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10명 중 3명 ‘조용한 사직’ 상태 ]
[사표 던지는 중앙부처 공무원 1년에 3000명]
[눈먼 돈 당연시하는 나라]
[국민 공복 아닌 정권의 ‘노비’가 돼 버린 공무원들 실태]
[괴물이 된 '문빠']
[관료의 영혼을 저당 잡은 권력]
[상처 주고 소금 뿌리는 정부]
공무원 10명 중 3명 ‘조용한 사직’ 상태
공무원을 흔히 ‘공복’이라고 하지만 요즘 젊은 공무원들은 스스로를 ‘공노비’라고 자조한다. ‘복(僕)’이 종이나 머슴을 뜻하니 차이가 없는 것도 같지만 어감은 완전히 다르다. 공복은 국민에 대한 봉사자이지만 공노비에겐 보람과 사명감이 없다. 박봉에 업무는 과중하고 악성 민원에 시달리기 일쑤다. 경직적 조직문화에 자율성을 발휘하기도 쉽지 않다. 힘들다고 하소연하면 ‘누칼협(누가 칼 들고 공무원 하라고 협박했나)’이라는 비아냥만 돌아온다.
▷한국행정연구원이 중앙행정기관 공무원 1021명을 대상으로 가치관 조사를 한 결과를 연세대 행정학과 연구진이 추가로 분석해 보니 공무원 10명 중 3명은 ‘조용한 사직(Quiet Quitting)’ 상태인 것으로 조사됐다. 실제로 사직은 하지 않으면서 최소한의 업무만 하겠다는 태도로 자리만 지키는 것이다. 응답자의 32.52%(332명)가 ‘조직이 원하더라도 추가적인 직무를 맡을 용의가 없다’고 했다. 일로 인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을수록, 연령이 낮을수록 조용한 사직 가능성이 높아졌다.
▷최근 공직사회는 박봉과 악성 민원, 낡은 조직문화 등으로 크게 위축된 상태다. 올해 9급 초임(1호봉) 공무원의 월평균 급여액은 222만2000원(세전)으로, 주휴수당을 포함한 월 최저임금보다 16만 원 많은 수준이다. 하루에만 평균 100건씩 생기는 악성 민원에 시달려 극단적 선택을 하는 공무원까지 나왔다. 선망의 대상이던 공무원의 인기는 급격히 하락하고 있다. 올해 국가공무원 9급 공채 시험 경쟁률은 21.8 대 1로, 1992년 이후 32년 만에 가장 낮았다. 재직 기간이 5년이 안 된 공무원 퇴직자는 지난해 1만3566명으로 5년 만에 2.4배로 늘었다.
▷조직문화는 무기력을 학습시킨다. 한국행정연구원이 공직을 떠난 청년들에게 물어보니 국민의 삶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공직 문을 여는 순간 깨졌다고 했다. 갓 배치되자마자 인수인계도 없이 수억 원의 예산 편성을 떠넘기며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다. 순환보직으로 1, 2년 뒤 다른 자리로 옮기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가 반복됐다. 능력 있으면 보상과 대우가 좋아지는 게 아니라 업무 부담만 늘어났다.
▷고위 공무원들도 다르지 않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극단을 오가는 정책 기조에 따라 눈치를 봐야 한다. 일을 열심히 하면 직권남용, 안 하다간 직무유기가 될 수 있다. 소신과 적극 행정은 접고 적당히 소극 행정을 하는 게 안전하다는 보신주의가 몸에 밴다. 직원들이 잠재적 퇴사 상태인 회사의 미래가 밝을 수 없다. 젊은 인재들은 공무원 되기를 꺼리고, 기존 공무원들은 자리만 지키려는 분위기에서 국가 행정이 제대로 돌아갈 리 없다.
-김재영 논설위원, 동아일보(24-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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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표 던지는 중앙부처 공무원 1년에 3000명
“우리가 국가의 산업을 책임진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국뽕’에 취해 살았던 시절이다.” 산업통상자원부에서 근무하는 20년 차 공무원 A 씨는 초임 시절을 이렇게 회고한다. 정책 프로젝트가 떨어지면 밥 먹듯이 야근을 하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나라 살림살이부터 일자리, 복지, 안보 등 부처별로 대한민국을 끌고 간다는 긍지와 사명감이 각 부처 공무원들에겐 넘쳤다.
