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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을 얻은 괴벨스] [국화와 칼] [파울 요제프 괴벨스]

뚝섬 2025. 5. 1. 10:04

[영생을 얻은 괴벨스]

[국화와 칼]

[파울 요제프 괴벨스]

 

 

 

영생을 얻은 괴벨스

 

나는 1945년 5월 1일 총성이 울리는 베를린에 서 있다. 오늘 나치의 국민계몽선전장관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여섯 자녀(1남 5녀) 전부를 살해한 뒤 부인 마그다와 함께 극단적 선택을 한다. 자식들을 몰살시키는 과정에 마그다가 괴벨스보다 더 적극적이었다고 하는데, 히틀러 없는 세상에서는 살 필요가 없다는 게 이유였다. 전 남편과의 사이에 1남을 둔 이혼녀 마그다는 괴벨스를 만나기 전부터 히틀러의 사생팬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히틀러는 괴벨스와 재혼하라고 말했고 그녀가 이 성스러운 지시를 받든 것은 어두운 신앙심 이전에 그런 식으로라도 히틀러 곁에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녀 여섯의 이름 첫 글자가 전부 H인 것도 히틀러를 사랑해서 그랬다는 역사학자들도 있다.

 

히틀러 집권 출발기인 1933년 5월 10일 괴벨스는 ‘베를린 서적 소각 사건’을 일으킨다. “책을 불사르는 것은 오직 시작일 뿐이다. 그런 곳에서는 결국 인간을 불태울 것이다”라고 예언한 이는 1856년에 죽은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였다. 히틀러의 사탄이 되기 전 괴벨스는 실업자이자 지식인이었다. 오른발이 왼발보다 짧아서 걸음을 절었던 그는 문헌학 박사이자 불태울 만한 가치가 없는 소설 ‘미하엘’을 쓴 작가였다. 그가 무의미한 소설가였던 것은 실패한 화가였던 히틀러의 억하심정(抑何心情)과 오버랩된다.

 

괴벨스는 비록 하루뿐이었지만 독일 제3제국의 제2대 총리로 살았다. 히틀러가 죽으며 그를 자신의 후임으로 임명해서였다. 괴벨스의 진면목은 인류사가 공인하는 ‘대중 파시즘의 선구자’에 있다. 괴벨스는 이 분야의 원천 기술이자 사도 바울이다. 영향력만 따진다면 그는 좌익이든 우익이든 현대 정치와 현대사회 안에 엄청난 수의 제자들과 자발적 노예들을 거느리며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마르크스가 부럽지 않고 공맹(孔孟)에 꿀리지 않는다. 히틀러는 죽었지만, 괴벨스는 영생(永生)을 얻었다.

 

-이응준 시인·소설가, 조선일보(25-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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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와 칼 

 

일본에 관한 인류학적 분석… '전쟁과 평화 모두 사랑하는 이중성'

 

일본인은 미국이 지금까지 전력을 기울여 싸운 적 가운데 가장 낯선 적이었다.

'일본을 가장 깊이 있게 들여다본 책'으로 손꼽히는 '국화와 칼'의 한 구절입니다. 이 책은 사실 특별한 목적을 갖고 쓰였어요. 미국 국무부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6월, 적국 일본과 일본인의 국민성을 알기 위해 인류학자 루스 베니딕트(1887~1948·사진)에게 의뢰한 보고서에서 시작된 책이죠.

베니딕트는 2년여의 연구 끝에 보고서를 내놨어요. 전시라 일본에 가보지는 못했지만 미국에 사는 일본인을 면담하고 여러 자료를 분석해 완성했습니다. 베니딕트가 보기에 일본인은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배우와 예술가를 존경하며 국화를 가꾸는 데 신비한 기술을 가진 국민"이면서도 "칼을 숭배하며 무사에게 최고의 영예를 돌리는" 사람들이에요. 한마디로 전쟁과 평화를 동시에 사랑하는 이중적인 민족이었죠.

