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민정음’ 빌보드 정복
올 초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받은 작품상은 1992년 아카데미 역사상 비(非)영어 영화로는 처음이었다. 그만큼 미국인들은 ‘자막 달린 영화’를 싫어한다. 어제는 방탄소년단(BTS)이 ‘Life Goes On’으로 빌보드 ‘핫100’ 1위를 차지했다. 제목은 영어지만 가사는 한국어다. 올 9월 영어 가사 곡 ‘Dynamite’가 싱글차트 1위를 차지한 데 이어 이번엔 한국어 가사로 정상에 오른 것이다. 영어 가사가 아닌 노래가 발매 첫 주에 정상에 오른 것은 빌보드 62년 역사상 처음이다.

▷BTS의 충성스러운 ‘아미(ARMY)’들에게 언어는 장벽도 아니다. 유튜브에는 BTS 한국어 가사 발음을 로마자로 표기하고 영어 자막을 달아놓은 동영상이 차고 넘친다. 아미들 중 ‘통역병’들이 무료로 제작한 콘텐츠들이다. ‘oppa’(오빠) ‘unnie’(언니) ‘aegyo’(애교)와 같은 ‘돌민정음’(아이돌과 훈민정음을 합한 신조어)을 일찌감치 뗀 아미들은 이 영상으로 노랫말을 ‘선행학습’한 후 콘서트장에서 ‘얼쑤’와 같은 추임새까지 ‘떼창’ 한다.
▷BTS의 일상을 담은 영상이나 인터뷰도 공개된 지 몇 시간 만에 영어로 번역되고, 다시 수십 개의 언어로 옮겨진다. BTS가 곤룡포를 입고 나오면 ‘곤룡포란 왕의 의상으로 다섯 마리 용이…’라는 설명이 따른다. ‘우린 다 개돼지 화나서 개 되지’(‘AM I Wrong’)를 번역할 땐 ‘한국 고위 관료가 민중은 개돼지라고 말해 논란이 된 적이 있다’는 해석을 곁들여준다.
▷한류 드라마도 2000년대 초중반까지는 영어 자막이 먼저 제작되고 그것이 각국의 언어로 번역됐는데 그 후로는 바로 각국의 언어로 옮겨지기 시작했다. 자막 봉사자들은 대부분 대학생들이어서 북반구 대학의 시험 기간엔 자막 달기 속도가 늦어지기도 한다(홍석경 서울대 교수 저서 ‘BTS 길 위에서’). 열성 팬들의 번역에 의지해 ‘어둠의 경로’로 한국 드라마를 찾아보던 팬들은 이제 넷플릭스에서 한류 콘텐츠를 마음껏 포식한다. 대만과 말레이시아의 넷플릭스 최고 인기 TV 프로그램 10편 중 9편, 베트남은 8편, 일본은 5편이 한국 드라마다.
▷지난해 한국어능력시험(TOPIK) 응시자 수는 37만5871명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프랑스 파리8대학 한국어과는 138명 정원에 1000명 넘게 지원했다(2018학년도). 태국과 아르메니아 시위 현장엔 케이팝 노랫말과 한글 구호가 등장한다. 574년 전 ‘말과 글이 달라 제 뜻을 능히 펼치지 못하는 백성’들이 안타까워 만든 한글이 디지털 시대 세계인을 위로하는 문화언어가 되고 있다.
-이진영 논설위원, 동아일보(20-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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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기록 앞에 부끄러운 자화상..
4년마다 열리는 세계 기록인의 모임인 ICA(세계기록관리협의회) 총회가 다음 달 서울에서 개최된다. 190여개 나라에서 2000여명이 참가하는 세계 기록인의 대축제다. 세계기록관리협의회는 기록의 효과적인 관리와 보존, 세계기록유산의 보호와 활용을 주된 사업으로 하는 국제기구다.
유네스코는 1992년부터 '기록 유산이 인류 모두의 소유물이므로 미래 세대에 전수될 수 있도록 이를 보존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취지로 세계기록유산을 선정해왔다. 그 후 안네의 일기를 비롯한 348건을 보존 가치가 있는 기록 유산으로 정하였다. 훈민정음 해례본 등 우리나라 기록 유산 13종도 포함돼 있다. 특히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 거질의 역사 기록이 포함됐는데, 역사 기록물이 3종이나 등재된 것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다. 그만큼 우리나라 역사 기록은 인류사적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은 셈이다. 우리 선조는 기록의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하였다. 당대의 일을 문자로 남겨 후대가 소중한 교훈으로 삼기를 바랐던 것 같다. 과거가 곧 현재와 미래의 거울이 된다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에는 왕과 신하 사이의 국정 운영에 대한 진지한 대화, 그리고 조선시대의 다양한 사회현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어떤 것은 바로 옆에서 보고 듣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생동감이 넘친다.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빠짐없이 기록한 승정원일기를 보면 우리 선조의 엄밀함과 치열함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특히 2억4000여 만 자의 승정원일기는 양에서도 단일 서종(書種)으로는 세계 최대이다. 중국의 전 역사를 기록한 이십오사(二十五史)가 4000만 자인 데 비해 인조 때부터 순종 때까지 288년간의 기록이 그 6배에 달하니 내용이 얼마나 상세할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승정원일기는 현재 우리말로 번역된 것이 20% 정도에 불과하다. 완역을 하려면 최소 50년은 더 기다려야 한다. 지금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이 환갑이 되어야 비로소 완역된 승정원일기를 볼 수 있다. 일성록 완역도 20년이나 남았으며, 재번역 중인 조선왕조실록도 완료되려면 30년 가까운 세월이 걸릴 것이다.
그러니 세계기록유산에 우리나라 역사 기록물이 3종이나 등재되었다고 들떠 기뻐하며 자랑스러워할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자기 나라 역사를 그 나라 국민이 읽을 수조차 없는 현실을 정말 창피하게 생각해야 한다. 자기 나라의 역사를 읽지도 못한다는 것은 국격(國格)과도 관계되는 문제이다. 전 세계에 이런 나라가 또 있을까.
그러나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예산과 인력이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서두르면 한 세대 안에 우리말로 번역된 역사 기록을 모두 볼 수도 있다. 할 수 없어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데도 하지 못하는 현실이 그저 통탄스러울 뿐이다.
이번에 서울에 오는 세계 각국 기록인이 승정원일기의 구체적 내용을 물으면 우리는 무어라 대답해야 하나. 명색이 자기 조상이 쓴 자기 나라 역사책인데도 아직 5분의 4에 해당하는 분량은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씨'일 뿐이니 정녕 답답하고 부끄럽지 않은가.
-이명학 한국고전번역원장, 조선일보(16-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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