▷요즘 관가 분위기는 달라졌다. 18개 중앙부처 소속 일반직 공무원 중 사표를 던지는 이가 한 해 3000명에 육박한다. 인사혁신처와 국회 자료에 따르면 2021년 일을 그만둔 공무원이 2995명으로 2017년에 비해 57% 늘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법무부, 고용노동부 순으로 많았다. 과기정통부는 산하 우정사업본부의 우정직, 법무부는 교정직 공무원들이 그만둔 사례가 상대적으로 많다. 그외 정책을 담당하는 공무원들의 사표 행렬도 부쩍 늘고 있는 추세다.
▷중앙부처의 허리급이라고 할 수 있는 과장급 이상의 탈(脫)공직이 특히 눈에 띈다. 국토교통부는 2021년 한 해에만 3급과 4급 공무원 26명이, 산업통상자원부는 21명이 사표를 쓰고 기업, 연구소 등으로 옮겼다. 민간 분야의 인력 수요가 늘어나기도 했지만 ‘더 늦기 전에 새로운 기회를 붙잡자’는 분위기가 강해졌다고 한다. 공직이 과거만큼 안정적이지 않고 보상 등 유인책도 떨어진다며 공무원들은 한숨이다. 고위공무원단으로 승진해 봤자 정권이 바뀔 때마다 ‘코드 인사’에 휘둘리거나 인사 유탄을 맞을 것이란 불안감도 적지 않다.
▷스스로 떠나는 공무원들 앞에서 ‘철밥통’은 옛말이다. MZ세대를 비롯한 청년 공무원들의 조기 퇴직도 두드러진다. 연공서열을 비롯한 구시대적 조직문화와 낮은 처우, 미래에 대한 회의감과 비전 부재 등 문제들이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 탓이다. 외무직 공무원 중에서는 시험에 수석 합격했던 30대 외교관이 구글로 가겠다며 돌연 사표를 냈다. “시험에 들인 시간과 노력이 아깝다”면서도 이에 매달리지는 않는 게 요즘 젊은이들이다. 공무원시험 응시율도 계속 떨어져 9급 공무원 경쟁률은 31년 만에 최저를 기록했다.
▷공직사회의 인력 공백을 메우기 위해 해외에서는 인공지능(AI) 도입, 자동화 등을 통한 시스템 효율화 작업을 시도하는 사례들이 나오고 있다. 딜로이트컨설팅은 공무에 AI 기술을 도입할 경우 미국에서만 연간 업무시간은 12억 시간, 예산은 411억 달러 아낄 수 있다는 계산을 내놓기도 했다. 기계가 대신해줄 수 없는 게 국민을 위하는 공복(公僕)들의 헌신과 피땀이다. 이런 인재 양성에 많은 국가 예산과 노력이 투입된다. 한 명씩 떠날 때마다 국가적 손실이 쌓여간다.
-이정은 논설위원, 동아일보(23-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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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돈 당연시하는 나라
예산 집행률 높이는 데만 관심 두니 ‘보도블록 교체’ 같은 낭비 반복
중요한 건 ‘예산 빨리 쓰기’보다 ‘필요한 곳에 잘 쓰기’임을 유념해야
2018년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적폐 제도인 신속집행 폐지를 간절히 청원합니다’라는 글이 올라왔다. 전년도에 계획한 예산 규모대로 지출하는 것만 강조된 결과 부실 공사 등이 발생하고 행정력도 낭비된다는 내용이었다. 예산을 어떻게 빨리 사용할지 고민하는 것보다 국민에게 필요한 예산 지원이 제대로 이루어질 방법을 궁리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많은 공무원과 국민이 공감해 1만명 이상이 청원에 동참했음에도 청와대, 기획재정부, 행정안전부 그 어디도 개선 의지를 보이지는 않았다.
