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에 만난 풍경들
한 친구가 올해는 ‘살았다’기보다 ‘견뎠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시간이라고 했다. 계획대로 된 것 하나 없이 한 해가 가는데, 전 국민에게 한 살씩 빼줘야 하는 거 아니냐는 거다. 중년의 그는 실직 중이다. 많은 브랜드를 성공시키고 승승장구하던 그의 입에서 결국 자신은 브랜드가 되지 못했다는 말이 나왔다. 명함이 사라지니 인맥도 바람처럼 사라졌다고 했다.
영화 ‘풀몬티’의 뜻은 몽땅 벗은 사람들이다. 영국 대처 총리 시절, 철강 산업 구조조정으로 실직한 중년 남자들이 돈을 벌기 위해 여성 전용 클럽에서 스트립쇼를 하는 이야기이다. 끝까지 버텨보려 했지만 입은 옷을 스스로 벗어야 했던 남자들 이야기는 유쾌하게 그려지지만, 모든 장면에서 슬픔이 함께 밀려온다.
코로나 시대, 직장인도 어렵지만 자영업은 정말 어렵다. 요즘 거리 풍경이 더 그렇다. 내가 사는 곳에서 가장 번화한 상가를 며칠 만에 갔다가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임대 게시판이 붙어있는 곳들은 봤지만, 최근처럼 여섯 가게에 연달아 폐업과 임대 표지가 붙어있는 건 처음이었다. 자주 가던 식당 앞에서 “그동안 아껴주신 성원에 감사드립니다”라는 폐업 인사와 마주쳤다. 인테리어를 뜯어낸 식당 내부는 사라진 주인의 가슴속처럼 보였고, 유리창엔 바람에 흔들리는 폐업 인사말이 간신히 붙어있었다. 이 추운 겨울, 그 많던 사장은 어디로 간 것일까?
늦은 밤 번화가에서 뛰어오며 길을 묻는 남자들은 십중팔구 대리 기사다. 언젠가 만난 대리 기사는 양복을 입고 일하면 불편하지 않으냐는 기자의 질문에 ‘존중받고 싶어서’라고 답했다. 취객을 상대할 때도 양복을 입고 있으면 갑옷을 두른 듯 무장이 된다는 것이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지만, 귀천을 나누려 하는 누군가에게 양복은 최소한의 대항이었을 것이다. 요즘은 힘내라고 말하기도 미안한 세상이다. 하지만 견디느라 수고한 우리 모두의 어깨를 토닥이고 싶다. 참으로 기이했던 올해의 달력이 이제 한 장 남았다.
-백영옥 소설가, 조선일보(20-12-0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어느 특별한 수능 도시락
끝없는 코로나 터널 속 꽃핀 고3 손님과 가게 주인의 우정
텅 빈 가게 와준 수험생 위해 꼭두새벽 도시락 싼 볶음밥집 사장

일러스트=이철원
수능 전날 밤 대치동에서 김치볶음밥집 하는 친구가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다음 날 새벽 4시, 단 한 사람을 위한 수능 도시락을 싸기 위해 가게에 나간다고 했다. 그에겐 일곱 살 아들 하나만 있다. 그런데 웬 수능 도시락. 게다가 원래 가게 여는 시각은 오전 11시, 심지어 그날은 쉬는 날이었다.
며칠 전 가게에 찾아온 한 수험생 엄마와의 약속 때문이었다. 고3 딸이 수능 날 점심으로 꼭 그 집 볶음밥을 먹겠다고 했단다. 그의 머릿속에 바로 떠오른 얼굴이 있었다. 지난봄 코로나가 무섭게 퍼지며 손님이 뚝 끊겼을 때,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온 여학생. 이후 일주일에 서너 번 김치볶음밥을 먹고 갔다. 엄마가 상시 대기 중인 여느 대치동 학생들과 달리 늘 혼자였다. 워낙 조용해 서비스 주기도 조심스러웠던 아이였단다. 가게 주인은 지난달에야 겨우 말을 걸었다. 아이는 미술을 전공하는 예고 3학년생이었다.
