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가 보험금 63% 독식… ‘필수의료’ 좀먹는 실손보험 ]
["실비 보험 있으시죠?" 돈 벌려는 의료진 말에 혹하면 '공범' 됩니다]
[실손보험 연 2조원 적자, '사기' 수준 행태들 만연]
[외래 많이 가는 한국인]
[과잉진료로 망가지는 실손의료보험]
[우리 어떤 DNA가 폴크스바겐을 사게 만들까]
10%가 보험금 63% 독식… ‘필수의료’ 좀먹는 실손보험
올 들어 실손보험 가입자의 10%가 전체 비급여 보험금의 63%를 타간 것으로 나타났다. 대형 보험사들이 1∼9월 지급한 비급여 실손보험금 4조3000억 원을 분석했더니, 보험금을 많이 타간 상위 10%의 가입자가 2조7000억 원을 싹쓸이한 것이다. 이들이 받아간 보험금은 1인당 평균 395만 원으로, 하위 10% 가입자가 타간 보험금의 260배를 웃돌았다. 4000만 명이 가입해 ‘제2의 건강보험’으로 불리는 실손보험이 과잉 진료로 멍들고 있다.
이는 병원을 옮겨 다니며 과도하게 치료받는 ‘의료 쇼핑족’과 비급여 진료의 허점을 노린 의료계의 도덕적 해이가 맞물린 결과다. 한 40대 남성은 11개월간 병원 8곳에서 비급여 물리치료를 342회나 받고 실손보험금 8500만 원을 청구했다고 한다. 게다가 비급여 진료비 책정은 의료기관 마음대로이다 보니 일부 병원이 수입을 올리려고 고가의 비급여 진료를 남발하고 있다. 꼭 필요하지도 않은데 1000만 원이 넘는 백내장 수술을 권하거나 수십만 원 하는 도수치료에 비타민·영양주사 같은 시술을 병행하는 식이다.
이 같은 과잉 비급여 진료로 인해 만성 적자에 빠진 실손보험은 올해도 2조 원이 넘는 손실을 낼 것으로 보인다. 적자를 메우려면 매년 보험료를 15%씩 올려야 할 정도다. 수천만 원씩 보험금을 타가는 소수의 부도덕한 환자들 때문에 병원에 잘 가지 않는 대다수 가입자의 보험료가 오르는 비정상이 계속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실손 빼먹기’가 건보 재정을 갉아먹고 의료 체계를 왜곡시킨다는 점이다. 급여 항목에 실손보험이 보장하는 비급여를 ‘끼워 파는’ 혼합 진료가 늘면서 건보 재정에 큰 부담을 주고 있다. 실손보험 탓에 피부과·안과·정형외과 등에서 고가의 경증 치료로 손쉽게 돈벌 수 있는 구조가 굳어지면서 필수의료 분야의 구인난은 심각하다. 과잉 진료를 부추기고 필수의료를 무너뜨리는 실손보험에 대한 개혁을 늦춰선 안 되는 이유다. 불필요한 비급여 항목을 대폭 손질하고 환자 본인 부담을 높여 도덕적 해이를 차단할 방안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
-동아일보(24-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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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 보험 있으시죠?" 돈 벌려는 의료진 말에 혹하면 '공범' 됩니다
“실비(실손) 보험 있으시죠?”
