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원전이었던 적 없다'는 이재명 정부]
[개혁군주 영조의 '내로남불']
[장자, 문왕에게 삼검을 설하다]
'탈원전이었던 적 없다'는 이재명 정부
현 정부 에너지 정책이
처음부터 실용주의였다고?

“탈원전은 정치적 프레임이지, 우리나라는 실제 탈원전을 한 적이 없다.” 2022년 7월, 공영방송인 TBS에서 뉴스를 진행하던 김어준씨가 한 말이다. 2012년 대선이 부정선거라는 내용의 ‘더 플랜’이란 영화를 만들었고, 세월호 고의 침몰설을 주장하는 등 온갖 가짜뉴스를 퍼뜨린 그이지만, 문재인 정권이 탈원전을 안 했다는 저 말은 너무도 황당해 말이 안 나올 정도였다. 진실은 이렇다. 문 정권은 경제성을 조작해 가면서 월성 1호기를 폐쇄했고, 건설이 완료된 신한울 1·2호기는 운영 허가를 내주지 않는 바람에 가동하기까지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한창 짓고 있던 신한울 3·4호기는 한동안 건설이 중단됐고, 고리 2호기는 허가 기간 만료 2년 전에 했어야 할 ‘계속운전’ 신청을 안 하는 바람에 2023년 4월부터 가동이 중단돼 올 3월 재가동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정도면 세계 탈원전 순위에서 독일에 이은 단독 2위쯤 될 것 같은데, 독일이 유사시 원전 대국 프랑스로부터 전력을 공급받는다는 점에서 실질적 1위는 문 정권 시절 대한민국일 듯하다. 2011년 발생한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탈원전을 외치는 목소리가 높아진 것은 이해하지만, 일조량이 적고 강풍도 안 부는 대한민국에서 덜컥 탈원전을 추진한 건 국가 지도자로선 너무도 무책임했다.
이게 잘못된 선택임이 드러나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바로 인공지능(AI) 시대의 개막. 예컨대 구글 검색에 평균 0.3Wh의 전력이 쓰인다면 챗GPT는 그보다 10배에 가까운 2.9Wh의 전력이 필요하단다. 사진을 애니메이션(지브리 화풍)으로 만들어주는 챗GPT 프로그램이 ‘전기 먹는 하마’로 불리는 이유도 이 때문인데, 2050년에는 전 세계 AI가 소비하는 전력량이 지금의 2.5배로 늘어날 전망이란다. 지금도 AI의 핵심인 데이터센터가 정전으로 가동이 중단됐다는 기사가 간간이 나오고 있으니, 세계 각국에서 AI 시대를 대비한 전력 확충에 비상이 걸린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간 기업들에 강요하다시피 했던 RE100의 개념이 재정립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그 한 예. ‘기후그룹(The Climate Group)’이라는 영국 비정부기구가 처음 시작한 RE100은 ‘Renewable Energy 100%’의 약자로, 기업이 제품 생산에 필요한 에너지의 100%를 재생에너지로 하자는 것이다. 여기에 구글을 비롯한 빅테크 기업이 속속 합류하면서 RE100은 마치 국제 규약에 준할 정도의 힘을 얻었다. RE100에 참여하지 않는 기업들은 수출길이 막힐 것이라는 얘기도 나왔을 정도. 하지만 AI 시대 이후 RE100의 실효성은 급격히 추락했다. 구글만 해도 5년 전보다 이산화탄소를 48%나 더 배출하고 있는데 무슨 RE100인가? 이런 상황에서 미국과 유럽의 주요국은 재생에너지만 고집하는 RE100을 넘어 원전과 수소를 포함한 ‘CF(Carbon Free·무탄소) 100’을 대안으로 주목하고, 탈원전 폐기와 신규 원전 건설에 돌입했다. 세계 첫 탈원전 국가였던 이탈리아는 물론 벨기에·스웨덴 등이 다시 원전을 짓겠다고 나섰고, 이미 원전 강국인 프랑스도 2050년까지 14기의 원자로를 추가로 짓는단다. 아시아도 예외가 아니어서, 중국은 향후 10년간 원전 150기를 건설할 예정이며, 후쿠시마 사고 당사자인 일본도 진작에 탈원전에서 유턴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독일의 반성. 프리드리히 메르츠 총리는 최근 한 비즈니스 모임에서 탈원전 정책이 ‘심각한 전략적 실수’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2023~2024년 독일 경제는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했고, 작년에도 겨우 0.2% 성장에 그쳤는데, 그 배경 중 하나로 탈원전이 지목되고 있어서다.
