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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토男, 에겐女] [MBTI와 사주] [철학강사가 만든 '혈액형별 성격']

뚝섬 2025. 5. 20. 06:43

[테토男, 에겐女] 

[MBTI와 사주, 무엇을 믿습니까]

[철학강사가 만든 '혈액형별 성격']

[혈액형은 A, B, AB, O형뿐? 무려 300가지]

 

 

 

테토男, 에겐女

 

서양 철학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인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보편적인 관심에서 비롯됐다. 소크라테스는 정치에 뜻을 둔 제자에게 “정치가로 성공하려면 먼저 너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부터 파악하라”고 조언하는 용도로 이 말을 썼다. 그러나 철학이나 과학보다는 주술에 의지하는 사례가 더 많았다. ‘너 자신을 알라’도 원래는 그리스 델포이 신전에 새겨진 주술 문장이었다. 서양에선 점성술이, 동양에선 사주팔자가 그런 도구로 쓰였다.

 

▶현대라고 다르지 않다. 한국과 일본에선 AB0식 혈액형 분류법이 최근까지도 성격 파악 도구로 널리 쓰였다. 1927년 일본의 한 우생학자가 ‘혈액형에 의한 기질 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하며 A형은 소극적이고 B형은 진취적이라 규정한 게 계기였다. 한국에선 혈액형 속설을 근거로 영화도 만들어졌다. 영화 ‘B형 남자친구’는 일편단심인 A 혈액형 여자가 바람기 많고 이기적인 B형 남자친구의 마음을 잡기 위해 부심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혈액형과 성격에는 아무런 과학적 상관관계가 없다. 인간의 성격을 고작 혈액형 4개로 분류하는 것 자체가 억지이고 비과학적이다. 그래선지 2010년대 들어 혈액형보다는 성격을 16개 유형으로 분류하는 MBTI가 대세로 자리 잡았다. 청춘 남녀의 미팅 자리에선 이성에게 자신의 MBTI를 밝히는 것이 예의가 됐다. 기업들도 MBTI로 직원을 채용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들어가고 싶은 회사가 좋아할 만한 내용으로 자기소개서에 MBTI를 조작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올해 들어 MBTI 대신 ‘테토 남녀, 에겐 남녀’가 성격 분류법으로 유행한다고 한다. 테토와 에겐은 남성 호르몬 테스토스테론여성 호르몬 에스트로겐을 줄인 말이다. 적극적이고 활달하면 테토남이나 테토녀, 상냥한 성격에 부드러운 얼굴선을 가졌으면 에겐남이나 에겐녀라는 식이다. 몇 해 전 국내 한 블로거가 분류법을 만들었고 이를 본 만화가가 그림으로 그려 소셜미디어로 퍼뜨린 게 수백만 조회 수를 기록하며 확산했다.

 

▶테토 남녀 분류법도 과학적 근거는 없다. 성호르몬 수치도 재지 않고 겉으로 보이는 성격과 외모로 사람을 판단한다. 심리학자들은 “테토 남녀 같은 분류법은 그냥 재미일 뿐이니 이런 분류에 기대어 자신을 규정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가수 시인과촌장은 ‘가시나무’에서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라고 노래했다. 사람의 마음은 고정된 것이 아니고 배움과 경험의 축적을 통해 바뀌고 성장한다는 뜻일 것이다.

 

-김태훈 논설위원, 조선일보(25-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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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TI와 사주, 무엇을 믿습니까

 

MBTI와 사주에 빠진 MZ세대

 

나의 성격과 친구·직장 내 대인관계가 막히면 MBTI(Myers Briggs Type Indicator)를 들여다보고, 진로와 미래·연애가 답답할 땐 사주 앱을 켠다. MBTI에 빠진 청년들이 구세대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사주에도 눈길을 돌리고 있다. MBTI와 사주, 어떻게 다르고 같을까. 어느 쪽이 더 용할까.

