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쪽짜리 대통령
북한 김정은에 대한 배려와 환심의 1할만 야당과 보수 쪽에 써도 '성군' 소리를 들었을 것
우리 국민 둘로 갈라놓고 북한과 대화하겠다는 건…
그럴 기회가 없겠지만, 문재인 대통령을 인터뷰하면 '본인은 한쪽 진영을 위한 대통령에 만족하는가?'라고 첫 질문을 하겠다. 어떤 반응일지 짐작된다. '반쪽짜리 대통령'이라는 말을 꺼내는 것 자체를 자신에 대한 모독으로
여길지 모른다. 그는 여전히 "지지하지 않았던
국민도 섬기는 통합 대통령"이라는 취임사 구절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사실 역대 어느 대통령도 온 국민의 사랑과 인정을 받은 적은 없었다. 그래도 이들은 그
나름대로 어느 한쪽의 국민이 아니라 모두에게 골고루 지지받기 위해 애썼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국민을
갈라치기 해 지지 세력을 규합해도, 대통령이 되고 나면 나라를 위해 국민 통합보다 더 중요한 게 없다는
걸 깨닫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재임 2년이 됐지만
한쪽 진영의 맹주(盟主) 역할에 만족하는 것 같다.
그런 사례로 현 정권의 적폐 청산을 다시 끄집어낼 것은 없고, 지금 벌어지는 '패스트트랙' 충돌 사태에 한정하겠다. 국회가 난장판이 되자 문 대통령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엄중한
경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정부와 국회가 힘을 모아야 한다는 국민의 바람이 어느 때보다 높은데 정치권의 대립과 갈등이 격화해 매우 안타깝다"고 말했다. 물리력을 동원한 한국당을 겨냥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사태의 배후에는 어떻게든 '공수처법'을
통과시키겠다는 청와대가 있었다. 이를 위해 '연동형
비례제'를 내건 소수 야당과 거래한 것이었다. 고립된
제1 야당이 어떻게 나올지는 정치 초보도 예상할 수 있다. 정당
간판을 내리지 않으려면 한국당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제 삭발 투쟁은 좀 볼썽사납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었으면 지지자들에게 '사쿠라'로 외면받았을 게 틀림없다.
이 지경이 되었으니 국회에서 추경 예산이나 각종 법안 심의는 다 날아갔다. 아무리
한국당이 '웰빙 정당'이고 투쟁이 오래 못 갈 것이라고 해도
어느 날 슬그머니 회의장에 들어올 리는 없다. 문 대통령이 '엄중한 경제 상황'을 인식했으면
죽다 깨어나도 국회를 이런 막장 충돌로 유도하지 말아야 했다. 그렇게 시급하다는
추경 예산과 법안을 걷어차 버린 쪽은 사실상 대통령이었다. 그런 대통령이 "국민의 바람은 어떻고…'라며 관전평 말하듯 했고, '좀비' '의회주의적 타협의 성공'
같은 글을 페이스북에 올리는 조국 민정수석을 신줏단지처럼 끌어안고 있다.
'반쪽 대통령'이 되는 길은 자신과 다른 입장에 있는 야당과 국민을 깔보고 조롱하고 무시할수록
쉽게 도달한다. 설령 야당이 형편없고 마음에 안 들어도 공들여 설득해야 할 정국 운영의 파트너다. 보수는 어쨌든 우리 국민의 절반이다. 문 대통령은 왜 이들을 북한
독재자만큼도 대접하지 않는지 이해 안 될 때가 많다.
북한 김정은과의 접촉에서 봤듯이 문 대통령은 그런 설득에는 선수다. 친절하고 관대할 뿐만
아니라 이해심도 많았다. 그렇게 대변해줬던 북한 김정은으로부터
"오지랖 넓은 중재자·촉진자 행세를 할 것이 아니라 민족의 일원으로서 제정신을 가져라"
하는 수모를 받고도 인내심을 보여왔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의 환심을 다시 사겠다는
결의는 여전하다. 그런 배려와 환심의 1할만 야당과
보수 쪽에 써도 문 대통령은 '성군(聖君)'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러지 않으니까 왜 우리 국민은 둘로 갈라놓고 북한과는 대화해서 무얼 하겠다는 건지
의심을 사는 것이다.
