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隨想錄]

[붕세권 지도] [1000원의 행복] [돌아갈 수 있는 내 집이 있다.. ]

뚝섬 2024. 11. 28. 06:42

[붕세권 지도]

[1000원의 행복] 

[돌아갈 수 있는 내 집이 있다는 행복] 

 

 

 

붕세권 지도

 

1980년대 서울 쌍문동 서민들의 삶을 그린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는 붕어빵이 자주 등장한다. 동네 친구이자 바둑 천재인 택이의 대국이 다가오자, 주인공 덕선은 종이봉투에 붕어빵을 담아 그의 방문을 두드린다. “야, 붕어빵. 잘 다녀와.” 덕선이 건넨 붕어빵은 훗날 남편이 되는 택이와 나누는 사랑을 상징한다. 남편을 잃고 두 아이를 키우는 선우 엄마도, 역시 아내와 사별한 고향 선배 택이 아빠가 입원하자 붕어빵을 사 들고 병원을 찾아간다. 이후 택이 아빠가 “날도 추운데 우리 같이 살자”고 청혼해 두 사람은 재혼한다.

 

▶바삭한 껍질 속에 달콤한 팥소가 들어있는 붕어빵은 이처럼 서민의 겨울을 따뜻하게 지켜온 간식이다. 그 기원은 일본의 ‘다이야키(鯛焼き)’인데, 우리 말로 ‘도미빵’이다. 일본에는 에도 시대부터 둥근 밀가루 반죽 속에 팥을 넣은 ‘이마가와야키’라는 간식이 있었다. 1909년 이것을 팔던 고베 세이지로란 사람이 장사가 잘 안 되자, 물고기 모양 틀을 개발해 다이야키가 등장했다.

 

▶일본에서 도미는 기쁜 일이 있을 때 먹는 고급 생선이자 행운의 상징이다. 복(福)의 신 ‘에비스’도 옆구리에 도미를 끼고 있다. ‘다이야키’는 서민들은 이런 도미를 좀처럼 먹지 못한다는 점에 착안해 만든 것인데, 곧바로 대히트했다. 지금도 도쿄 명소 아자부주반에 가면 고베가 만들었던 원조 다이야키를 맛볼 수 있다.

 

다이야키는 일제강점기에 한국에 들어왔지만, 그 변형인 붕어빵이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팔리기 시작한 것은 미국이 밀가루를 대량 원조한 1960년대로 추정된다. 동의보감에 “여러 물고기 중 가장 먹을 만하다”고 적혀 있을 만큼 한국인에게 친숙한 물고기여서 ‘붕어빵’이 됐을 것이다. 한때는 겨울이면 어디에나 붕어빵 노점이 있었다. 그러나 몇 해 전부터 밀가루, 팥, 식용유 원가가 상승하면서 가격이 오르자 채산을 못 맞춘 많은 가게가 문을 닫았다. 그래도 추운 날 붕어빵 맛을 잊지 못하는 사람은 많은가 보다. ‘역세권(驛勢圈)’을 흉내 낸 ‘붕세권’이란 말까지 생겼다고 한다. 근처에 붕어빵 맛집이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한 중고 거래 앱이 26일 ‘붕어빵 지도’를 공개해 화제다. 주변의 붕어빵 가게와 후기를 찾아볼 수 있다. 2020년부터 호떡, 군고구마 등 ‘겨울 간식 지도’를 제공했는데, 가장 많이 등록·검색되는 메뉴가 붕어빵이었다고 한다. 슈크림, 앙버터 등을 넣은 신종 붕어빵도 등장했다. 붕어빵 정도는 마음 놓고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

 

-김진명 논설위원, 조선일보(24-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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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원의 행복

 

요즘 1000원으로는 붕어빵도 못 사 먹는다. 두세 개에 2000원, 네댓 개에 3000원 달라 하지 1000원어치는 팔지 않는다. 편의점에 가도 크림빵이 1200원, 흰 우유 1100원, 삼각김밥이 1500원이다. 1000원으로 살 수 있는 건 껌 한 통, 로또 복권 한 장 정도다. 그래서 요즘 대학가에선 든든한 한 끼를 단돈 1000원에 먹을 수 있는 학식이 인기라고 한다.

▷매일 아침 전국 곳곳의 대학교 구내식당은 1000원에 아침을 해결하려는 학생들로 붐빈다. 소셜미디어에 올라온 ‘천원의 아침밥’ 사진들을 보면 잡곡밥과 계란국에 돼지불고기 묵무침 콩나물 김치까지 집밥보다 낫다 싶다. 학생이 1000원을 내면 정부가 1000원을 보태고 나머지는 학교가 부담한다. 정부 보조 없이 교수와 직원들이 모은 장학금으로 1000원에 아침밥을 주는 대학도 있다. 밥 한 끼 먹으려고 긴 줄을 선 학생들이 안쓰럽기도 하고,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히 움직이는 모습이 대견하기도 하다.

