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상직 공무원' 된 한국 男 마라톤]
[日 박물관의 ‘일본인 손기정’]
'육상직 공무원' 된 한국 男 마라톤

22일 대구 수성구 대구스타디움 일대에서 열린 '2026 대구마라톤'에서 엘리트 선수들이 출발 하고 있다. 이번 대회에는 엘리트 선수들을 포함해 4만여명이 함께했다. /연합뉴스
2시간 20분 43초. 지난 22일 대구 도심을 달린 국내 남자 엘리트 마라톤 풀코스(42.195㎞) 1위 기록이다. 함께 출발한 국제부 1위 탄자니아 선수(2시간 8분 11초)와는 12분 넘게 뒤처졌고, 국제부 여자 1위 케냐 선수도 2시간 19분 35초를 찍었다. 마라톤이 직업인 한국 남자 엘리트 선수 중 가장 빠른 기록이 외국 여자 선수보다 느렸다. 국제부 여자 2위인 에티오피아 선수도 한국 남자 선수들보다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다.
이 장면은 한국 마라톤이 세계 무대에서 경쟁력을 완전히 상실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국이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황영조)과 2001 보스턴 마라톤(이봉주) 우승자를 배출했다는 게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다. 남자 마라톤 한국 최고 기록은 2000년 세운 2시간 7분 20초인데 무려 26년 동안 깨지지 않고 있다. 기록 경신은커녕 최근엔 2시간 10분 이내에 완주하는 선수도 찾기 어렵다. 한때 아시아 마라톤 강국 자리를 놓고 경쟁하던 일본은 거침없이 기록을 단축해 최근 5년 새 2시간 4분대 기록까지 나왔다.
문제는 마라톤 저변이 약해서가 아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마라톤 공화국’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일반인의 관심이 높다. 전국 곳곳에서 매년 수백 개의 마라톤 대회가 열리고, 풀코스 출전자가 1만명을 넘는 대회도 적지 않다. 1990년대 10여 개에 불과했던 실업팀은 현재 90개 안팎으로 폭증했다. 선수들의 체격과 훈련법, 러닝화 같은 장비도 이전과는 몰라보게 좋아졌다. 그런데 기록은 왜 후퇴만 하는가?
엘리트 선수들의 경쟁 구조가 망가진 것이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시즌마다 상위권 선수들이 ‘A 대회는 누구, B 대회는 누구’ 식으로 ‘교통정리’하듯 출전할 대회를 정한다. 국내 상위 기록 보유자들이 치열하게 경합하는 장면을 보기 어려운 이유다. 당연히 레이스의 긴장감은 떨어지고, 기록 향상의 동기도 사라진다. 마라톤 대회마다 1·2위 선수가 바뀌지만 경쟁으로 새 얼굴이 등장하는 게 아니라 우승 나눠 먹기만 반복되는 식이다.
보상 체계는 더 심각하다. 전국체전과 국내 대회 입상이 실업팀 입단과 연봉 계약을 좌우하는 까닭에 국제 기록 개선은 뒷전이다. 선수들은 세계 무대에 어울리는 기록을 내기보다 고만고만한 국내 대회에서 선방하고 생존하는 데만 급급하다. 이게 무슨 엘리트 선수인가. ‘육상직 공무원’으로 조롱당해도 싸다.
한국 마라톤 선수들의 기량이 갈수록 퇴보하다 보니 이제는 엘리트와 마스터스(일반인)의 구분 없이 한 무대에서 경쟁해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실제로 작년 춘천마라톤에서 남자 엘리트 우승자와 마스터스 우승자의 기록 차이는 1분 37초에 불과했다. 엘리트가 마스터스의 추격을 체감하고, 마스터스가 엘리트의 등을 보며 달리는 이 구조가 서로에게 긍정적인 자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양승수 기자, 조선일보(26-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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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박물관의 ‘일본인 손기정’