정권 초반에는 그럴듯한 말의 향연(饗宴)에 절대다수
국민이 현혹됐지만 지금은 많이 깨어났다. '적폐 청산'을
운운하는 쪽이 오히려 적폐일 수 있고 입버릇처럼 '정의' 운운하는
쪽이 나라를 결딴낼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현실에서 엄청난 부작용이 나타난 경제정책과 결정을
수정하지 않는 그를 의아스럽게 보게 됐다. 통계 수치로 현 상황을 미화하며 "내년이나 다음 분기(分期)에는
문제가 사라지고 좋아질 것"이라는 헛된 약속도 덥석 믿지 않게 됐다. 오히려 우리 어깨에 얹힌 현실의 큰 짐을 받아들여야 해답을 찾을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
집권 2년이면 오만과 독선에서 빠져나올 충분한 시간이 됐다. 국민은 각성이 있는데, 대통령은 여전히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얘기하고
있다. 이를 지적하면 '기득권 적폐 세력의 저항'으로 취급하는 것도 여전하다. 문 대통령 본인은 잊어버렸는지 모르나
취임 후 첫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 지시에 이견(異見)을 제기하는 것은 '해도
되느냐'가 아니라 '해야 할 의무'다. 브리핑할 때 반대 의견이 있었다는 것이 함께 나가도 좋다." 하지만 그 뒤로 청와대는 소수 이견이 새 나갈까 봐 청와대 직원들의 휴대폰을 강제로 수거해 검사했다. 차라리 말이라도 그렇게 안 했으면 이런 실망감이 덜했을 것이다.
-최보식 선임기자, 조선일보(19-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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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폐 수사' 件件이 지시한 대통령이 "통제할 수 없다"니
문재인 대통령은 2일 청와대에서 열린 사회원로 간담회에서 "어떤 분들은 이제 적폐 수사는 그만하고 통합으로 나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씀도 한다"면서도 "살아 움직이는 수사에 대해서는 정부가 통제할
수도 없고 또 통제해서도 안 된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개인적으로는 국정 농단이나 사법 농단이 사실이라면 아주 심각한 반헌법적인 것이고
헌법 파괴적인 것이기 때문에 타협하기 쉽지 않은 것"이라고도 했다.
대통령의 말은 마치 적폐 청산 수사가 자신의 뜻과는 관계없이 수사기관들의 자율적인 판단에 따라 시작됐고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는 적폐 청산을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국민 통합만 얘기하더니
취임 직후 내건 100대 국정과제 제1호가 적폐 청산이었다. 국민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문 대통령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적폐 청산이라고 공표하면서 검찰과 경찰에 철저한 수사를 지시한 것이다. 심지어 기소된 사건의 공소
유지를 철저히 하라는 구체적 재판 전략까지 국정과제 속에 포함시켰다. 청와대 지시로 20곳 가까운 정부기관에 만들어진 '적폐 청산 TF'가 수사 대상을 뽑았다.
