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 대가가 본 일제 참패의 원인… 플랜B 없는 '필승의 신념']
[일본 패망 재촉한 ‘임팔 작전’]
경영 대가가 본 일제 참패의 원인… 플랜B 없는 '필승의 신념'
[떠난 이의 그 책]
노나카 이쿠지로의 '실패의 본질'
일본 제국은 왜 실패하였는가?
노나카 이쿠지로 외 지음 | 박철현 옮김 | 주영사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3월, 일본은 버마(지금의 미얀마) 방면군을 신설하고 예하에 제15군을 배치했다. 이때 15군 군사령관이 된 사람이 무타구치 렌야(牟田口廉也)였다. 영국군과 미군·중국군 등 연합군의 버마 방면 반격에 직면한 시점에서 그는 엄청난 계획을 세운다. 국경을 넘어 인도 북동부인 아삼을 침략하겠다는 인도 진공(進攻) 작전이었다.
그래서 1944년 3~7월 벌어진 ‘임팔 작전’은 일본에 처참한 결과를 가져왔다. 참전 병력 약 10만 명 중 3만 명이 죽었고 2만 명이 부상당했으며 살아남은 병사 중 절반 이상은 환자였다. 태평양전쟁의 전세 또한 심각하게 기울었다. 일본군은 왜 이토록 처절한 실패를 겪었나?
원제가 ‘실패의 본질(失敗の本質)’인 이 책은 지난달 25일 별세한 노나카 이쿠지로(野中郁次郞·1935~2025) 일본 히토쓰바시대 명예교수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지난해 일본에서 누적 판매량 100만부를 달성했다. 그는 ‘아시아의 피터 드러커’로 불린 경영학자로, 전쟁사·군사사·조직론 등을 전공한 다른 필자 5명과 함께 이 책을 썼다. 미드웨이, 과달카날, 임팔, 레이테, 오키나와 등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의 결정적인 패전을 경영학 관점에서 분석한 결과물이다.
1945년 9월 2일 미 해군의미주리호 함상에서 일본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가 태평양전쟁의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노나카 이쿠지로는 일본의 패전을 '일본군이라는 거대 조직의 실패'라고 분석했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임팔 작전은 군사 전략의 관점에서 봤을 때 ‘꼭 필요한가’ ‘가능한가’가 매우 의심스러운 작전이었다고 노나카 등은 짚는다. 게다가 제15군과 상급 사령부의 의사는 통일되지 않았고 소통에 혼선을 겪었다. 충분한 보급을 경시한 채 전략적 기습에 모든 것을 맡겨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컨틴전시 플랜(contingency plan·비상 계획)조차 없었다. ‘필승의 신념’이라는 비합리적 사고방식만 있었을 뿐, 돌발 상황에 봉착했을 때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플랜B’ 같은 건 생각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인간관계와 조직 내 융화를 중시하는 분위기가 오히려 이 무모한 계획을 허가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경영학적인 관점에서 더 어처구니없었던 것은, 객관적 전력 분석보다 무타구치의 ‘개인적인 심정’이 앞서 있었다는 점이다. 1937년 중일전쟁의 도화선이 된 루거우차오 사건 당시 그는 현지의 일본군 연대장이었고 ‘나 때문에 그만… 전쟁이 여기까지 확대됐다’는 자책감 때문에 향후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반카이(만회)’를 해 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이런 요소가 군 조직 속에서 걸러지기는커녕, 상층 지도부는 작전을 당장 중지해야 할 시점에서도 ‘체면’을 앞세워 그대로 진행시켰다.
20세기 중반에 이르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된 전(前)근대적 의식 역시 당시 일본군에 깊게 똬리를 틀고 있었다. 1939년 몽골 국경에서 소련군과 국지전을 벌여 패한 할힌골(노몬한) 전투 당시, 일본 관동군은 ‘전혀 승산 없는 상황이 된다 해도 일본군만의 정신력과 지휘 능력의 우월성 같은 무형의 전력으로 승리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해보기 전에는 모른다, 하다 보면 어떻게든 수가 난다’는 정신이 소련군의 합리주의와 물량 앞에서 철저히 무너졌던 셈이다.
