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년 이어온 유럽의 왕실]
[잉글랜드 헨리 2세]
1000년 이어온 유럽의 왕실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교황이 헨리8세에 ‘신앙 수호자’ 칭호… 왕은 21세기에도 신성한가

엘리자베스 여왕의 대관식-1953년 6월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열린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관식. 이날 의례를 주관한 성공회 수장 캔터베리 대주교는 “영국은 하느님의 왕국에 더 가까워졌다”고 선언했다. 엘리자베스 2세는 70년간 영국 국민들을 단결시키는 통합의 상징으로 재위했고, 서거한 여왕의 후계자 찰스 3세가 내년 70년 만에 새 대관식을 치르게 된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나 찰스 3세는 왜 국왕인가? 이들이 왕위를 차지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오늘날 사람들 대부분은 아마 동의하기도 이해하기도 어려울 테지만, 답은 이들이 신성하기 때문이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왕국들은 1000년 넘는 장구한 세월에 걸쳐 군주의 영적이고 종교적인 성격을 유지해 왔다. 특히 대관식은 군주의 신성성을 확보해 주는 중요한 행사다. 1953년에 거행한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 당시 의례를 주관한 영국 성공회 수장인 캔터베리 대주교 제프리 피셔는 국왕의 세속 권력이 축소된 대신 영적 권력이 훨씬 더 강화되었으며, 그로 인해 영국은 하느님의 왕국에 더 가까워졌다고 선언했다.
6세기에 기독교적 즉위식 첫 등장
일반인 관점에서는 대주교가 국왕에게 ‘성 에드워드왕의 왕관’을 씌워주는 장면이 대관식의 클라이맥스로 보일 수 있다. 왕권을 상징하는 홀(笏·scepter)을 왼손에 쥐고, 보석 444개로 꾸민 무게 2.23㎏의 순금 왕관을 머리에 얹는 장면은 분명 멋지고 인상적이다. 그렇지만 사실 국왕을 국왕답게 만들어주는 장면, 다시 말해 왕을 신성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장면은 기름 부음 의식(도유식·塗油式·anointment)이다. 대주교가 신성한 기름을 발라주는 의례를 하면 신왕은 잉글랜드의 교회를 지키고 보존하겠다고 선서한다. 이 의식의 모델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스라엘 국왕의 즉위식이다. 참석자들은 ‘열왕기상’의 1장에 나오는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은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니,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신이시여 왕을 구하소서, 왕이시여 만수를 누리소서, 왕이시여 영생을 누리소서” 하는 내용을 노래한다. 근대에 들어서는 이 장면에서 1727년 헨델이 조지 2세의 대관식을 위해 작곡한 ‘제사장 사독’을 연주한다. 도유식은 국왕의 권력과 권위가 하느님에게서 유래한다고 선포하는 의미다. 이를 통해 국왕은 그리스도(이 말 자체가 ‘기름을 발라 축성된 임금, 대제관’이란 뜻이다)의 대리인과 같은 거룩한 존재가 되어 정의롭게 나라를 다스리며, 또 국가와 교회의 통합성을 강화한다.
국왕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 신령한 존재라는 의식은 멀리 켈트족 전통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켈트족 왕은 용과 괴물이 상징하는 혼돈의 힘과 싸워 이기고 세계의 질서를 회복하는 존재다. 켈트 신화에서 왕은 세상의 중심인 신성한 나무에 자리 잡고 우주의 조화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며, 치유와 예언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성격을 띠는 유럽의 군주를 ‘기적을 행하는 왕(thaumaturgic king)’이라 부른다.