방대한 문헌을 연구한 그는 '유일신 종교가 제시하는 윤리적 절대 기준'이 없기 때문에, 일본인에겐 삶의 목적도 윤리도 상황에 좌우된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상황 의존적이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서라면 전쟁도 불사하고, 반대로 굴종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는 "손에는 아름다운 국화, 허리에는 차가운 칼을 찬 일본인"은 이렇게 태어났다고 적습니다.

국가적 차원의 이중성은 '국가신도(國家神道)'라 불리는 정치와 종교가 혼합된 일본 종교를 통해 드러납니다. 국가신도는 '만세일계(萬世一系)의 통치자인 일왕'을 숭배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메이지유신을 단행한 일본 정치가들은 국가신도가 종교가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종교적 영향력을 가졌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거예요.
 

 

베니딕트는 '계층적 위계질서'를 일본과 일본인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라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국가신도는 일본의 계층 사회를 만들고 유지하는 역할을 했어요. 이를 통해 정치계, 종교계, 산업계 등에서 '알맞은 위치'를 부여받은 사람들은, 그 안에서 '안전하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최하위 계층일지라도 하나의 체계 안에 속한 것은 안전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체계로부터 소외되는 것은 죽음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죠. 전쟁도 하나의 체계였고 그래서 일본인들은 국가가 전쟁을 시작했을 때 자신의 목숨마저 내놓으며 그 체계 안에 있고자 했다는 겁니다.

책 끝에 루스 베니딕트는 '일본의 행동 동기는 기회주의적'이라며 예측을 하나 합니다. "일본은 평화로운 세계가 지속되면 평화주의에 헌신하겠지만, 세계열강이 전쟁 준비에 돌입하는 순간 무장 진영으로 조직된 세계 속에서 자기 위치를 찾을지도 모른다." 루스 베니딕트의 예언 아닌 예언이 현실이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국화와 칼'이 출간 70여 년도 넘은 지금까지 읽히는 고전인 이유입니다.

 

-장동석 '뉴필로소퍼' 편집장·출판평론가, 조선일보(19-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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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요제프 괴벨스

 

언론사 낙방 거듭하던 청년 괴벨스, 히틀러 연설에 매료돼 참모진 합류

선전·선동 맡아 나치 지명도 올려… 나치에 도움 되면 '가짜 뉴스'도 유포… 폭력적인 집회도 숱하게 열어
나치 패망하자 가족과 함께 목숨 끊어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심사 우대국 목록)에서 제외하는 작업을 주도한 사람 중 하나가 세코 히로시게(世耕弘成) 경제산업상입니다.

세코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 시절(2005년) 자민당 공보본부장대리를 지냈어요. 자민당의 선거 전략과 홍보를 맡는 자리입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처음 집권했을 때(2006년)는 총리보좌관을 지냈고요. 자기 세력을 위해선 어떤 논리든 만들어내는 재주가 있어, 그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자민당의 괴벨스'란 별명을 붙였어요. 세코 자신은 이 별명을 질색한다고 합니다. 괴벨스가 누구길래 그럴까요?

히틀러의 입, 괴벨스

파울 요제프 괴벨스(1897~1945)는 나치 정권의 선전·선동을 총괄했던 히틀러의 오른팔이에요. 그는 어린 시절 골수염을 앓아 한평생 다리가 불편했고, 신체적 열등감이 심했어요.
 

 

파울 요제프 괴벨스(오른쪽 끝)는 나치 정권의 선전·선동을 총괄했던 히틀러의 오른팔입니다. 아내 마그다 괴벨스(왼쪽 둘째) 역시 열렬한 히틀러 신봉자였습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그는 자신의 콤플렉스를 지적 우월감을 통해 극복하고자 했어요. 학교에서 누군가 자신보다 더 아는 걸 견디지 못했다고 해요.

괴벨스는 23세 때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취업난에 시달렸어요. 당시 독일은 1차대전 패전의 충격으로 경제난이 심각했어요.

