도서관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632년에 펴낸 문제작 ‘두 세계 체계에 대한 대화’로 종교재판에 회부돼 큰 고초를 겪었다. 그런데 이 책에는 흥미로운 한탄이 등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 대포가 없었던 게 참 아쉽군. 대포만 있었더라면 무지를 깨부수고, 우주에 대해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었을 텐데.”

 

무지(無知)를 깨부수는 대포라니? 이는 시적인 비유가 아니다. 대포를 비롯한 화약 무기의 등장은 당시 전쟁뿐 아니라 인류 지성과 산업의 발달에 엄청난 자극을 불어넣고 있었다.

 

화약은 본래 중국에서 불로장생을 추구하던 연단술의 부산물로 발명됐고, 13세기 몽골 제국의 정복 사업을 따라 유라시아 전역으로 퍼졌다. 유럽인들은 몽골군이 남기고 간 화약에 불을 붙여 보고, 그 강렬한 폭발 에너지를 어디에 쓸지 온갖 불온한 상상에 빠져들었다. 그 당연한 귀결은 총과 대포와 같은 화약 무기였다.

 

그러나 총과 대포가 전쟁의 주역이 되기까지 한참이 더 걸렸다. 화약의 핵심 재료인 염초가 비쌌기 때문이다. 1346년 백년전쟁의 분수령이 된 크레시 전투에서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는 핸드캐넌과 청동제 대포 몇 문을 동원했지만, 정작 승부를 가른 것은 1만여 명의 잉글랜드 장궁병이 분당 수만 발씩 퍼부은 ‘화살비’였다.

 

그럼에도 유럽 전략가들은 화약 무기가 몰고 올 폭풍을 예감했다. 유럽 각국이 경쟁에 뛰어들며 화약 수요가 급증했고, 크레시 전투 후 30여 년 만에 영국의 화약 가격은 7~8배로 치솟았다.

 

수요가 폭발하면 인간은 기어이 공급을 만들어낸다. 14세기 후반 독일 지역에서는 ‘염초밭’이 등장했다. 사람과 가축의 분뇨, 음식 쓰레기, 낙엽을 섞어 쌓은 두엄 더미가 가득한 밭이었다. 박테리아가 암모니아를 산화시켜 질산염을 만들어내는 일종의 노지 바이오테크놀로지 공장과 같았다. 이 기술 혁신으로 1417년 영국에서 화약 1파운드의 값은 숙련된 장인의 하루 임금이던 5펜스까지 떨어졌다. 14세기 후반 고점 대비 20분의 1 이하의 폭락이었다. 

 

염초밭에서 수거한 흙을 끓여 질산칼륨(염초)을 추출하는 모습.

 

화약 공급이 늘면서 화약무기 제조기술도 빠르게 발전했다. 중세 유럽은 교회 종탑에 매달 청동제 종을 주조하면서 야금기술을 쌓아왔는데, 청동의 주석 비율을 낮추자 인장 강도가 훨씬 높은 건메탈(gunmetal)이 탄생했고 더 튼튼한 대포를 만들 수 있게 됐다.

 

이런 기술 혁신은 공교롭게도 1453년 세계사를 바꿨다. 그해 봄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는 천년 제국 비잔틴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공략을 위해 초대형 공성포 수십 문을 제작했다. 그중 헝가리 기술자 오르반이 만든 대포는 길이가 8m를 넘고 270㎏짜리 석재 포탄을 1.5㎞ 이상 날릴 수 있었다. 6주 동안 5000발이 넘게 퍼부은 포격 끝에, 천년을 버텨온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무너졌다.

 

그로부터 두 달도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남프랑스 카스티용에서 또 다른 중요한 전투가 벌어졌다. 잉글랜드 백전노장 슈루즈베리 백작은 장궁병을 믿고 카스티용의 포위를 풀기 위해 프랑스군을 향해 돌격했다. 하지만 그간 절치부심한 프랑스군이 꺼내 든 것은 300문의 대포였다. 백작은 포탄을 맞아 아들과 함께 전사했고, 이로써 백년전쟁이 종지부를 찍게 됐다.

 

이처럼 프랑스는 당시 화약 무기 기술혁신을 선도했다. 콘스탄티노플 공성포는 200㎞를 옮기는 데 두 달이 걸렸을 만큼 무거웠다. 반면 프랑스는 마차 바퀴를 단 전용 ‘포가(砲架)’를 개발해 말로 끌 수 있게 했고, 포신 양옆에 회전축 투리용(砲耳)을 설치해 조준 각도를 손쉽게 조절할 수 있었다. 프랑스에 의해 대포는 진정한 야포(field gun)로 거듭났다. 

 

발사각도에 따라 변하는 탄도의 모양을 묘사한 17세기 포술서 삽화.

 

신무기와 신기술로 무장한 프랑스는 이내 서유럽 최강 군사대국으로 도약했다. 샤를 8세는 청동포 70문 이상을 갖춘 막강한 포병을 앞세워 1494년 이탈리아를 침공한다. 이듬해 2월 프랑스군은 해발 420m 바위산 위에 두께 3.5m의 성벽을 자랑하는 난공불락의 몬테 산지오반니캄파노 성에 도달했다. 성은 몇 년이고 버틸 것처럼 견고했다. 하지만 프랑스군이 집중 포격을 퍼붓자 8시간 만에 성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성은 곧 함락됐다.