 

MZ들의 인간관계 척도가 된 MBTI

 

직장인 최모(32)씨는 소개팅 주선을 받을 때 ENTP 유형을 무조건 기피한다. 최씨는 “살면서 겪은 최악의 인간 유형이 공교롭게 다 ENTP였다”며 “주변에도 물어보니 제가 생각한 ENTP의 단점과 비슷한 경우가 많더라. 각자 자신의 MBTI에 맞는 유형을 찾아서 소개팅을 받는 게 보통”이라고 했다.

 

MBTI는 요즘 MZ세대가 가장 신뢰하고 의지하는 인간 평가 수단이다. 대인관계를 ‘손절’하거나 ‘찐친(진짜 친한 친구)’을 고를 때, 연애 상대를 정하거나 심지어 회사에서 직원을 뽑을 때도 MBTI가 중요한 가늠자로 사용된다. MBTI 유형별로 연애 궁합이나 직장 상사-부하 궁합, 친구 궁합까지 정리된 도표도 널리 퍼져 있다.

 

온라인 상에 돌아다니는 MBTI 궁합표. 정작 MBTI 전문가들은 "별로 믿을 게 못된다"며 "유형보다 연애 상대의 인품, 가치관을 더 중요하게 봐야한다"고 조언했다./온라인 캡처

 

애인도 친구도, 알바까지 MBTI

 

청소년들에게 MBTI는 친구를 가리는 척도로 자리 잡았다. 최근 한 교복업체가 초중고 학생 400여 명을 설문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84%가 “친구를 사귈 때 선호하는 MBTI가 있다”고 답했다. 대학들은 MBTI 검사로 학생의 진로를 설계하는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결혼정보회사들은 MBTI 맞춤형 매칭 서비스까지 내놓고 있다.

 

MBTI는 1944년 미국의 작가 캐서린 쿡 브리그스가 딸 이저벨 브리그스 마이어스와 함께 정신분석학자 카를 융이 제시한 심리유형론을 근거로 개발한 성격 유형 검사다. 외향(E)-내향(I), 감각(S)-직관(N), 사고(T)-감정(F), 판단(J)-인식(P)을 조합해 총 16가지의 성격 유형으로 분류한다. 서구권에선 1960년대부터 활용됐고, 국내에는 1990년대 도입돼 별자리·혈액형을 대신해 사람을 판단하는 가장 효율적이고 손쉬운 수단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MBTI 유행 초기부터 전문가들은 “MBTI로 섣불리 사람이나 인간관계를 단정해선 안 된다”고 경고했지만, 우려는 이미 현실이 됐다. ‘INFJ는 예민해서 별 말 아닌데 상처받고 스스로 착각해서 사람을 죄인 만든다’ ‘ESTJ는 이기적인 나르시스트에 상대방을 가스라이팅 한다’ 등 특정 MBTI 유형을 비난·기피한다는 글이 온라인에 봇물처럼 쏟아진다. 자신의 단점이나 문제를 MBTI로 합리화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나는 P형이라 지각을 자주 할 수밖에 없다”거나 “나는 T 유형이라 다른 사람의 감정에 좀처럼 공감 못 한다”는 식이다.

 

”MBTI, 성격 단점은 잘 못 찾아내”

 

전문가들은 “MBTI를 제대로 이해하고 긍정적으로 활용하는 게 좋다”고 했다. 김종구 한국성격검사연구소 소장은 “MBTI는 16개 유형이 우열의 차이가 없고 다 훌륭한 면들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한 수단이지, 누군가를 배척하고 단정 짓는 수단이 아니다”고 했다. 이동귀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다른 성격유형검사와 MBTI를 비교해 보면 긍정적인 성격 특성은 공통적으로 잘 나타나지만, 부정적인 특성은 그렇지 않다”며 “즉 MBTI는 성격의 긍정적인 면을 잘 포착하는 반면 부정적인 특성은 예민하게 다루지 못하기 때문에 단순한 흥미 이상으로 사람을 평가하거나 채용하는 데 활용하는 건 무리”라고 말했다.

