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약구급방 모르면 경찰이 될 수 없는 나라
순경 공채 시험에 고려 시대 의학서 간행연도 묻는 질문
중·고교 시절 나는 국사와 세계사를 끔찍하게 싫어했고 성적은 그보다 더 끔찍했는데 그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시험문제가 너무 어려워서 아무리 공부해도 좋은 성적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국사와 세계사 시험에는 꼭 보기 네 개를 연도순으로 나열하라는 문제가 나왔다. 그때나 지금이나 암기력에는 자신이 없었고 이런 문제는 속수무책으로 틀리고 말았다. 중학교 때는 연도를 외우지 못하는 나의 머리를 원망했고, 그 둔한 머리가 좀 굵어진 고교 때에는 이런 걸 왜 외워야 하나 하는 반항심이 생겼다.
얼마 전 신문을 읽다가 오래전 그 반항심이 다시 떠올랐다. 순경 공채 시험 한국사 문제에 연도순 나열 문제가 나왔는데 보기 중 하나의 연도가 불분명해 정답을 두 개로 처리했다는 기사였다. 순경이 되려면 연도를 알아야 하는 그 보기들은 ㉠팔만대장경 완성 ㉡삼국유사 편찬 ㉢향약구급방 간행 ㉣황룡사 9층 목탑 소실이었다. 이 가운데 향약구급방 간행연도가 1236년인지 아닌지 불확실하다는 게 논란의 요지였다.
이 기사를 읽는 순간 나는 여전히 저런 문제가 출제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대한민국에서 순경이 되려면 향약구급방 간행연도를 알아야 한다는 사실에 내가 수험생인 양 화가 났다. 순경이 저 고려 시대 의서 간행연도를 알아야 한다면 총경은 침과 뜸을 놓는 데 능해야 하며 경찰청장은 새로운 한의서라도 집필해야 한다는 말인가. 지금도 노량진 고시촌에는 추리닝에 삼선 슬리퍼 끌고 컵밥 먹으며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는 수험생들이 그득하다. 나는 이 문제에서 어떻게든 그들 중 상당수를 좌절시키고야 말겠다는 출제자의 의도 말고는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다.
경찰에 입문하는 데 상식 이상의 한국사 지식이 필요한가. 오히려 체력과 적성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 향약구급방이 궁금하면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찾아보면 되는 시대에 이런 시험은 가위바위보로 1차 합격자를 뽑는 것보다도 불합리하다. 이런 필기시험에 합격해야 체력시험과 면접을 볼 수 있다니, 앞으로 순경 계급장을 볼 때마다 존경심과 안쓰러움이 들 것 같다.

한국의 시험은 누굴 뽑는 시험이 아니라 떨어뜨리는 시험이다. 가혹하리만치 그렇다. 서울에서 유명하다는 영어 유치원의 스펠링 맞히기 시험 문제를 본 적이 있다. 스무 개쯤 되는 영단어 가운데 'dehydrate(탈수 상태가 되다)'가 있었다. 어떻게 이런 문제를 대여섯 살짜리들에게 내느냐고 했더니 쉬운 단어만 내면 100점이 너무 많아져서 외국에서 살다 온 아이 엄마들이 "시험에 변별력이 없다"고 항의한다고 했다. 과연 한 명만 100점을 받고 많은 아이가 95점을 받았다고 한다.
재작년 수능을 앞두고 '영국남자'라는 이름의 영국인 유튜버가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그 전년도 한국 수능 영어시험 문제 다섯 개를 영국의 영어교사 네 명에게 풀어보라고 한 것이다. 비록 한 문제당 50초로 시간제한을 두긴 했으나, 영국인이면서 영어를 가르치는 이들은 한두 문제밖에 정답을 맞히지 못했다. 한국의 고3들이 읽고 풀어야 하는 영어 지문에서 'satiety(포만감)'란 단어는 제대로 발음하지도 못했고 'hedonics(쾌락론)'란 단어는 생전 처음 봤다고 했다. 확신하건대 한국의 영어 교사들도 절대 저 문제들을 제한시간 내에 풀 수 없을 것이다.