노나카는 ‘일본군의 패전은 결국 일본군이라는 조직의 실패’라 지적하며, ‘이 조직은 과거의 성공에 얽매인 나머지 자기 혁신을 이루지 못해 실패했다’고 결론짓는다. 과거의 성공에서 일반적인 원리를 뽑아내 조직원 모두가 공유하는 시스템이 없었고, 새것을 습득하는 대신 쓸모없게 된 지식을 버리는 조직 학습의 과정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조직 문화가 경직돼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할 상황이었다. 반면 미군은 일본군에 없는 엘리트가 유연하게 사고할 수 있는 인사 교육 시스템 우수한 사람이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분권적 시스템 강력한 통합 시스템을 지니고 있었다.
노나카 등은 1984년에 쓴 이 책에서 “전후 일본은 재건에 성공했지만, 일본군의 조직 원리가 기업 경영에 도입됐기 때문에 일본의 조직은 또다시 실패할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그리고 몇 년 뒤 일본은 장기 불황에 빠졌다. 국내 독자들이 일본군 조직의 몇몇 특성을 보고 ‘어쩐지 낯익은 것 같다’고 느낀다면 이 책은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할 것이다.
-유석재 기자, 조선일보(25-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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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패망 재촉한 ‘임팔 작전’
2차 대전 당시 인도 북동부 마니푸르주 임팔 일대에서 일본군을 섬멸하기 위해 탱크와 함께 진격하는 구르카 용병 군대. 1944년 3월 8일~ 7월 3일 사이 영국 정보 당국 촬영. /미 의회도서관
1944년 3월 버마를 점령 중이던 일본군은 인도 북부에서 치고 들어오는 영국군을 상대로 ‘임팔 작전’에 돌입한다. 적의 거점인 임팔, 코히마를 기습 공격해 인도·버마 전선에서 주도권을 회복하고 연합국의 중국행 보급로를 차단한다는 계획이었다. 15군 사령관 무타구치 렌야가 보급 사정을 등한시한 채 주도한 이 작전은 몇 달 만에 8만여 병력을 희생시키며 일본 패망을 재촉한 ‘광기(狂氣)의 작전’으로 알려져 있다.
보급 단절로 일선에서 막대한 희생이 속출하자 작전을 수행 중이던 31사단장 사토 고토쿠가 사령부 지시를 무시하고 독단으로 철군 명령을 내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사단장급 고위 지휘관으로서는 초유의 항명 사건이었다. 처형을 각오한 사토는 작전의 무모함을 철저히 따질 작정이었으나, 군 수뇌부는 사토를 보직 해임에 처하고는 서둘러 사건을 봉합하고자 했다. 사토는 정신병자로 몰리며 한동안 작전 실패의 원흉이라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작전 취소를 건의한 다른 두 사단장도 중도에 경질되었지만, 정작 온갖 반대에도 작전을 강행한 무타구치는 본국 소환 후 예편 조치에 그쳤다. 파벌로 찢긴 채 자기편 챙기기가 횡행하고 전황 악화 책임 전가에 급급한 당시 군부의 체질로는 이미 정상적인 전쟁 수행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전후(戰後) 작전의 실상이 밝혀지면서 어떠한 난관도 정신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며 작전을 밀어붙인 무타구치는 ‘3대 오물(汚物)’이라는 오명의 주인공이 되었고, 그 자신은 ‘작전 실패는 부하들 탓’이라는 추한 변명을 말년까지 늘어놓아 세간의 비웃음을 더했다.
사리에 맞지 않는 주장으로 전체의 이익을 해하는 자가 누구인지, 책임을 물어야 할 자가 누구인지, 무엇이 명예인지, 누구의 명예를 지켜주어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이 혼란스러운 국가가 공동체로서의 응집력을 발휘하며 단합하는 것은 어려움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신상목 대표, 조선일보(21-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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