다행스러운 점은 이재명 대통령이 그간의 입장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이다. 20대 대선 당시 ‘감(減)원전’이라는 공약을 내세웠고, 후보 토론회 당시 RE100으로 윤석열 후보를 공격하기도 했던 이 대통령은 작년 9월만 해도 원전 신규 건설에 부정적이었다.
그랬던 이 대통령의 입장이 바뀐 것은 지난 1월 21일 신년 기자회견에서였다. “에너지의 미래를 고려하면 막대한 에너지 수요가 발생하는 것은 사실”이므로 “이념이 아닌 현실과 국민 뜻에 기반해 판단하겠다”는 것. 그로부터 6일 뒤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은 지난 정부에서 추진한 신규 원전 2기를 계획대로 건설하겠다고 발표했다. “한국은 에너지 섬나라이면서 동서 길이가 짧아 태양광 발전만으로 전력 운영을 하기에 매우 어려운 조건”이라는 게 김 장관의 말인데, 탈원전을 당론으로 삼는 더불어민주당에서 국회의원을 지냈고, 불과 2년 전만 해도 RE100을 지지했던 그가 갑자기 입장을 바꾼 이유가 혹시 대한민국이 사방이 막힌 사실상의 섬나라라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았기 때문일까?
장관은 그렇다 쳐도, 대통령이 국가의 중요 정책에 대해 입장을 180도 바꾸려면 독일 총리가 그랬던 것처럼 반성 같은 게 있어야지 않을까 싶지만, 이런 모습이 어디 하루 이틀인가? 지난 1월 12일 이 대통령의 NHK 인터뷰를 보라. 이 대통령은 우리나라가 일본과 캐나다 등 12국이 가입된 경제협정에 가입하는 조건으로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 재개를 논의하자고 했다! 그가 민주당 대표 시절 후쿠시마 방류수를 ‘독극물’이라고 했던 걸 생각하면, 저 정도의 180도 태세 전환은 정말 어질어질한데, 하물며 과거의 탈원전 이력을 따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하정우 청와대 AI미래기획수석의 다음 말은 도저히 참기 어렵다. “이재명 정부의 에너지 정책은 처음부터 실용주의 에너지 믹스 정책이었다. 탈원전이었던 적이 없다.” 3년 반 전 김어준의 데자뷔, 좌파 대통령들은 참 좋겠다. 저렇게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이들이 계속 나와서.
-서민 단국대 기생충학과 교수, 조선일보(26-02-14)-
_______________
개혁군주 영조의 '내로남불'
금주령 어긴 자는 처형하고 자신은 술을 마셨다..

등극한 지 만 2년째 되던 서기 1726년 10월 13일, 조선 21대 왕 영조가 종묘에 행차했다. 선왕 경종 삼년상을 마치고 신위를 종묘에 모신 영조는 이날 오후 창덕궁 인정전에서 3대 국정지표를 발표했다.(1726년 10월 13일 '영조실록') 좌의정 홍치중(洪致中)이 대독한 국정지표는 세 가지였다.
첫째는 계붕당(戒朋黨)이다. 편가르기 때려치우고 정치 똑바로 하라는 주문이다. 둘째는 계사치(戒奢侈)다. "금과 옥은 먹을 수도 입을 수도 없으니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아끼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계숭음(戒崇飮)이다. "술은 사람을 미치게 하는 광약(狂藥)이니 엄금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이날부터 1776년 영조가 죽을 때까지 50년 동안 조선은 화합의 정치와 검소한 도덕적 삶과 주정뱅이 없는 세상이 됐다? 그럴 리가 없었다. 문제는 입으로 내뱉은 도덕률 뒤에 숨은 위선(僞善)이었다.