이 물음이 몇 시간 후 1000만원 가까운 돈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다. 50대 한 남성 A씨는 최근 시골집에 가서 벌초를 하다가 허리를 다쳤다. 처음엔 삐끗한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출근을 앞두고는 아예 걷지를 못했다. 거의 기다시피 서울 강남 회사 앞 정형외과에 갔다. 접수대 직원의 첫마디는 “어디가 불편하시냐”가 아닌 “실비 보험이 있느냐”였다. 별 의심 없이 “네”라고 답한 뒤 의사를 만났다. “저희만의 노하우가 담긴 시술이 있어요. 두어 시간 걸리는데 두 발로 걸어 나가게 해드릴게요.” 걸을 수 있다니 이보다 좋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과거엔 정형외과 의료진이 환자의 실손 보험을 볼모로 도수 치료 등 과잉 진료를 권유했지만 최근엔 피부과 등으로도 확산되는 추세다./게티이미지뱅크
A씨는 여러 동의서에 정신없이 사인을 하고 국소마취 후 시술을 마쳤다. 그리고 침대 밑으로 발을 내디뎠는데 진짜로 두 발로 걸을 수 있는 게 아닌가. 의사에게 연신 감사하다며 머리를 조아렸다. “디스크 수술이라도 받으라고 하면 어쩌나 걱정했죠. 그런데 간단한 시술로 낫다니 뭐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좋았죠.” 수납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A씨는 진료 내역서를 받고 눈을 의심했다. “0이 몇 개야? 90만원이겠지? 아니, 900만원이 넘는다고?” A씨는 시술 전 비용과 관련된 안내를 전혀 받지 못했지만 이미 시술을 받기도 했고 또 낫기까지 했으니 울며 겨자 먹기로 계산해야 했다. 카드 하나로는 한도 초과가 떠서 세 카드로 나눠 결제하는 굴욕도 맛봤다. 왜 이렇게 비싸냐는 항의 한마디도 못 했다. “실손 보험 청구를 하니 600만원 정도 돌려주더군요. 다 낫긴 했는데 기분이 썩 좋지 않아요. 사기당한 기분이랄까. 시술 전에 금액을 안내받았다면 망설이지 않았을까요? 그러니까 ‘실비 보험 있냐’고 물었을 테고요.”
A씨 같은 일은 비일비재하다. 정형외과만이 아니다. 피부과나 미용 시술을 하는 클리닉, 의원 등에서도 마찬가지다. B씨는 최근 한 피부과를 방문했다. 접촉성 피부염 때문이었다. 어디가 안 좋아서 왔는지 설명하자 직원은 대뜸 “실비 있으시죠?”라고 물었다. “잠시 고민했는데 없다고 하면 제대로 된 치료를 안 해줄 거 같아서 있다고 했어요.” 상의를 탈의하고 침대에 누운 채 의사와 증상 관련 대화를 주고받은 뒤 소독 처치 후 염증 주사를 맞았다. “레이저하면 금방 좋아지는데 하실 거죠?” “아, 네.”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입는데 머리 위에 이런 안내문이 있었다. “원치 않는 치료가 이뤄진다면 미리 말씀해 주세요.”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한 5분 진료받았나? 7만원이나 받더라고요. 황당했지만 또 치료받으러 가야 하니 별말은 안 했죠.”
일부 피부과는 아토피 같은 질환을 위한 시술을 미용 목적으로 방문한 고객에게 권하며 “실손 보험 되니까 돈은 돌려받으신다”며 노골적인 장사를 하기도 한다. 10만~20만원대 피부 건조, 피부 장벽, 무좀, 탈모 등을 위한 제품을 미용 목적으로 쓰면서 치료를 위한 것처럼 속이는 것이다. 정형외과 간판이 아닌 한 ‘클리닉’에선 200만원짜리 도수 치료 10회권을 끊으면 60만~70만원대 피부 탄력, 미백 시술을 끼워주겠다는 패키지도 제안한다. 이렇게 하면 도수 치료 1회 20만원 중 1만원만 본인이 부담하고 19만원은 돌려받는다고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실손 보험 청구는 10회 전부를 한꺼번에 말고 1회씩 나눠 청구하라고도 안내한다. 도수 치료 10회 받으면 필라테스나 PT를 무료로 제공한다는 의원도 있다. 가벼운 골절에 MRI를 권유하고 태반 주사를 놔주는 곳도 있다.