 

MBTI 유형 중 INFP를 설명하는 캐릭터. INFP 유형은 열정적인 중재자이자 잔다르크형 성격으로 설명된다. 전문가들은 "MBTI는 16가지 성격유형 간에 우열이 없고, 각자 저마다의 장점이 있으며 서로 간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며 "다른 성격검사와 비교했을 때 MBTI는 단점을 잘 분별해내지 못하고 성격적 장점을 잘 드러낸다고 봤을 때, MBTI로 사람을 손절하거나 단정짓는 건 무리가 따른다"고 말했다./온라인 캡처

 

MBTI별 궁합표 등에 대해서도 전문가들은 “신뢰성이 떨어지니 믿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 김종구 소장은 “가령 ESFJ도 어떤 인품과 가치관을 가졌느냐에 따라 굉장히 친절하고 회사 내 화합을 이끄는 직장인이 될 수 있지만, 반대로 누구보다 뛰어난 사기꾼도 될 수 있다”며 “MBTI는 말 그대로 성격 유형을 보여주는 것이지 사람의 인품과 도덕성을 가리키는 건 아니다”라고 했다.

 

한국 청년들이 이토록 MBTI에 열광하는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한국의 교육시스템이 유년 시절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충분히 탐구하고 설명할 수 있도록 하지 못한 게 근본 원인”이라고 입을 모았다. 한 번의 속성 검사로 자신의 성격 유형을 분석하는 MBTI에 그래서 열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주, MBTI보다 3만배 더 정교하다?

 

31세 직장인 김세영(가명)씨는 사주(四柱)를 ‘열공’ 중이다. 틈날 때마다 스마트폰 앱으로 검색하며 공부했는데, 이제 주변 커플의 궁합을 봐줄 수준까지 올랐다. 그가 속한 MZ세대에서 MBTI가 유행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저도 MBTI를 맹신하다시피 했죠. MBTI가 인기를 얻은 이유 중 하나가 과거 유행한 ‘혈액형 성격설’보다 더 정확하다는 거였잖아요. 혈액형은 4가지에 불과한 반면, MBTI는 16가지로 4배 많으니까요. 그런데 사주는 무려 51만8400가지로, MBTI의 3만2400배란 걸 알게 됐어요. 그만큼 더 세밀하고 정교하게 성향과 기질을 파악할 수 있다는 의미 아니겠어요?”

 

MZ세대 10명 중 9명 ‘운세 본 적 있다’

 

기성 세대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사주에 젊은 세대가 빠져들고 있다. 구인·구직 사이트 알바천국이 최근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MZ세대 10명 중 9명이 ‘운세를 본 적 있다’고 답했다. 젊은이들의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서울 익선동 한옥거리에서 사주 부스를 운영하는 역술인 A씨는 “과거와 달리 젊은 친구들도 많이 온다”고 했다.

 

“20대 연인들이 데이트하면서 찾아와 궁합을 봐요. 여자 친구들끼리 오는 경우도 많은데, ‘내 연애운은 언제쯤 풀리느냐’를 자주 물어요. 앞으로 진로나 일이 어떻게 풀릴지, 사주상 본인 성격이 궁금하다며 찾아오기도 하고요.”

 

MZ세대는 아무래도 역술인을 직접 만나기보다는 통화나 문자, 온라인 등 비대면 상담을 선호한다. 네이버의 온라인 상담 플랫폼 ‘네이버 엑스퍼트’에서는 지난해 매출의 74%가 운세 및 사주 상담에서 발생했는데, 서비스 이용자의 72%가 20·30대였다. 유튜브나 메신저 서비스, 소셜네트워크(SNS)로 사주를 보기도 한다.