▷‘1000원의 행복’ 행정도 유행이다. 광주 서구는 양동시장에 고령자들이 시간제로 일하는 ‘천원 국시’집을 열었다. 노인 일자리 만들고 시장도 살려 보려는 시도다. 국수 한 그릇에 3000원이지만 시장에서 장을 본 사람들에겐 1000원만 받는다. 경북 영천시와 경주시는 교통이 불편한 지역 주민을 위해 ‘천원 행복택시’를 운영하고 있다. 영천시 임산부는 출산 후 1년까지는 택시 요금이 1000원이다.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1000원에 감상할 수 있는 서울 세종문화회관의 ‘천원의 행복’ 프로그램은 올해로 16년째를 맞았다.

 

▷1000원 행정에 대해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지만 고물가로 힘겨운 이들은 “생활 밀착형 행정”이라며 반긴다. 버는 돈보다 나가는 돈이 많다 보니 1000걸음 걷고 퀴즈 풀 때마다 10원씩 포인트가 쌓이는 앱을 깔아 ‘앱테크’를 하고, 신규 발급 혜택을 노리고 수시로 새로운 카드를 신청하는 ‘카테크’를 하며, 개비당 10원을 주는 구청 담배꽁초 줍기 알바 뛰면서 끝 모를 불황을 견디고 있다. 10원도 아쉬운데 1000원은 오죽 크게 느껴질까.

바람이 불 때는 그것이 곧 지나가는 것임을 잊지 말아라. 비가 올 때도 마찬가지다. 구름이 걷히면 곧 해가 나는 법이다.” 장석주 시인이 성인이 돼 독립하는 딸에게 쓴 편지 구절이다. 언젠가 찬 바람 지나고 비가 그치면 알게 될 게다. 가난한 나를 위해 많은 이들이 수고로움으로 따뜻한 아침밥을 짓고, 아름다운 공연으로 영혼의 허기를 달래 주었음을. 우리는 1000원으로도 행복할 수 있는 존재임을 말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동아일보(23-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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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갈 수 있는 내 집이 있다는 행복

 

"네가 돌아와서 정말 기쁘구나, . 네가 없는 동안 너무 쓸쓸했어. 나흘이 이렇게 긴 줄 몰랐단다." 저녁 식사 후 매슈와 마릴라 사이에 앉은 앤은 여행에 대해 빠짐없이 이야기했다. "정말 멋진 시간이었어요. 제 인생에서 잊지 못할 날들로 기억될 거예요. 하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좋았던 건요,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었어요."

―루시 M. 몽고메리 '빨강머리 앤' 중에서.

 

다섯 살 때였나, 길을 잃어버린 적 있다. 겁이 나서 엉엉 울면서 골목길을 헤매고 다녔다. 다시는 집에 갈 수 없을까봐 무척 두려웠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 해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씻겨주던 엄마한테 혼이 나면서도 집에 왔다는 게 왜 그리 좋았을까.

방학 때 크고 넓은 친척 집에 가서 놀다가도 때가 되면 집에 오고 싶었다. 비록 작았지만 집에 오면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놓였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세상에 수많은 집이 있어도 날 반겨주고, 밥 먹여주고, 따듯하게 재워줄 곳이라곤 우리 집뿐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집이 좋은 이유가 피를 나눈 가족이 모여 살기 때문이라고 착각하기 쉽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가족만큼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을 나누는 집단도 없다. 재산 분쟁이나 가정 폭력, 친족 살인까지는 아니더라도 혈연이란 이름으로 서로를 고통스럽게 상처 내는 일은 얼마든지 많다.

루시 M 몽고메리의 '빨강 머리 앤'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매슈와 마릴라 남매의 사랑 속에서 밝고 건강하게 성장하는 한 소녀의 이야기다. 일찍 부모를 잃고 남의 집과 고아원을 전전하던 앤에게 초록색 지붕 집은 세상 그 어떤 곳보다 마음 편한 곳, 멀리 떠나 있어도 늘 돌아오고 싶은 곳이다. 갑작스러운 파산과 매슈의 죽음 이후, 앤이 대학을 포기하면서까지 마릴라 곁에 남아 초록색 지붕 집을 지키는 이유이다.

가정의 달 5, 우리들 마음이 정말 받고 싶은 선물은 크든 작든, 높든 낮든, 소유든 임대든, 혈연 가족이든 아니든 또는 1인 가구라도 해도 두 발 쭉 뻗고 쉴 수 있는 내 집,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하고 앤이 느끼던 작은 행복이 아닐까.

 

-김규나 소설가, 조선일보(19-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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