이런 제안은 의사가 아닌 상담실장, 상담팀장, 코디네이터라는 직원이 ‘비밀의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은밀하게 이뤄진다. “의사도 그렇지만, 환자도 싸게 좋은 제품으로 시술받으니 서로 눈감으면 되잖아요. 공범인 셈이죠.” 인터넷에 ‘실비 적용 가능한 피부과 시술 항목’을 검색하면 대놓고 제품을 홍보하는 피부과도 상당하다. 실제 실손 보험과 관련한 사기도 빈번히 일어난다. 최근 한 의사는 브로커 소개로 내원한 환자들에게 허위의 하지정맥류 수술비 영수증을 발급, 환자 700여 명이 실손 보험금을 청구하게 하는 방법으로 약 50억원을 편취했다. 의사는 징역 7년을, 브로커 3명은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환자의 실손 보험을 볼모로 과잉 진료를 하는 의사는 과거엔 정형외과에 국한돼 있었지만 지금은 확대되는 추세다. 병의원에서 “실손 보험이 있냐”고 묻는 이유는 비급여 치료를 권하기 위해서다. 비급여는 건강보험 혜택이 적용되지 않아 환자가 전액 부담하는 항목으로, 실손 보험을 내고 있는 경우엔 계약 조건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부를 돌려받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작년 실손 보험 적자가 2조원대에 육박했다. 신 의료 기술인 무릎 줄기세포 주사나 도수 치료 등 비급여 지급 보험금이 증가한 탓인데, 역시 과잉 진료가 문제라고 금융감독원은 지적했다. 금감원은 이들의 솔깃한 제안에 동조, 가담한 환자들도 형사처벌을 받는다고 경고하고 있다. 한 보험사 관계자는 “싸게 받는다고 좋아하지만 불필요한 고가 치료를 받아 결국엔 전체 보험료가 상승하는 것”이라며 “선의의 피해자가 생긴다”고 말했다. ‘수백, 수천만 원도 아니고 10만원, 20만원 정도는 괜찮겠지’가 자기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생각, 한 번쯤 해보시길.
-김아진 기자, 조선일보(2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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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손보험 연 2조원 적자, '사기' 수준 행태들 만연
보험개발원이 추산한 2032년 실손보험금 지급액 예상치
질병·상해 치료 때 쓴 실제 의료비를 보상해주는 실손보험이 지난해 1조9738억원 적자를 냈다. 포화 상태에 달한 보험 가입자 수는 전년과 큰 변화가 없지만 보험금 지급액이 1조2000억원이나 늘었기 때문이다.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비급여 진료비 지급액이 급증하면서 만성적인 적자 구조를 만들고 있다.
실손보험 적자의 최대 원인은 병원들이 수입을 올리려 고가의 비급여 진료를 남발하기 때문이다. 의사들이 꼭 필요하지도 않은데 건당 1000만원에 달하는 백내장 수술이나 수십 만원씩 드는 도수 치료, 갑상샘 결절 고주파 절제술, 비타민·영양주사 등을 권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지난해는 복지부가 골수 추출 줄기세포를 무릎 관절강에 넣는 치료법을 실손보험 적용 대상에 포함시키면서 이른바 ‘무릎주사’가 적자의 새로운 구멍으로 등장했다. 구멍만 생기면 병원과 의사들이 돈을 챙기려 달려든다. 보험사들이 불필요한 진료로 판정해 보험금 지급을 거절하는 경우가 잦아 보험 가입자들 피해도 빈발하고 있다.
일부 가입자들이 병원을 옮겨 다니며 과도하게 진료받는 ‘의료 쇼핑’도 적자를 더욱 키우고 있다. 2022년의 경우 전체 가입자의 2.2%(75만명)가 1000만원 넘는 보험금을 타간 반면 63.5%는 아예 보험금을 청구하지도 않았다. 소수의 과잉진료가 전체 가입자 부담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실손보험 가입자가 늘수록 적자가 나니 지속가능할 수가 없다. 자칫 공적(公的) 건강보험과 사적(私的) 실손보험의 두 축으로 이뤄진 의료보장 체계를 흔들 수도 있다. 보험사 적자가 커지면 결국 보험료 인상으로 이어질 수 있어 가입자에게도 손해다. 만성 적자 구조를 수술하는 방법은 병원과 의사들의 과잉 진료를 줄이는 것이다. 불필요한 비급여 항목은 대폭 손질하고 의사와 가입자·브로커 등이 짜고 하는 보험 사기 조사를 대폭 강화해야 한다.
