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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도 원양어선 태우는 '참치왕'] .... [어느 식당의 원산지 표기.. ]

뚝섬 2025. 5. 16. 06:30

[손자도 원양어선 태우는 '참치왕'] 

[참치 회사는 어떻게 이차전지 시장을 뚫었나]

[어느 식당의 원산지 표기: 오징어=원양어선]

[닌텐도의 성공 비밀]

 

 

 

손자도 원양어선 태우는 '참치왕'

 

1957년 6월 최초의 원양어선 ‘지남호(指南號)’가 부산항을 출항했다. “남쪽으로 배를 몰아 부(富)를 건져 올려라”라는 뜻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작명했다. 원래 미국산 중고 시험조사선이었다. 대만·필리핀·싱가포르 해역에서 참치 조업을 시도했지만 허탕을 쳤다. 동승한 미국인 기술 고문이 허리를 다쳐 대만에서 하선한 탓에 선원들은 외국 책을 보면서 낚싯줄을 던져야 했다. 싱가포르의 한국인 무역상에게 돈을 빌려 기름을 채운 뒤 인도양까지 가서야 첫 조업에 성공했다.

 

▶지남호가 출항 108일 만에 참치 10t을 싣고 부산항에 귀환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참치(실제는 새치)를 비행기로 공수해 경무대 뜰에 걸어놓고 기념 촬영을 할 정도로 국가적 경사가 됐다. 1970년대 들어 원양어선이 850척, 선원이 2만3000명에 이를 정도로 원양어업은 주요 수출 산업이 됐다. 원양 수산물이 총수출의 5%를 차지했다. 원양어선을 3년만 타면 집을 산다고 할 정도로 선원들 수입도 좋았다.

 

1959년 남태평양으로 출항한 제2지남호의 항해사는 훗날 세계 최대 참치 선단을 거느린 ‘참치왕’이 된다. 김재철(90) 동원그룹 명예회장이다. “고기를 가득 싣고 사모아로 돌아가는 길이다. (중략) 엊그제까지도 성난 파도가 쳤는데 오늘은 만선 귀항을 축하라도 하는 듯 잔잔하구나.” 김 회장이 동생에게 만선의 기쁨을 전한 편지 글이 36년간 중고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다. 김 회장이 1982년 ‘참치캔’을 만든 덕분에 참치는 국민 음식이 됐다. 명절 때면 참치 선물 세트가 30만개씩 팔렸다.

 

▶김 회장은 장남이 대학생일 때 4개월간 원양어선을 태웠다. “좋은 경영자 되려면 노동의 가치를 알고, 말단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고충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아들에 이어 김 회장의 손자 김동찬(25)씨도 이달 말 원양어선을 타고 참치 조업에 나선다고 한다. 인생의 짐은 무거울수록 좋다. 그럴수록 인간은 성장한다는 김 회장의 말에 그 이유가 담겨 있을 것이다.

 

한국은 한때 미국, 일본과 더불어 3대 어업 강국이었다. 1990년대 이후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태국 등 후발 주자들이 대거 등장한 데다, 각국이 어업 자원을 보호하려고 원양어선 조업료를 대폭 올리고, 쿼터를 줄이고 있기 때문이다. 원양 업계는 고부가가치의 횟감용 참치 ‘수퍼 튜나’를 개발하고, 2㎏에 100만원씩 받는 북대서양 참다랑어 조업에 나서는 등 활로를 찾으려 애쓰고 있다. “역사를 만드는 건 도전뿐”이라는 김 회장의 말에 답이 있을 것이다.