기독교화가 진척되면서 이런 내용은 새로운 종교에 맞추어 변형되었다. 왕은 이제 신과 동격의 존재는 아니며 그보다는 신과 소통하는 일종의 사제와 같은 성격을 띤다. 이런 의미에서 국왕은 백성이 선출한 게 아니라 하느님에게 선택받은 존재임을 더욱 강조하게 되었다. 대관식에서 왕관을 쓰는 요소보다 신의 축복을 더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기독교적 즉위식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6세기에 등장한다. 574년 콜럼바(Columba) 성인이 댈리어더 왕국(Dál Riata 혹은 Dalriada, 스코틀랜드 서부 지역에 위치해 있던 나라)의 아이단 막 가브란(Áedán mac Gabráin)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을 내린 것이 유럽 최초의 기독교적 즉위식 사례다. 이때 기독교 군주의 즉위는 어떤 의미였을까? 이 시대는 폭력이 넘쳐나는 무정부 시대이며, 영적·문화적으로 암흑기였다. 마치 깡패들이 날뛰듯 부족장이나 전사 귀족들이 멋대로 폭압적 행태를 일삼던 상태에서 벗어나 새로운 군주가 강력한 힘으로 통치하여 질서와 안정을 기하는 것이 훨씬 개선된 제도였다. 콜럼바 성인은 법을 통한 통치, 무엇보다 기독교적인 정의·겸손·자애의 원칙 아래 통치하는 국왕에게 기꺼이 교회의 지지를 보냈다. 반대급부로 세속 권력은 교회에 후원과 보호를 제공한다. 그리하여 교회와 국가가 서로 돕는 관계가 정립된 것이다.
중세 내내 국왕은 가톨릭교회에서 권위와 정당성의 근거를 제공받았다. 이 점은 영국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나 영국 국교회가 성립된 이후에도 변함이 없고, 오히려 더 강화되어 영국 국왕은 ‘신앙의 수호자’라 불렸다. 사실 이 표현은 역설적인 면이 있다. 원래 이 타이틀은 16세기에 교황이 헨리 8세에게 부여한 것이다. 가톨릭 신앙을 철저히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참으로 가상하다고 하여 이런 명예로운 타이틀을 받았는데, 이후 헨리 8세는 자신의 이혼과 재혼 문제에 시비를 거는 교황청의 처사에 반발하여 가톨릭과 결별하고, 영국 국왕이 기독교 신앙의 최고 수장(首長)이 되는 국교회를 설립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개신교 신앙의 보호자’가 되었다. 영국의 국왕이 신앙의 수호자라는 주장은 영국 주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왕의 초상과 함께 ‘DG REG FD’라는 약어가 보이는데, 이는 Deo Gratia Regina Fidei Defensor, 다시 말해 ‘신의 은총을 입은 여왕, 신앙의 수호자’라는 뜻이다.
박보검의 침대가 궁금하다면?
국왕이 종교적 성격을 띠는 신성한 지배자라는 관념은 근대에 들어서도 계속 강화되었다. 제임스 1세(잉글랜드 왕으로 재위 1603-1625)는 왕권신수설, 즉 국왕의 권위는 하느님에게서 받은 신성한 힘이기 때문에 의회의 조언이나 승인 없이 자유롭게 법률이나 칙령을 제정할 수 있다는 주장을 설파했다. 이런 논리는 정치적으로 물의를 일으켰지만, 사실 국민은 적어도 국왕이 신성하다는 점에 대해서만큼은 의심하지 않았다. 내전 과정에서 참수당한 국왕 찰스 1세는 그리스도와 직접 비교되기도 하여, 군중이 죽은 왕의 목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손수건에 적시기 위해 몰려들었다. 말하자면 기독교 신앙을 위해 죽은 순교자로 대접받은 것이다.
헨리 8세, 이혼 문제로 가톨릭과 결별
교회가 왕실에 신비한 분위기나 존경의 태도를 강화해주는 것은 현대에도 마찬가지다. 대관식, 결혼식, 장례식 등을 지극히 화려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서 과시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연구자들은 19세기 후반부터 왕실 의식이 변모했다고 말한다. 이전에는 의식이 차분하고 사적이며 일반 대중에게 널리 광고하지는 않았으나 갈수록 더 화려하고 공적이고 사람들 이목을 끄는 방식으로 변했다. 1953년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이 최초로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것도 중요한 변화의 계기다.
엘리자베스 2세가 서거하고 영국 즉위위원회가 찰스 3세의 왕위 승계를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내년 봄이면 새로운 영국 군주의 대관식을 보게 될 것이다. 여전히 영국 국민 다수가 군주제 유지에 찬성한다고는 하지만 왕실에 대한 애정이 예전만 못하다는 점 또한 분명하다. 왜 여전히 국왕이 존재해야 하는가 설명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세속화한 현대사회에서 국왕이 신의 지상 대리인이며 신성한 인물이라는 주장을 문자 그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동안 왕실 인사들의 적나라한 면모를 너무 많이 접한 나머지 왕실의 신비로움은 다 증발해 버리고 말았다. 왕세자빈과 불화 끝에 이혼하고 그러는 동안 유부녀와 연인 관계를 유지한 사실 등은 평범한 사람이라면 전적으로 보호받아 마땅한 사생활에 속하겠지만, 영국을 비롯하여 영연방 15국의 원수로서 하느님의 뜻을 이 땅에 펼쳐야 할 ‘신성한 존재’로서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21세기에도 과연 군주는 신성한 존재로 남을 것인가? 앞으로도 계속 군주제를 유지하려면 새로운 현대적 정당성을 확보할 일이 남았다.