-조선일보(24-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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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래 많이 가는 한국인
그다지 급한 증상도 아닌 환자가 대학병원서 응급 진료를 받는 경우가 꽤 있다. 이들은 집으로 돌아갈 때 보험회사 제출용 서류를 뗀다. 진료비를 돈으로 보상받는 실손보험 가입자다. 보험사는 응급실 진료 한 번에 5만원 정도 준다. 비(非)응급 증상으로 응급실을 찾는 실손보험 가입자가 비가입자보다 32% 많다. 대형 병원 응급센터에 경증 환자가 몰리는 이유 중 하나다.
▶유명 대학 병원 정형외과 교수가 들려준 얘기다. 관절염 때문에 인공 관절 수술을 받아야 할지 물어보기 위해 이른바 '빅(big) 4' 병원 외래 네 곳을 다 거친 환자를 종종 본다고 한다. 자신은 수술이 필요하다고 말한 네 번째 의사였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심각한 질병이 아닌데도 초호화 닥터 쇼핑을 제한 없이 할 수 있다. 특진비마저 사라져 비용 부담도 크지 않다.
▶최근 과잉진단예방연구회 소속 의대 교수들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정부가 흡연자를 대상으로 폐암 CT 무상 검진을 시작하는데, 그러면 폐암처럼 보이는 '가짜 폐암' 임시 진단이 쏟아져 나와 그걸 확인하기 위해 조직 검사를 받다가 멀쩡한 사람들이 폐출혈이나 기흉(氣胸) 피해를 볼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국은 과잉 진단으로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갑상샘암 폭증 현상을 경험한 바 있다. 우리나라 직장 건강검진에서 받는 검사 종류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검진받을 때보다 많다.
▶엊그제 발표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건 통계를 보면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82.7세로 일본에 이어 둘째 장수국이다. 그렇지만 자기 건강이 좋다고 보는 비율은 매우 낮고, 병·의원을 찾는 횟수는 가장 많다. 국민 1인당 외래 진료 횟수가 연간 16.6회로 십수년째 1위다. 우리나라는 건강보험 지원 아래 3000원(65세 이상은 1500원)만 있으면 웬만한 도시서 예약 없이 전문의 외래 진료를 받을 수 있다. 같은 보험료 내고 병·의원 안 가는 사람이 손해라는 생각이 든다.
▶문턱 낮은 외래가 중병을 막는 효과가 있지만 전문 의료는 양날의 칼이어서 맘껏 한다고 마냥 좋은 게 아니다. 약물·검사 남용으로 의료비가 올라가고, 병원 의존증, 검사 과신증, 건강 염려증도 유도된다. 이에 선진국은 전문의 진료에 단계별 제한을 둔다. 건강 증진 활동을 해서 외래를 덜 가거나, 고가 주사를 안 쓰거나, 약을 적게 먹어도 인센티브를 준다. 건강은 '의사 면죄부'로 얻는 게 아니다. 스스로 노력해 만들어야 건강 수명이 길게 간다.
-김철중 논설위원·의학전문기자, 조선일보(19-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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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잉진료로 망가지는 실손의료보험
인도가 대영제국의 식민지이던 시절, 수도 델리에서 주민들이 맹독성 코브라에게 물려 죽거나 피해를 보는 일이 잦았다. 대응에 나선 정부는 해결책으로 코브라를 잡아오는 사람들에게 포상금을 지급하는 방안을 시행했다. 그런데 포상금 신청이 느는데도 코브라 피해는 줄지 않았다. 정부의 조사 결과가 기막혔다. 코브라 포상금이 돈벌이가 되자 주민들이 여기저기서 몰래 코브라를 사육하고 있었던 것이다. 코브라 피해를 막고 주민들에게 소득의 기회도 주려던 정책이 주민들의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라는 벽에 막혀 결국 폐기됐다.