 

명품 수입업체를 운영하는 방준성(35·가명)씨는 “인스타그램으로 알게 된 역술인에게 DM(다이렉트 메시지)을 보내 연락했고, 카카오톡으로 사주를 봤다”며 “사업하느라 바빠서 철학관 갈 시간 내기가 힘든데 카카오톡으로 상담하니 편리한 데다 말하는 내용이 전부 글로 남아 좋았다”고 했다.

 

인스타로 역술인 만나 카톡으로 사주 상담

 

젊은 사주 애호가들이 널리 이용하는 건 스마트폰 앱이다. 캐릭터와 일대일 채팅하듯 운세를 확인하는 ‘헬로우봇’, 자체 사주 분석 시스템을 운영해 사용자 친화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포스텔러’, 광고 시청으로 유료 결제를 대신할 수 있는 ‘점신’ 등 다양한 앱이 나와 있다.

 

‘궁합팅’은 궁합 AI(인공지능)가 무작위로 선별한 100만쌍의 데이터를 기준으로 오행 분석, 음양의 합, 조화와 서로의 기질 등을 분석해 점수를 매긴다. 궁합 점수가 90점 이상 나온 상대를 매일 한 명씩 무료로 매칭해준다. 포스텔러의 사주풀이는 입사 지원용 자기소개서에 활용하는 것이 ‘꿀팁’으로 전수되기도 한다. 사주 보는 이의 장단점을 객관적인 언어로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역술가들은 “MBTI와 사주는 원리가 비슷하기 때문에 MBTI에 빠지면 사주에도 빠지기 쉽다”고 했다. 본지에 오늘의 운세를 연재하는 한소평씨는 “MBTI의 토대가 된 심리유형론을 제시한 카를 융은 주역(周易)의 논리에 조예가 깊었다”고 했다. “무극에서 태극이, 태극에서 음양이, 음양에서 사상이, 사상에서 팔괘가 나와요. 이 팔괘를 다시 쪼개면 16개가 되죠. MBTI가 성격 유형을 16가지로 나누는 것과 같아요.”

 

이름만 사주에서 MBTI로 바뀌었을 뿐, 삶의 불확실성과 미래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무언가에 의지하려는 인간의 마음은 그대로라는 소리다.

 

-김성윤 기자/배준용 기자, 조선일보(23-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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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강사가 만든 '혈액형별 성격'

 

韓·日만 100년간 휘둘리고있다

불과 319명 조사한 연구 결과

1970년대 日 작가가 이를 기초로 '혈액형 인간학' 출간, 인기 폭발…

한국서도 유행… 과학 근거 없어

 

처음 만난 사람과 어색함을 깨느라 흔히 던지는 질문 중에 '혈액형'은 빠지지 않는 소재다. 많은 사람이 혈액형을 알면 상대방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고 믿는다. 정말 사람 혈액형은 성격을 결정짓는 요소일까. '혈액형별 성격'의 역사는 100년 전 독일에서 시작됐다. 당시 독일에서는 독일인이 태생적으로 다른 민족보다 우수하다는 근거를 찾는 우생학(優生學)이라는 학문이 유행했다.

1919년 독일 학자 루트비히 힐슈펠트는 '인종별 혈액 차이'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연구에서 영국인, 프랑스인, 독일인은 A형이 B형의 두 배가 넘었다. 반면 흑인, 베트남인, 인도인 등은 B형이 더 많았다. 힐슈펠트는 이를 근거로, 진화한 민족일수록 A형이 B형보다 많다고 주장했다.

당시 독일에 있던 일본 철학 강사 후루카와 다케지는 힐슈펠트의 연구 결과를 본 뒤 주변 사람 319명을 조사해 '혈액에 따른 기질 연구'라는 글을 썼다. 다케지는 "혈액형이 다르면 성격도 다르다"고 주장했다.