18세기 조선의 가난과 사치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가난하게 살았다. 아시아 요업산업을 선도했던 조선은 전쟁 때 일본군에 도공들을 집단으로 빼앗겼다. 농사지을 땅은 급감했고, 나라 재정도 엉망이었다. 한번 파괴된 기반시설은 회복이 느렸다.
세월이 흘러 숙종(재위 1674~1720)대가 되니 태평성대가 왔다. 민간 생산이 서서히 늘고 이에 따라 상류층이 부의 상징으로 사치를 부릴 그 무렵, 영조가 등극한 것이다.

서기 1726년 음력 10월 13일 창덕궁 인정전에서 영조가 3대 국정지표를 발표했다. 당쟁을 금하고 사치를 금하고 술을 금하여 나라를 바르게 하겠다는 선언이었다. 하지만 법과 개혁과 규제는 적용되는 곳이 따로 있었다. 법을 어긴 측근에게 법은 적용되지 않았고 개혁군주 영조는 신하들과 수시로 술을 즐겼다. 입으로는 온 세상이 함께 사는 이상 사회를 선언했지만, 그때 세상은 그저 '그들의 천국'이었다.
엄한 국정지표에 따라 부녀자들은 화려한 가체(加髢)가 금지되고 족두리를 써야 했다.(1756년 1월 16일 '영조실록') 금실로 수놓은 비단 또한 금지됐다. 민간에 화려한 그릇이 유행하자 영조는 값비싼 청화 안료를 쓰는 청화백자 제작을 금지하고 질 떨어지는 철화백자만 생산하도록 명했다.(1754년 7월 17일 '영조실록') 사치금지법은 재위 내내 사회 전반에 시행됐다.
술 먹고 사형 당한 관리
재위 7년째, 영조는 다시 한 번 금주령을 강화했다. "왜 사대부 양반에게는 법을 적용하지 않고 상민과 천민에게만 집행하는가. 세력있는 자는 적발하지 못하니, 근본을 버려두는구나[可謂捨本治末者也]."(1731년 6월 10일 '영조실록') 몸통은 놔두고 깃털만 건드리니, 언젠가는 혼쭐을 내겠다는 경고였다.
마침내 간 큰 고위 관리가 시범 케이스로 적발됐다. 함경 남병사 윤구연이 술을 마시다 걸린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윤구연 집에서 술 냄새가 나는 빈 항아리가 나온 것이다. 심문은 영조가 직접 했다. 장소는 서울 남대문이었다.(1762년 9월 17일 '영조실록') 궁을 떠나 남대문에 도착한 영조는 약방 제조가 바친 탕제를 마시고 문초를 시작했다.
"왜 술을 마셨나." 윤구연은 "술이 아니라 매[鷹] 알을 담가뒀다"고 답했다. 영조는 "술 냄새 나는 매 알도 있나"라며 일단 곤장을 한 대 쳤다. 윤구연이 "이 몸의 첩과 첩의 어미와 종이 술을 담갔다"고 실토했다. 영조는 다시 곤장을 세 대 치고 이리 말했다. "너는 불효에 불충을 저지르고 군법까지 위반했다. 어찌 피하겠는가." 윤구연이 늘어놓는 장황한 변명을 끝까지 들은 영조는 "금주령을 어긴 죄인 목을 잘라 장대에 걸라"고 명했다.
사헌부 교리 강필리와 사간원 사간 여선응, 홍문관 지평 최청이 "목숨은 중하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왕은 "너희가 군왕을 살인자라 부르는가"라며 세 사람을 파면했다. 영의정, 우의정, 좌의정이 또 처벌을 만류했다. 영조는 "법은 만인에게 적용되는 것[法者 非予之法 卽古法]"이라며 이들 또한 그 자리에서 파면했다. 그 사이 나발과 북 소리가 울려 퍼졌고 윤구연은 목이 잘렸다. 영조는 윤구연 첩을 함경도 갑산 관비로 보내고 비변사에 있는 아들 윤범행과 칠곡부사인 형 윤경연 또한 파직시켰다.(1762년 9월 17일 '승정원일기') 아무도 반항하지 못했다.
