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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푸른 밤’에서 ‘미나리’까지] [윤여정의 50년 전 다짐]

뚝섬 2021. 5. 18. 06:33

깊고 푸른 밤’에서 ‘미나리’까지

 

[에릭 존의 窓]

 

올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자로 윤여정 배우의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 작년 영화 ‘기생충’이 작품상을 받을 때 온 국민이 느꼈던 전율을 다시 한번 느꼈다. 작년 아내의 문자메시지로 ‘기생충’의 수상 소식을 접하자마자 나는 함께 회의 중이던 직원들에게 이를 알렸고, 회의실은 순식간에 기쁨의 탄성으로 가득 찼다. 올해는 비록 대면 회의가 아닌 화상회의 중이었지만 작년의 황홀했던 순간이 그대로 재현되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최근 한국 영화계의 쾌거를 되새기며, 과거 한국 영화와 쌓아온 추억과 함께 지난 수십 년간 한국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돌아보고 싶었다.

 

/일러스트=이철원

 

먼저 작년 아카데미 수상으로 빛나는 봉준호 감독의 이전 작품들을 생각했다. 서울 한 극장에서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을 보면서 극적인 스토리 전개, 카메라 워크, 그리고 음산한 배경에 압도당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 영화에서 처음 접한 송강호 배우의 연기는 가히 독보적이었다. 그는 언제 봐도 멋진 최민식 배우, 그리고 늘 변화무쌍한 유해진 배우와 더불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가 되었다. 이후 봉준호 감독과 송강호 배우는 ‘괴물’과 ‘설국열차’에서 호흡을 맞추며 한국 영화를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콤비로 자리 잡았다. 작년 미국에서 ‘기생충’이 처음 개봉했을 때 이 콤비가 합을 맞춘 작품들을 소개하며 미국인 친구들을 한국 영화에 입문시키기도 했다.

 

봉 감독의 과거 명작들을 반추하다 보니 내가 한국 땅을 처음 밟았던 1984년까지 기억이 거슬러 올라갔다. 그 자체로 미술 작품이었던 당시의 대형 극장 간판들은 지나가던 나의 발걸음을 붙잡아 세울 만큼 화려했다. 서울에서 보내는 첫 주말에 시내 구경을 하던 중 나는 한 극장 앞에 서서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이라는 문구를 보며 한참을 고민했다. 한국어를 배운 지 얼마되지 않았던 나는 몇 분이 지난 후에야 그 문구가 영어 원제를 한국말로 그대로 음차하여 옮겨 놓은 것이란 사실을, 그리고 그 옆에 서구적인 외모에 턱시도를 입은 남자가 바로 한국인 미술가 손끝에서 재탄생한 배우 숀 코너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마 지나가던 사람들은 가만히 서서 한국어로 쓰인 영화 제목을 한 글자 한 글자 읽어가며 고민하던 나를 이상하게 봤을 것이다. 한국 극장에서 처음 본 영화는 ‘깊고 푸른 밤’이었다. 영화관에 들어서는 순간 코끝을 찌르는 오징어 구이 냄새가 처음에는 무척 강렬하게 느껴졌다. 익숙해지고 나니 이제는 미국 극장의 팝콘과 나초 치즈 냄새가 너무 느끼해서 견디기 힘들 정도다.

 

지난 35년 한국 영화사에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변천사도 고스란히 담겨있다. 1980~90년대 주한 미국 대사관에 근무할 때 한국 정부가 스크린 쿼터제를 폐지하도록 설득하는 데 힘썼던 기억이 있다. 공정한 경쟁의 장이 열리면 미국 영화가 유입될 뿐 아니라 한국 영화 발전의 계기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스크린 쿼터제 유지를 주장하던 이들은 할리우드 영화가 대량으로 유입되면 한국 영화 산업을 잠식할 것이라며 반발했지만 결국 쿼터제는 폐지됐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 영화는 국내를 넘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 한국 감독들은 아주 한국적이면서도 보편적인, 강렬한 이야기를 영화에 담아냈다. ‘기생충’이 좋은 예다.

 

미국 관객들 눈에는 한국 어머니들의 치열한 교육열, 부잣집에서 일하는 운전기사와 가사 도우미의 모습, 그리고 짜파구리가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문화적 장벽을 넘어선 ‘기생충’의 성공을 보면, 봉 감독이 수상 소감에서 인용했던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라는 한 영화계 거장의 말에 공감하게 된다. 앞으로도 한국이 다양한 부문에서 고유의 정서와 개성을 드러낼수록 전 세계가 한국을 주목할 것이다.

 

연이은 아카데미 수상으로 입증되는 한국의 저력을 볼 때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한국의 매력 두 가지를 꼽아보고자 한다. 우선, 윤여정 배우의 수상 소감에서 내가 수차례 미국인 친구들에게 설명하려고 애썼던 한국인 특유의 시니컬한 유머를 엿볼 수 있다. 성공에 너무 목매지는 않되 인생이 때때로 던지는 고난을 재치 있게 넘어서는 한국인들의 삶에 대한 태도는 나를 자꾸 한국으로 돌아오게 하는 매력 중 하나다. 이와 더불어 봉준호 감독과 윤여정 배우가 몸소 보여준 성실함 역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 둘은 국내 영화인이 해외 진출을 감히 꿈꾸기도 어려웠던 시절에 영화계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오랜 기간 능력을 갈고닦은 끝에 결국 국제 무대에서 정상에 올랐다. 지금의 한국은 영화뿐 아니라 다른 여러 분야에서도 앞서 말한 삶을 대하는 의연한 태도, 그리고 창의성을 겸비한 탁월한 기술력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제품을 만들어낸다. 한국이 보여주는 창의성과 기술의 놀라운 결합은 내가 현재 속해 있는 회사뿐 아니라 여러 외국계 회사가 한국에 R&D 센터를 세우는 이유다. 그런 의미에서 윤여정 배우와 봉준호 감독이 이룬 쾌거는 개인적 성취일 뿐 아니라 한국에 있는 우리 모두의 위상을 드높여주는 일이다. 진심을 다해 축하드린다.