괴벨스는 언론사 취업은 물론 작가가 되는 데도 실패했어요. 그는 이 과정에서 반유대주의에 빠져들고 맙니다. '유대인이야말로 물질주의의 화신이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악덕에 구체적으로 책임이 있는 존재'라는 위험천만하고 편협한 사상이었어요.

괴벨스, 히틀러에 매료되다

이 무렵 괴벨스는 히틀러의 연설을 듣고 감명을 받았어요. 그는 1925년 나치에 입당해 히틀러와 가까워집니다. 당시 일기를 보면 괴벨스가 얼마나 히틀러에게 매료됐는지 드러납니다. '아돌프 히틀러,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 그대는 위대함과 동시에 단순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천재의 특성이다.'

괴벨스는 히틀러가 독일의 부흥을 이끌 인물이라 믿었어요. 히틀러도 괴벨스의 출중한 글솜씨와 연설 실력을 알아보고 그를 핵심 참모로 삼았죠.

1928년 5월 선거에서 득표율 3%였던 나치당은 1932년 7월 선거에서는 득표율이 37%로 크게 오르며 원내 1당이 됩니다. 이 과정에서 괴벨스는 선전·선동을 맡아 나치의 지명도를 끌어올리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웁니다.

그는 나치에 도움이 된다면 '가짜 뉴스'도 서슴지 않고 유포했어요. 나치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멸종시켜야 할 존재'이자 '도살해야 할 대상'이라고 여겼고, 폭력적인 집회를 숱하게 조직했어요. 히틀러는 1933년 총리가 되자마자 그런 괴벨스를 선전부 장관에 임명합니다.

◇'괴벨스의 주둥이'라 불린 보급형 라디오

선전장관이 된 뒤 괴벨스는 우선 신문을 통제했어요. 그는 "언론은 국가가 원하는 곡을 연주하는 피아노"라고 믿었지요.

괴벨스는 또 라디오에 주목했어요. 그땐 라디오가 요즘 유튜브처럼 '새로 뜨는 인기 미디어'였거든요. 그는 라디오를 통해 '히틀러는 구세주이자 천재이고 구국의 영웅'이란 메시지를 퍼뜨렸어요.

더 많은 사람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그는 아예 '국민수신기'라는 76마르크짜리 라디오를 대량생산하게 했어요. 당시 일반 라디오의 반값이었어요. 일반 노동자 2주치 급료 수준이었죠. 독일 인구가 8000만명이던 시절, 이 라디오는 5년 만에 무려 1000만 대가 팔려나갔다고 합니다. 독일 국민은 이 라디오를 '괴벨스의 주둥이'라고 불렀다고 해요.

하지만 2차대전이 길어지면서 독일 국민은 회의에 젖게 됩니다. 괴벨스는 날마다 '독일이 이기고 있다'고 선전했지만 실제로는 하루하루 패색이 짙어졌으니까요.

마침내 나치가 패망하는 마지막 순간이 왔을 때, 히틀러는 베를린의 벙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요. 다른 측근들이 도망가는 와중에도 괴벨스는 끝까지 히틀러 곁에 남아 아내와 여섯 아이와 함께 집단자살 했답니다.

[그 자신도 다리 불편했으면서 장애인 학살 정책 지지했어요]

나치는 1933년부터 '유전적 질환의 자손 예방법'이라면서 유전 질환을 앓는 40만명을 대상으로 강제 불임 시술을 했어요. 이후 1939년에는 'T4 작전(Aktion T4)'이란 이름으로 장애인과 정신 질환자를 학살했어요. 괴벨스는 이 정책을 지지한 핵심 인사 중 하나였어요. 그 자신이 장애인이었는데도요.

참고로 괴벨스의 아내 마그다도 열렬한 히틀러 지지자였습니다. 마그다는 나치 패망 후 아이들과 집단 자살하면서 '총통과 나치즘 이후에 오는 세계는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편지를 남겼어요.

 

-서민영 경기 함현고 역사 교사/기획·구성=양지호 기자, 조선일보(19-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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