지난 8월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예산결산특별위원회/뉴스1
당시 제기된 국가 재정 운영의 문제는 현재 진행형이다. 예산을 편성하는 것만 강조된다. 어떤 방식으로 누구에게 국가 돈을 쓸지에는 사회적 관심이 크게 없어 보인다. 예산 편성 및 집행에 가시적인 문제가 없는 한, 언론이나 국회의 관심은 ‘예산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사용했나’보다 ‘편성된 예산을 왜 쓰지 않았나’에 있다. 그러다 보니 상급 기관은 매달 편성된 예산에 대해 지출 계획을 세워서 하급 기관에 그대로 수행할 것을 지시하고, 그 지출 실적 관리에 급급하다. 더 적게 쓰도록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쓰는 방향으로 추궁한다. 돈을 아껴 예산을 남기고 있는 기관이 있으면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왜 쓰지도 않을 돈을 요구했나’라며 해당 기관의 장을 질책한다. 사업 필요성이 일시적으로 줄었다고 보고하면 ‘올해 돈을 쓰지 못한다는 것은 필요 없는 예산이었다는 것’이라며 ‘집행 실적이 낮으면 내년 예산 감축이 불가피하다’면서 불필요한 예산 지출을 강요한다.
그동안 정부는 매년 상반기가 끝나면 집행 실적이 60%에 근접했다고, 연말이 되면 편성된 예산 대부분을 집행했다는 것을 성과인 양 과시했다. 이 과정에서 불필요한 세금 낭비가 반복되었다. 매년 반복되는 보도블록 교체가 그 대표적 사례다. 사업 목적에 맞게 집행할 곳이 더는 없다는 지방정부나 공공기관의 하소연에도 불구하고, 중앙정부는 알아서 지출하라면서 돈을 떠넘겼다. 집행 실적을 높일 목적으로 말이다. 2018년 당시의 국민청원은 이와 같은 비정상적인 재정 운영 방식에 따른 누적된 불만이 표출된 것이었다.
예산이 편성되는 시점과 집행되는 시점 사이에는 갭이 있을 수밖에 없다. 재정 당국과 국회의 심의와 의결에 걸리는 시간을 고려하면 그 시차는 짧게는 수개월이고 길게는 1년도 넘는다. 오늘날과 같이 행정 환경이 복잡해진 상황에서 1년 뒤에 필요한 자금 규모를 정확하게 예측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 정부가 세금을 쓰는 방식은 1년 뒤에 사용할 용처를 정해둔 후, 그 용처에서 벗어나면 잘못한 것이라는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영어 자격증 취득을 목적으로 1년간 학원 등록을 계획했다고 가정해 보자. 1년이 지나지 않더라도 영어 자격증을 땄다면 굳이 학원을 다닐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학원을 계속해서 다닐 것을 요구한다. 학원을 다니지 않겠다고 하면 ‘편성된 예산을 임의로 집행하지 않는다’고 질책한다.
비상식적인 재정 집행은 이뿐이 아니다. 더 적은 비용으로 사업 수행이 가능한데도 편성된 예산이 남을까 우려해 기존 재정 지출 방식을 되풀이한다. 예산을 절감한 공무원에게 인센티브를 주는 예산 성과금 제도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일상적 사업에서는 ‘집행률을 높이라’는 지시로 예산 절감보다는 편성된 예산을 모두 지출하는 것이 더 강조된다. 국가 돈은 눈먼 돈이 되어 몇몇 사람들이 틈을 비집고 들어와 그 돈을 타낸다. 이런 일이 누적되면서 국민은 국가를 불신하게 된다. 다행히 이번 정부는 집행률 관리 실적을 보도자료 돌리며 발표하고 있지는 않는 듯하다. 집행률 관리보다 세금이 필요한 곳에 효율적으로 사용될 방법을 고민했으면 한다.
-신재민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 조선일보(22-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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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공복 아닌 정권의 ‘노비’가 돼 버린 공무원들 실태
신재민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이 조선일보 본사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신 전 사무관은 "현 정권에서 공무원은 정치인의 꿈을 이뤄주기 위한 조직이 됐고, 정권의 목적에 동원되다 구속까지 된다”고 말했다.