 

-김홍수 논설위원, 조선일보(25-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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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치 회사는 어떻게 이차전지 시장을 뚫었나

 

참치 넣으려 캔 제조업 시작… 그 기술로 배터리 캔 시장 진입
완전히 새로운 영역 뚫기보다 잘하는 기술 확장해 ‘혁신의 사슬’

 

1960년대 태평양을 누비던 청년 선장 김재철의 배를 일본 원양어선들이 뒤쫓았다. 원양어선에 어군 탐지기도 변변찮았던 시절 김 선장은 참치 배에서 소화 덜 된 생선을 꺼내 원주민들에게 보여준 뒤 그 생선이 많은 해역을 물어서 그 길목을 지키다 참치 떼를 쓸어 담고 있었는데, 일본 어선들은 그 비법을 몰랐던 것이다. 이렇게 시작됐던 참치잡이 회사의 혁신은 지금도 이어진다. 반도체, 양자역학, 이차전지 정도 돼야 혁신 기업이라 불릴 것 같은 시대에 오늘은 참치 회사의 60년 혁신을 추적해 볼까 한다.

 

1982년, 김재철 선장이 참치 잡기를 시작한 지 13년째이던 해에 동원은 참치 통조림을 만들기로 했다. 잡는 수산업에서 식품 제조업으로, 1차 산업에서 2차 산업으로 확장한 것이다. 이듬해 동원참치 판매량이 600만개를 돌파하며 돌풍을 일으켰다. 이 무렵 기자도 라면에 참치를 넣어 영양 보충을 시도했던 것 같다.

 

당시 우리의 제조 역량이 워낙 취약했던 터라 통조림 제조는 미국 회사에 맡겼다. 그런데 통조림 생산 규모 등을 결정하는 데 있어 점점 미국 통조림 업체 입김에 휘둘리게 되자 독자 생산을 결정했다. 매사가 그렇듯 시련은 발명의 어머니였다. 참치에 물을 넣은 일반 참치 통조림과 달리 동원은 생선 통조림을 찌개나 볶음밥 재료로 활용하는 한국인 특성을 감안해 면실유(지금은 카놀라유)를 넣어 풍미를 높였다. 이 바람에 요즘도 식용유 값이 오르면 참치 통조림의 원가가 올라가는 일이 발생한다. 참치 캔 제조에 나선 지 35년째인 지난해 통조림용 참치 캔의 누적 생산량은 73억개를 돌파했다. 지구 15바퀴를 돌고도 남고, 에베레스트산의 32배가 넘는 높이다. 그사이 동원은 국내 최고의 스틸 캔 제조 업체가 됐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2014년부터는 원터치 뚜껑을 국산화했다. 스틸 캔을 따기 위해 별도의 오프너가 필요 없게 돼 소비자 입장에서는 편의성이 커지고, 생산자 입장에서도 원가 절감 효과를 봤다.

 

그런 참치 캔 제조 기술이 이제는 이차전지 사업으로 확대되고 있다. 참치 회사가 무슨 이차전지냐고 할지 모르지만 두 갈래로 접근 중이다. 우선 캔 기술을 그대로 활용해 이차전지용 배터리 캔 시장에 진입을 시도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캔을 만들면서 자연스레 진출한 ‘레토르트 포장재’ 사업에서 획득한 알루미늄박 기술이다. 이차전지의 핵심인데, 동박에 비하면 기술 장벽이 낮지만 향후 급증할 전기차 시대에 유망한 분야다. 동원의 한 관계자는 “완전 새로운 영역을 뚫었다기보다 지금 잘하는 경쟁력을 정확히 파악해 확장하는 ‘혁신의 사슬 방식’이라고 말했다. 혁신이란 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게 아니다.

 

동원은 최근 3년간 현대자동차에서 생산 엔지니어 7명을 스카우트했다. 다시 한번 참치 회사에 웬 자동차 회사 기술자라고 할지 모르지만 지금 수산, 식품 사업군에 포진해 있다. 자동차 산업만큼 생산 역량이 뛰어난 사업군은 없다는 판단에서다.

 

산업의 대변혁에다 저성장 시대까지 겹쳐 맞이하는 우리 사회 곳곳에 혁신의 목소리가 높다. ‘전기차’ 시대를 맞는 정유사들은 탈황 기술 등을 통해 돌파구를 찾는 식이다. 기존의 문법과 법칙이 통하지 않는 것이다. 거대한 역경이겠지만 결국엔 혁신으로 뚫고 갈 것이다.

