與 대표 비서의 극단 선택
일본 정계의 최대 뇌물 스캔들로 꼽히는 리크루트 사건이 한창이던 1989년 4월 다케시타 총리의 비서가 주검으로 발견됐다. 30여년간 다케시타의 ‘금고지기’를 하던 인물이었다. 그가 “모든 것은 내가 한 일”이라는 말을 남기고 영원히 입을 다물자 사건은 거짓말처럼 흐지부지됐다. 1976년 록히드 뇌물 사건에선 다나카 전 총리의 운전기사가 자동차에서 배기가스를 틀어놓고 목숨을 끊었다. 그가 5억엔의 현금을 실어날랐다고 검찰에서 자백한 직후였다. ‘윗분’을 배신했다는 죄책감 때문인 것으로 추정됐다.

▶1979년 더글러스 그라만 사건 때는 핵심 피의자인 닛쇼이와이 상사 상무가 조직과 회장을 보호하기 위해 극단적 선택을 했다. 2005년 세이부그룹 회장이 주식을 위장 보유한 사실이 드러났을 때는 사장과 주식 담당 직원이 잇따라 그렇게 했다. 자신의 희생으로 조직과 ‘윗분’을 살려야겠다는 생각, 아니면 자기가 폐를 끼쳤다는 ‘속죄 의식’에서 비롯된 일본식 선택이라고 한다. 과거 일본에선 이런 식의 행동을 당연시하거나 심지어 높이 평가하는 분위기까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에서도 이런 문화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비리 의혹에 연루된 사람들의 극단적 선택이 꼬리를 물고 있다. 지난해 12월 청와대 울산시장 선거 공작에 연루된 청와대 비서관, 지난 6월엔 민주당 윤미향 의원과 함께 정의기억연대 회계 의혹에 연루된 마포쉼터 소장이 목숨을 끊었다. 두 사람 모두 윗사람의 불법을 드러낼 ‘연결 고리'였다. 연결 고리가 끊기면서 수사는 답보 상태다.
▶이낙연 민주당 대표실 부실장 이모씨가 검찰 조사를 받다 극단적 선택을 했다. 초대형 사기 사건을 일으킨 옵티머스로부터 이 대표 선거 사무실 사무기 지원을 받은 일로 조사를 받았다. 옵티머스 아닌 다른 금품 수수 혐의가 나왔다는 보도도 있다. 이 대표가 전남지사 시절 경선 과정에서 당비를 대납하는 등 이 대표를 돕다가 실형을 살았던 사람이다. 이 대표의 최측근이자 내부 사정을 속속들이 아는 ‘집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입을 다물기 위한 죽음인지, 아니면 주군 모르게 저지른 ‘실수’에 대한 속죄인지 추측만 난무할 뿐이다.
▶우리 정치권 일각에선 죽음이 하나의 도피처이자 수단으로 여겨지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극단적 선택으로 끝나지 않고 박원순 서울시장이 뒤를 이었다. 여당은 성추행으로 인한 박 시장 죽음을 미화하려 안간힘을 썼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미화될 수는 더욱 없다.
-정권현 논설위원, 조선일보(20-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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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시대, '무서운 사람들의 무서운 정치'
박 시장의 '극단적 선택' 방치해 등 떠민 권력의 사람들
권력 分立 허문 ONE TEAM 시스템 무너지면 일시에 붕괴
박원순 서울시장 사건을 지켜보며 '참 무서운 정권'이란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이 정권 사람들은 피해자의 고소 사실을 실시간으로 빼돌리고 정권 지지자들은 '피해 호소인'이란 신조어(新造語)를 만들어가며 피해자를 향한 2차·3차 공격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정권과 정권 사람들이 두려워진 건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니다.
이 사건을 최초로 인지(認知)했던 검찰과 고소장을 접수한 경찰의 보고 라인에 위치했던 적지 않은 정권 사람들은 박 시장이 '극단적 선택'을 하기 전에 사건 정보를 공유(共有)했다. 그러면서도 어느 누구도 예상할 수 있었던 박 시장의 '극단적 선택'을 만류하지 않았다. 박 시장은 비슷한 유형의 사건에 연루됐던 부산시장이나 충남지사와는 살아온 길이 달랐던 사람이다. 인권 변호사로 이름을 쌓았고, 여성 권익 옹호에 앞장섰고, 성희롱 사건에 대한 최초의 법원 판례(判例)를 이끌어낸 주역 가운데 하나다.