대학에서 심도 있는 공부를 할 수 있는 학생을 뽑는 것이 아니라 쓸모없고 비현실적인 경쟁을 시켜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좌절감을 느끼게 하는 시험이 지금의 수능이다. 그러니 대학생이 돼도 제대로 된 글 한 편 못 쓰고, 똑 부러지는 발표 한번 못 하는 것이다. 영국의 영어교사들은 이렇게 말했다. "대체 이렇게 어려운 지문은 어디서 가져오는 건가요?" "영국에서는 아무도 이렇게 말하지 않아요." "이런 문제 풀어야 하는 학생들은 영어를 진짜 싫어하겠네요. 정말 지루한 내용이거든요." 영어를 배우면 배울수록 영어가 싫어지는 교육인 셈이다. 이것은 지금 수능 수험생의 부모 세대부터 지금까지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순경 공채 필기시험에서 낙담한 사람들을 비롯한 모든 수험생에게 '영국남자' 유튜브에 나온 영어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이 시험은 여러분이 누구인지 말해주지 않아요. 여러분은 앞으로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어요. 침착하게 최선을 다하세요. 그러나 어떤 결과가 나오든 항상 다른 길과 방법이 있어요."
-한현우 논설위원, 조선일보(20-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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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EIC-JPT 시험 有感]
한현우 논설위원께,
[향약구급방 모르면 경찰이 될 수 없는 나라]
위 칼럼을 접하고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던 소회를 되새겨 봅니다. 3~40년 해외영업관련 업무를 해오면서 한국을 찾아오는 많은 외국분들에게 나름 한국의 소개를 할 기회가 많이 있었습니다. 차제에 「관광통역안내사」 자격시험을 거쳐 기회가 되는대로 외국인들에게 한국을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해당 자격시험의 필수조건인 외국어 구사능력은 영어 TOEIC과 일본어 JPT 시험에서 각각 760점(990점 만점)과 740점(990점 만점) 이상이어야 합니다. 4월과 5월에 TOEIC 시험(결과 565점/630점)을 보았고, 5월에는 JPT 시험(결과 585점)을 보았으나 결과는 관광통역안내사 자격기준에 미달되어 포기하였습니다.
조금 더 공부를 하여 기준에 맞춰볼까 하다가 포기한 이유는 두 어학시험에 위의 칼럼내용과 비슷한 회의감이 들어서입니다. 3차례의 시험을 경험한 결과, 영어, 일본어 두 시험 공히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하였습니다. 독해의 경우입니다. 전체 문제를 다 풀기 위하여 정독도 하지 못하고 빠른 속도로 풀어나갔음에도 대략 100문제 중 2~30개 문항을 손도 대보지 못했습니다. 물론 전 문항을 다 풀고, 월등한 스코어를 획득한 수험생이 아주 많습니다.
전체 문항을 다 풀고, 월등한 고득점을 얻기 위해서는 소위 답 고르는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수강료가 꽤 고가일 것으로 생각되는 학원강의, 인터넷강의나 교재는 정답을 고르는 기술이 대부분입니다. 지금 한국에는 수많은 재학생, 취준생들이 스펙의 필수인 어학시험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많은 시간과 재정적인 부담을 안고 정답 찍는 기술을 습득하고, 한번 응시에 5만원 소요되는 시험에 많게는 10번 이상 응시를 통하여 고득점을 얻어야 하는 우리의 청년들을 볼 때 한번 생각해 볼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취업 기본스펙이 요구하는 800점 이상을 얻기 위해서는 시간은 별개로 하더라도, 쉽게 2~300만원은 소요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고득점을 얻으면 외국인을 상대할 때 원활한 의사소통에 어느 정도는 도움은 되겠지요. 문제를 완전히 읽지도 않고 정답을 찍는 기술을 익힌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앞뒤 정황만으로 1~2초 안에 정답을 골라야 전 문항을 풀 수 있는 이런 상황에서 고득점을 얻는다고 과연 실제 외국인과의 효율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할까 의구심이 듭니다.
-20-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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