민생사범 단속령-'여가탈입'의 금지
임진왜란 이후 한성 인구는 급격히 증가했다. 당연히 주택난도 심화됐다. 지방에서 벼슬자리를 얻어 상경한 관리들은 집이 없었다. 상경 관리들 가운데에 버르장머리 없고 포악한 사람들은 아무 여염집[閭家·민가]에 들어가 집을 빼앗고 살았다. 주민을 채찍으로 때려 내쫓고 집을 빼앗기도 했다.(1615년 8월 2일 '광해군일기') 이를 '여가탈입(閭家奪入)'이라 한다. 여염집을 빼앗아 들어간다는 뜻이다. 17세기 호적상 한성 인구 75%가 상민과 천민이었으니(이근호, '17, 8세기 여가탈입을 통해 본 한성부의 주택문제'), 백성 주거권과 재산권은 언제든지 25%인 양반에 의해 폭력적으로 박탈될 위기에 놓여 있었다. 영조 즉위 후에도 이런 불법은 여전했다.
영조는 즉위와 함께 여가탈입 금지를 특별히 지시했다.(1724년 11월 1일 '영조실록') 하지만 민가를 빼앗은 관리는 2년 금고형, 일반 사대부는 과거 응시 자격 박탈 6년형이라는 형벌이 규정된 때는 재위 30년째인 1754년이었다.(1754년 7월 16일 '영조실록') 한두 명 처벌로 없애기에는 여가탈입이 너무 많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영조 7년 사간원 정언 이성효가 "여가탈입 금지령을 정승 한 명이 어겼는데, 아무도 보고를 하지 않았다"며 "재조사를 통해 처벌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이에 영조는 "승정원에서 조사해 의법 조치하라"고 명했다. 다음 날 금지령을 어긴 정승 정체가 밝혀졌다. 바로 5년 전 3대 국정지표를 대독한 당시 좌의정이자 현 영의정 홍치중이 아닌가.(1731년 7월 15일, 16일 '영조실록')
개혁의 민낯 '내로남불'
왕이 말했다. "법 적용에 어찌 차별이 있을 수 있겠는가? 금령을 신칙하는 뜻은 폐지할 수가 없다. 관련자들을 노역형에 처한 뒤 유배시키라." 과연 엄한 개혁 군주였다. 하지만 홍치중에 대해서는 그 처분이 달랐다. 영조가 말했다. "홍치중에게 선유(宣諭)하게 하여 대명(待命)하지 말도록 하라."
'백성에게 임금 뜻을 알리게 하고 그로써 처벌을 면하게 한다'는 뜻이다. 구두 경고도 아닌, 스스로 반성문 한번 쓰게 하고 사건을 덮겠다는 뜻이다. 우승지 조명신이 "임금과 신하의 의리는 생각하지 않으십니까(不念堂陛之義乎)?" 하고 물었다. 홍치중은 "오해가 있었다"고 변명했다. 영조는 '온화한 비답을 내려 위로하고[上溫批慰諭]' 관련자들에게 내렸던 노역형과 유배형도 취소시켰다.(1731년 7월 16일 '영조실록') 바로 한 달 전 "세력 있는 자는 적발하지 못하니, 근본을 버려두는구나"라고 내뱉었던 탄식은 간 곳 없었다. 개혁보다는 '군신 간 의리'가 먼저였다.
"송절차가 지금은 참 맑구나"

영조의 열네 번째 딸 화유옹주 묘 부장품. 청나라에서 수입한 황채장미문병(黃彩薔薇紋甁)이다. 조선은 당시 수입은 물론 고급 자기 생산도 금지된 나라였다. /국립고궁박물관
1755년 9월 영조는 "식혜를 예주(醴酒)라 하니 이 또한 술이다. 제사상에 술 대신 올리라"며 제수용 술을 금지했다. 대신 영조는 술 대신 송절차(松節茶)를 즐겼다. "고금(古今)에 어찌 송절차의 잔치가 있겠는가?"라며 금주를 실천하는 모습을 스스로 대견해할 정도였다.(1766년 8월 16일 '영조실록')
그런데 이 송절차가 정체불명이었다. 차를 마시면 왕이 이상해지는 것이다. 이런 일이 있었다.
