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회담 결렬, 지금이라도 이성 찾길
한·일 외교장관 회담이 아무 성과 없이 끝났다. 두
장관은 공개 자리에서 인사는커녕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일본은
'휴전'을 원하는 미국의 압박 때문에 마지못해 회담에 응했다고 한다. 일본은 예정대로 2일 한국을 화이트 리스트에서 배제하는 결정을 강행할
것이라고 한다. 친한파로 알려졌던 일본 집권당 2인자마저
일본을 찾은 우리 국회의원단과의 면담을 끝내 거부했다. 그만큼 일본 분위기가 강경하다는 얘기다.
화이트 리스트에서 배제되면 이달 하순부터 1115개 전략물자를 수입할 때 일본 정부의 개별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이미 규제가 시작된 반도체 소재 3종에
이어 배터리·디스플레이·수소차·화학·공작기계 등 거의 전 산업에 걸친 충격이 올 수 있다. 한국
경제뿐 아니라 전 세계 산업의 공급 사슬을 교란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일본에도 부메랑으로 돌아갈 것이다.
오사카 G20 정상회의에서 "자유롭고
공정하며 차별 없는 무역의 원칙"을 강조했던 아베 총리가 정치외교 문제에 통상 무기를 끌어들여
세계 자유무역 체제의 근간을 파괴하려 한다. 2010년 중·일 영토 분쟁 때 희토류 수출을 막았던 중국과
뭐가 다른가. 전 세계 언론은 "글로벌 IT 생태계를 교란하지 말고 어리석은 무역 전쟁에서 빠져나오라"고
촉구하고 있고, 일본 시민사회와 지식인들도 '한국을 적으로
만들지 말라'고 한다. 아베 총리는 이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일본이 화이트 리스트 배제를 결정하면 한국 정부도 대응 조치에 나설 것이다. 현재 한·일
간 정보보호협정 파기를 검토 중이라고 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일본은 이를 압박으로 느끼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한·일 간 대응 조치가 상승 작용을 일으켜 양국 관계가 회복 불가능한 파탄 관계로 고착되면 경제·안보에서
심각한 사태다. 중국, 러시아, 북한만 이득을 본다. 한·일 모두에 커다란 국익 손실로 돌아올
것이다.
-조선일보(19-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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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의 순간
한국어로 '진실의 순간'으로 번역되는 'the moment of truth'는 본래 스페인
투우(鬪牛) 용어인 'el
momento de la verdad'에서 유래한 말이다. 1930년대 헤밍웨이의 투우
논픽션 '오후의 죽음'에서 소개되면서 영어권에 퍼지기 시작했고, 이제는 한국에서도 흔히 사용되는 유행어가 되었다.
투우의 클라이맥스는 투우사가 물레타(붉은 천)로
소를 농락하다가 소의 급소에 검을 찔러 넣는 순간이다. 가공할 뿔을 휘두르는 흥분 상태의 소에게 다가가
일격을 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때 얼마나 침착하고 우아하게 소의 급소에 검을 꽂아 절명(絶命)시키느냐가 투우사 기량의 척도가 된다. 이처럼 투우사가 소와 일대일로 맞서 담력과 능력을 입증해야 하는 순간이 바로 진실의 순간이다. 영광의 순간이 될 수도 있지만, 치명상을 감수해야 하는 '위기의 순간'이라는 의미가 본래 뜻에 내포되어 있다.
일본어에는 '도탄바(土壇場)'라는 말이 있다. 본래 뜻은 에도시대에 죄수를 참수(斬首)하기 위해 흙[土]을 볼록하게 쌓아 만든 단(壇) 형태의
사형 집행장이다. 포박을 당해 꼼짝 못 하고 단두(斷頭)의 칼날을 기다려야 하는 장소라는 뜻에서 '절체절명의 위기'를 뜻하는 관용어로 사용된다. '도탄바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다' '도탄바에서 대역전극을 펼치다' 등의 표현을 현대 일본어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개인이건 국가건 진실의 순간은 가급적 맞이하지 않는 것이 좋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이듯 불확실성은 줄이고 리스크는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베트남의 전쟁 영웅 보응우옌잡(武元甲)은 자신의 불패 철학을 '3불(不) 전략'으로 요약한
바 있다. 적이 원하는 시간에 싸우지 않고, 적이
좋아하는 장소에서 싸우지 않고, 적이 생각하는 방법으로 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숙적(宿敵)이 걸어온
싸움이니 굳이 진실의 순간을 마다하지 않겠다면 감정은 절제하고 보 장군의 지혜를 되새기면 좋을 것이다.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조선일보(19-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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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호재' 만났다고 좋아하는 집권 민주당
민주당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이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에 따른 한·일 갈등이 내년
총선에서 여당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취지의 보고서를 작성해 소속 국회의원들에게 보냈다. 연구원은
최근 여론조사 결과를 토대로 "우리 지지층일수록 현 상황에 대한 여야의 대응이 총선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며 "원칙적
대응을 선호하는 여론에 비춰볼 때 총선 영향은 긍정적일 것"이라고 했다. 외교적 해법보다 반일(反日)
싸움이 득표에 도움이 된다는 얘기다. 심각한 경제 위기 상황에서 일본의 무역 보복까지
겹치고 있는데 집권당이 '일본과 싸우면 선거에 유리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 이들에게 힘든 기업, 국민의 사정과
국가 안위는 몇 번째 순위인가.