그 아이 엄마였다. 한눈에도 분주해 보였다. 워킹맘이었다. 아이 엄마는 “고3 애가 코로나 때문에 학교에 못 가는데 점심을 못 챙겨줘 늘 미안했다. 그사이 나 대신 따뜻한 밥을 챙겨줘 정말 고맙다”고 했다. 수능 날 아이가 평소 먹던 볶음밥을 포장해 가 보온도시락에 넣어주려 한다는 엄마의 계획을 듣다가 친구가 말했다. “그러지 마시고 수능 전날 도시락통을 가져다 주세요. 제가 당일 새벽에 만들어 싸놓을 테니 아침 6시에 오세요.” 그는 코로나 때문에 1년 내내 맘 졸였을 고3 아이, ‘집밥’ 아닌 ‘집밖밥’으로 아이의 점심을 때우게 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을 워킹맘을 그렇게라도 응원하고 싶었단다.
그에게 물었다. 그렇게까지 한 이유가 뭐냐고.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정작 위로받은 사람은 나였어. 가게 문 열어 놨는데 손님 하나 없이 휑한 것만큼 대책 없을 때도 없거든. 코로나가 가게를 삼켜버렸을 때, 그 아이가 온 거야. 우린 어쩌면 피난처로 함께 대피한 무언(無言)의 동지였을지 몰라.” 말 한마디 없었지만 가게 주인은 따스한 한 끼로, 아이는 존재 자체로 서로의 마음을 데우는 작은 모닥불이었다.
사실 그에게 2020년은 혹독한 해였다. 명문대 출신 전문직 맞벌이였던 그는 아내와 함께 6년 전 잘나가는 직장을 관두고 김치볶음밥 전문 푸드트럭에 도전했다. 매스컴도 꽤 탔다. 사업을 불려 1년 전 호기롭게 대치동에 매장을 냈는데 느닷없이 코로나란 암초가 나타났다. 매출은 수직 낙하. “우산 없이 언제 끝날지 모를 소나기를 하염없이 맞고 있는 기분”이란다.
친구 얘기를 들으며 일본의 인기 단편집 ‘우동 한 그릇’ 중 ‘마지막 손님’편이 떠올랐다. 작은 과자점 점원 게이코는 가게 문을 닫고 나오다 한 손님을 마주친다. 임종 앞둔 어머니께 드릴 과자를 사러 왔다는 남자에게 기꺼이 문을 열어 주고, 과자 값도 받지 않은 게이코. 그날 밤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한 사람의 손님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한 사람의 손님의 생활을 위해 나의 이익을 버린다. 인간으로서의 아름다움을 우리 상인들의 모습으로 간직하고 싶다.”
올 3분기 말 자영업자가 진 은행 빚은 387조원(한국은행 자료). 사상 최대다. 불가항력의 역병 속, 자영업자들 가슴은 실금투성이가 됐다. 단골 수험생 하나를 위한 수능 도시락은 최악의 나날을 버티면서 써내려간 자영업자의 희망가일지 모른다.
도시락 받아가던 아이 엄마가 말했단다. 딸아이가 영상미디어학과에 진학해 그 가게 영상을 찍는 게 목표라고. 그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이왕이면 카메라 든 아이도, 영상 속 가게 주인도 마스크 없이 활짝 웃을 수 있기를.
-김미리 기자, 조선일보(20-12-05)-
========================================
'[세상돌아가는 이야기.. ] > [國內-이런저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자동차 핸들 잡는 자세에 따른 성격 분석] (0) | 2020.12.13 |
|---|---|
| [‘尹축출=檢개혁’… 자기들끼리만 걸린 집단최면] [친문 자중지란] (0) | 2020.12.11 |
| [‘돌민정음’ 빌보드 정복] [위대한 기록 앞에 부끄러운 자화상..] (0) | 2020.12.02 |
| [어떤 도굴꾼은 풍수사보다 더 유능하다] (0) | 2020.11.21 |
| [三星의 솥바위 전설] [반도체와 ICBM] [AI 변호사를 대하는.. ] (0) | 2020.1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