'홍건이라는 종9품 무관이 강론에 참석했다. 왕이 그에게 물었다. "'정흉모(丁胸矛)'라는 창을 아느냐." 홍건이 머뭇대자 영조는 병조판서에게 곤장을 치게 했다. 곤장을 거의 반쯤 쳤을 때에도 묵묵무답이었다. 영조가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요상한 놈이다. 내가 직접 심문해 혼내 주겠다." 옆에 모시던 사람들이 새파랗게 질렸다. 홍건이 천천히 아뢰었다. "성상 말씀이 평소 알고 있던 것과 달라 즉시 대답하지 못했나이다." 의외로 홍건은 정흉모라는 무기에 대해 해박하게 답했다. 영조는 급히 그를 서천현감에 임용했다.'(성대중, '청성잡기'4 '성언·醒言', '초관 홍건의 기개와 영조')
말단 무관에게 화를 내고 평소와 달리 행동하더니 종9품 말직을 종6품 현감으로 즉석에서 인사 조치하는 기행. 그 비정상적인 행동에 대해 '청성잡기'에는 '영조가 마침 송절차를 마신 터라 약간 취한 채 말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술이었다.
신하들에게 송절차를 권하며 "취해서 쓰러지더라도 허물 삼지 않겠다"고 한 사람도 영조였고(1769년 2월 26일 '영조실록'), "전에는 탁했으나 지금은 맑고, 물을 많이 섞으니 담백하다[釀法勝前 昔濁今淸 則取多和水 故其味猶淡]"고 한 사람도 영조였다.(1769년 6월 12일 '승정원일기') "법은 만인에게 적용되는 것"이라고 서릿발처럼 선언한 사람도, 개혁 군주 영조였다. 만인 속에 본인은 없었다.
윤구연 처형되던 날 죽다 산 사내
훗날 다산 정약용은 윤구연을 처형하던 날 '실록'과 '승정원일기'에 누락된 사실 하나를 자기 문집에 기록해 놓았다. '임금께서 숭례문에 납시어 윤구연 머리를 베어 도성 사람들에게 보이고 좌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술 마신 자가 있거든 바로 고하라. 저와 같이 죽일 것이다." 그때 대장 이주국이 임금을 호위하고 있었는데 앞으로 나와 엎드려 말하기를 "소신은 얼마 전 술 한 잔을 마셨으니 감히 숨기지 못하나이다"라고 하였다. 임금께서는 좌우를 둘러보며 다른 말을 하셨다[上顧左右而言他]. 그 자리에 있던 여러 신하들은 다리를 덜덜 떨었다[羣臣在班者 爲之股栗].'(정약용, 여유당전서 보유, '혼돈록·餛飩錄' 3 '이대장·李大將')
술을 먹었다고 자수한 사람이 하필이면 자기가 아끼던 무관이었다. 왕은 못 들은 척하고 딴청을 피웠다. 신하들은 그 위선 앞에서 아무 말 못하고 떨 뿐이었다. 집은 고관대작에게 빼앗기고 장식은 사치라 금지됐으며 술은 목숨 걸고 마셔야 하고 고급 그릇을 쓰면 비난받던 시대였다.