 

이 가공할 위력은 이탈리아 반도 전역에 큰 충격을 줬다. 이후 60여 년간 지속된 ‘이탈리아 전쟁’ 시대가 열리면서, 이탈리아인들은 생존을 위해 더 강력한 대포를 만들고 운용하는 지식을 개발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물체의 운동에 대한 새로운 생각의 불씨가 당겨졌고, 그 불씨는 16세기에 이르러 거센 불길로 타올랐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대포가 있었더라면!” 하던 갈릴레오의 한탄은 바로 이런 시대적 요구에서 나온 것이다. 르네상스 지식인들은 대포와 포술을 연구하며 ‘무지’를 깨고 더 강력한 컴퓨팅 파워를 얻기 위한 문을 열어젖혔다.

 

-채승병 밀덕·군사기술연구가, 조선일보(26-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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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구한 明의 화약

 

임진왜란은 한반도에서 벌어진 최초의 본격 화기전(火器戰)이었다. 개전 초기 일본의 '총'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조선은 종국에는 '포'로 외침(外侵)을 견뎌냈다. 이순신 장군이 해전에서 압승할 수 있었던 것도 적을 능가하는 조선 수군의 함포 전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화기전은 화약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화약 없는 화기는 무용지물일 뿐이다. 한반도에 화약 제조 기술이 도입된 14세기 말 이후 조선은 중국과 더불어 세계 최고의 화약 기술 보유국이었다. 그러나 기술이 있다 하여 뜻대로 화약을 제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화약 제조를 위해서는 '초석(硝石)'이 필수이다. 염초(焰硝)라 불리던 초석은 복잡한 화학 공정을 거쳐야만 생산할 수 있다. 조선은 제조 기술은 있었지만, 전국을 뒤져도 연간 수천 근 정도의 염초밖에 확보할 수 없었다. 화약은 희소 첨단 전략물자로 특별 관리되었고, 명(明)은 최우방국 조선에도 화약을 넘기지 않았다.

조선은 전란 발발 당시 군기시(軍器寺)에 2만7000근의 화약을 비축하고 있었으나, 국왕의 몽진으로 도성(都城)이 비자 폭도의 방화로 모두 소실되고 만다. 수년을 공들인 전략물자가 덧없이 사라진 것이다. 일본군의 파죽지세 공세에 위기감을 느낀 명은 비로소 화약을 조선에 원조하기 시작한다. 명군 파병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병부상서 석성(石星)이 가장 먼저 취한 조치도 조선에 각궁(角弓)과 화약을 보내는 것이었다.

명군이 임진왜란 승리에 얼마나 기여했는가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다. 그러나 명군이 올린 전과(戰果)가 무엇인지를 따지기 이전에 명이 원조한 화약이 없었다면 조선군의 화기 전력 자체가 반쪽이 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수 있는 전략물자 확보를 위한 자체 역량과 위기 때 의지할 수 있는 우방의 존재는 예나 지금이나 안보의 기초이다.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조선일보(19-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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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큐와 조선의 운명 가른 동맹 외교

 

임진왜란은 1598년에 종료되었지만 일본의 동아시아 질서 흔들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1609년 3월 가고시마의 시마즈(島津) 가문은 오래전부터 벼르던 류큐(지금의 오키나와) 원정에 나선다. 전쟁은 한 달 만에 시마즈군의 완승으로 끝났고, 류큐의 상령(尙寧)왕은 일본으로 송환되어 시마즈가와 도쿠가와 막부에게 신종(臣從)을 서약해야만 했다.


이후 류큐의 입지는 불우한 것이었다. 시마즈가는 류큐를 부용국(附庸國) 취급하며 조공을 강제했다. 다만 류큐의 중국 조공국 지위는 건드리지 않았다. 이른바 이중조공국화(化)였다. 류큐는 시마즈가 진공(進貢) 외에도 막부에 사절을 보내 군신의 예를 표해야 했으니 사실상 삼중조공국 신세였다.

류큐는 신주단지처럼 믿던 종주국 명의 보호를 기대하였지만, 조선에서 일본과 대적하느라 국력이 소진된 명은 고민에 빠진다. 북방의 이민족 발흥 조짐도 심상치 않았다. 명은 자국 안보에의 위협 정도를 가늠하면서 류큐 문제를 관망하였고, 일본도 이번에는 지나치게 명을 자극하는 것은 피하고자 했다.

두 세력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류큐를 둘러싸고 형성된 강대국 세력 균형하의 (변형된) 분할·지배 체제를 '양속(兩屬) 체제'라고 한다. 이때의 복속이 화근이 되어 류큐는 1879년 일본 영토로 편입된다.

사실 류큐의 운명은 남의 일이 아닐 수도 있었다. 임진왜란 때에도 일본은 조선 할지(割地)를 획책한 바 있다. 할지론은 전쟁 내내 일본과 명 사이를 오갔고, 누구도 조선의 국토 보전을 장담할 수 없는 불확실성이 한반도에 드리워져 있었다. 할지론을 무산시킨 것은 명이 중화 체제 수호 관점에서 조선 방어에 부여한 국익의 크기였다. 명과 조선을 안보 공동체로 묶기 위해 조선이 기울인 노력도 명의 인식을 거들었다. 그 지점에서 조선과 류큐의 운명이 갈렸다. 자존·자강은 누구나 바라는 것이나 대국의 논리를 살펴 자국 안전을 도모하는 동맹 외교가 중소국의 안전에 더욱 긴요할 때가 있다.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조선일보(19-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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