적폐 청산이라고 뭉뚱그려서는 말귀를 못 알아들을까 싶었던지 대통령은 구체적인 사건을 적시해가면서 수사를 지시하기도 했다. 2017년 7월엔 "방산
비리 척결"을 지시했고, 8월엔 박찬주 육군대장
부부의 공관병 '갑질 의혹'에 대해 "뿌리를 뽑으라"고 했으며 2018년 2월엔 "강원랜드
채용비리 수사 외압 의혹을 엄정 규명하라"고 했다. 2018년 7월 인도 출장 중엔 촛불집회 계엄령 문건을 독립수사단을 구성해 밝히라고 지시했고, 지난 3월 동남아 순방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김학의 전 법무차관, 고 장자연씨 사건, 클럽 버닝썬 사건 수사를 지시하며 "공소시효가 지난 일도 사실 여부를 가리라"는 지침을
주기도 했다. 대통령 민정수석이 취임 기자회견에서 "민정수석은
수사를 지휘하면 안 된다"고 했던 말은 대통령이 직접 수사를 지휘할 테니 자신은 빠지겠다는
뜻이었던 모양이다. 박찬주 대장 수사는 갑질 의혹은 물론 별건 뇌물 수수까지 무죄 판결이 났고
계엄령 문건 수사도 대통령이 밝히라고 했던 쿠데타 모의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
이런 무리한 수사들은 대통령 지시가 없었다면 검찰이 애초에 착수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하라"는 지시는 셀 수 없이 했던 대통령이 이제
와서 "하지 말라"는 지시는 수사기관의
독립성을 해치는 것이라고 설명하니 국민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조선일보(19-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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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모 무리한 패스트 트랙, 내부서 터져 나오는 반발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내고 민주당으로 복귀한 김영춘 의원은 인터뷰에서 "선거법을 패스트 트랙(신속처리안건)에 태워 일방 처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김 의원은 "경기의 규칙인 선거법만은 야당과 합의
처리해야 한다"고 했는데 문재인 대통령도 야당 대표 때 똑같은 말을 했었다. 문무일 검찰총장은 선거법과 함께 패스트 트랙으로 지정된 검경 수사권 조정 법안에 대해 "견제와 균형이라는 민주주의 원리에 어긋난다"고
했다. 검찰 출신인 민주당 금태섭 의원과 조응천 의원도 각각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 신설 법안과 수사권 조정 법안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내놨다.
민주당이 바른미래당, 정의당, 민주평화당
등 3당과 서로 원하는 법안을 주고받는 방식으로 패스트 트랙 지정에 성공하고 승전가를 부르자마자 권력
내부에서 이에 대한 이의가 나오고 있다. 패스트 트랙은 법안 처리가 무한정 표류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예외적으로 적용되는 조치다. 국회 재적 의원의 5분의 3 이상이 찬성하는 법안에 대해서는 여야 합의가 이뤄지지 않더라도 국회 논의 기간이 330일이 지나면 본회의에 자동 상정되도록 한 것이다. 앞서 패스트
트랙으로 지정됐던 사회적 참사법 등은 개별 법안에 대해 상당 정도 공감대가 이뤄진 경우라서 여당 내 이견이 없었고 야당도 크게 반대하지는 않았다.
이번에 패스트 트랙에 올린 선거법, 공수처법, 검경
수사권 조정 법안은 입법부와 수사기관의 권력 문제를 다루는 것이라서 국민 실생활과는 관련이 없고 대다수 국민은 법안 내용도 알지 못한다. 당연히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됐을 리가 없다. 선거법과 수사
관련 법은 전혀 연관성이 없는데도 패스트 트랙 지정에 필요한 재적 의원 5분의 3 의석을 확보하기 위해 억지로 한 몸인 것처럼 묶었다. 공수처법을
반드시 통과시키고 싶은 여당은 선거법에 대한 생각이 달라도 어쩔 수 없이 찬성해야 했고, 야당은 선거제도를
바꿔 의석 수를 늘리기 위해 수사 관련 법안들을 묻지 마 지지하는 식이었다. 더구나 선거법은 김 의원
지적처럼 애초에 한국당 반대를 무릅쓰고 패스트 트랙에 올려놓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선거제도
강제 변경은 결국 되지도 않을 일이고 만에 하나 강제로 바꾼다면 심각한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압도적 지지를 받는 법안을 신속 처리한다는 패스트 트랙의 기본 원칙을 무시하고 야당을 제압하겠다는 정치 계산만 앞세워 밀어붙이고 나니
정권 내부에서부터 다른 말이 나오고 있다.
-조선일보(19-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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