1970년대 초 일본 작가 노미 마사히코가 다케지의 글을 기초로 '혈액형 인간학'이라는 책을 펴냈다. 혈액형에 따라 몸의 구성 물질이 다르고, 이것이 체질과 성격을 결정한다는 비(非)과학적 내용이었지만 일본에서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혈액형에 맞는 음식, 옷, 교육법까지 유행했다. 이 유행이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현재의 혈액형별 성격에 대한 믿음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100년 전의 비전문가가 불과 3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가 지금까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혈액형에 열광하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뿐이다. 이는 두 나라 혈액형이 전 세계적으로도 독특한 ABO식이기 때문이다. 2010년 기준으로 한국인은 A형이 34%, O형이 28%, B형이 27%를 차지한다. 일본은 A형 37%, O형 31%, B형 22% 정도다. 확률적으로 태어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낮은 AB형을 제외하면 혈액형이 고르게 분포돼 있다.

반면 프랑스는 A형이 44%, O형이 42%이고 미국은 A형이 40%, O형이 45%이다. 프랑스나 미국에서는 사람이 대부분 A형과 O형인 만큼 혈액형으로 사람 성격을 구분할 여지가 많지 않다. A형이 실제로 소심하다면, 프랑스와 미국에는 한국보다 소심한 사람이 많아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혈액형별 성격은 왜 꾸준한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일까. 심리학자들은 이를 '바넘 효과' 때문으로 분석한다. 바넘 효과는 일반적 성격이나 심리적 특징을 자신만의 특성으로 여기는 경향이다. 예를 들어 "좋아하는 일은 적극적으로 하고, 싫어하는 일은 회피하려고 하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그렇다"고 답한다. 당연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교수는 "혈액형이 성격에 영향을 미친다면 유전적으로 성격을 규정하는 유전자와 혈액형을 결정하는 유전자가 연관이 있어야 하지만, 두 유전자는 전혀 관계가 없다"면서 "혈액형과 성격에 대한 과학적 연구 결과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도, 연구할 가치가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박건형 기자, 조선일보(15-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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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액형은 A, B, AB, O형뿐? 무려 300가지

 

피, 영양분·산소 공급하고 방어… 몸에 대한 정보 보여주는 상황판

 

'피'라는 말에는 많은 느낌이 담겨 있다. 뭔가 섬뜩하고 무섭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공포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알고 보면 피는 광대한 우주 공간의 지구라는 별 위에서 우리가 따뜻한 체온을 가지고 생명체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고마운 존재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핏속에는 우리 몸을 지키고 자라게 하는 '생명체들'이 혈관을 따라 순환하고 있다.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 혈장 등이 그 생명체들이다. 우리 몸에 있는 수많은 세포는 피를 통해 영양분과 산소를 공급받고, 침입자를 막으며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에너지 수송과 침입자 방어 전담

피는 골수에서 태어난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 등의 혈액세포와, 생명 활동을 위해 필요한 수많은 물질을 함유하고 있는 액체인 혈장으로 구성된다. 적혈구는 에너지대사에 필수적인 산소를 세포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혈액세포 중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피 한 방울엔 적혈구가 약 3억개 들어 있고, 적혈구 안에는 산소와 결합하는 헤모글로빈이 약 200만개 들어있다. 헤모글로빈은 철분을 가진 헴이라는 색소 성분과 글로빈 단백질로 이뤄져 있다. 산소와 결합하는 헴이 빨간색을 내므로 적혈구가 빨갛고 피 색깔도 빨갛다.

백혈구는 박테리아, 바이러스 등 병원체로부터 우리 몸을 지키는 일을 한다. 외부 침입자의 종류와 특성에 맞게 대응하기 위해 많은 종류의 백혈구가 있다. 그중 과립구(호중구, 호산구, 호염구)들은 침입자들을 잡아먹거나, 과립 속의 무기를 배출해 염증반응을 일으켜서 적을 무찌른다. 또 단구세포나 대식세포는 침입자를 잡아먹고 림프구들에게 그 정보를 제공한다. 덕분에 이후에 같은 침입자가 오면 즉각 대응할 수 있다. 바로 면역 시스템이 가동되는 것이다. B 림프구는 항체를 만들어 침입자를 공격한다. 세포로 침투한 침입자들은 T 림프구와 자연살해(NK)세포들이 제거한다.