정치 상황 판단으로 평생을 보냈던 청와대 사람들이 박 시장이 처한 처지를 몰랐을 리 없다. 그의 정치 참모들도 마찬가지다. 왜 그들은 '극단적 행동'을 만류하지 않았을까. 퇴로(退路)가 끊긴 사람을 방치하는 것은 등을 떠미는 것과 같다. 박 시장의 행동은 '극단적'이었지만 그가 갔던 길은 '선택의 결과'가 아니었던 셈이다. 그것은 '강요된 선택'이었다. 절벽 앞에 선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보다 '극단적 선택'을 '정치 득실(得失)의 저울대'에 올려놓고 계산했던 것이다.
박 시장을 죽음의 길로 내몰았던 그들은 그의 사후(死後) 어마어마한 꽃다발과 무수한 찬양(讚揚)의 말로 '강요된 선택'을 덮었다. 죽음을 저울에 다는 그들의 계산법은 무엇이었고 그런 판단에 참고한 전례(前例)는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수사를 계속 받기보다 죽음을 선택했기에 정치적으로 부활(復活)할 수 있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과 죽음을 선택했기에 같은 진영 내에서 사람 됨됨이에 대한 소리가 이어지는 노회찬 전 의원의 경우를 떠올렸을 것이다. '사람이 먼저다'라는 정치 구호는 헛말이다.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 진영(陣營)의 이익이다. 박 시장에게 바쳐진 서울시장(葬)이란 과거에 없던 장의 절차나 박원순 문서 기록관 건립 추진은 박 시장 생애를 마지막까지 정치에 이용하는 처사다. 위선(僞善)을 뺨치는 도덕성의 타락이다.
지금 이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라는 이름의 폭력극(暴力劇)'은 박 시장의 죽음이란 렌즈를 통해야만 이해가 가능하다. '(우리) 권력도 엄정(嚴正)하게 수사하라'는 대통령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따랐던 검찰총장은 무슨 일을 겪고 있는가. 따르던 후배들은 옷을 벗었거나 원도(遠島)에 유배(流配) 처분을 받았거나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다. 수사의 주체(主體)는 박 시장 고소 관련 정보를 가장 먼저 접하고 권력 상부(上部)로 유출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서울중앙지검이다. 말이 검찰총장이지 머리·몸통·팔다리가 다 잘려나간 의자만 있는 자리다. 대통령의 말만 듣고 마음을 읽지 못한 죄(罪)다.
감사원장은 또 어떤가. 청와대는 그를 임명하면서 '감사원의 독립성과 정치적 중립을 수호할 적임자'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걸 자신에 대한 대통령의 기대 사항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판사 출신이라 '감사원은 대통령에게 소속하되 그 직무(職務)는 독립성을 유지한다'는 감사원법 제2조도 든든한 버팀목으로 여겼을 법하다. 착각이었다. 감사원이 원전(原電) 폐쇄 결정의 타당성 여부를 '진짜' 감사하자 여당과 어용(御用) 언론은 벌떼처럼 일어섰다. 다음 단계는 감사원장을 감사원 내부에서 고립화(孤立化)하는 방식일 것이다.
백선엽 장군을 현충원에 묻은 다음 날 현충원 인터넷 게시판에 '친일부역자'라는 팻말을 다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반대편에 대한 가혹한 형벌(刑罰)로 보면 이 정권은 조선의 적통(嫡統)을 이은 세력이라 할 만하다.
건물에 내화벽(耐火壁)을 쌓는 것은 건물이 한꺼번에 불길에 휩싸여 붕괴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다. 권력 분립(分立)이 정권에 불편한 것 같지만 이 역시 비상시(非常時) 정권의 총체적 붕괴를 막는 안전장치다. 이 정권은 권력분립이 아니라 원 팀(one team) 시스템이다. 대통령과 청와대 비서실, 대통령과 내각이 한팀이 되는 것이 아니다. '대통령과 대법원' '대통령과 헌법재판소' '대통령과 검찰' '대통령과 감사원' '대통령과 KBS·MBC'가 한팀이 되는 것이다. 이런 시스템은 무너지면 단번에 붕괴한다. 무서운 나라의 두려운 시대를 산다.
-강천석 논설고문, 조선일보(20-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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