청와대의 기획재정부에 대한 외압을 폭로했던 신재민 전 기재부 사무관은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공무원은 정치인의 꿈을 이뤄주기 위한 조직이 됐고, 정권의 목적에 동원되다 구속까지 된다”고 했다. 청와대를 뒷받침할 무리한 수치를 거짓으로 만들어내라는 지시가 시도 때도 없이 장관·국장·과장을 거쳐 사무관까지 내려와 너무 괴로워한다고 했다. 한 공무원은 게시판에 말도 안 되는 지시와 보고서에 죽고 싶다는 글까지 올렸다. 그러다 사건으로 불거지면 감옥에 가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월성 원전은 언제 폐쇄되느냐”고 한마디 하자 월성 1호기에 대한 경제성 평가 조작이 시작됐다. 법을 집행하는 공무원들이 ‘조작'을 해야 했다. 담당 공무원이 버티자 교수 출신 산자부 장관은 “너 죽을래”라고 협박했다. 수치 조작도 모자라 일요일 밤에 사무실에서 증거를 대거 인멸하는 짓까지 저질러야 했다. 윗선을 묻는 추궁에 “신내림”이라고 했다. 이 때 ‘신(神)’은 청와대일 것이다.
김학의 전 차관 불법 출금도 “조직의 명운을 걸라”는 문 대통령 지시에서 비롯됐다. 법을 지켜야 할 법무부와 검사들이 조직적으로 불법행위에 가담했다. 이 불법을 공익 제보한 공무원은 오히려 고발될 처지가 됐다. 택시 운전사를 폭행한 이용구 법무차관에 대해 경찰관들은 뭉개기 수사로 봐주더니 수차례 거짓 해명까지 했다. 윗선의 지시를 받았겠지만 담당 경찰관만 대기 발령을 받았다. 손혜원 전 민주당 의원 부친을 독립유공자로 만들어준 특혜에 대해서도 윗선은 무사하고 실무 국장만 처벌받았다.
100조원 이상 들어가는 자영업자 손실 보전에 대해 기재부 차관이 나랏빚 걱정을 하자 총리는 “개혁 저항 세력”이라 몰아붙였다. 민주당은 “이게 기재부의 나라냐”고 윽박질렀다. 공무원이 저항하면 인사나 수사로 보복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 한국 경제를 여기까지 키우는 데 큰 역할을 했던 기재부가 불과 4년 만에 기피 부처가 됐다고 한다.
공무원이 승진을 위해 목을 매온 것은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 정권은 차마 시켜선 안 될 일까지 거침없이 지시하고 밀어붙인다. 공무원이 이의 제기만 해도 눈을 부릅뜬다. 현실과 동떨어진 정책을 만들라 지시하고 뻔뻔한 거짓말까지 시킨다. 그 뒷감당은 모두 공무원의 몫이다. 책임지고 감옥 가는 것도 이들이다. 졸개보다 못한 취급이다. 그래도 이들이 선거에 연전연승하니 공무원들은 그저 눈치를 볼 뿐이다. 헌법상 ‘국민에 대한 봉사자’가 아니라 정권의 노비나 다름 없다.
-조선일보(21-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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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이 된 '문빠'
문빠의 환심 잃을까 두려워하고
'우리 이니' 같은 미신 숭배자의 달콤한 말 즐기면 독재의 길로 갈 수도…
그저께 청와대 대변인은 '그분을 좀 대변해달라는 대통령의 지시'라는 단서를 달고 브리핑했다. 그분이란 문재인 대통령 면전에서 "거지 같아요. 너무 장사 안돼요"라고 했다가 '문빠'에게 신상이 털리고 악플 세례를 받은 아산 전통시장의 반찬 가게 주인을 말한다.
대변인은 "그런 표현으로 인해 공격받고 장사가 더 안된다는 것에 대해 문 대통령이 안타까움을 표했다"고 말했다. 특정 개인에 대한 문빠의 '집단 공격'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대통령 언급이 나온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전만 해도 대통령 지지자들이 자율적으로 그러는데 나설 일이 아니라고 방관해왔다.