혈소판은 혈관 손상으로 출혈이 생겼을 때 피를 멎게 해준다. 이들은 혈관이 손상된 부위에 재빨리 달라붙어 서로 엉긴다. 그러고는 혈장 속에 있는 혈액 응고 인자들을 끌어모아 피를 떡지게 해 지혈시킨다. 손상된 혈관을 보수하여 원래 모습으로 회복시키는 일도 한다. 혈장에 있는 단백질 중에서 가장 많은 것은 알부민이고, 그 다음이 면역글로불린(항체), 혈액 응고 인자들이다.

◇300개가 넘는 혈액형

혈관을 따라 흐르는 피는 지금 이 순간의 모든 생명 정보를 담고 있다. 병원의 진단검사의학과는 혈액검사를 통해 혈액세포들과 수많은 혈장 물질을 측정하고 분석해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모은다.

최근에는 각종 첨단기술을 이용해 측정 대상 물질을 분자 수준으로 넓혔다. 앞으로는 암 유전자 등 질병 관련 유전자도 피를 통해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실리콘밸리의 한 벤처기업은 피 한 방울로 240가지 질병을 진단할 수 있다고 주장해 기업 가치가 엄청나게 치솟았다. 최근 그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되면서 논란이 되고 있다. 하지만 실험실에서 하던 많은 분석과정이 손에 들어오는 작은 플라스틱 칩과 극미량의 피로 대체되는 것은 사실이다. 바로 칩 안에 들어온 실험실 격인 '랩 온 어 칩(lab on a chip)'이다.

일반인들은 '피' 하면 당장 혈액형을 떠올린다. 혈액형은 남녀가 상대의 성격을 알아보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19세기 까지도 피를 많이 흘리면 살아날 방법이 없지만 혈액형을 알게 되면서 다른 사람의 피로 보충할 수 있게 됐다. 누구나 잘 아는 ABO 혈액형은 1900년 칼 란트슈타이너가 발견했다. 이후 Rh 혈액형 등 30개의 혈액형군에서 300개가 넘는 혈액형이 발견됐다. 왜 이렇게 많은 것일까. 적혈구의 표면에는 저마다 기능을 가지고 있는 수많은 구조물이 있다. 단백질도 있고 사슬처럼 연결된 당분들도 있다. 바로 이들이 혈액형을 좌우한다.

항체는 외부 침입자를 포착해 공격하는 면역물질이다. 항체마다 공격 대상이 정해져 있다. 공격 대상이 항원이다. 적혈구 표면의 수많은 구조물은 저마다 다른 항체를 부르는 항원이 될 수 있다. A형 피는 A항원과 B항체를 갖고 있다. B형 피는 B항원과 A항체가 있다. A형 사람에게 B형 피를 수혈하면 A항원에 A항체가, B항원에 B항체가 각각 결합해 공격한다. 혈액형 중에 ABO와 Rh 혈액형만 유명하게 된 이유는 이 방법으로 구분한 혈액의 항원이 항체 형성을 유발하는 능력이 세기 때문이다. O형은 A든 B든 항원이 아예 없어 누구에게 수혈해도 면역반응이 일어나지 않는다. 대신 항체는 A와 B형을 둘 다 갖고 있어 다른 혈액형의 피를 수혈받지 못한다.

Rh 혈액형군(群)에는 D, C, c, E, e 등을 포함하여 50가지나 되는 혈액형이 존재한다. 우리가 보통 Rh형이라고 하는 것은 이 중에서 D 혈액형을 지칭한다. Rh 양성은 D 항원을 가지고 있는 경우이고 Rh 음성은 D 항원을 가지지 않는 경우이다. Rh 음성은 유럽과 미국에서는 15~20% 정도로 흔한 데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0.1~0.3% 정도로 아주 드물다.

-권석운 서울아산병원 진단검사의학과 교수, 조선일보(15-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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