 

“변하려면 변하면 안 되는 것을 찾아내면 된다. 새로운 것을 하고 싶다면 안 바꿔야 하는 것을 찾아보면 금세 답이 나온다” ‘경영이란 무엇인가’를 쓴 조안 마그레타의 말을 새겨볼 만한 것 같다.

 

-이인열 산업부장, 조선일보(23-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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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식당의 원산지 표기: 오징어=원양어선

 

얼마 전에 경상남도 거창의 한 식당에서 봤다. 벽에 버젓이 붙어 있었다(be overtly pasted up on a wall). ‘원산지(country of origin): 오징어(squid)=원양어선(deep-sea fishing vessel).’

 

식당 주인이 interior ornament(인테리어 장식)으로 붙여 놓은 것인지, ulterior motive(숨은 동기)가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그 집은 추어탕(loach soup) 집이었다. 그 기억이 난 김에 우스갯소리들을 모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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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은 ‘라떼는 말이야’ 하는 아버지에게 ‘과거에 산다(live in the past)’고 비아냥대는데, 그때는 집값이 훨씬 쌌기(be much cheaper) 때문인 줄 모르고 하는 소리다.”

 

“당신이 내 남편이라면 당신 커피에 독을 탔을(put poison in your coffee) 거예요. 당신이 내 마누라였다면 그 커피 당장 마셔버렸을 거요.”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TV가 책장(bookshelf)보다 더 큰 사람은 믿지 말아라.’”

 

“아들 넷을 둔 아빠에게 물었다. ‘만약 모든 걸 다시 할 수 있다면(if you had it to do all over again), 그래도 아이를 낳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저 네 놈만 아니라면….’”

 

“‘아, 달력 스케줄 좀 확인해보고…'라는 말은 ‘엄마한테 물어보고…’의 성인용 버전(adult version)이다.”

 

“당신이 어린 자녀들에게 소리를 질러대지(yell at your young kids)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아이들과 충분한 시간을 함께 보내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하나님은 돈을 어떻게 생각하실까? 하나님이 준 그 돈을 쓰는 인간들의 작태를 보면(look at the people’s conducts) 알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열린 마음을 가져야(be open-minded) 한다. 하지만 그 사이로 뇌가 빠져나갈(drop out) 정도는 아니어야 한다.”

 

“결혼은 하늘에서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한다. 천둥(thunder)과 번갯불(lightning)도 그렇다.”

 

“허구(fiction)와 실제 현실(reality)의 차이는? 허구는 말이 되게끔(make sense)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명예훼손으로 소송을 걸려고(sue for defamation of character) 했다가 생각을 접었다(think better of it). 나에게 그럴만한 명예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낙천주의자(optimist)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떨어져(fall off it) 50층을 지나면서도 ‘지금까지는 다 좋네(So far so good)’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누구나 지구를 구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엄마 설거지를 돕고(help mom do the dishes) 싶다는 이는 아무도 없다.”

 

“나와 아내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인간을 둘이나 만들어냈으면서(creat two human beings from scratch) 거의 다 만들어져 있는 간단한 조립식 가구는 꿰맞추지 못해 끙끙댄다.”

 

“누군가를 비판하기(criticize someone) 전에 그 사람의 신발을 신고 1마일을 걸어보라고(walk a mile in their shoes) 한다. 그러다 보면 그 사람과 1마일 멀어지게 되고 남는 건 그 사람 신발뿐인 경우도 있다.”

 

“이 나라의 문제(the trouble with this country)는 ‘이 나라의 문제는…’이라고 말하는 인간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윤희영 에디터, 조선일보(21-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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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텐도의 성공 비밀

 

운전을 하던 직원이 뒷자리 사장에게 불쑥 말을 건다. "전자계산기처럼 생긴 (액정 화면) 게임기를 만들면 팔리지 않을까요?"

빚더미에 휘청거리던 화투회사 사장은 친하게 지내던 계산기 회사 간부에게 이야기를 전한다. 얼마 후 함께 만들자는 승낙을 받았다. 1980년 이렇게 탄생한 액정(液晶)화면 게임기가 '게임&워치'다. 세계 휴대용 게임기의 역사는 여기서 시작됐다.