 

-에릭 존 보잉코리아 사장/前 주태국 미국 대사, 조선일보(21-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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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정의 50년 전 다짐

 

1971년 3월 청룡영화상 시상식 소식을 보도한 조선일보 기사. 당시 윤여정은 영화 데뷔작인 '화녀'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엄마 나 상 탔어.”

 

정확히 50년 전 윤여정의 수상 소감은 지금처럼 화려하거나 세련되지 않았다. 1971년 김기영(1919~1998) 감독의 ‘화녀’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받은 자리였다. 당시 스물넷의 신인 배우 윤여정은 “이 벅찬 기쁨을 먼저 엄마에게 전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한 뒤 TV 카메라 앞에서 절했다. ‘화녀’는 윤여정의 영화 데뷔작.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 수상 소감 말미에 그가 고인이 된 김 감독에게 특별히 감사의 뜻을 밝혔던 것도 이런 사연 때문이다.

 

당시 청룡영화상을 주최한 조선일보는 1971년 3월 7일 자에서 신인 배우 윤여정을 향해서 축하와 함께 따끔한 조언도 빼놓지 않았다. “모험을 무릅쓰고 신인에게 무게 있는 상을 안겨준 것은 연기와 목소리가 따로 겉돌아온 지금까지의 ‘반쪽 배우(?)’에의 경고와 자극인 줄 안다. 윤여정의 발전 여부가 앞으로 우리 영화의 질적 향방을 가름하는 표본이 될 것이다. 격려를 아끼지 않는 만큼 만심(慢心)하지 말고 정진하기 바란다.”

 

1971년 윤여정이 '화녀'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받은 직후의 인터뷰

 

‘그의 발전 여부가 우리 영화의 질적 향방을 가름하는 표본이 될 것’이라는 당부는 50년 뒤 그대로 현실이 됐다. 윤여정이 나흘 뒤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했던 말도 흥미롭다. “이번 수상으로 제대로 배우가 되기도 전에 스타라는 인상을 받을까 봐 걱정이에요. 그리고 선배들에게도 외람된 것 같고요. 하지만 정말 기뻐요.”

 

영화계 동료들을 먼저 챙기고 자신의 마음을 다잡으면서도 제 할 말은 다 하는 솔직한 화법은 그때도 그대로였다. 인터뷰 말미에는 20대 배우 윤여정의 포부도 드러나 있다. 도전하고 싶은 배역에 대한 질문에 그는 “근본적인 여성의 매력, 순종이나 미적인 감각을 벗어나 성격 배우로서, 특히 웬만해선 타협이 잘 안 되는 그런 성격을 가진 역”이라고 답했다.

 

실제로 윤여정은 2000년대 홍상수·임상수 감독의 작품과 저예산 독립 영화에 출연하면서 파격적인 연기 변신을 거듭했다. 이 때문에 ‘충무로의 대모’로도 불렸다. 50년 전의 다짐을 그대로 실천한 셈이다. 당시는 ‘신인 배우’의 한국어 소감이었다면 지금은 ‘월드 스타’의 영어 소감으로 달라졌을 뿐, 윤여정은 언제나 윤여정이었다.

 

실은 그는 60년 전에도 같았다. 대한체육회장·문교부 장관을 지낸 소강 민관식(1918~2006) 선생은 1957년 중산육영회(현재 소강민관식육영재단)를 설립했다. 가난하지만 재주 있는 학생들을 발벗고 도와주기 위한 취지였다. 이 장학회의 1960년 4회 장학생이 윤여정이다.

 

1960년 윤여정이 중산육영회(현 소강민관식육영재단) 장학생 대표로 했던 답사.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 아래서 세 딸 가운데 맏딸로 자라난 윤여정은 이 장학회와 연을 맺으면서 학업을 이어 갔다. 소강민관식육영재단의 소장 자료를 통해서 당시 장학생 대표였던 윤여정의 답사를 볼 기회가 있었다.

 

“저희들은 이 자리에서 비록 변변치 못한 말솜씨나마 이 고마우신 여러 어른들의 뜻에 어긋남이 없이 열심히 공부하여 이 나라의 없어서는 아니 될 일꾼이 되고 앞으로 저희들처럼 불우한 어린이들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는 결심을 굳게 하는 터입니다.”

 

영화 '죽여주는 여자'

 

결과적으로 당시 13세 소녀 윤여정은 그 결심을 지킨 셈이 됐다. 누구든 삶에는 연속과 단절의 지점이 존재한다. 윤여정의 반 세기 연기 인생에서 가장 큰 단절과 변화는 아마도 결혼 후 공백과 이혼 후 복귀였을 것이다. 하지만 인생사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달라지지 않는 모습도 있다. 어쩌면 윤여정은 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공한 것일지도 모른다. 50년 전 신인 배우 시절과 60년 전 고학생의 다짐이 그걸 보여준다.

 

-김성현 기자, 조선일보(21-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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