문건이 공개돼 논란이 일자 당 대변인이 "당에서 지시한 것이 아니다"라며 선을 그었지만 보고서 내용이 지금 여권의 솔직한 속내일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지금의 이 사태는 외교 문제로 경제 보복을 하는 일본의 책임이다. 그와
함께 뻔히 예상된 문제를 장기간 방치해온 한국 정부에도 책임이 있다. 그런데 정부는 문제가
터지자 반일 선동부터 시작했다. 반일 감정에 불을 지르면 선거 호재가 될 수 있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청와대 조국 수석이 "징용 판결을 부정하면 친일파"라고 나선 것이나 대통령이 이순신이나 거북선을 말하고 다니는 것도 같은 계산일 것이다.
민주당에서는 내년 도쿄 올림픽 보이콧 주장이 나왔다. 일부 의원들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을 파기하자"고 했다. 북한 미사일 최종 궤적은 일본의 정보를 받고 알았다. 그래도 여권
안팎에서는 '내년 총선은 한·일전'이라는 주장도 나온다고
한다. 어이없고 말도 안 되는 얘기다. 하지만 정부 응원단이
된 언론들과 열성 지지층을 동원하면 그조차 만들 수 있다고 보는 모양이다.
이해찬 대표가 "한·일은 헤어질 수 없는 이웃인 만큼 감정을 삭여 공존할 수 있는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이 진심이라면
초등학생을 반일 시위에 동원하는 것과 같은 지나친 행태에 경종을 울려야 한다. 일본의 부당한 조치에는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저열한 국내 선동을 하면 일본이 웃을 것이다. 지금은 안보와 경제 위기다. 무능으로 이 위기를 초래한 정부와 민주당은
좋아할 때가 아니라 책임을 느껴야 할 때다.
-조선일보(19-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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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총리에게 마지막으로 촉구한다
한국을 수출 심사 우대국(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는
결정을 내릴 일본 각료회의가 2일 열린다. 이를 앞두고 미국
고위 당국자가 한·일 양국에 '분쟁 중지 협정'에 합의할
것을 촉구했다고 외신들이 보도했다. 양측이 실제 조치를 중단하고 협상 테이블에 앉으라는 뜻이다. 곧 태국에서 아세안안보포럼이 열린다. 이 자리가 미국의 중재 아래
한·일이 일단 '휴전'에라도 합의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 한국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과 미국을 위해서도 반드시 그렇게 돼야 한다.
한국을 신뢰하기 힘든 국가로 규정하는 화이트리스트 배제 조치는 한국을 적대 국가로 간주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한국도 대응 조치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양국 외교 경제 관계가
파탄 나면 세계 경제에까지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양국 내 반일, 혐한 감정을 걷잡을 수 없이 키워 오랫동안 씻기 힘든 앙금을 남기게 될 것이다. 여기서 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다.
일본 아베 총리는 전후 최장수 총리가 된다. 일본 내에서 점증해온 혐한 기류를 적절히 이용해온
덕도 보았다. 이번에도 한국의 반발을 꺾고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 일본의 보복으로 한국산에 의존하는 세계 기업과 산업 생태계가 혼란에 빠지고 상호
신뢰 위에 구축된 글로벌 공급 사슬이 무너진다면 세계 경제가 위축될 것이다. 국제사회는
한국의 책임도 거론하겠지만 자유무역의 최대 수혜국인 일본이 자유무역을 외교 보복의 수단으로 휘두르는 것에 더 비판적일 것이다. 일본이 그동안 어렵게 구축해온 국제적 이미지를 잃고 중국과 비슷한 폭력적 국가의 대열로 들어서는 것은
아베 총리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동북아는 중국의 패권 욕망과 북한의 핵무장, 러시아의 아시아 개입주의로 안보 격랑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의 전략폭격기 편대가 한·일 사이의 바다를 휘젓고, 북한은 일본 방향으로 연일 미사일을 쏘고 있다. 한·미·일은 좋든
싫든 자유민주 이념을 공유하는 안보 공동체로 묶여 있다. 한국은 일본에 있는 미군 후방 기지 없이
안보를 보장받을 수 없고, 일본은 한국이라는 방파제 없이 안전할 수 없다.
어느 때보다 한·미·일 간 협력과 공조가 필요한 지금, 혐한과 반일의 극한 대치는
자국 내 지지층을 결집하는 정치 게임에는 유리할지 몰라도 한·일 양국과 동북아의 지속적인 안정에는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결국 한·일 모두 패자가 되고 만다. 아베 총리는 양국 미래를 벼랑
아래로 몰 수 있는 화이트리스트 배제를 철회하는 결단을 내리기를 바란다. 아직 기회는 있다.
-조선일보(19-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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