[중세 유럽의 왕은 그리스도와 동급?]
왕의 손길 닿으면 병이 낫는다고 믿어
국왕의 신성성을 잘 나타내는 요소는 국왕의 손길(Royal Touch)로 병을 치유한다는 믿음과 관행이다. 중세 잉글랜드와 프랑스에는 이 관행이 널리 퍼져 있었다. 국왕의 손길이 닿으면 병이 낫는다는 믿음은 곧 국왕이 그리스도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특히 국왕의 손길이 가장 큰 치유력을 보인다고 믿었던 병이 연주창이다. 이 병의 실체는 경부림프선결핵(tuberculous adenitis)이다. 결핵균이 침투하여 림프선이 커지고 농양이 생기며, 여기서 생긴 고름이 피부로 터져 나오는 증세를 보인다. 연주창 환자를 만져서 병을 낫게 했다는 기록을 처음 남긴 왕은 헨리 2세(재위 1154-1189)지만, 이전 기록들로 보건대 이미 정복왕 윌리엄(재위 1066-1087)이 시행한 것으로 보인다.

환자 어루만져 치료하는 헨리 2세-헨리 2세가 연주창에 걸린 백성을 어루만져 치료하는 장면을 담은 그림.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국왕의 신성한 치유력이라는 믿음은 중세 내내 이어졌고, 종교개혁 이후에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17세기에 찰스 2세는 1660년부터 4년 동안 2만3000명의 환자를 만졌고, 다음 국왕 제임스 2세는 1685년 3월부터 12월 사이에 4422명을 만졌다. 영국에서 이 의식을 마지막으로 행했던 왕은 앤 여왕으로서 1714년의 기록이 있다. 프랑스의 루이 14세 또한 이 행사에 성심껏 참여해서 1680년 부활절 기간에만 1600명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물론 왕이 만져주었다고 병이 다 나은 것은 아니다. 볼테르가 지적하듯, 그토록 왕의 손길이 많이 닿았던 루이 14세의 첩이 연주창으로 죽었다는 사실이 그 점을 말해 준다.
현대인들은 물론 이런 의식을 문자 그대로 믿고 따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비슷한 사고방식을 보이기도 한다. 예컨대 즉위 25주년 축전(silver jubilee)을 맞았던 1977년에 군중들이 엘리자베스 2세에 다가가 손을 뻗어 마치 치유를 구하는 듯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국왕의 신성한 힘에 대한 무의식적인 기억이라 할만하다.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조선일보(22-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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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헨리 2세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1133~1189, 재위 1154~1189)는 ‘제국’에 준하는 강력한 국가를 건설한 뛰어난 왕이었다. 프랑스 앙주(Anjou) 출신의 이 인물이 잉글랜드 왕이 되기까지에는 실로 복잡한 사연들이 얽혀 있다. 이야기는 1120년에 있었던 해상 사고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국왕 헨리 1세는 프랑스의 노르망디 공작도 겸하고 있었으므로 두 지역의 통치를 위해 영불해협을 자주 건너다녀야 했다. 이해 11월, 국왕 자신은 노르망디에서 잉글랜드로 안전하게 항해를 마쳤지만, 왕자 두 명과 귀족 300명이 탄 블랑슈-네프(Blanche-Nef)호가 암초를 들이받고 침몰하는 대형 사고가 일어났다. 졸지에 왕위 계승자인 두 아들을 잃은 것이다. 남은 자식은 황제 하인리히 5세와 결혼했다가 남편이 죽는 바람에 친정으로 돌아온 딸 마틸다(Matilda)밖에 없었다. 헨리 1세는 딸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결정한 후, 여러 전략적인 고려 끝에 마틸다를 앙주 백작 제프리 플랜타지네트와 재혼시켰다. 후일 이 결혼에서 나온 아들이 헨리 2세라는 이름으로 왕이 되어 플랜타지네트 왕조를 개창하게 된다.