도쿄올림픽 주 경기장 인근에 있는 '일본 올림픽 박물관' 내 '역대 일본인 금메달리스트'를 전시하는 코너에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수를 최상단에 배치했기 때문이다. 사진은 '일본인 금메달리스트' 코너에 손기정 선수를 소개하는 모습./서경덕 교수 제공
성화봉을 든 백발노인이 경기장으로 들어왔다. 가슴에는 태극 휘장과 오륜(五輪) 마크를 달았다. 덩실덩실 춤추는 듯 세상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펄쩍펄쩍 뛰었다. 수만 관중이 일제히 기립했다. 들어서는 순간 누구나 그가 누군지 알았다. 역사적 의미도 알았다. 성화를 들고 서울올림픽 개막식장을 달리는 태극 마크의 손기정. 그를 향해 박수를 쏟아낸 관중 속에 다케시타 노보루 일본 총리도 있었다.
▶개막식이 열린 1988년 9월 17일. 일본은 긴장했다. 한국의 관중들이 일장기를 든 선수단에게 야유를 퍼붓지 않을까. 당시 니혼게이자이신문의 한 대목이다. “한국인에게 과거의 불행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일본 국기지만, 국기를 들고 일본 선수단이 입장했을 때 경기장은 박수로 끓어올랐다. 일본 선수단은 한국의 국화(國花) 무궁화를 들고 있었다. 관중을 향해 무궁화를 흔들었다.” 요미우리신문은 일본 선수단 기수(旗手)의 말을 이렇게 전했다. “굵은 눈물이 쏟아졌다. 한 바퀴 행진은 너무 짧았다. 더 걷고 싶었다.”

▶손기정은 원래 최종 주자였다. 비밀이 새 나가 개막식 직전에 외신에 보도됐다. 조직위는 막판에 최종주자를 미래 세대로 바꾸기로 결단했다. 경기장에 들어와 끝까지 달릴 줄 알았던 손기정은 다음 주자에게 성화봉을 넘겼다. 열아홉 육상 선수 임춘애였다. 두 주자의 나이 차는 57년. 그 순간 경기장을 가득 채운 과거의 감격이 미래의 희망으로 승화됐다. 더 큰 박수와 환호가 터졌다. 이 선택이 서울올림픽 개막식을 역대 최고 올림픽 개막식 중 하나로 만들었다.
▶최근 일본 올림픽 박물관이 ‘역대 일본인 금메달리스트’ 전시장에 손기정 선수 사진을 상단에 배치했다고 한다. 손기정이 월계관을 쓰고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경기 시상대에 선 사진이다. 그때 심훈은 사진을 보고 시를 썼다. ‘오오, 나는 외치고 싶다. 마이크를 쥐고/ 전 세계의 인류를 향해서 외치고 싶다!/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고 부를 터이냐!’(’오오, 조선의 남아여!’) 하지만 손기정의 가슴엔 커다란 일장기가 그려져 있었다. 아래로 향한 그의 눈은 월계관 그늘에 가려졌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올림픽 시상식”으로 불리는, 바로 그 순간이다.
▶일본은 지금 올림픽을 치르려는 나라다. 올림픽은 세계인의 축제다. 그런데 일본이 올림픽 홈페이지 일본 지도에 독도를 굳이 넣고, 손기정을 일본 선수로 전시해 이웃 나라의 상처를 들쑤신다. 코로나 사태로 1년 연기된 올림픽이다. 그러지 않아도 일본의 방역 문제로 경기를 제대로 열 수 있을지도 의문인 상황이다. 그래도 많은 한국민은 일본 올림픽이 열리고 선수들이 펼치는 드라마를 기다리고 있다. 일본은 그런 기대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한일 외교 갈등 격화엔 한국 정권이 책임져야 할 부분이 분명히 있지만, 일본의 이런 치졸한 행태를 보면 혀를 차지 않을 수 없다.
-선우정 논설위원, 조선일보(21-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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