인도의 코브라 사례와 비슷한 사례를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다. 보험 산업이 '실손의료보험 과잉진료'라는 도덕적 해이로 생채기가 나고 있다. 실손의료보험은 국민건강보험에서 부담하지 않는 진료비(본인부담금)를 보장해주는 보험이다. 갑작스러운 사고나 질병에 따른 의료비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어 가입자가 3000만명을 넘어선 국민 보험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 실손의료보험의 보험금 지급액이 가파르게 늘어나고 있다. 2010년 800억원이었던 보험금이 2014년 1조5000억원으로 4년 만에 17배나 늘었다. 일부 병의원에서 과잉진료를 유발하는 사례가 계속되고 있고,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진료에 대해 진료비가 제각각이어서 그렇다.
보험의 원리상 보험금이 늘어나면 결국 선량한 다수의 보험 가입자가 그만큼 보험료를 더 부담할 수밖에 없다. 의료·보험업계뿐 아니라 이를 관리하는 보건복지부와 금융위원회, 건강보험관리공단,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등 정부와 이해 당사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
도덕적 해이는 사회적 비용을 추가 발생시키고 불법이나 범죄로 이어질 수 있으며, 심하면 산업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다. '나 하나쯤이야', '큰 죄도 아닌데…'라는 생각이 조화와 균형을 무너뜨리고 전체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우리나라는 경제 발전에 힘입어 시민의식에 많은 진전이 있었지만 아직도 부족한 부분이 있다. '내 것'에 애착이 강한 반면 사회 전체가 공유하는 '우리 모두'에 대한 인식이 약한 것이다. 공동의 가치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스스로 경계하는 책임감이 커져야 한다.
-이수창 생명보험협회 회장, 조선일보(16-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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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어떤 DNA가 폴크스바겐을 사게 만들까
누구나 남보다 나, 세상보다 내 가족이지만 그 정도가 심한 우리
公보다 私, 忠보다 孝였던 나라… 대들보 없는 집 아닌가
독일 자동차 회사 폴크스바겐이 사기를 치다가 들켜 세계 각국에서 판매가 곤두박질 치고 있는데 유독 한국에선 별 차이 없이 잘 팔리고 있다는 뉴스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한국 사회의 본성, 한국인 심중(心中) 깊은 곳을 움직이는 DNA, 어쩌면 우리가 극복하기 어려울지 모를 한계가 의외의 사건으로 노출된 것 같은 느낌이다.
사람은 누구나 '남'보다 '내'가 중요하고, '세상'보다 '내 가족'이 우선이다. 그런데 거기에도 정도가 있을 것이다. 어느 나라에선 폴크스바겐이 환경오염 거짓말을 하다 판매가 100분의 1로 떨어지는데 한국에선 값 좀 깎아줬다고 그 차 판매가 65% 늘었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내 이익'과 '사회 전체 이익' 간의 균형이 얼마나 무너져 있는지 보여준다.
환경오염은 사회 구성원 전체의 문제다. 미국·일본에선 그러니까 그것이 '나의 문제'가 된다. 한국에선 모두의 문제는 남들의 문제이며, 그래서 누구의 문제도 아니게 된다. 폴크스바겐이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공기 오염이 아니라 나만 다치는 브레이크 문제였다면 한국에서도 판매가 폭락했을 것이다.