/게티이미지코리아 헨리 2세는 친구였던 수도사 출신 베켓을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한 이후 재판권 관할 등 문제로 그와 원수 관계가 됐다. 이로 인해 1170년에 과잉 충성하는 기사 4명이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베켓을 살해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Fictures of English History(19850년)'에 실린 토머스 베켓 살해 사건.
20여년 내전 끝에 왕위 계승한 헨리 2세
1135년 헨리 1세가 사망하자 정해진 대로 일이 돌아가지 않았다. 마틸다를 여왕으로 추대한다는 선왕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며 자신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는 후보가 여럿 나타났다. 이런 어수선한 시기에는 선수를 치는 게 중요하다. 마틸다를 비롯한 다른 후보들은 먼 지역에 있던 반면 선왕의 조카인 스티븐(Stephen of Blois)은 잉글랜드 남부까지 하루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이런 ‘이유 같지 않은 이유’가 왕위 쟁탈의 중요 요소이던 시대다. 스티븐은 런던 시민들과 일부 귀족을 설득하고 캔터베리 대주교에게서 도유식(기름 부음 의식)을 받아 왕관을 썼다. 선왕이 임종할 때 마음을 바꾸어 자신을 지명했노라는 허위 사실 유포까지 했다.
눈앞에서 왕위를 놓친 마틸다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이제 잉글랜드는 마틸다파와 스티븐파 사이의 내전으로 치달았다. 중앙 권력이 약화하자 지방 귀족들은 거칠 것 없이 권력을 행사했다. 농민들을 징발해 성을 쌓고 병사들을 길러 약탈 행위를 일삼는 ‘강도 귀족’도 많았다. 20년 가까운 세월 무법천지가 되자 사람들은 정당한 국왕의 올바른 통치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되었다. 내전을 벌이던 양측도 오랜 투쟁 끝에 지쳐 타협에 들어가 1153년 웨스트민스터 조약을 맺었다. 스티븐은 마틸다의 아들 헨리를 양자로 삼아 자신을 이을 계승자로 지정하고 국정에 미리 참여하도록 했다. 다음 해 스티븐이 죽자 헨리 2세는 순조롭게 왕위를 물려받았다.

/위키피디아 헨리 2세의 어머니 마틸다(Matilda) 초상화.
헨리는 여러 차례 운 좋게 영토를 늘려갔다. 1151년 부친의 사망으로 앙주와 멘(Maine) 백작이 되었고, 다음 해 아키텐의 알리에노르와 결혼하여 그녀가 유산으로 받은 프랑스 중서부 영토도 차지했다(‘아키텐의 알리에노르’ 편 참조). 이제 잉글랜드 왕위에 오르자 그는 스코틀랜드 변경에서 피레네산맥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의 지배자가 되었다. 역사적으로 이 영토는 ‘앙주 제국’ 혹은 ‘플랜타지네트 제국’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헨리 2세는 그 당시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왕국의 지배자로 꼽혔다. 그 자신도 제국 통치에 걸맞은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국정을 개혁한 ‘관습법의 아버지’
헨리는 잉글랜드 국민들 입장에서 보면 외국인이었다. 그의 모국어는 프랑스어였으며, 영어는 알아듣기는 하나 말은 못 하는 수준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오히려 국내 사정에 연연하지 않고 개혁을 밀어붙였다. 국왕에게 대들다가는 대륙에서 막강한 군대를 끌고 와서 짓누를 태세였다. 무엇보다 사법권을 확실하게 장악해서 그동안 지방 영주 법정에서 다루던 많은 사건을 국왕 순회법정으로 넘기도록 조치했다. 국민들로서도 불합리한 점이 많았던 영주 법정보다는 정해진 절차에 따라 소집된 배심원들이 명백한 증거를 통해 판결을 내리는 국왕 법정을 선호했다. 전국에 동일한 법률이 적용되면서 점차 관습법(Common Law) 체계가 잡혀 가기 시작했다. 헨리 2세가 ‘영국 관습법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유다. 런던 고문서보관소에 보존된 엄청난 양의 문서를 보면 행정, 외교, 사법 등 모든 분야마다 헨리 2세가 얼마나 정력적으로 국정을 개혁하려 했는지 알 수 있다.