그래서 일부 언론은 '대통령 지시가 있었다'고까지 밝히며 브리핑한 것을 청와대의 이례적 반응이라고 보도했다. 대통령의 선의인지 목전에 다가온 선거 때문인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평소에는 여론이 뭐라든 꿈쩍 안 했지만 지금은 많이 신경 써야 할 시점이 된 것은 틀림없다.
언론에서는 '문 대통령, 안타까움을 표시'라고 따뜻한 제목을 뽑았다. 하지만 브리핑의 핵심은 그게 아니었다. 한 출입기자가 "이번 사건과 관련해 대통령이 극렬 지지층에 자제 요청이 있었나?"라고 묻자, 청와대 측은 이를 장황하게 부정했다.
"악성 비난의 글을 쓰거나 하는 분들이 이른바 '문빠'이거나 한 것은 아니다. 이분(반찬 가게 주인)을 비난하는 분들은 오해를 한 거다. 거지 같다는 것은 요즘 사람이 쉬운 표현으로 한 것이다, 서민적이고 소탈한 표현이었다, 분위기가 안 나빴고 전혀 악의가 없었다. 대통령은 그런 오해를 풀어주려는 것이다. 예의 갖추지 않고 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이분은 오해를 받고 있어서 이로 인해 생기는 피해가 안타깝다는 거지, 지지층에 대한 반응은 아니다."
요약하면 이렇다. 대통령에게 '거지 같다'는 식으로 예의 없이 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데 실상 반찬 가게 주인이 예의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게 주인에 대한 공격은 오해에서 비롯됐다. 대통령은 오해를 안타깝게 여겨 풀어주려는 거다. 그리고 이는 '문빠'의 소행은 아니다. 이쯤 되면 정말 반찬 가게 주인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한 것인지 문빠의 행태를 변명해주는 것인지 헷갈린다.
균형 감각을 가진 대통령이라면 "칭찬을 기대한 적 없다. 대통령은 원래 욕을 듣는 자리다. 그렇게 해서라도 어려운 서민들의 속이 좀 풀렸으면 좋겠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문빠의 보스가 아니라 국민의 대표자여야 한다는 점을 상기할 것이다. 아무리 자신의 지지 세력이라 해도 반찬 가게 주인에게까지 집단 린치를 가하는 것은 '오해가 아니라 미친 행태'라고 지적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문빠들의 타깃은 주로 정치인이나 공직자, 언론인이었다. '공격 좌표'를 찍고 무차별 신상 털기와 악플, 문자 폭탄 테러를 가해 왔다. 한번 당해본 인사들은 문빠를 '히틀러 추종자' '문화대혁명 홍위병'이라며 학을 뗐다. 하지만 대통령은 자신의 지지 세력에 의한 자유민주주의 파괴 행위를 묵인해왔다. 문빠는 눈에 뵈는 게 없는 괴물처럼 됐다. 이제는 반찬 가게 주인까지 공격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그 여주인에게는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형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짓을 숨어서 벌여온 문빠들 그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
3년 전 문재인이 민주당 대선 후보로 확정됐을 때 "18원 후원금, 문자 폭탄, 비방 댓글 등은 문 후보 측 지지자에서 조직적으로 한 것이 드러났다"고 질문받자 "경쟁을 더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양념 같은 것"이라고 답했다. 지금은 중기부 장관이지만 당시 반대 진영에 섰던 박영선 의원은 "아침에 눈뜨니 문자 폭탄과 악성 댓글이 양념이 되었다. 양념이라는 단어의 가벼움에는 문 후보가 이 사안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어 왔고 또 때론 즐겨왔는지…"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여전히 문빠의 미친 짓을 '양념'으로 보고 있는 게 틀림없다. 어쩌면 이런 문빠의 환심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우리 이니 마음대로' 같은 미신 숭배자의 달콤한 말을 즐기고 있는지 모른다. 이 맛에 빠질수록 자신에 대한 비판에는 치를 떠는 독재자의 길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실제 현 정부나 여당 그 누구도 문 대통령에게 맞서 '이건 옳지 않다'며 딴소리를 못 내고 있다. 문빠에게 찍혀 조리돌림 당할 수 있다고 겁내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제약되고 정당한 비판이 틀어막히는 괴기한 상황이 벌어져 오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문빠를 어둠 속 바퀴벌레로 본다. 아주 오래전 서울 강북의 오래된 아파트에서 세 들어 산 적 있었다. 어느 날 밤중에 목이 말라 전등을 켰을 때 방 안 풍경이 낯설었다. 어둠 속에서 바퀴벌레들이 새카맣게 쏟아져 나와 있었던 것이다. 환한 불빛에는 재빨리 달아나 숨기 시작하던 그 바퀴벌레 떼가 연상될 뿐이다.