메르스 사태 때 사실상 감염 위험 없는 사람 수백만 명이 마스크를 쓰고 다녔다. 그런데 의사들 얘기를 들으니 정작 마스크를 써야 할 폐질환 환자들 상당수가 병원 문밖만 나서면 마스크를 벗어버린다고 한다. 자기에게 병균이 들어올 가능성이 티끌만큼 있어도 마스크를 쓰지만 자기 병균을 남에게 퍼뜨릴 때는 그 가능성이 높아도 마스크를 벗는다. 폴크스바겐 판매 급증과 같은 심리다. 미세 먼지 원인 중의 하나가 디젤 버스다. 천연가스 버스는 연비가 떨어져 충전소를 많이 지어야 하는데 동네 주민들 반대가 심하다고 한다. 공기 좋아지는 건 모두에게 좋은 것이고, 내 집값은 나에게만 좋은 것이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우리는 서슴없이 '나'를 고른다. 한국이 세계 10위권 경제라느니, 고교 이상 교육을 받은 국민이 80%니 하지만 공(公)과 사(私)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우리는 50~60년 전이나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한국 사람은 자기 집 쓰레기를 담장 밖으로 던지고, 일본 사람은 담장 밖 쓰레기를 제 집 안으로 던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얼마 전 '올해의 이민자상(賞)'을 받은 일본인 와타나베 미카씨가 같은 말을 했다. 한국으로 시집온 지 28년인 와타나베씨는 '가장 안 바뀌는 습관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이제는 음식까지 한국식으로 먹습니다만 안 바뀌는 제 습관이 있다면 남편이 제일 싫어하는 것인데, 바깥에서 생긴 쓰레기를 집에 들고 와서 버리는 것입니다."
길에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게 되지 않는 것은 인식 자체가 제 집 바깥을 자기와 상관없는 곳, 함부로 해도 되는 곳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와 자기 가족 밖의 영역이 바로 사회와 국가다. 말로 하는 애국자가 넘쳐나는 우리나라이지만 정말 우리가 사회와 국가를 생각하는 인식의 저 밑바닥엔 무엇이 있는지 두려울 때가 있다.
옛 교과서에 월남(月南) 이상재 선생 이야기가 있었다. 어느 날 며느리가 울고 있어 월남이 이유를 물었더니 재봉틀이 고장 났다고 했다. 월남 선생은 "너는 나라가 망했을 때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더니 재봉틀 고장 난 것 갖고는 그렇게 우는구나"라고 한탄했다. 근 100년 전의 얘기지만 지금이라고 얼마나 다른가 생각한다.
늘 마음에 걸려 있는 서울대 한국학연구원 김시덕 교수의 글이다. '중세 중국의 충경(忠經)은 효경(孝經)에 호응해 주군에 대한 충성을 논하는 책이다. 역대로 중국과 일본에서 널리 읽혔으며 그 인기는 근대 이후에도 식지 않았다. 만주에서도 중시했다. 이에 반해 조선과 현대 한국의 주민 가운데 '충경'에 대해 들어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전(前) 근대사회에서 주군, 곧 국가에 대한 충성과 가문에 대한 효성이 충돌할 때 충을 효보다 앞세우는 모습이 한국 역사에선 별로 확인되지 않는다. 모친상 때도 나선 이순신 같은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유라시아 동부의 여러 지역 가운데 한반도는 '충경'의 존재감이 사라지고 '효경'만이 득세한 특수한 곳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폴크스바겐 판매 급증이라는 한국적 현상을 보고 충(忠)보다 효(孝), 공(公)보다 사(私)가 더 득세한 이 특수성을 떠올린 것은 며칠 전이 6·25였기 때문이다. "중공군이 온다는 말만 들으면 먹던 밥숟가락까지 던지고 도망쳤다"(백선엽 장군)는 우리 모습이 그려져서이다. '외적과 싸우는 데는 등신, 우리끼리 싸우는 데는 귀신'인 역사가 바로 이 특수성과 닿아 있다고 본다. 그로부터 66년이 지난 최근 국민안전처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전쟁이 일어난다면 일반 성인의 45%, 대학생의 62%가 '국가보다 개인이나 가정이 우선'이라고 답했다. 여론조사가 이런데 실제 전쟁에선 어떨까. 우리는 대들보 없이 어찌어찌 서 있는 나라인 것만 같다.
-양상훈 논설주간, 조선일보(16-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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