그의 치세 중 일어난 중요 사건으로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베켓 살해가 있다. 국왕은 즉위 직후 수도사 출신인 베켓을 천거받았다. 뛰어난 행정 능력을 갖춘 베켓은 치세 초기 국정 운영에 큰 도움을 주었다. 문제는 그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하면서 벌어졌다. 지금까지 거의 친구처럼 잘 지내던 두 사람은 이후 원수 관계로 돌변했다. 자리가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것일까. 베켓은 대주교로 임명되면서 국왕에게 ‘여태 저를 총애한 것 이상으로 증오할 것입니다’라는 말을 했다.

/위키피디아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 초상화.
말년에는 아내·아들과 전투
정치와 종교 간 갈등은 재판권 관할 문제로 폭발했다. 원래 교회 법정은 종교 문제만 담당해야 하지만 점차 더 많은 재판을 자기 관할로 삼으려 했다. 소유권을 다투는 문제도 신의 이름을 건 선서 위반 사건이라며 교회 법정으로 가져가는 식이다. 피고인들도 국왕 법정보다 관대하고 벌금도 적으며 구속도 잘 하지 않는 교회 법정을 선호했다. 이렇게 되면 국왕의 통치 기반이 약화할 수밖에 없다. 헨리는 베켓에게 종교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 교회 직위를 박탈당한 사람을 세속 재판에 넘기라고 요구했지만 베켓은 거절했다. 국왕의 강압에 못 이겨 명령에 따른다고 했다가 프랑스로 도주해서는 교황에게 탄원하여 국왕을 파문했다.
파문으로 인해 잉글랜드 전체가 성무(聖務) 정지 상태가 되면 아무리 국왕이라고 해도 힘을 쓸 수 없다. 별수 없이 국왕은 베켓을 찾아가 타협하는 수밖에 없었다. 힘을 되찾은 베켓은 곧 잉글랜드로 돌아가서 그동안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던 주교들을 파면하려 했다. 프랑스에서 이 소식을 접한 헨리 2세는 ‘내가 한낱 수도사의 조롱거리가 되는데, 신하 중 나를 위해 뭔가를 하는 자가 없다’며 탄식했다. 이럴 때 과잉 충성하는 자들이 꼭 문제를 일으키는 법. 기사 4명이 아무 말 없이 잉글랜드로 가서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베켓을 살해했다. 이 사건으로 헨리 2세는 전 유럽에 걸쳐 악마 소리를 들었다.
곧이어 집안 문제가 그를 괴롭혔다. 헨리는 자신의 사후에 영토를 분할하여 아들들에게 넘겨줄 계획을 했다. 이것이 오히려 부모 자식들 사이, 형제들 사이에 분란을 가져왔다. 더 이상의 막장 드라마가 없다. 아들 중 리처드 편을 드는 왕비 알리에노르는 전 남편인 프랑스 국왕을 끌어들여 남편과 전투를 벌였다. 막판에는 부왕이 산속 오솔길로 도주하는데 그 뒤를 아들이 추격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중병에 걸려 시농(Chinon) 성에 누워 있을 때 신하가 새로운 반역자 명단을 가지고 왔다. 제일 위에는 그토록 사랑하던 막내아들 존의 이름이 있었다. 존도 아버지의 힘이 약해지자 반역에 나선 것이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 나는 이 세상일을 생각할 기력도 없노라” 하는 말을 마치고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얼마 후 별세했다. 얼마나 무상한가, 세상의 권력이여!
<국왕의 최후>
헨리 2세를 끝까지 지킨 얼마 안 되는 신하 중 하나인 윌리엄 마셜(William Marshal)이 국왕의 최후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발뒤꿈치에서 시작된 병세가 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결국 온몸이 불타는 듯했다. 국왕은 고통 때문에 신음 소리를 내며 짐승처럼 꿈틀거렸다. 왕자 리처드는 왕위를 빨리 물려주지 않은 아버지에 대해 “늙은이가 코미디를 벌이고 있다”고 떠들고 다녔다. 그즈음이면 거의 모든 신하가 다 도망가고 없었다. 마침내 왕은 피를 토한 후 죽었다. 윌리엄이 죽은 왕을 보니 팬티만 입고 있어서 외투로 덮어주었다. 장례식을 마칠 무렵 인근의 빈민들이 몰려왔다. 국왕의 장례식 때에는 빈민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돈 한 푼 남아있지 않아 음식을 주지 못하자 몰려든 빈민들이 화가 나서 다 때려 부수겠다고 소리를 질러댔다.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확과 교수, 조선일보(20-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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