-최보식 선임기자, 조선일보(20-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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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의 영혼을 저당 잡은 권력
인사권 거칠게 휘두르는 권력 앞에 공무원은 영혼 없는 관료로 전락
문제는 권력 주변 인물이 아니라 눈과 귀를 닫은 최고 권력자뿐
선출된 정치권력 앞에서 임명직 공무원들은 무력하다. 비단 현 정부뿐만 아니라 보수·진보를 망라한 과거 정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통령과 청와대가 거칠게 권력을 휘두르면 관료들은 바람보다 빨리 몸을 숙여 영혼 없는 충실한 테크노크라트로 전락했다. 인사권자의 입맛에 맞춰 같은 사안을 순식간에 A 답안지에서 정반대의 B 답안지로 바꿔 그럴듯한 보고서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최근 검찰 인사에서 보듯 최고 권력자는 맘에 안 드는 인물을 쳐낼 수 있고, 그걸 본 공무원 사회는 납작 엎드려 결국 순치되고 만다.
한때 우리 사회에는 경제를 정치의 입김으로부터 차단해야 한다는 암묵적 합의 같은 것이 있었다. 사유재산권과 거래의 자유, 기업 활동과 이익 추구가 법의 보호 아래 작동하도록 정치권력의 이해와 침해에서 독립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올바른 경제 관료는 이런 경제 원칙을 확인하고 실천하는 국민의 대리인 역할을 하도록 기대되어 왔다. 그러나 경제 관료의 말은 언제부터인가 힘을 잃고 있다. 우리 사회가 쌓아 올린 번영의 철학과 원칙을 대변하지 못하고 종종 자의적 권력에 맞춰 조변석개하는 비루한 언어로 전락했다. 가령 9개월 전 홍남기 부총리는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국가 채무 비율을 40% 선으로 유지하겠다"고 발표했다가 "40%의 근거가 뭐냐"는 문재인 대통령의 반박을 듣자 일주일 뒤 "내년에는 40%를 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말을 바꿨다. 불과 6개월 전 신재민 전 사무관이 국가 채무 비율이 높아지는 것을 사실상 별일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기재부가 적자 국채 발행을 계획했다는 목숨을 건 폭로는 권력자의 한마디로 아무 값어치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경제가 정치에서 독립하는 것은 권력의 진공 상태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다. 경제 원칙과 시장경제의 작동을 외부의 간섭으로부터 지키려는 충만한 권력의 의지가 맹렬하게 작동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경제가 처음으로 정치보다 우위를 점했을 때는 아이러니하게도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이었다. 피를 부른 잔혹한 군사독재 정권이었다는 데 이견이 없고 여기에 대한 역사적 심판도 끝났지만, 이와 별개로 이 시기에 어떻게 시장경제가 한국에 뿌리를 내렸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당시 정당성이 없었던 정권은 필사적으로 경제에 매달렸고 다른 정치권력의 시장 간섭을 최고 권력이 막아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시 김재익 전 경제수석에게 전두환 전 대통령이 했던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는 말은 권력 이양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실현하려는 강한 권력 의지의 표현이다. 그 이후 우리 경제가 정치로부터 독립성을 확보했던 시기는 외환 위기 직후 달러가 부족해 국제기구 눈치를 봐야 했던 기간 정도일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경제는 정치 과정이었다. 사유재산권도 수많은 행동 규범과 법 제정, 집행이라는 정치적 과정을 통해서 오늘의 형태로 자리 잡았다. 경제학자 아바 러너는 "경제학이 (우아하게) 사회과학의 여왕 자리에 오른 것은 정치적으로 해결된 문제를 다루기 때문"이라고 했다.