"우리는 즐긴다"
1776년 개혁 군주가 죽었다. 이듬해 열네번째 딸 화유옹주가 죽었다. 1992년 경기도 부천 옹주와 남편 황인점 합장묘에서 옥비녀, 그릇 따위 화려한 부장품 30여 점이 쏟아졌다. 모두 생전에 사용하던 물건들이었다. 그릇도 10여 점이 나왔다. 이 가운데 황채장미문병(黃彩薔薇紋甁)과 녹유리장경각병(綠琉璃長頸角甁)은 청나라 수입품이었다. 꽃병들이 이리 말한다. "저들은 처벌하고, 우리는 즐긴다."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조선일보(19-08-21)-
________________
장자, 문왕에게 삼검을 설하다
천자지검(天子之劍) 있으면 나라는 누구도 흔들 수 없다
제후지검(諸侯之劍) 있으면 나라는 결단코 지지 않는다
서인지검(庶人之劍)뿐이면 나라는 처참한 쑥대밭 되니
문왕 시절 서인지검 난무해 한 번도 경험 못한 나라 됐네
# 세상이 하수상하여 〈장자(莊子)〉를 들췄더니 '설검(說劍)' 편의 세 가지 검(三劍) 이야기가 느닷없이 눈에 들어왔다. 헛바람 들고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어 기막힌 세태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다. "옛날 문왕(文王)은 칼싸움을 좋아하여 식객으로 모여든 검사(劍士)만 족히 삼천 명이 넘었다. 밤낮으로 문왕 앞에서 칼싸움하여 죽고 다친 자가 한 해에 백여 명이나 되었어도 그칠 생각은커녕 되레 즐기고 있었다. 이와 같이 하기를 수년이 지나자 나라 형편이 말이 아니게 되었고 급기야 이웃 나라 제후가 옆구리를 치며 공략해 들어왔다."
# 태자(太子)가 이를 걱정하여 좌우 측근들을 모아놓고 말하길 "누가 왕에게 간하여 칼싸움을 그치게 할 것인가." 좌우의 신하들이 말했다. "장자(莊子)라면 능히 할 수 있을 것이외다." 이에 장자와 태자가 어렵사리 만났을 때 태자 말하길 "우리 문왕께서는 쑥대처럼 풀어헤친 더벅머리에 눈을 부릅뜨고 거친 소리를 질러대는 그런 자를 좋아하십니다." 그러자 장자는 평범한 옷을 벗고 대신 검복(劍服)을 갖춰 입은 후 문왕을 만났다. 그때 예를 갖춰 잰걸음으로 걷지 아니하고 왕을 보고서 절도 하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왕께서 칼싸움을 좋아하신다 하기에 제 검을 가지고 왕을 알현코자 한 것입니다." 이미 칼을 빼 든 문왕이 곧장 대꾸하듯 물었다. "그대의 검은 어느 정도의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가?" 장자가 받아 말하길 "신(臣)의 검은 열 발짝 나아갈 적마다 한 사람을 쓰러뜨리고, 그렇게 하여 천 리를 나아가는 동안 가로막을 자가 없습니다." 이에 문왕이 "천하무적이로다!" 하며 감탄한 후 이런 고수(高手) 검객에게 맞서 싸울 검사들을 뽑기 위해 휘하 식객 검사들이 7일 동안 겨루게 하였는데 이 때문에 죽거나 다친 이가 60여 명이었다. 그 가운데 대여섯 명을 추려내 고수 검객 장자와 맞서게 했다. 대결에 앞서 문왕이 먼저 이르길 "싸울 검 길이는 어느 정도가 좋겠는가?" 하니 장자가 대꾸하길 "신에게는 세 가지 검이 있는데 오직 왕께서 쓰자고 하시는 것을 따를 것이니 먼저 이에 대해 설명드리고 나서 일합(一合)을 겨루겠나이다." 왕이 궁금하여 말하길 "세 가지 검이 무엇이냐?" 하니 장자가 "천자지검(天子之劍), 제후지검(諸侯之劍), 서인지검(庶人之劍)이 그것입니다" 하고 아뢰었다.

# 장자가 말했다. "천자지검은 연나라의 연계(燕谿)와 색외(塞外)의 석성(石城)을 칼날 끝으로 삼고, 제(齊)나라의 대산(岱山)을 칼날로 삼으며, 한(韓)나라와 위(魏)나라를 칼자루로 삼아 사방 오랑캐를 치고, 춘하추동 사시의 추이에 따라 주위를 둘러치며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으로 통제하고 형벌과 은덕으로 휘두르니 봄여름에는 화기(和氣)로 유지하고 가을 겨울에는 위엄(威嚴)으로 내려칩니다. 이 검을 한번 쓰면 온 천하가 떨며 복종합니다." 한마디로 천자지검은 천하를 떨게 하고 엎드리게 만드는 칼이니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를 만들려면 반드시 거머쥐어야 할 검이다. 하나 기껏 북쪽 경계 너머에서 '삶은 소 대가리도 웃을 일'이라는 조롱을 받고서도 응징은커녕 말소리조차 크게 못 내는 문왕이 감히 이런 천하지검의 위엄과 위력을 감당이나 하겠는가 하는 것이 세간의 민심이었다.