일본 교토(京都)의 작은 기업에 불과하던 닌텐도(任天堂)에서 일어난 일이다. 화투업체 사장과 의기투합해 액정을 공급해준 회사는 1970년대 '덴타쿠(電卓·전자계산기)전쟁'에서 카시오에 참패했던 샤프였다. 아이디어를 낸 운전석 직원은 도시샤(同志社)공대의 성적 불량 졸업생 요코이 군페이(橫井軍平). 그는 훗날 강연에서 "전자회사에서 모두 낙방해 고향 회사라면 어디든 감지덕지였다"고 말했다.

 

닌텐도 역사에는 젊은 주역 2명이 더 등장한다. 먼저 가나자와(金澤)미대를 졸업한 미야모토 시게루(宮本茂). 지방대 출신 디자이너였다. 미야모토는 집안 인연이 있던 닌텐도에 샐러리맨으로 입사해 요코이와 함께 그 유명한 '마리오'와 '젤다' 소프트웨어를 만들었다.

또 한명은 외부인이다. 16년 동안 게임 동인지(同人誌)를 만들던 공업전문학교 출신 다지리 사토시(田尻智). 그는 어린 시절을 숲이 많던 도쿄 변두리에서 지냈다. 그때 친해진 곤충을 소재로 게임 기획서를 만들어 닌텐도 문을 두드렸다. 지금도 세계 어린이의 마음을 꽉 잡고 있는 '포켓몬스터'다.

이들 3명을 묶어 닌텐도를 일군 경영자는 화투가게의 창업 3세 야마우치 히로시(山內溥). 지금은 세계적 인사가 된 샐러리맨 미야모토가 "사장님 웃는 얼굴을 보고 싶어서 모두 열심히 했다"고 회고할 만큼 카리스마형 독재자였다. 야마우치는 숨어 있던 인재를 정확히 뽑아내 전폭적으로 밀어준 이유 하나로 세계적 경영자 반열에 올랐다.

닌텐도는 엄청난 발명을 내놓은 적이 없다. 기술도 없었다. 한물간 소형 액정을 게임기에 붙이고, 누구나 시간을 때울 수 있는 단순한 캐릭터의 게임을 만든 것이 전부다. 게임기의 기술력, 소프트웨어와 캐릭터의 정교함 모두 경쟁자 소니에 밀렸다. 그러나 시장을 석권한 것은 닌텐도였다.

"시든 기술의 수평사고" 샐러리맨 요코이가 말한 성공 비결이다. 게임기에 액정을 붙인 것처럼 누구나 알고 있는 흔한 기술을 누구나 아는 다른 분야에 적용하는 응용력을 말한다. 그의 말대로 '훌륭한 상품'이 아니라 '팔리는 상품'이 중요한 것이다. 요코이는 1997년 교통사고로 숨진 뒤 일본 경제계에서 '게임산업의 신(神)'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닌텐도' 언급 이후 다양한 반응이 나온다. "정부부터 게임산업을 지원하라"는 비판에서, '명(明)텐도 MB'란 조롱까지. 하지만 정부 지원이 닌텐도 성공에 역할을 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뚝심의 경영자, 엉뚱한 상상력의 샐러리맨, 자연에서 성장한 청년 마니아의 흥미진진한 모험담만 있을 뿐이다. 누구나 닌텐도가 될 수 있다는 희망 이외에, 어떤 절망적 메시지도 그곳엔 없다.

우리가 닌텐도에서 배워야 할 것은 '수평사고'다. 옆을 살피면 요코이·미야모토·다지리와 같은 인재, 깃발을 꽂으면 물러서지 않는 불굴의 경영자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림없다"고 아우성이다. 정부만 올려다보는 습관, 옆자리 인재를 경시하는 '수직사고'가 한국의 닌텐도를 어림없게 만드는 것이다.

 

-선우정 도쿄특파원, 조선일보(09-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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