현 정부의 경제정책은 최고 권력자의 철학이라고 봐야 한다. 소득 주도 성장과 탈원전 정책이 무수한 비판을 받아도 수정이 없는 것은 대통령 생각이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권력이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합리적 경제 조언과 각론적 처방은 그냥 땅에 떨어지고 말 뿐이다. 노동 개혁과 규제 혁파가 한국 경제의 돌파구라고 하지만, 이를 실천하는 것은 철저히 정치의 영역이다. 경제가 살려면 정치가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최소한 주군의 눈과 귀를 가리는 주변 인물들이 문제라는 얘기는 말아야 한다. 크게 보면 그저 눈과 귀를 닫은 주군이 있을 뿐이다.
-박종세 부국장 겸 여론독자부장, 조선일보(20-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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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주고 소금 뿌리는 정부
문재인 정부의 탈(脫)원전 정책 직격탄을 맞은 국내 대표 원전 기업 두산중공업이 1000여명 규모의 인력 구조조정에 돌입했다. 이 소식이 전해진 19일 정부는 '두산중공업의 경영난은 탈원전 탓이 아니다'라는 취지의 설명 자료를 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4개 주무 과(課)가 함께 낸 A4 용지 5장에 이르는 장문의 설명 자료에서 "두산중공업은 최근 수년간 지속된 세계 발전 시장의 침체, 특히 석탄화력 발주 감소로 인해 어려움을 겪어 왔다"며 "에너지 전환(탈원전) 정책 이후 한국수력원자력이 두산중공업에 지급한 금액은 과거 대비 변화가 없다"고 했다.
탈원전 정책으로 인해 두산중공업이 입고 있는 손실과 피해는 없다는 얘기인데 이게 사실과 전혀 다르다는 건 업계 사람들은 모두 다 안다. 두산중공업은 신한울 3·4호기 주(主)기기 제작에 이미 4927억원을, 주기기 제작을 위한 설비 투자비와 기술 개발 비용으로 2300억원을 투입했다. 신한울 3·4호기 건설 취소로 인한 매몰 비용이 최소 7000억원에 이르는 것이다. 현재 건설 중인 신고리 5·6호기에 주기기 납품이 올해 말 거의 끝나면 당장 내년부터는 국내 원전 매출은 절반으로 급감하고, 공장 가동률도 절반 이하로 떨어지게 될 것이라는 것 역시 업계의 정설이다. 게다가 현 정부가 신규 원전 6기 건설을 한꺼번에 백지화해 예상됐던 미래 매출 7조~8조원은 연기처럼 사라지게 됐다.
산업부는 "세계적 에너지 전환(탈원전 및 재생에너지 확대) 추세로 웨스팅하우스 등 해외 원전 기업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원인과 결과를 뒤죽박죽으로 섞어놓은 궤변'이라고 지적한다. 정용훈 카이스트 교수는 "웨스팅하우스 등은 시장은 있지만, 공급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라며 "우리는 공기(工期)와 예산에 맞춰 건설할 능력이 있는데도 탈원전으로 공급 능력을 상실해 가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산업부는 또 "두산중공업과 협력업체의 경영난 해소를 위해 체코·폴란드 등 신규 원전 수출에도 적극 나서겠다"고 했지만 이 역시 당장 급한 상황만 모면하기 위한 립서비스일 뿐이다. 정부의 원전 수출 지원이 말뿐이라는 건 여러 곳에서 입증되고 있다. 폴란드 원전 수주를 위해 프랑스와 일본 등 경쟁국은 정상들이 직접 뛰고 있지만, 우리는 산업부 차관이 폴란드를 방문한 게 고작이다.
대기업인 두산중공업이 구조조정을 할 정도면 이 회사의 수많은 협력업체인 중소기업들은 더 처참한 상황에 놓였을 것이다. 탈원전 탓에 원전 업계가 도산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안다. 그런데도 정부는 '탈원전 탓이 아니다'라는 변명에만 급급하다. 탈원전 탓에 제 살 깎아내는 고통을 감내하는 두산중공업을 비롯한 원전 업계를 두 번 죽이는 설명 자료는 굳이 내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안준호 산업1부 차장, 조선일보(20-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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