# 장자가 다시 말했다. "제후지검은 지혜와 용기 있는 이를 칼끝으로 삼고, 욕심 없는 청렴한 이를 칼날로 삼으며, 현명하고 어진 이를 칼등으로 삼고, 충의와 성덕이 있는 사람을 칼자루의 테로 삼으며 무용이 뛰어난 호걸을 칼자루로 삼습니다. 이 검을 곧장 세우면 앞에서 당할 것이 없고 휘두르면 사방에서 당할 것이 없습니다." 장자의 말대로 제후지검은 사람을 제대로 써 기강을 잡고 민심을 수습해 나라의 사방을 안정시키는 검이다. 하지만 '곡학아세'하는 이가 칼끝이 되고 '내로남불'하는 이가 칼날이 되며 '표리부동'한 이가 칼자루가 되는 한 그런 검은 내려치는 순간 부러지다 못해 자기를 되찌르고 말 일이다.
# 또 장자가 말한다. "서인지검은 쑥대처럼 풀어헤친 머리에 철모를 깊게 눌러쓰고 두 눈 부릅뜬 채 괴성을 지르며 위로는 상대 목을 베고 아래로는 상대의 간과 폐를 찌를 뿐인 천하 잡류의 칼입니다. 서인지검을 쓰는 것은 투계(鬪鷄), 즉 싸움닭과 다를 바 없습니다. 지금 문왕께서는 천자와 같은 자리에 있으면서 서인지검을 좋아하시니 황송하오나 저는 왕을 경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자지검으로 천하를 안녕되게 하고, 제후지검으로 나라의 질서를 잡아 부국강병의 꿈을 이뤄내기는커녕, 온갖 미몽과 환상에 사로잡혀 밖으로는 옴짝달싹 못 하면서 안에서만 못난 것들을 닭싸움질시키듯 닦달하기에 여념 없는 문왕의 경박한 처신을 장자는 힐난한 것이다.
# 장자의 세 가지 검에 대한 설파가 있은 뒤 "문왕은 창피함을 느꼈던지 궁중에 칩거한 채, 석 달 넘게 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사이 삼천 검사는 평소 칼싸움하던 자리에서 서로 상대를 칼로 찌르며 모두 죽었다." 이 와중에 자유 찾아 목숨 걸고 북쪽 국경 넘어와 어렵게 살던 어미와 자식이 굶어 죽었다. 오호애재(嗚呼哀哉)라! 투계 같은 칼싸움꾼들을 거둬 먹이며 닭싸움시키는 데 마구 쓸 돈은 있었으나 정작 살아보겠다고 목숨 걸고 국경 넘은 백성은 굶어 죽는 나라가 되었으니 '더는 남에게 지지 않는 나라'는 무엇이며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는 이 무슨 공허한 말잔치인가. 참으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던 문왕의 즉위사(卽位辭)는 이렇게 실현되고야 마는 것인가? 오호통재(嗚呼痛哉)라!
- 정진홍 컬처엔지니어, 조선일보(19-08-21)-
===============================
'[세상돌아가는 이야기.. ] > [時事-萬物相]'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김주애 후계 공식화하면 고모 김여정과 유혈 사태 가능성"] .... (11) | 2026.02.16 |
|---|---|
| [서울 집중 해소하려 시골에 예산 쏟아붓는 게 '지역균형발전'인가] (3) | 2026.02.14 |
| [이재명과 닉슨, 軍을 보는 서로 다른 눈] .... (0) | 2026.02.14 |
| [먼 나라 얘기 같지 않은 '아프간 망국 백서'] [ .. ‘남 탓’ 통상·외교] (1) | 2026.02.13 |
| ["부총리님" 대신 "경훈님"] [나이가 벼슬] [노인 폄하하던 사람들.. ] (1) | 2026.0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